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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속이지 말라
황광민  |  seokkyo@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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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6월 09일 (토) 13:47:48 [조회수 : 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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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장 1-6절

성령을 속이지 말라

 

가. 높은 차원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5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본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수성의 차원은 아주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헌금하였을 때 일어난 이야기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에 작정했던 대로 헌금하지 않고 얼마를 감추고는 전부인 것처럼 하였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2절). 여기서 문제는 성령을 속인 것이다.

* 하나님은 아주 높은 차원의 순수성을 원하신다. 그들은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다가 베드로의 책망을 듣고는 현장에서 죽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일상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범적인 사건이다. 성도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높은 차원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 우리가 징계를 받지 않았다고 자만에 빠지면 안 된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가 완전해서 하나님이 참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성도는 자만에 빠지지 말고 더 높은 차원의 순수성을 위해 힘써야 한다.

 

나. 체면을 유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2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소유를 팔아 헌신하기로 작정하였으나 아까운 생각이 들자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여기서 ‘감추다’(노스피조마이)는 ‘남몰래’(노스피)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이 모르면 된다는 생각에서 행동했다. 진실보다는 체면을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리했던 것이다.

* 다윗은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알리바이를 조작했었다. 밧세바와의 관계를 은폐하기 위하여 술책을 쓰고 결국은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은 속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다. 다윗을 살린 것은 알리바이가 아니라 진실한 회개였다.

* 그런데 동양에서는 체면윤리가 발달하여 왔다. 불교나 유교는 무신론이므로 자연히 사람 앞에 인정받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보았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사람들 앞에 체면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체면을 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다. 성령을 존중하고 온전히 따르라.

3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야 한다(창17:1).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삼상16:7). 다윗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고백했다(시139:7). 즉 사람이 성령을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하다.

*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는 말은 성령을 무시했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령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사탄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그 속에 육신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탄의 영향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성령을 속이지 않으려면 ‘사탄충만’에서 ‘성령충만’이 되어야 한다.

* 그리고 성령을 무시하면 양심이 마비된다. 양심(쉰에이데시스)은 ‘함께 보다’ 또는 ‘함께 인지하다’라는 뜻이다. 양심은 성령님과 함께할 때에 옳은 양심이 된다. 성령을 무시하면 양심은 ‘화인맞은 양심’이 되고 결국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성령을 존중하고 온전히 따라야 한다.

 

라. 순수성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한다.

5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순수성을 잃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다. 베드로가 그들의 불순함을 징계하자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났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순수성을 회복해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너그러우신 하나님의 은혜다. 그렇다고 순수성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은혜만 강조하고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 삭개오가 순수성을 회복하였을 때 주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었다.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하였고(눅19:8),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칭찬하셨다(눅19:9). 하나님은 순수성의 사람들을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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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6-15 08:32:42
성령이 무엇인지.....
알아야 성령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양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은 양심을 무시하진 않습니다.
성령은 율법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은 율법도 무시하진 않습니다.
성령은 양심을 양심되게 하며 율법을 율법되게 함으로써 진정 양심과 율법을 온전케 하는 영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순수성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성령은 순수성을 무시하진 않습니다.
다만 이 순수성을 온전케 하기도 하는 영이십니다.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이나 성령의 뜻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을 충만함과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따르는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겐 순수해 보일 것 입니다.

순수한 어린아이가 성령의 충만함이라 할 순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해 보일 것입니다.

진정 성령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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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121.160.212.239)
2018-06-20 13:00:11
양심을 무시하진 않으나 양심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윤리를 무시하진 않으나 윤리를 따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현재 대개의 삶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성령은 아니지만 성령께선 그 안에 계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그 분을 닮고자하는 거룩한 본성과 열망으로
높은것을 추구합니다
그렇기에 성령을 모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윤리적이며 세상누구 보다도 도덕적입니다.
그저 무시하지 않는 깔보지 않는 정도의 삶을 넘어섭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분이 말씀 하실때엔 날선검과 같은 촌철살인입니다
애매호호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조차 애매모호한 성령을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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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6-21 20:02:19
윤리와 도덕이 성령은 아니지만 성령께선 그 안에 계십니다.
라고 하시니... 성령은 윤리와 도덕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 봅니다.
진정 윤리와 도덕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또 진정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령과 윤리와 도덕, 성령이 윤리와 도덕 속에 있으니 윤리와 도덕이 성령보다 크다 할 수 있으며 성령이 윤리와 도덕속에서 윤리와 도덕을 따를 것이니 윤리와 도덕이 성령보다 큰 것이라 하니 어찌 양심과 윤리를 따르지 않는다 할 수 있습니까?

성령은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윤리와 도덕 가운데도 계십니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이 성령을 뛰어넘지 못하니 성령안에 윤리와 도덕이 있음입니다. 그러므로 윤리와 도덕이 성령을 거스리지 못하며 성령을 따르니 성령은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본성과 열망으로 가득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윤리적이며 도덕적이라 하니.... 거룩한 본성은 윤리를 추앙함이며 열망은 도덕을 숭상함이니.... 또 다시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본성은 윤리와 도덕을 따르려 하는 것이며 윤리와 도덕을 따르려 하는 것이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본성과 열망이라 하니... 이보다 애매모호함이 없음입니다.

성령의 말씀이 날선검과 같은 촌철 살인이라 하니... 윤리오 도덕을 촌철살인니라 함과 같으니 그것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율법을 가리킴입니다.

율법을 말하기 위하여 윤리와 도덕을 말하고 율법을 말하기 위하여 성령을 말하니... 율법과 성령을 혼동케 하여 성령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 할 것 같으므로 이 또한 율법을 통한 촌철살인이며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야 말로 촌철살인입니다. 예면 예고 아니오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을 말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율법을 말함이며 성령의 말씀을 율법이라 오해를 시키니....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대게의 가르침입니다.

성령을 율법으로 촌철살인하며 가르치려 하니 진정 성령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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