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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명품바보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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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5월 20일 (일) 12:52:23
최종편집 : 2018년 06월 13일 (수) 03:49:19 [조회수 :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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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음은…

 

크리스천치고 하나님께서 ‘왕 중 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분의 자녀임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늘나라의 왕자 또는 공주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이치가 그러니 아마 머리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슴도 그런가 하면, 글쎄, 어떨지.

어떻든 신자 된 우리는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라는 확고한 인식과 그로 인한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 그 커다란 은총을 도외시하는 것은 돼지가 진주를 그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자신이 세상의 왕자 또는 공주가 되었다면 어떠하겠는가. 여기에서 우리 같이 한번 생각해 보자. 세상의 왕이 우위인가, 아니면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이 우위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맞다. 우문 중의 우문이다. 그런데 왜 세상의 왕자나 공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 높은 자신을 몰라보는가.

자신이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로서의 실감이 나든 안 나든 하늘나라의 그 자리는 세상의 그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격이 높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격이 높은 것일까.

세상의 그들은 호화로움과 권력을 누리지만, 하늘나라의 그들, 그러니까 우리는 그와 반대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주어진 권력이 있고 힘 있다면 그것을 그것이 없어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 그리고 호화로운 생활 대신 더불어 사는 나눔을 통해 마음의 부요를 누려야 한다. 그러는 것이 하늘나라의 법, 즉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을 해 낼 수 있기에 하나님의 권속이다.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고 특별한 것이다. 아니라고? 잘 믿으면 만사형통하다고? 웃기지 마라. (아, 아니, 실례! 필자의 됨됨이가 튀어나오고 말았네. 잘 믿는다고 만사가 형통한 것은 아니라는 걸 말하려다 보니 그만…)

어떻든 성경 어디에도 잘 믿으면 만사형통하다고 하는 말은 없다. 물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와하18:7)와 같은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만사형통과 닮은꼴의 표현이 없는 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형통이라는 말은 실로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건 구약에서일 뿐이고 필자가 알기로는 신약엔 그런 개념이 없다. 신약에는 오히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8)고까지 말한다.

물론 징계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으면 그런 것을 왜 받겠는가.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어디 그게 사람인가. 하나님이지. 믿는 사람들이 연단과 훈련을 통해 성장해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면 왜 굳이 그런 고생을 해야 하겠는가.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것은 그 뿌리가 바람으로 인해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연단과 훈련을 위한 고난은 주시더라도 슬픈 일만은 피하게 해 주시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라 하신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라 하신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아니다. 비포장도로만도 못한 길이다. 곧지만 험한 길이다.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는 길이다. 산도 넘어야 하고 강도 건너야 하는 길이다. 장애물이 있어도 피하거나 돌아가면 안 되는 길이다. 기어올라서라도 곧장 가야하고, 포복을 해서라도 똑바로 가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힘이 들어도, 육신이 괴로워도 슬프지 않고 마음 넉넉하고 기쁜 길이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달려가야 할 좁은 길이다. 그렇다고 있는 숨을 다 몰아쉬고 몸을 작게 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그런 문, 그런 길이 아니다. 욕심이라는 짐만 내려놓으면 활개를 치며 들어가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길이다. 달리기 코스는 라인 때문에 좁지만 그렇다고 달리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없으면 가장 단거리가 되는 일직선으로 달릴 수 없어 최고의 기록을 낼 수 없다.

하나님의 법이요 뜻인 성경말씀이 꼭 그렇다. 그에 따라 산다는 것은 달리기 코스를 만드는 라인이 그런 것처럼 자유를 속박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보장한다. 못 믿겠거든 한번 시도해 보라. 그 속으로 들어가 그에 따라 살아 보면 그게 자신을 날 수 있게 하는 날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필자가 그걸 어떻게 단언할 수 있냐고? 단언할 수 있다. 아직 신앙이 어리어 전면 아닌 부분적으로이긴 하지만 직접 체험한 것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 있다.

문제는 가치관이다. 가치관이 바뀌면 행복관도 바뀐다. 어떤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의 불행을 고소해 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상대방의 불행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게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인데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축하를 해 주는 사람도 있다.

크리스천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육신을 무시할 수 없다. 육신이 있기에 사람인데 어떻게 그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육의 소욕을 버릴 수가 없다. 다만 사람은, 더욱이 크리스천은 그 소욕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사람이로되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입네 하면서도 삶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아니 그들보다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물론 믿는 우리도 사람인 이상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안락의 길로 가고자 하는 관성이 있다. 그러나 그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말씨가 거칠어짐을 이해 바란다) “세상 물건 불탈 때 너도 타겠구나” 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불구덩이로 내닫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 세상의 왕자나 공주처럼 살려다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하늘나라의 왕자 또는 공주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여 자긍심을 가지고 격조 높은 삶을 삶으로 어깨에 날개를 달고 자유로이 창공을 날 것인가를 확실히 결정해야 한다.

 

 

마무리로 하는 사족 한 마디

 

여기에서 사족으로 글의 마무리를 할까 한다.

‘딸 바보’라는 말이 있는데, 딸을 각별히 사랑하는 아버지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일본에도 비슷한 말로 ‘오야바카’라는 게 있다. ‘오야’가 ‘부모’이고 ‘바카’가 ‘바보’이니 자식을 익애라 할 정도로 사랑하는 부모를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바보’가 되는 게 어떨까.

아니, 아니다. ‘딸 바보’나 ‘오야바카’는 내리사랑을 말하는 것이니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담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 뭐가 돼야 할까.

‘마마보이’라는 말도 있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매사에 줏대가 없고 의존적으로 사는 사내를 가리키는 말이니, 이 또한 예수님께 어울리는 우리의 자세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두 개념의 장점만 모아 예수를 각별히 사랑하고 그분께 절대 복종하며 의존한다는 의미를 담아 ‘주의 명품바보’라 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이제부터 ‘이 자식으로 하여금 성삼위 하나님의 명품바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 기도한다면 어떨까.

사족의 사족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필자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주님의 아름다운 바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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