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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망치는 예배 지상주의기독교 신앙은 하늘나라에 세워진 푯대를 행해 달려가는 인생항로다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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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5월 13일 (일) 09:22:35
최종편집 : 2018년 05월 18일 (금) 23:39:25 [조회수 : 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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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한자로 ‘예도 례(禮)자’에 ‘절 배(拜)’자를 쓴다

 

기독교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교회가 연상되고, 교회는 예배 없인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는 예배가 교회 기능의 중심에 있다는 말도 되고, 따라서 기독교의 중핵을 이룬다는 말도 된다. 예배 없는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배 없는 기독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크리스천 대부분은 교회를 통해 기독교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이 예배의 참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나 알고 참석했을까. 아니 교인들 중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필자는 20대 초반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예배를 보러 다닌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돌아오곤 했다. 군 생활 때였다.

예수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게 된 것은 제대 직후, 그러니까 20대 중반이었다. 예수가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인임을 믿게 되자 필자는 기독교 신앙에 비교적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하나의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회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며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의문 가운데에서도 다른 교인들이 그러니 필자도 덩달아 예배가 신앙에 있어 지극히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몸이 아파도 가능한 한 기를 쓰고 교회에 가 예배를 드렸다.

의미도 모른 채 예배에 참석하다 보니 답답하여 물어 봐도 신학적 용어의 나열 뿐 속 시원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 정의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는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답답함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수밖에.

‘예배’가 ‘예도 례(禮)자’에 ‘절 배(拜)’자를 쓰니 ‘예의를 갖추어 드리는 절’이라는 의미로 억지스레 한자를 풀어 해석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생각하게 된 것이 ‘공경하여 절한다’고 하는 의미의 ‘경배’였다. ‘예의를 갖추어 하는 절’이나 ‘공경하여 하는 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기는 하지만 필자는 왠지 후자 쪽이 예배와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흐르고 목사가 된 지금까지도 예배를 하나님께 큰절을 올리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다. 하기야 “경의를 나타내어 절함” 또는 “신이나 부처 앞에 경배하는 의식”이 ‘예배’의 사전(이희승 국어대사전)적 의미이니 전혀 엉뚱한 생각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면 ‘예배’의 신학적 정의는 어떤 것일까. 복잡하고 어려운 수식어를 다 빼고 골격만을 말한다면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여 섬기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데,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그 같은 예배의 순서들을 ‘하나님께 큰절을 올리는 마음’으로 진행해 간다면 좋은 예배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데, 어떤가.

 

 

생활은 엉망인 채 예배에 열중하는 교회들

 

그런데 그렇다면 ‘큰절’이란 어떤 것인가. ‘앉거나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등을 굽혀 머리를 조아려 하는 절’이 ‘큰절’의 사전적 의미인데, 그것만으로 정말 ‘큰절’이 되는가. 아닐 것이다. 동작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이 다른 데에 가 있다면 그것은 ‘큰절’은 고사하고 ‘작은 절’도 되지 못할 것이다. 명실공히 ‘큰절’이 되기 위해서는 그 같은 동작과 더불어 자신을 무한히 낮추고 상대방을 끝없이 존경하는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에서의 그러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순종’일 것이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대로 하겠나이다’ 하고 하나님께 ‘순종’을 각오하여 결단하는 마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입을 통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에 대한 순종이지 제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사나 예배와 같은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뜻인 성경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다시 말해 성경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는 마음의 다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진정한 경배로서의 예배가 된다.

이리 말하면 목사 중 혹자는 ‘그래 맞아, 순종해야지’라며 맞장구를 칠지도 모른다. 목사인 자기에게 순종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꺼내기도 창피한 말이지만 순종을 목사인 자기에 대한 것으로 가르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게 우리들 교회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목사에게 순종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하되 성경과 그 정신에 부합할 경우에만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에서 기독교의, 교회의 중심활동이라 할 수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큰절을 올리는 마음’으로, 즉 ‘“순종”을 각오하고 결단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예배는 하나의 종교적 이벤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와 비슷한 의미의 말씀은 호세아 6장에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절)로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두 번이나 인용하실(마9:13, 12:7) 정도로 중요하고 구약의 내용을 관류하는 핵심적 말씀이다.

그런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말씀이 됐건, 하나님께서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는 말씀이 됐건 방점은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순종’ ‘인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찍혔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방금도 예배는 ‘순종’을 ‘각오’하고 ‘결단’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예배’ 때의 ‘각오’와 ‘결단’은 그 ‘예배’가 끝난 후에 그렇게 실행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과 이어지지 않는 ‘예배’는 허울일 뿐 ‘예배’가 아니다

 

그런데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지금까지 말하고자 한 것을 바울이 이미 명확하게 밝혔는데,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가 그것이다. 어떤 번역은 여기에서의 ‘산제사’를 ‘산 제물’로 옮기고 있는데, 어느 것이 됐건 우리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해서 드리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무슨 심청이도 아닌데,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몸을 실제로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의미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제상에 오른 제물이 살아 있어서는 안 되고, 죽지 않으면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자신의 몸을 실제로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기의 못된 자아를 죽이고 순종하라는 의미임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르지 않고 안는다고 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라는 말? 이에 대한 대답은 방금 인용한 1절에 이은 2절이 명쾌하게 해 주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사는 삶이 우리 각자가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린 것이며, 이 같은 산제사가 곧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말이다.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라는 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렇다고 교회에서 형식을 갖추어 드리는 예배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예배’는 ‘교회 기능’의 중핵이다. 함께 모여 하나가 돼서 하나님께 큰절을 올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에 이어지는 활동을 하는 것, 그것이 ‘교회’를 이루는 핵심적 조건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예배’는 ‘예배’ 그 자체로 끝나선 안 된다. 일상생활이 그에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활동이 교회 내의 것만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방으로 파송했던 것처럼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 밖으로 흩어져 활동하게 해야 한다.

이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더욱 분명하게 해 주고 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신 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는 가르침이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의식에 따라 습관적이고도 규칙적으로 드려 왔던 예배를 이제부터는 때와 장소의 담을 헐고 육체 아닌 영으로, 그리고 진실 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인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이때’부터 그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시 말하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드려 오고 있는 ‘예배’를 폐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예배’를 온전한 것이 되게 하려면 그에 이어지는 삶 자체도 ‘예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삶 자체, 즉 일상을 통해 드리는 ‘예배’는 그 자체만으로 ‘예배’가 될 수 있으나, 일상의 삶과 이어지지 않는 ‘예배’는 허울일 뿐 알맹이 있는 ‘예배’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을 위한 삶을 산다면…

 

그렇다면 ‘예배’로부터 이어지는 일상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야 그 자체로 ‘예배’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이어야 한다. 또 그렇다면 그런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생각하는 것도 믿음으로 하고, 행하는 것도 모두 믿음으로 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씀에 따라 사는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생활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대로 품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품으려고 기도하며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닮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도 하나님께서는 품은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니 은혜이다.

예수 믿는 사람입네 하는 성도의 코스프레를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예수의 향기가 아니라 인간의 악취를 풍길 뿐이다. ‘예수’의 ‘예’자 조차 입 밖에 내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과는 어딘지 달라 보이는 사람, 사과꽃 향기라도 날 것 같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과꽃 향기를 낸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필자가 소속된 교회의 지난주 설교 예화를 잠깐 소개해 보고자 한다.

 

설 집사의 남편은 귀가가 늦는 일이 거의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그것도 만취 상태로 새벽녘에 돌아왔다가는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는 허겁지겁 출근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설 집사는 그런 남편을 좋게 봐 줄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짝짜꿍이 되어 외계인 취급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주방에 가려는데 덮은 것도 없이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담요를 가져다 덮어 주었다. 그러자 그렇게 밉기만 하던 남편이 조금은 가엽게 느껴졌다. 회사일이 바빠 항상 야근 아니면 접대로 술에 취해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기와 아이들을 위해 그리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설 집사의 남편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니 아이들도 달라졌다. 그런데 그들만이 아니었다. 남편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되도록이면 술도 덜 마시고 귀가도 빨리하려 애쓰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회사에서 부서를 옮기고부터는 귀가가 빨라졌다. 가정의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여보, 나도 교회나 다녀 볼까?’ 어느 토요일 저적 식탁에서 남편이 한 말이다.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졸라대도 꿈쩍도 않던 사람인데,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린다고 하는 것을 어렵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예화 중의 설 집사가 한 것처럼 그리하면 된다. 마음만 고쳐먹어도 그리 어렵지 않게 거룩한 산제사로서의 삶을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않은 일이 계기가 되어 훌륭한 삶을 살게 된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아주대학교병원 외상외과의 이국종 교수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2011년 ‘아데만의 여명’작전 때 납치됐다 구출된 석해균 선장을 치료해 ‘아덴만의 영웅’이라는 호칭을 얻었고, 최근에는 작년 11월에 판문점 JSA를 통해 귀순하다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를 치료해 온 국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6. 25 한국전쟁 때 한쪽 눈을 잃고 팔과 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 유공자로 아들 국종에게 죄인 된 마음으로 살았다. 친구들에게 ‘병신의 아들’이라고 놀림 받는 아들을 보는 마음이 장애를 입은 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린 국종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고 감싸기가 너무 버거웠다. 가난조차 숙명처럼 그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중학생 때였다. 축농증이 심해 병원을 찾았다. 그가 내민 국가 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본 간호사가 다른 병원에 가보라고 싸늘하게 말했다. 몇몇 병원을 돌아다녀 봤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세상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마지막으로 찾은 병원에서 의료복지카드를 받아 든 의사가 한 말이었다. 의사는 정성들여 치료를 해 주고는 진료비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격려의 말까지 해 주었다.

이때 어린 국종의 마음에는 하나의 결심이 서고 있었다.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자.’ 그리고 의사가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도 이때 배태하였다.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

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인가. 필자는 이 말을 대하는 순간 밀려오는 감동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말이다. 사람이 돈보다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말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세상임의 웅변 이상의 증명이 아니고 뭐겠는가.

 

 

기독교 신앙은 하늘나라에 세워진 푯대를 행해 달려가는 인생항로다

 

이국종 교수는 천주교 신자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신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고 있는 거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는 것이 더욱 향기로운 예배, 거룩한 산제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와 같은 생활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보통사람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도 풀이 죽어 살 것도 없다. 자신에게 주신 능력껏 살면 된다. 가라 하신 길로 가기만하면 된다.

능력이 부족해 못한다면 내 책임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책임이다. 게을러 능력을 기르지 못했다면 그야 내 책임지만, 그렇게 태어난 것은 그러도록 하신 분의 책임이다. 그러니 나는 주어진 삶을 열심히 바르게 사랑으로 살면 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요 예배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두 사람 설 집사와 이국종 교수는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생활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이다. 그런데 어떤가. 누구라도 이 교수처럼은 아닐지라도 설 집사 같이는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하겠다는 의지에 달려 있다.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의지도 각오나 결단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그러니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니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믿음의 우리는 모두가 유신론자이다. 그러나 그게 머리로만일 뿐 가슴은 아닌 사람들이 많다. 입으로는 크리스천입네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많다. 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인데 교회를 나서는 순간 하나님과 안녕을 고하는 사람도 많다.

머리가 믿으면 가슴이 따라야 하고, 입이 말하면 생활을 통해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믿는 하나님은 교회를 나서서도 자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

잠언에 보면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7)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대하면 누구라도 ‘그래,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이기는 하나 자기와는 상관없는 그림의 떡일 뿐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다들 알기는 하지만 그냥 있기만 할 뿐 나와는 무관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림의 떡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설령 그분의 실체가 그림의 떡보다도 더 불확실해 보일지라도 그런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면 채소가 살진 소보다도 더 영양가 높고 맛있는 음식이 된다. 손에 잡히지 않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그분이 부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도록 나를 감싸 안으시고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보호하며 인도해 주신다.

지금이야말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할 때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말씀에 따라 살겠다는 그런 각오와 결단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할 일이 아니다, 그대는 할 수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한다면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척진 사람이 있는가. 먼저 손을 내밀어 보라. 저쪽에서 거절하면 진심을 담아 몇 번이고 그리해 보라. 설령 상대 쪽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그대는 신앙으로 부쩍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마음에 날개가 돋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 되는지 안 되는지 한 번 시도라도 해 보라.

기독교 신앙은 인생의 액세서리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맞는 말이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세워진 푯대를 행해 달려가는 인생항로이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려워 못하겠거든 쉬운 것부터 시작해 보라. 그로 그대의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이자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액세서리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니다.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엄중한 구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죽게 되면 죽는다는 각오로 그리해 보라. 그대의 내면에서 천국이 열리기 시작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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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19 13:56:40
"삶 자체, 즉 일상을 통해 드리는 ‘예배’는 그 자체만으로 ‘예배’가 될 수 있으나, 일상의 삶과 이어지지 않는 ‘예배’는 허울일 뿐 알맹이 있는 ‘예배’가 아니다."

말은 그럴싸하다. 그러나 이 말이 누구의 말이던가?
선지자? 예수님? 제자들?

내가 아는 한 아니다. 이 말은 임종석의 말이다.
임종석의 개똥 철학이며 성경에도 존재하지 않는 개똥 신학이자 신앙이다.

제사가 무엇인가? 희생제사가 무엇인가?
그것에 구약의 예배였다. 삶을 삶이 되게 하기 위한 제사였던 것이다.

예배란 일상이 예배일 순 없다.
단 예배를 통해 진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이 되어진다면 그의 말이 주님의 가르침이 될수 있으며 그의 행동이 주님의 모습을 본 듯한 일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예배를 통해 진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이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영적인 예배 산제사를 드림으로 진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이 된다는 뜻이다.

영적인 예배가 없이는 진실한 사람으로의 회복의 길은 없다.
공자의 삶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의 삶이었던가?
노자의 삶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의 삶이었던가?
석가의 삶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의 삶이었던가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또 어떠하며 철학자들의 삶은 또 어떠한가 말이다.
그들의 삶이 진실한 믿음의 사람의 삶이었던가 말이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의 삶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외엔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수 있는 영적 예배인 것이다.

예수님이 예배를 드리지 말라 하던가?
예수님이 예배는 유치찬란한 재롱잔치며 문화적 지체아들의 재롱잔치라 한적이 있었던가?

모두가 거짓말이다.
듣기엔 그럴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완 무관한 얘기다.
그러면서 거창하게 과대포장하여 그럴싸하게 만들어 낸다.

미혹이다. 유혹이다.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이며 적그리스도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상으로 드리는 예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 이들의 삶과 연결된 진실한 믿음의 삶이 있을 뿐이다. 이 진실한 믿음의 삶을 또한 예배의 삶이라 할 뿐이다.

그러니 현혹되지 말라. 미혹시키지 말라.
일상은 일상일 뿐이다.
그 일상이 예배와 연결된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영적인 예배가 있으며
그 일상이 예배와 무관한 거짓된 믿음의 사람들의 형식적인 예배가 있을 뿐이다.

형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의복이 몸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형식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라면 어떠한 형식이 되어도 무관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드리는 예배의 형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신령과 진정으로 에배를 드려야 한다고 충고 또는 권면이 있을 뿐이리라.

일상의 삶과 이어지지 않는 ‘예배’는 허울일 뿐이 아니다.
비록 허울처럼 보일진 모르지만 그 속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며 진실한 믿음의 모습이 있다면 그 허울처럼 보이는 예배가 그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거룩한 주님의 빛으로 나아가는 성도의 마땅함이다.
최소한 이 빛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어리석은 자의 기도이자 소원이며 간구가 바로 예배인 것이다.

예배의 알맹이는 사람에게 있음이 아니다.
이 예배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이다.

이 예배의 알맹이를 성경은 말하기를 주님의 살과 피라 하였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동참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하길 바라는 지체의 소망인 것이다.

이 지체의 소망을 어여삐 보시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통해 예배가 예배가 되게 하신다. 그래서 예배는 교회의 형식에 머물지 않고 삶의 자리로 이어진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의 언행엔 성령의 감동이 있으며 그들의 언행은 참으로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니 말이다.

예배는 예배 그 자체로써 그 자치가 충분하다.
아니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예배인 것이다.

진실함 믿음의 사람들은 에배를 통해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게 될 것이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으로 가득케 될 것이며 성령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에게 감화와 감동하심으로 사랑으로 충만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배는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며 이웃을 사랑하겠노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은총과 땅의 것으로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 은총과 복은 심령이 가난함이 될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될 것이다. 예배를 통해 주님이 말씀하신 8복이 이루어 질 것이며 예배를 통해 시편이 증언하는 복있는 자의 삶을 살게 하실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아벨을 보라. 그는 믿음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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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23 07:34:02
참으로 웃기는 허설에
내 한마디 하련다.

<예배는 사랑(의 표현)이다>라는
재신의 얼떨결의 언표에 관하여

그래,
그 예배의 본질격인 사랑을
예배당(교회당)에서만 하느냐?
그 예배(사랑)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하는지
가르치고 배우고 연습하는 장이
교회당(예배당)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나머지 너의 주절거림은 도통 외계인의 방언이라
알아듣기가 불편하구나...
허설 제작에 시간보내지 말고 공부 좀 하거라.
문자주의 빠져서 너의 그 허설이 무슨 영험있는
영설인지 착각하지 말고.

참, 너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 팁 하나 주겠다.

성령, 성령 하는데
성령이 무언지 아느냐?
성령은
[거룩한(신성한) 가르침]이라
할 것이니라!

성령은 거룩한 가르침!
성령은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의 가르침!
성령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있는 가르침!
너의 헛소리가 아니라.
깨우친 자들에게 임하는
아니, 깨우치려고 임하는 가르침!
너는 도대체 네가 만든 허설에 꽉 막혀 있는 중생이니
성령이 너에게 임할 길이 영 어려워 보인다.
그냥 네가 만든 성령(흐릿한 령!)에 취해 그렇게 살거라...
참으로 너의 존재가 가엽구나!
재신아, 공부 좀 하거라.
너의 깡통, 맹물 논리로 강단신학을
비웃지 말고.
너의 그 독선과 편견으로 너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너 자신은 정녕 모른단 말이냐?
그러니 개독교 먹사 소릴 듣는다.
아느냐?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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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15 19:47:07
교회와 예배?
삶 자체, 즉 일상을 통해 드리는 ‘예배’는
그 자체만으로 ‘예배’가 될 수 있으나,
일상의 삶과 이어지지 않는 ‘예배’는 허울일 뿐
알맹이 있는 ‘예배’가 아니다.
<본문 중에서>

교회로 모이는 것은
예배드리려 함이 아니요
예배드리는 법을 배우려 함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여
교회는
예배드리는 곳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이어야 한다!

또 많은 얼치기들이
생쥐떼처럼 달려들려나?
예수피를 팔고 사는 흡혈귀같은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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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15 22:37:39
참,
예배란
교회당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유치찬란한 재롱잔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예수)의 뜻대로 사는 것임을
빠뜨릴 뻔 하였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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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112.172.203.5)
2018-05-16 12:29:39
그러므로
이런 논리라면
교회당에서 하는 대부분의 사사건건은
예배가 아니라
그냥 영적, 문화적 지체아들의 재롱잔치?
그 자체이겠죠.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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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19 13:23:41
강단 신학의 문화적 지체아의 재롱적인 글을 언제까지 쓰려는가?
어찌 예수를 잃었는가?

예수를 잘 안다고 생각을 하겠지?

그렇다면 예수님이 예배를 지체아들의 재롱잔치라 하던가?
예배는 영적인 예배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 했지....

무릇 돌이여 신령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가?
무릇 돌이여 진정으로 드린다는 말의 의미도 알고는 있는가?
무릇 돌이여 진정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가?

예수를 잃어 버리고 예수를 팔아 스스로 의인화에 빠진 얼치기가 누군가?
바로 이단과 사이비들의 괴수이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예배라고?
그래 좋다. 그것이 예배라 하자.
그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돌은 신령한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는가 말이다.

만약 돌이 그리 살고 있다면 이미 노가다 판이 천국이 되었을 것이야.
그러니 천국이 있다 없다 괜히 떠들 필요도 없는 것이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다 지체아들의 재롱잔치이고...
자신이 행한은 것이라면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왜 삶의 현장이 그리 치열한 것이지?
왜 노가다 판이 그리 치열한 삶의 자리인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치열함을 경험 하는 것이라 누가 그러던가? 무릇 돌? 그렇지 그러니 돌일 밖에......

무릇 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잃고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18~20)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니야....
오히려 반대이지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며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의속에 빠져 얼치기가 되어 소리지르는 돌이 되는 것이라네....

돌은 이단이야, 사이비야!
때론 이단과 사이비를 통해서도 바른 말씀을 전하시고 하시지...
그래서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는 뜻이야...

그러나 그게 전부야.... 그게 끝이야....
돌은 돌일 뿐 사람의 영광이 주어질 수 없으며 더 나아가 하늘의 영광을 얻을 수 없는 것인게야....

강단 신학의 문화적 지체아의 재롱잔치와 같은 글을 언제까지 쓸 것인가?
내 그리 말했지 않은가? 세월을 아끼라 말이야....

돌아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으니 묻고 있는겐가?
"그 자체이겠죠. 아닌가요?"

아니야!!!!
물론 돌이 소리지르는 것과 같이 빛을 잃고 맛을 잃은 교회들의 예배가 없는 것은 아니지.... 그렇다고 모든 예배가 빛을 잃고 맛을 잃은 것은 아님을 알란 말이야.....

무릇 돌이여 진정 참 예배를 드리고 싶은건가?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게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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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19 23:12:59
재신아!
성경 누더기 몇개 짜깁기하여
열심히 짖어대는구나.
참으로 나름 많이도 준비한 듯.
그대는 영물이 아니라
맹물일세.
문자는 죽이는 것임을 모르는...
그래, 예수를 따르는 것이 교회당에 앉아서
재롱잔치 하는 것이라는 말이야?
좋게 말하여 재롱잔치지 그건
흐릿한 자(영)들의 푸닥거리니라!
재신아, 그대는 만번을 다시나도
영의 자녀가 아니라,
죽이는 문자의 종자이니라.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중생인지
이제 가엽지도 않구나!
그렇게 먹사짓하여 배는 부르냐?
도도하고 자신만만한 걸 보니
여러 영혼들을
영적, 문화적 아수라장에 빠뜨린
아주 악동인듯 하다!
그대야말로 전형적인 먹사로서
개독교 탄생과 유지의
공신인 듯 하구나!

내가 자신이 서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대같은 중생이라도 한번쯤은 생각해보라고
반문한 것이니라.
그러나 그대는 사고를 잃은 맹물이니
무슨 생각이 있겠느냐?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 알량한 영혼이라도
천국에 가거라!
열심히 개독교 먹사짓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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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20 09:16:52
성경 누더기 짜집기라 하니....
그래 무릇돌이 그리 생각을 한다면 어쩔수 없지...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누더기 강단 신학 짜집기보단 성경 짜집기가 더 나아보인다고 말이야...
무릇 돌님아...
어쩌면 돌님에게 전해진 복음도 성경 전체가 아닐지도 몰라...
흔히 말하는 쪽복음 일지도 모르고 성경 몇 구절이거나 한 구절이 그대를 신학교로 인도했을지도 모르지....

그 성경 한구절이 돌에겐 이젠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모르고
짜집기라 우수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말씀이 돌을 여기까지 인도하여 왔다는 사실을 알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목사를 먹사라 부르지 않았겠지....
만약 먹사로 보았다면 어찌 신학교에 들어 갔겠는가?

강단 신학의 짜집기에 믿음을 잃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섭리와 경륜을 잃었구나...

강단신학이 진리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인 것을 어찌하랴...
무릇 돌이 쇠라도 됐으면 철이라도 들었을 것인데....

내가 개독교 먹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개독교 먹사라 비아냥거리며 비웃는 것이 강단 신학의 교만이야....
어느 신학교 교수가 목사를 존경하더냐?
어느 신학교 교수가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진 생명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더냐?

무릇 돌이되어 개독교라 비아냥거리며 예배를 재롱잔치라 하니...
그래 돌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예배가 하나님이 보시기엔 배롱잔치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재롱잔치에라도 가보거라.
아이들의 어설픈 재롱잔치를 그의 부모들이 얼마나 기빠하고 즐거워 하는지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재롱잔치와 같은 예배를 드리지 못해 돌이 말하는 개독교가 되고 먹사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그래 무릇 돌이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예배를 드리는가 보자.
돌이 그리 말했던 것과 같이 치열한 삶의 현장인 노가다 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리는 온전한 예배가 있는가 보자....

세월을 아끼라 했건만 누더기 짜집기와 같은 인생을 언제까지 살려 하는가????
돌을 신학교로 인도하신 하나님과 그 때 허락하신 하늘의 믿음과 돌님의 부모님들을 언제까지 실망시키려 하는가 보자....

심판의 날이 멀지 않았을 것이니.... 아니 이미 그 심판이 돌 앞에 있으니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진정 믿는다면 먹사라 조롱하는 목사인 내 말을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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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무릇돌 (59.15.221.177)
2018-05-22 16:32:58
푸하하
이제 심판까지 운운하는 구나!
이 얼치기 먹사야!
강단신학을 폄훼하는 그대야말로
깡통신학의 신봉자이며
견변신학의 추종자이구나.
밥이나 잘 챙겨 먹어라.
허설을 제작하고 배설을 열심히 하려면
여러 영혼들을 호려서
너의 그 흐릿한 영혼과
헐벗은 배를
가득
채워야 하느니라...

참, 너에게는
심판도 과하느니라.
너 자체가
심판이요,
도가니요,
아수라장이니라.
아느냐?
알리가 있겠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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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22 17:59:16
돌은 이미 돌로서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무릇 돌이 내가 심판이라 하니 무릇 돌아! 이 말씀을 기억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무릇 돌이 노가다 판에서 전전긍긍하니 그대가 이미 심판을 받고 있음이며 그대가 목사를 향하여 먹사라 하니 그 또한 심판을 받음이니 또 다시 이 말씀을 기억하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무릇 돌이 사람이 되길 바랬건만 그리 돌로 사는 것이 좋다 하니 그래 그냥 돌로 살아가거라. 다만 돌이 돌이키길 원한다면 속히 회개하길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회개케 하는 영을 통하여 돌이 회심하여 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주님의 자비가 돌에게 함께 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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