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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구원받을 수 있지만 자살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self-회개'는 '면죄부'가 아니다
강만원  |  mw144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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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5월 11일 (금) 18:35:57
최종편집 : 2018년 06월 02일 (토) 16:42:33 [조회수 : 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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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구원받을 수 있지만 자살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

 

“살인은 물론 중죄이지만,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할 수 없는 자살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거짓신앙이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그리스도 신앙의 진실’인 양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유인즉, “살인한 자는 죄를 범한 후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회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기 때문에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오래 전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생활고를 비관하며 어린 두 아이를 강에 던져 죽인 비정한 아버지가 아이들만 죽이고 자신은 죽지 않은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들은 죽일 수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죽을 수 없었다.”며, 기독교인인 자신은 “자살하면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덤덤히 말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를 섣불리 일반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살인과 자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왜곡된 의식과 믿음은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살인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허튼 주장은 사랑과 정의가 요체인 그리스도 신앙에서 결코 용인될 수 없다. 특별한 이론 없이 받아들여졌던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살인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에 내가 새삼스레 반론을 제기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거짓명제이며, 거기에 숨어있는 가증한 ‘은닉죄’에 주목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싸구려 복음’의 회개만능주의가 의식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다.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서 회개를 마치 ‘면죄부’처럼 악용하는 참담한 외식, 그것은 “회심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주장하는 ‘구원파적 거짓복음’과 본질상 다름이 없다.

물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구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회심)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명백한 진리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회개의 절대가치를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개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거짓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회개일 때 비로소 구원의 능력을 지닌 회개의 가치와 의미가 있을 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회개는 단지 회개를 빙자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요단 강을 찾았던 무리에게 요한은 세례를 받기 전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이라”고 요구했다. 거짓회개는 ‘독사의 자식들’이 즐기는 ‘입술의 신앙’, 이른바 ‘외식’일 뿐 결코 진정한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며 회개의 기회조차 빼앗은 살인범이 자신은 살겠다고 회개(?)하는 추한 ‘탐욕’과 거짓을 과연 그리스도 신앙의 회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컨대 너나없이 ‘회개’라고 쉬이 말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모두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약시대에도 회개는 결코 하나님과 둘이서 ‘담판’하는 밀담이 아니며, 가벼이 죄를 회피하려는 구실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는, “제사를 드리려다가 – 다시 말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다가 – 형제에게 잘못한 일이 생각나거든 그 형제와 ‘화목해진’ 다음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기 전에 피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받으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또한, “잘못을 저지른 형제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교회의 용서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교회에서 공적인 고백을 하지 않는 자는 “이방인이나 죄인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경우이든, 내가 회개하고 내가 용서받는 ‘self-회개’가 아니라 ‘공의’에 부응할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살인과 자살을 구별했던 본론으로 돌아간다. 살인범은 살아있는 동안에 회개할 시간이 있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반면에,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람은 회개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는 주장은 결국 회개를 명분 삼아 인간의 소중한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망언이다. 요컨대, ‘이타적인’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전면 부정하는 치명적인 일탈이며, 추악한 이기심이 깃든 가증한 이단 신앙이다.

살인범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서 회개할 ‘은혜의 시간’이 있는지 모르지만, 살해당한 사람은 아무런 죄도 없이, 더욱이 부지불식간에 살해당해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실로 부당하기 이를 데 없는 억지가 아닌가.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살인범은 사람을 죽이고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고, 살해당한 사람은 억울하게 죽었으면서도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벌의 저주를 받는다는 불의가 과연 사랑과 정의를 강조하는 그리스도 신앙에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살도 살인이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살해도 명백한 살인이다. 그리고 살인은 성경이 지목하는 가장 중한 죄악이다. 예컨대 초대교회는 살인과 우상숭배, 간음을 회개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하는 ‘3대 중죄’로 단정했다. 반면에 중세 가톨릭에서는 7가지 죄에 대한 ‘중죄의 목록’은 있었을망정, ‘관용주의’가 교회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제외하고는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중죄의 항목은 없어졌다.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또는 자살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죄인’의 자리에 있는 우리는 자신이 마치 ‘심판자’인 양 섣불리 죄의 용서에 대해 단정할 자격이 없다. 어떤 죄이든 죄를 용서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다. 자신이 회개했다고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주장한다고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그 회개의 진실성을 낱낱이 간파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히 죄를 심판할 수 없을망정,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묻고 성찰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다시 말해, 살인하고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소중한 생명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자, 이처럼 죄를 범하고도 극단의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의 순간적인 ‘뉘우침’을 과연 예수께서 회개로 받아들이고 그의 죄를 용서하실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명제는 그분의 뜻에 합당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예수께서, 그리고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며 희생하신 예수께서 과연 무고한 사람을 죽이며 구원까지 가로막은 자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회개한들, 정녕 그의 회개를 받아들이시겠는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용서받을 수 있다면서, 그와 구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날선 주장에는 그리스도 신앙을 가장한 거짓신앙의 치명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

 첫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윤리적인 오류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있을망정, 회개하면 살인도 용서받을 수 있다 감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로 단정하는 자들의 신앙적 오류이다. 그들에게 냉철한 이성의 신앙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주의’에 사로잡혀 그들은 정작 ‘사랑과 정의’의 신앙은 뒤로 한 채, 자살한 사람들의 처절한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따뜻한 감성의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살인과 자살은 모두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어긴 참람한 중죄이다. 그럼에도 모세와 다윗의 예를 들면서 살인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자살 역시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해야 되며, 역으로 자살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살인 또한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해야 된다.

회개를 빌미로 살인과 자살을 허투루 차별하는 오류, “살인은 회개할 수 있어서 구원받을 수 있지만 자살은 회개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면서 회개를 면죄부로 제시하는 왜곡된 믿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은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자력구원의 이기적 믿음...

이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서” 다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한국교회 주류신학의 치명적인 오류와 함께...,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 신앙이며, 그것이 한국교회와 교인들을 배교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라.

다시 강조하지만, 결코 나는 살인을 정죄하거나 자살을 동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왜곡한 ‘회개만능주의’를 고발하려는 것이다. 또한, 자살이 분명히 중죄일망정 죄의 심판은 오롯이 주께 맡기고 우리는 다만 ‘Com-Passion’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를 섣불리 정죄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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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121.127.77.229)
2018-05-12 23:12:26
전체적인 맥락 즉 구원의 문제로 논 하자면 가히 그럴듯한 글입니다.
그 이전에 현실적으로 분명한 것을 짚고 넘어갑시다.

남의 생명을 거두는 살인이나, 자기의 생명을 거두는 살인이나 똑같은
“살인”입니다.

회개? 남을 죽이고 살면서 회개 하는 거나, 스스로 자기를 죽이고 꺼져가는 그 희미한 정신 속에서 회개하는 회개나 같습니다.

다시 조금만 바꾸어 말하자면, 자살도 살인이다. 의 더 큰 의미는 구원과
회개의 개연성에 중점을 두는 논제 보다 자살하지 말아라! 그것도 살인이다.! 에 중점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살인을 한다든지, 자살을 한다든지... 극히 “작은 수”의 움직임이고, 그것을 실행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우리들이 이러게 한번정도 이 글처럼 논 할 수 있다고 생각 되지만, 확장성은 다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생명을 거두는 살인은 타인이나, 본인이나 같은 살인 이라는 것에 확장성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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