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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연주의적 성서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자들의 공동체』
이은경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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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5월 03일 (목) 01:30:41
최종편집 : 2018년 05월 03일 (목) 01:31:42 [조회수 :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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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해석자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 코링턴 교수의 『자연주의적 성서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서평

 

이은경 박사(감신대 연구교수)

 

   
 

1. 로버트 S. 코링턴(Robert S. Corrington)은 미국 뉴잉글랜드 초월주의의 흐름을 잇는 미국 자연주의 전통과 찰스 퍼어스(Charles S. Peirce)에서 시작된 미국 실용주의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학자로, 자신의 철학을 ‘탈자적 자연주의’(ecstatic naturalism)로 규정한다. 코링턴 교수는 현재 미국 뉴저지의 드류대학교에서 철학적 신학과 종교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10여 년 전부터 해마다 ‘탈자적 자연주의 국제학술대회’(The International Congress on Ecstatic Naturalism)를 개최해 오고 있다. 다양한 학술대회와 심포지엄 등을 통해 이미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한 코링턴 교수는 한국 신학자들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으며, 2016년에는 “조울증과 철학적 삶 - 우리 모두는 조울증-천재”라는 주제로 열린 <종교와 건강 국제 심포지엄>에서 청소년기부터 시작된 조울증이 자신의 철학과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번에 박일준이 번역한 󰡔자연주의적 성서해석학과 기호학: 해석자들의 공동체󰡕(이하 󰡔해석자들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interpreters: On the hermeneutics of nature and the bible in the american philosophical tradition, 1986)에서 코링턴 교수는 한편으로는 퍼어스(Charles S. Peirce), 로이스(Josiah Royce)와 같은 미국의 고전 사상가들이 어떻게 해석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는지를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평 해석학’(horizontal hermeneutics)이라 부르는 미국 해석학적 전통이 지향하는 핵심적 개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해석자들의 공동체’(community of interpreters)이다.

이 책을 집필한 후 코링턴 교수는 자신의 ‘탈자적 자연주의 철학’의 지평을 넓히면서, 이후 네 권의 책을 시리즈로 출판하였다. 시리즈의 두 번째로 『자연과 영: 신비합일적 자연주의에 대한 에세이』(Nature and Spirit: An essay in ecstatic naturalism,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2)를 출판하였고, 세 번째로는 『퍼어스 개론: 철학자, 기호학자 그리고 탈자적 자연주의자』(An Introduction to C. S. Peirce: Philosopher, semiotician, and ecstatic naturalism, Lanham MD: Roman & Littlefield, 1993), 네 번째로는 『탈자적 자연주의: 세계의 기호들』(Ecstatic Naturalism: Signs of the world, Bloomington: India University Press, 1994),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 『자연의 자아: 근원에서 정신으로』(Nature’s self: Our journey from origin to spirit, Lanham MD: Roman & Littlefield, 1996)를 출간하였다.

‘탈자적 자연주의 철학’ 시리즈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해석자들의 공동체』에서 코링턴 교수는 하이데거 학파와 연관된 유럽적인 접근 방법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대륙적 현상학과 -히르쉬(E. D. Hirsch)와 같은 문학비평가들이 말하는- 보다 문자적이고 반(反)대륙적인 접근 방법을 아우르면서 제3의 해석의 길을 열고 있다. 특히 이번 책의 ‘바울과 원시 교회’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미국적 토착화 신학으로서의 ‘탈자적 자연주의’가 바울 공동체를 어떻게 이야기 화(化)하고 있는지를 로이스의 해석을 따라가며 보여주고 있다.

로이스는 바울 공동체를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해석자들의 공동체로 생각했다. 예수의 전기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 다소 소홀하기는 했지만, 바울은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 속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역동적인 구조들을 탐구하였고, 성령의 현존에 따라 이 공동체가 어떻게 발전하고 성숙해 나가는지를 최초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초기 교회는 스승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하기 위한 지침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킬 수 있었고, 그러한 해석적 전통을 끊임없이 이어가면서 끈질기게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마지막 논평에서 박일준은 초기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공관복음서의 공동체들과는 달리 바울 공동체는 스승 예수에 대해 끊임없이 해석하고, 그 해석에 대한 충실성을 지켜나갔던 교회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 공동체가 “영의 공동체”와 “해석자들의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먼저 초대교회는 공동체의 본성과 하나님, 그리고 예수의 삶과 활동에 대한 것들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이제까지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들을 해석적으로 조직하였다. 다시 말해 자기들의 상황 속에서 다양한 해석적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적 활동들을 자기 멋대로 수행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해석자들은 스승 예수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영의 안내를 충실히 따랐으며, 이것을 통해 초기 공동체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포스트휴먼시대를 사는 우리가 바울 공동체의 해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해석자들의 공동체󰡕의 “편집자 서문”을 쓴 찰스 메비(Charles Mabee)의 말을 빌면, ‘모든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을 위한 해석(interpretation for another)’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해석 활동은 공동체적’이고, 또한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과 통찰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렇게 구성해 낸 이야기들이 실재에 대한 완전한 해석이라는 환상 또한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퍼어스와 코링턴이 ‘해석자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다시 말해, 해석은 해석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지속적인 비판과 반론의 가능성에 노출되어야 하고, 그를 통해 보다 온전한 해석 혹은 보다 상황에 적합한 해석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자들의 공동체’의 노력이 완전에 도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석이 적용되는 상황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고, 상황에 따라 그 순간에 보다 나은(better) 해석을 찾으려는 노력 역시 무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들의 공동체에서는 ‘참이냐 거짓이냐’(true or false)의 이분법이 아니라, ‘더 나은 혹은 더 나쁜’(better or worse) 해석의 분별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 책을 번역한 박일준 역시 포스트휴먼시대라 일컬어지는 우리 시대가 해석자들의 공동체를 요구하고 있음을 역설하면서, 해석자들의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로 “우리의 해석은 언제나 시대적 적절성이라는 잣대를 통해 판단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3.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창시자인 퍼어스의 견해가 당시 정신적 공백 시대를 살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던 것처럼, 퍼어스의 기호학적 개념을 받아들인 코링턴의 ‘해석자들의 공동체’는 스토리텔링 애니멀(storytelling animal)로서의 인간이 개인적 치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정신적 공백을 매우고,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를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데 있어 하나의 단초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코링턴이 제안하는 ‘해석자들의 공동체’는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지구적으로도 의미있는 이야기와 해석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코링턴의 “해석자들의 공동체” 개념을 한국적 상황에서 다시 성찰해 봄으로써 이미 우리에게 있었던 ‘민중신학’, ‘토착화신학’과 같은 한국적 토착신학을 우리 시대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되살려 내고, 또 한편으로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필요한 토착신학적 사고를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재발견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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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07 20:19:20
성서 자체도 사건의 해석이며, 또한 해석이 필요한...
...포스트휴먼시대를 사는 우리가 바울 공동체의 해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해석자들의 공동체󰡕의 “편집자 서문”을 쓴 찰스 메비(Charles Mabee)의 말을 빌면, ‘모든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을 위한 해석(interpretation for another)’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해석 활동은 공동체적’이고, 또한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과 통찰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렇게 구성해 낸 이야기들이 실재에 대한 완전한 해석이라는 환상 또한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글에 좋은 책인 듯 합니다.
바울의 예수 사건 해석이 기독교를 산출하였지만
바울의 해석을 21세기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수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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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노재신 (222.105.146.139)
2018-05-07 20:34:38
바울의 해석을 이해나 하시오?
진정 바울의 예수 사건의 해석을 21세기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다면 일단 바울의 해석을 이해한 후에 그 이해를 바탕으로 비판을 하려면 해야 할 것이외다.

거부나 부정은 해석이 아니며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 그 자체는 의견도 아니올시다. 의견이 나오기 위해선 바울의 해석을 이해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외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괜시리 바울의 예수 사건 해석을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인신공격이며 그것이 바로 무식한 자의 용맹이라 할수 있을 것이외다.

만약 바울의 해석을 받아 들일 수 없다면 그 것에 대한 바른 해석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요.... 그것도 덕을 세우며 유익이 되는 것으로다 말이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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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
무릇돌 (59.15.221.177)
2018-05-08 05:00:20
나에 대한 댓글은 그만두고
기사 본문에 대한 댓글을 쓰시길 바라오.
무슨 딴지걸기 선수도 아니고...

그리고 (신약) 성경 중에서 바울의 저작으로 일컫는
것들조차 예수(사건)의 하나의 해석일 따름이고...

이해하기(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마는
바울의 글(서신서=성경)조차도 하나의(a) 해석이라는 것!
바울 당시 바울의 공동체에서 적용되던...

그리고
바울의 해석을 이해나 하시오?라고 묻는 그대는
정말 바울을 이해하시오?
수많은 신학자들도 다 제 각각인데?
아, 성령으로?
정말로 웃기는 소린 그만하시지요.
아마도 바울 자신도 지금 다시 자신의 글을 보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거요.
왜? 그는 전투적 상황에서 격한 감성에서
그의 많은 서신들을 기술하였고...
그리고 많은 경우 대필자에게 대필시켰으며
그 스스로 임박한 종말론을 신봉한 조급증의
사람이었고
그의 서신에 보면 야고보 등 예루살렘 사도단과
대단히 민감하고 열등적인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었오.
기독교는 바울을 따르는 종교이므로
그 처음부터 삐딱한 종교운동이라
보이지요. 충분히.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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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노재신 (222.105.146.139)
2018-05-08 17:23:03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해석하려 하는군...
바울이 바울이 쓴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쓰게 된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을 하시오?

무릇 돌은 자신이 이해지 못하는 글을 써본적이 있으시오?
또는 자신이 서 놓은 글을 후에 읽었더니 아니 내가 이런 말을 했었네 하고 놀랄만 한 글을 써 본적이라도 있소?

아마도 그런적이 없을 것이요. 왜냐하년 무릇 돌은 철저히 이성주의적인 비판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강단신학의 겟토가 되었으니 말이외다.

강단신학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 것이라 생각을 하시오?
착각하지 마시오. 오히려 강단신학이 교회를 오염시키고 왜곡을 시키며 힘을 빼놓고 있으며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길 바라오.

수많은 신학자들이 왜 제 각각인 줄 아시오?
그것은 자신들의 지식과 철학으로 성경을 이해하려 하고 바울의 신학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라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사에서 서로 다름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같은 한가지의 흐름이 있음을 보게 될것이요.
이것은 복음서에서도 나타나는 바인데... 분명 서로 다름의 시각과 가치관과 사상으로 복음서를 쓴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을 성경비평학자들은 누가복음 혹은 마가복음을 원조로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4복음서중 가장 짧은 내용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편집자들의 오기 및 첨가 된 부분이 가장 적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오.

성경을 무슨 고고학 자들이 지층을 쓸어가며 발견한 화석처럼 성경을 대하기 때문이지요. 성경이 무슨 지층이라도 되는 냥... 성경이 무슨 화석이라도 되는냥...

성경은 이러한 화석화 된 믿음을 조심하라고 하고 있오이다.
성경은 이러한 역사속에 묻혀버린 죽은 역사로 이해하는 것을 조심하라고도 하였지요.

바울이 처음부터 삐딱하는 해석은 성경의 해석이 아니라 신학자들의 삐딱한 시선 때문이라오.

그만 돌을 내려 놓고 강단신학의 갯토에서 벗어나시오.
성경이 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니 말이외다.

제발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으로 이제 강단 신학자들의 전투적 글쓰기와 논쟁에서 자유로와 지시길 바라오..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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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무릇돌 (59.15.221.177)
2018-05-08 20:27:17
누가복음 혹은 마가복음을 원조로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성경비평학자가 누가복음을 원조로 보려 하오?
혹 노재신 그대?
잠꼬대도 심하시구려...
하기야 그대는 영물이니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거의 비슷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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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노재신 (222.105.146.139)
2018-05-08 21:18:13
원조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뿐입니다.
나는 비평학에 관심이 별로 없소이다. 무릇 돌이 관심이 많을 뿐이지....
누가복음이 원조라 하든 마가복음이 원조라 하든 아니면 존재하지도 않는 제 3자료를 원시복음이라 하든 밀이요.

나는 단지 그들의 성경역사 비판이나 문학비평이나 모두 쓸데 없는 일이라는 것분이요.

돌이 문학비평을 해서 사람이 되었소?
돌이 역사비평을 해서 사람이 되었소?
돌이 소리 지른다고 사람이 되었소?
돌이 강단신학의 겟토가 되어 자유를 얻었으며 구원을 받았소?

잠을 자거나 깨어 있거나 꿈을 꾸듯 무언가를 보게 된다면 그것을 성경은 환상이라고 부른다오.

자연주의적 성서해석?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이나 해 보시오.
현실을 성경으로 해석이나 해 보시오.
미래에 대하여 성경으로 해석이나 해 보시오.

영물은 뻐와 살이 없겠지만 나는 살고 뼈가 있으니 돌이 말하는 영물이 아니올시다.
돌은 영물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시오?
영물이 지나친 거부감을 갖았던 이들이 사두개인들이라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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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08 22:09:34
무식하면
주둥이나 닥치기나 할 것이지.
아니, 요즈음은 무지렁이들도
키보드는 잘 두드린다.
관심도 없는 중생이
왜 아는체 나서느냐?
이 넋나간 얼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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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08 22:10:41
그리고
노재신이 관심갖는 찌질한 구원같은 건
무릇돌은 아예 관심조차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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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08 22:48:28
구원에 관심도 없는 얼치기가 성경 비평학엔 왜 관심을 갖아서....
무룻 돌이 되어 당당에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실족한 영혼들을 훔치려는 이리가 되어 있으니 내가 나서는 것이오.

그리 살다 지옥에 가면 좋으려나...
그리 살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그리 좋으려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좌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시오.

무릇 돌이 유식해봐야 돌이며 사람이 무식해도 사람이니....
나는 무식해도 사람으로 살려한다오...

구원엔 관심도 없는 얼치기 무릇 돌님아....
괜히 아는 척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지 말고....
진정 관심이 없거든.... 노가다 판에서 조용히 노가다나 하시오.

돌주제에 괜한 아는 척하지 말고 말이오...
그러면 내가 왜 돌의 글에 댓글을 달겠오....
무릇 돌이 괜히 사람인척 소리 지르니 돌은 돌로 조용하라 함이요...

떠들려거든 돌을 버리고 사람이 된 후에 무식해도 사람의 소리를 내란 말이올시다.

무식함이 있더라도 사람의 소리는 때론 하나님이 말씀처럼 사용하기도 하니 말이오....
유식한 돌의 소리는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게 될 심판의 대상이 됨을 기억하시구랴....
뭐 구원에도 관심이 없는 얼치기 돌이니 심판에도 관심이 없는 얼치기 돌이겠지만 말이요.....

구원과 심판은 먼 미래에 있을 누가문학적인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며 살아 가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기억이나 했으면 좋겠구랴....

내가 돌이게 이렇게 댓글을 다는 데에는 다 나름 그 뜻이 있으며 그 이유가 있음을 아시구랴... 얼치기 돌님아...

돌이 사람이 된다면 그것이 구원이며 사람이 돌이되어 돌로 그냥 남는다면 그 자체 또한 심판이 될 것이요....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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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09 05:37:13
여전히
스스로 문화지체, 영적 소경임을
열심히도 증명하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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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09 18:57:54
여전히 자신이 스스로 무릇 돌임을 증명하는구나!
어찌 비평학을 숭상하는 무릇 돌이 영적인 소경을 말하는가?

돌도 영적인 존재를 믿는가?
돌도 영물을 무서워 하는가?

진정 그렇다면 영적인 눈을 떠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진 것을 믿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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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15.221.177)
2018-05-15 21:28:13
재신아
넌 무엇하는 물건인고?
전후좌우를 구별못하는 걸 보니
쉰천지의 졸개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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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16 17:14:40
돌아 돌아 돌돌아.....
내가 분명 감리교 목사라 했을 텐데...
어찌 무엇하는물건이냐 물고 있는 것인고...

돌의 눈엔 목사들이 물건으로 보이는 가 보네...
내가 보기엔 돌이 물건이고 목사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말이야...

전후좌우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내가 방향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장애인으로 보이던가? 뭐 그렇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전후좌우는 사람의 기준일 뿐 내겐 전인 것 같지만 앞 사람에겐 후가 될 것이고 내가 후라 하지만 뒷사람의 입장에선 앞일테니 말이야...

내가 돌이 말하는 것과 같이 방위장애가 있을진 모르지만 돌은 영적인 장애가 있으니 이것을 어쩐다... 거기에다 나이 값도 못하는 얼치기 돌이니... 이걸 도 어쩌나....

신학교를 나와 노가다 판을 전전긍긍하는 길을 잃은 자가 오히려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된 나를 방향장애라 말하니... 오호라 누가 진정 방향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인가?

쉰천지의 졸개라고? ㅎㅎㅎ
감리교회 목사를 쉰천지의 졸개라 하니..... 적반하장이로구나.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지 못하고 노가다 판을 전전긍긍하면서 인터넷으론 길을 잃은 양들의 영혼을 훔치려는 이리가 되어있으니... 누가 진짜 쉰천지의 졸개인가 말이다.

강단 신학의 졸개인 돌아....
문학 비평의 졸개인 돌아....
개독교의 졸개인 돌아.... 돌아 돌아 언젠까지 돌려는가?
차라리 팽이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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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112.172.203.5)
2018-05-17 13:08:02
어이쿠!
감리교의 먹사인 재신아,
그래,
어떤 허설로 사람들을 호려서
그들의 피땀묻은 헌금으로
세끼 밥은 잘 챙겨 드시는가?
그댄 영물이라서 배도 안 고프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휘돌아 다니면서
여러가지 배설을 하려니
배도 고프련만
그대는 먹사 노재신이 아닌가?
그 위대한!
수고하시게.
먹사노릇 열심히 하며...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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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112.172.203.5)
2018-05-17 13:10:38
참,
몰랐네.
감리교에도 그대같은 먹사가 있는지!
열심히 허접한 먹사짓 하시게!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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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222.105.146.139)
2018-05-19 14:30:52
돌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최소한 이럴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어떤 허설로 사람들을 호려서 그들의 피땀묻은 헌금으로 세끼 밥은 잘 챙겨 드시는가?"라고 말이다.

허설은 돌의 혀가 아니던가? 노동자들의 인금을 호리는 것이 돌이 아니던가?

성도의 피땀이 묻은 헌금으로 밥 세끼를 채운 것이 미안하고 미안하여 목사다운 목사가 되려고 하였지......

성도들의 피땀이 묻은 헌금으로 세끼의 밥을 해결하는 이들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도 쳐봤지.....

소리지르는 돌에게도 주님의 뜻이 있으려니 싶어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었지.......

온갖 헛소리와 그럴싸한 말로 미혹의 허설을 푸는 돌에게 정신을 차리라고도 했으며 세월을 아기라고도 했었지....

내가 감리교회의 먹사라고? 그래 돌의 눈에는 그리 보일 수도 있지......
그러나 돌이 내가 누군인줄 알았다면 그런 소리는 못했을거야......

무지하니 용감하고 무지하니 허설을 쏟아내고.. 무지하니 사람의 진심어린 충고를 비웃기나 하겠지.......

돌이 그렇게 좋다면 그냥 돌하시게....
이제 무릇 돌이라 하지 말고 그냥돌이라 하시게...
그러면 내가 댓글을 달지 않을 테니 말이야....

돌이 좋다는 데 누가 막겠는가?
스스로 죽어 자신의 죄값을 치루겠다는 데 누가 가룟인 유다를 말리겠는가 말이야....
그러나 이 말은 기억하시게....
차라리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돌은 아니 되었을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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