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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박대성  |  dduru7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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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4월 24일 (화) 05:28:58
최종편집 : 2018년 04월 24일 (화) 06:20:01 [조회수 : 9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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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박대성 목사(베다니 한인연합감리교회, 메릴랜드)


조선 여성 최초로,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1)에서 서양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박에스더는, 1900년 가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 외곽에 위치한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2)를 찾았다. 박에스더의 의술이 필요한 조선의 백성들에게로 이제 다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묘비 앞에 서 있는 박에스더는, 쉽게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 묘비에는 영문으로 ‘Yousan Chairu Pak’ 이라는 이름과 함께, 1868년 9월 21일 출생해서, 1900년 4월 28일 볼티모어에서 사망했다고 새겨져 있었고, 영문으로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태복음 25:35)라는 성경구절도 함께 쓰여 있었다. 그 묘비는 바로, 사랑하는 남편 박여선(朴汝先)3)의 묘비였다.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간직했던 박에스더. 하지만 위기에 서 있던 유대 민족을 구했던 성경 속 에스더처럼, 박에스더는 조선의 백성들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질병까지 어루만지고 치료했던, 조선 최초의 여의사로, 위대한 감리교인으로, 그리고 짧지만 밝게 빛났던 별로 기억되고 있다.

   
박에스더

 

들어가며


130여 년 전, 흰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었고, 가난했으며, 이름조차 가지고 살지 못했던 조선의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의 삶은 항상 고달팠고, 절망적이었으며, 희망을 꿈꿀 내일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랬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희망과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던 이들이 있었다. 복음의 기쁨과 구원의 빛을 비춰주었던 낯선 이방인들. 바로 감리교 여선교사들이다.

   
 

그 중 ‘평양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이 있다. 1865년 미국 뉴욕주 리버티에서 출생한 로제타는, 1885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직에 몸담다가, 이듬해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 대학에 진학하여, 1889년 졸업한다. 졸업 후 뉴욕의 빈민촌에서 의료 선교를 하던 중, 후에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890년 10월, 감리교 여성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어, 조선에 도착하게 된다.

19세기 말, 미국 교회에 불었던 선교적 부흥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사는 것을 특별한 부르심으로 여겼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이 일에 동참했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거든,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을 하라.”

1837년 여성을 위한 대학인, 마운트 홀요크 여성신학교(Mount Holyoke Female Seminary)를 세운 메리 라이언(Mary Lyon, 1797-1849)이 해외선교를 적극 권장하며 했던 유명한 말이다. 1892년 일기에서 로제타는, 이 말이 자신을 해외선교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썼다.4)

 조선에 도착해, 바쁜 나날을 보내던 로제타는 자신의 일기에 그 당시 여성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이 없다. 그들은 작은 애, 혹은 예쁜이라고 불리는데,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야만 ‘창식이 엄니’같이 아들의 이름에 따라 누구의 엄마라고 불린다.” - 1890년 10월 20일5)

   
 

로제타뿐만 아니라, 메리 스트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 같은 감리교 여선교사들은, 조선의 여성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꼈다. 그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생해야 하는 존재였지, 한 사람의 동일한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런 의식조차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름이었다. 어려서는 누구 집 딸로, 결혼 후에는 누구 댁으로, 자식을 낳은 후에는 누구 어멈 혹은 할멈으로 불렸다. 철저히 남성 중심의 칭호였다. 이것이 ‘이름 없이’ 지내 온 전통사회의 여성이었다. 이 ‘이름 없음’은, 곧 ‘존재 없음’의 의미이기도 했다.6)

이런 ‘존재 없음’의 여성들에게, ‘여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성과 동일한 존재’라는 존재 의식을 심어주는 일에 앞장섰던 이들이 바로 감리교 여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이 조선의 여성이라는 ‘존재 없음’을 넘어, 수많은 여성들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보살피며, 그들에게 ‘존재 있음’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주었던 이름 셋 가진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김점동, 김에스더라고도 불렸던,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다.

 

   
   
▲ 이화학당 시절의 박에스더(원안)

 

1. 김점동으로의 삶


1890년 10월 로제타가 조선에 도착해 일했던 곳이 바로 보구여관(保救女館)이다.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이름을 하사했다. 보구여관은 남녀유별의 조선 사회에서, 의료혜택이 취약했던 조선 여성들을 위해, “여성을 위한 여성의 일(Woman’s Work for Woman)”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던, 미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1887년 10월 설립된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이었던 보구여관은, 후에 이대 부속 병원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로제타가 2대 책임자로 발령되었던 것이다.

   
보구여관

일손이 필요했고, 조선의 말과 문화에 익숙지 않았던 로제타를 위해, 이화학당에서는 몇 명의 학생들을 보구여관으로 보내, 돕도록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김점동이다.7)

“진료소에 통역을 제법 잘하는 점동이라는 학생 하나와 둘이서 일한다. 점동이는 영어를 잘하는 열네 살의 건강한 소녀인데, 영리하고 재빨라서 나는 그 아이를 꼭 훈련시키고 싶다.” - 1890년 10월 24일 로제타의 일기에서8)

김점동은 1877년9)  3월 16일, 서울 정동에 살던 광산 김씨 김홍택과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딸 중, 셋째 딸이다.10)  김점동은 그 시대 다른 여성들에 비하면, 여러 좋은 환경 가운데 자랐다고 할 수 있다. 1885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자신이 살던 정동 근처를, 선교의 근거지로 삼고, 학교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점동의 아버지 김홍택은, 첫 감리교 선교사였던, 헨리 아펜젤러 목사(Henry G. Appenzeller, 1958-1902)에게 고용이 되었고, 서서히 서양문물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 무렵, 아펜젤러 선교사를 통해,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여학교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김홍택은 서양 문물과 사상을 접할 수 있고, 음식과 옷을 제공한다는 말에, 한국 근대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에 김점동을 입학시켰다. 가난했지만, 일찍 서양문물에 눈을 뜨고,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 덕분에, 김점동은 이화학당에서 한글 성경과 교리문답을 배우며,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을 키울 수 있었고, 산수,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김점동은 보구여관에서 선교사이자 의사인 로제타를 도와 통역과 간호보조 업무를 하며,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없는, 꿈 없는 자신의 삶에, 무엇인가 변화가 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보구여관에서 서양의학을 처음 접하게 되었던 김점동은, 통역을 하고, 약을 조제하고, 환자를 돌보는 일은 좋아했지만, 피를 보는 수술 같은 것은 싫어했다. 그러나 로제타 선교사의, 속칭 ‘언청이’라 일컫기도 했던, 구순구개열 수술을 보조하고 난 후로는, 감명을 받고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11)  그 당시 ‘언청이’는 불치병으로 여겨졌는데, 수술과 치료를 통해, 새 삶을 살게 되는 조선의 여성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구체적이고 큰 꿈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로제타는 자신이 만나는 조선의 여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주체성을 회복해서, 자신의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해, 세상에 유용한,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려 애썼는데, 김점동에게서 그 희망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2. 김에스더로의 삶

   
 

어린나이에 부모로부터 떨어져, 이화학당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김점동은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특별히 복음의 진리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삶에 변화가 먼저 왔다. 조선 사람들과 대부분의 이화학당 여학생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발생되던 두 가지 죄악, 거짓말과 훔치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12) 그리고 마음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김점동의 마음속에 정결한 마음 갖기를 소망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홀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1년이 되어 가는 어느 장마철 밤, 그날따라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얼마 전 배웠던 성경 속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벌주시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같은 방을 쓰는 친구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 친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김점동은 친구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정결한 마음을 달라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의 순수한 믿음은 응답을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그들의 마음속에 충만해졌고, 두려움은 사라졌으며,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다른 이화학당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며, 매일 밤마다 작은 기도회가 김정동의 방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감리교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처럼 말이다. 후에 이화학당의 한국인 교사들도 이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이 모임은 조선 여성 최초의 기도 모임이 되었다.13)
 
김점동이 복음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복음은 그녀의 삶에 변화를 요구했고, 그 요구에 따라 살면서, 점점 새로 거듭날 준비가 되어갔다. 마침내 1891년 1월 25일 주일, 올링거 목사(Franklin Ohlinger, 1845-1919)에 의해 세례를 받은 김점동은, 에스더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된다.14)  새로운 이름을 얻는 과정을 통해, 성경 속 에스더가, 위험에 빠진 민족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듯, 김에스더도, 특별히 조선의 여성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15)

세례를 통해, 새 이름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김에스더처럼, 로제타 선교사도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889년 뉴욕의 빈민촌 진료소에서 만나, 서로 사랑을 키워왔던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였던, 윌리엄 제임스 홀과 한양에서 1891년 12월 재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6월 두 선교사는 결혼을 하며, 이제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 조선 선교에 대한 구체적이고 더 큰 비전을 품게 된다. 그리고 1년 후 김에스더에게도, 또 다른 큰 삶의 변화가 오는데, 바로 박여선과의 결혼이다.

 

3. 박에스더로의 삶


1) 결혼과 평양 선교

세월은 빠르게 흘러, 김에스더가 16세가 되었다. 아버지 김홍택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두 명의 언니들도 결혼을 했다. 에스더의 어머니와 친구들은 14세 이전에 결혼을 하던 조선의 풍습을 따라, 에스더도 하루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심지어 에스더가 일하던 시약소(Dispensary) 환자들마저도, 에스더를 볼 때마다, “왜 이렇게 큰 처녀가 결혼을 안했지?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라고 수군댔다. 당시 조선 사회에선, 기생이나 장애나 병이 있지 않는 이상, 16세가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성화와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드디어 한 사람이 물망에 오른다. 그의 이름은 박여선16) , 윌리엄 홀에 의해 마부로 고용되어, 기독교로 개종한, 언제나 정직하고 온화하며, 겸손한 청년이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사회에서 일하는 여자와 집에서 가족을 위해 음식과 바느질만을 잘 할 수 있는 여자 중 누가 더 좋은 지를 묻는 윌리엄 홀의 질문에, 박여선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여자가 더 좋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난 후, 윌리엄 홀은 에스더의 신랑감으로 박여선을 추천할 수 있었다.

에스더는 박여선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박여선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그때의 심정을 에스더는 로제타 홀에게 편지로 고백했다.

“저는 그의 신분이 높다거나 낮은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신분이 높든 낮든 부자이건 가난하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17)

 

   
 

드디어 1893년 5월 24일, 에스더는 박여선과 결혼을 하고,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불리게 된다.18) 조선의 전근대적인 여성관을 벗어나길 원했던 에스더와 조선 시대 남성관을 깨고, 아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박여선의 만남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였으리라.

그로부터 1년 후, 1894년 5월 8일, 태어난 지 아직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을 데리고, 로제타, 윌리엄 홀 선교사는 평양 개척 선교의 사명을 띠고 평양에 도착하게 되는데, 박여선과 임신 중이었던 박에스더 부부도 동행한다.

당시 평양은, ‘조선의 소돔’19) 이라고 불릴 정도로, 박해가 심했던 곳이었고, 도착하자마자 많은 어려움과 고초를 겪었지만, 에스더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로제타 홀의 평양 선교 활동을 훌륭하게 도왔다. 그러나 평양에서의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평양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평양 도착 한 달 만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런 와중에 에스더는 아기를 출산한다.

“셔우드가 이제 집안의 유일한 아기이다. 에스더 이모가 몸무게가 겨우 4파운드(1.8kg)밖에 되지 않는 귀여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셔우드가 아기를 너무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인형 손 같은 아기의 손을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그런데 아기는 겨우 36시간 동안 에스더 이모 방에 머문 뒤, 주님께서 그 작은 아기를 당신께로 데려가셨다.”20)

1894년 9월 10일, 로제타 홀의 육아일기에 의하면, 박에스더의 첫 아기는 미숙아였던 것 같다. 그리고 첫 아이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숨을 거둔다. 평양 선교 기간 중에 겪었던 박해 사건의 충격과 임신 중에 평양까지 갔다 오는 힘든 여행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곧 또 다른 슬픔이 다가온다.

성실하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했던 신실한 사람 제임스 홀은, 한창 청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894년 10월 한 달여 동안, 평양으로 다시 돌아가, 자신의 몸을 돌볼 틈도 없이, 부상병들을 치료하다 말라리아에 걸린다. 이후 한양으로 급히 돌아왔지만, 안타깝게도 배 안에서 또 다시 발진티푸스21)에 감염되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1월 24일 사랑하는 아내 로제타 홀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직한다. 로제타는 1894년 12월 10일, 셔우드의 육아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애써 하려던 말은 ‘아빠가 평양에 간 사실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갔고, 그분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오.” 사랑하는 아빠, 그의 믿음은 어린이의 믿음과 같이 단순했고,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잠들 듯 죽음에 대해 아무런 공포도 없었다.22)

   
 

그의 선교 활동은 비록 짧았지만, 평양 선교의 개척자이자, 고아와 어린이들의 진정한 친구였던 그의 헌신은, 결코 작지 않았고, 헛되지 않았다. 나중 아내 로제타 홀과 에스더를 통해, 그의 평양 선교의 꿈이 열매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순직과 함께 슬픔에 잠겨있던 로제타 홀은 잠시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때 에스더는 자신의 오랜 꿈이던 미국에서의 의학공부의 뜻을 간곡히 비쳤고, 로제타 홀은 미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의 허락과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은 후,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1894년 12월, 유복자23)를 임신한 상태였던 로제타 홀은, 아들 셔우드 홀, 에스더 부부와 함께 미국으로 출발하게 된다.24)

“엄마는 여기 와 있은 지 거의 5년이니 휴가를 받을 때가 거의 되었고, 또 더 이상 일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휴가를 받기로 했다. 엄마는 몇 년 쉬고 다시 기쁜 마음으로 평양에 파견되어 아빠가 시작해 놓은 일을 계속해 나가길 기대하고 있다. 에스더와 여선이는 둘 다 미국에 가길 무척 원해서 엄마가 데려가기로 했다. 여선이는 집에서 일을 도우며 시간이 나면 영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에스더는 리버티의 학교에 보낼 생각이다. 만약 공부를 잘해낸다면 에스더를 의과대학에 보낼 예정인데, 언젠가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의 자매들에게 돌아올 수 있길 기대한다.” - 1894년 12월 10일 로제타 홀의 셔우드 육아 일기에서25)

박에스더는 1893년 5월 결혼, 1894년 평양 선교활동 동행, 첫 아이의 죽음, 윌리엄 홀의 순직, 그리고 12월 미국으로의 유학 등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삶의 변화를 경험했지만, 이제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사로서의 꿈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2) 미국에서의 삶과 의학교육

1895년 1월 미국에 도착해, 그들이 맨 처음 정착한 곳은, 로제타 홀의 고향인 뉴욕주의 작은 도시 리버티였다. 쉽지 않았던 의과 대학 입학 준비를 위해, 그곳에서 에스더는 공립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박여선은 스스로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가며, 로제타 홀의 아버지 농장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아내 에스더의 뒷바라지를 했다.

같은 해 9월, 에스더는 뉴욕의 어린이 병원(Nursery and Child's Hospital)에 들어가 일 년 남짓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고, 틈틈이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하며, 의과 대학 입학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스더는 47명의 아기들이 입원해 있는 소아 병동에서 수간호사를 보조하고 있었는데 일을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또한 라틴어, 수학, 물리학 개인 교습을 받고 있었는데, 라틴어가 영어보다 쉽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년에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 대학에 입학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졸업하면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기 민족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해낼 거라 믿는다.”
- 1895년 10월 18일 로제타 홀의 이디스 육아 일기에서26)

   
 

하지만 의사가 되겠다는 소망과 희망을 품고 시작한, 낯선 미국 땅에서의 삶은, 그리 쉽지 않았다. 뉴욕 어린이 병원에서 일하던 중 두 번의 좌절과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데, 첫째는, 1894년 첫 아이에 이은, 두 번째 아이의 조산과 죽음이었다.27)  둘째는, 평소 에스더는 로제타 홀의 의과대학 후배가 되기를 바라며, 명문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 대학으로의 진학을 희망했지만, 결국 진학에 실패했다.

이런 아픔과 좌절을 경험한 에스더에게, 로제타 홀은, 의사가 되는 꿈을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귀국할 의향이 있는지를 편지로 물었다. 이에 에스더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적어 답장을 보냈다.

“만약 제가 지금 이것을 포기한다면, 또 다른 기회가 저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남편도 그 어떤 것보다 제가 의사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가 없다면, 그 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28)

   
 

꼭 의사가 되겠다는 에스더의 이런 의지와 열정, 그리고 노력으로 1896년 가을, 볼티모어 여자의과 대학29)에 입학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30)  그토록 오랫동안 꿈꾸며 준비했던 시간이었기에, 학교에서의 모든 시간들이 소중했고,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총 4년의 과정 중, 3년의 과정이 끝날 무렵인, 1899년 4월 말, 에스더가 볼티모어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녀의 후견자 역할을 했던, 스티븐슨 부인은 에스더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에스더는 이제 졸업까지 1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학위를 받자마자 조선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녀는 성적도 만족할 만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이 되는 존경받는 학생이면서, 우리의 한국 선교에 큰일을 감당할 인물이 될 것입니다.”31)

또한 에스더는 그 당시 미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동양 여성으로서, 많은 곳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회를 했다. 특별히 각 교회의 여성해외선교부가 주최하는 모임에서, 신앙 간증을 하며, 조선을 알리고, 선교의 필요성을 전하기도 했다. 32)
 

   
 

하지만 의대 입학 후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미국 생활은, 또 다른 비극을 에스더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전에 경험했던, 두 아이의 죽음보다, 윌리엄 홀의 죽음보다, 간절히 원했던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 대학으로의 진학 실패보다 더 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박에스더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사랑하는 남편 박여선의 죽음이다.

박여선의 투병생활에 대한 기록은, 1899년 스티븐슨 부인의 글에 처음으로 언급됐다.

“에스더의 남편은 지금 의과대학과 연계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습니다.”33)

1년이 넘는 박여선의 투병 생활과 죽음. 이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의과대학 교수 루이스 박사는 그 당시 박에스더의 삶을 이렇게 회상했다.

“에스더의 의과대학 과정은, 너무나도 슬픈 결말과 함께 끝을 맺었습니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실험을 하는 힘든 학업을 해내면서도, 밤에는 남편을 지극히 간호하는 삶을 오랫동안 반복했는데, 그녀가 마지막 졸업 시험을 시작하려 할 때 쯤,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우 훌륭히 시험을 통과했습니다.”34)

박에스더가 의사가 되는 것을,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 이가 남편 박여선이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남성상을 깨고, 박에스더의 의과 대학 공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했던, 그리고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었던 박여선. 끝내 사랑하는 아내 에스더가 의사가 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의료 선교사를 키우고, 짧지만 희생적이었던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는 현재 볼티모어 근처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의 스미스(Smith) 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의 가족 묘지에, 제일 첫 번째로 매장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35)  박에스더는 조선으로 떠나며, 남편의 무덤 앞에서 어떤 기도를 했을까?

                여선(汝先)의 묘비에서36)            
                      
             Esther의 손톱에
             봉선화 자욱이 희미해질 무렵
             향원정(香遠亭)에
             붉은 이화(梨花)가 흩날렸다
             제물포항을 떠나올 제
             많은 눈물을 흘려서인지
             가슴에 고인 서러운 한(恨)은
             끝내 숨어버리고 만다

             Rosetta Hall이 있는
             평양(平壤)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가 다가오자
             Esther는 누런 종이를 벗기고
             조선의 지도에 청진기(聽診器)를 대어본다
             아직 숨을 쉰단다
 
             '익숙해지면 떠나야 한다' 했던가
             그 말을 부정(不正)하듯
             상투를 튼 요리사의 몸은
             떠나기를 거부한다
             아무리 추스리고 추스려도
             나락(奈落)으로 떨어져가는
             육신은 누구도 일으키지 못한다

             나그네 되었을 때
             손을 잡아 주었던 Smith는
             자기가 누울 자리 한 켠에
             나의 거처(居處)를 양보하는 것으로
             눈물을 대신한다
             Lorraine Park의 파아란 하늘아래
             울지도 못하는 Esther,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제 조용히 잠든다
             33년을 숨쉬게 한 조선(朝鮮)을 가슴에 품고...,

             묘비(墓碑)여,
             너는 어찌 서지도 못하고
             돌아누웠느냐
             너라도 일어나서 다시 돌아올
             Esther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朝鮮)이 이토록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그저 누워서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안녕히 가시게나..., 점동(點童).
             그대는 절대로
             울어서는 안되네                             

 


3) 귀국 후의 활동

박에스더는 비록 미국에서, 많은 역경과 좌절을 경험했지만, 1900년 서양 의학을 공부한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조선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구체적이고 큰 꿈을, 이제는 실천하기 위해, 편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 파송 의료 선교사로 같은 해 11월 귀국한다.

   
 

로제타 홀이, 남편과 딸의 죽음이라는 절망 속에서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의료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박에스더도 많은 도전을 받았으리라.

귀국 후 박에스더는, 1898년 귀국한 로제타 홀과 함께, 보구여관과 윌리엄 홀이 개척했던 평양 의료 선교에, 자신의 열정과 삶을 모두 쏟아 붓는다. 이제는 로제타 홀의 조수가 아닌 동료로 말이다.

먼저, 보구여관과 광혜여원(廣惠女院)으로도 불리던 평양 부인 병원 등을 통해, 매년 수천 명 이상의 여성과 어린이 환자를 진료했고, 쉬는 날도 없이 더 많은 사람들을 진료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곳을 찾아 의료 활동을 펼쳤다.

특별히 자신의 안위보다 환자들의 치료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기에, 전염병이 유행할 때도, 환자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치료하고, 약을 전하며, 그들에게 복음과 평안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박에스더는 환자들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 불안감, 두려움까지도 어루만져주었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박에스더는 조선 여성들의 의료 교육에도 기여를 했다. 여성들을 진료하면서, 미신적이고, 잘못된 건강 상식으로 인해, 병이 더 심해져서 오는 경우를 발견하고, 그것을 계몽시키는데 주력했다.

또한 여성 의료 발전과 교육을 위해, 보구여관 내에 간호사 양성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제타 홀에 의해 설립된, 조선 최초의 특수 교육 기관이었던, 평양 맹아 학교 운영과 교육에도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37)

박에스더는 의료선교사로서 의료활동을 통해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통해서도 조선의 여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먼저 황해도, 평안도 지역의 산간벽지를 가리지 않고 순회하며, 여성과 아이들에게 활발하게 복음을 전했다. 또한 1903년부터 1909년까지,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여자 성경 학교를 통해, 말씀과 위생학38)을 가르치며, 큰 결실을 맺기도 했는데, 수많은 전도부인들이 양성되어, 어둠에 갇혀있던 조선 여성들에게 복음과 희망의 빛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1909년 ‘해외 유학 여성 환영회’가 열렸다. 해외에서 유학한 후 귀국해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헌신, 봉사하고 있는 여성들의 업적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던 이 모임에서, 박에스더는 하란사, 윤정원과 함께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1905년부터 앓기 시작했던 폐결핵으로 인해, 박에스더는 이때 이미 병세가 악화되어 있던 상태였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치료를 위해 중국 남경에서 요양을 하며39),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의료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또 다시 병세가 악화되면서, 안타깝게도 1910년 4월 13일, 귀국 후 그렇게 10년을 쉴 새 없이, 조선 여성들을 섬기던 박에스더는, 남편 박여선과 같은 폐결핵으로, 짧았지만, 빛났던 삶을 마감한다. 그녀의 나이 34세였다.

 

   
 

 

나오며


박에스더의 죽음에, 로제타 홀 그리고 에스더를 이모처럼 따르던 셔우드 홀이 받았을 슬픔과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셔우드 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박에스더의 죽음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고백했다.
 
“에스더 이모의 죽음은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한창 귀하게 쓰임 받던, 에스더 이모의 생명을 빼앗아갔고,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쇠약하게 만드는 결핵을 예방하는 것을 돕는데, 저의 모든 힘을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결핵 전문의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결핵 요양원을 세우기로 다짐했습니다.”40)

   
 

어릴 적 자신을 늘 아껴주며, 사랑해 주었던, 에스더 이모와 여선 이모부를 폐결핵으로 먼저 보냈던 셔우드 홀은, 자신의 결심대로, 결핵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삶을 헌신한다. 1928년 10월, 폐결핵 퇴치를 위해 ‘해주구세요양원’을 최초로 설립 하였고, 1932년 12월, 결핵퇴치 기금 모금을 위한, ‘크리스마스 실’(Christmas Seal)을 처음으로 발행한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박에스더와 박여선의 죽음이, 수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불씨가 된 것이다.

1894년 남편인 윌리엄 홀과 함께 평양 선교를 떠나며, 에스더에게 동행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로제타 홀에게 에스더가 의연히 대답했다.

“하나님이 저를 위해 문을 열어주시는 어느 곳이든지 저는 가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평양의 문을 열어주시면, 저는 가겠습니다. 저는 몸과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제 몸과 제 마음과 제 영혼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비록 사람들이 저를 죽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조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제 삶을 바치겠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41)

에스더의 이 고백이, 짧지만 별처럼 빛났던 그녀의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박에스더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고 갔다. 첫째는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고 회복하게 한 것뿐만 아니라, 그녀가 치료하고 만나는 이들이 복음을 깨닫고 예수를 영접해, 영혼이 치유되게 한 것이다. 둘째는, 비록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헌신이었지만, 에스더의 삶을 통해, ‘존재 없음’의 수많은 조선 여성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도전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 있었던, 조선의 작은 소녀 김점동에게 로제타는 빛이 되었다. 그녀를 꿈꾸게 했고,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귀하게 쓰임 받는 삶으로 그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점동은 박에스더가 되어 조선의 여성들에게 또 다시 빛이 되었다. 오늘날 그 빛의 빚을 진 우리들은, 또 누군가에게 빛이 되고 있는가? 길이 되고 있는가? 박에스더는 우리에게 묻는다.

 

참고문헌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기독교문사, 1990.
이덕주, ≪스크랜턴≫, 공옥출판사, 2104.
Harold J. Abrahams, ≪The Extinct Medical Schools of Baltimore≫, Maryland Historical Society, 1969.
Rosetta S. Hall Ed.,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 Eaton & Mains, 1897.
Sherwood Hall, ≪With Stethoscope in Asia : Korea≫, MCL Associates, 1978.
『Baltimore Sun』, Feb 1, 1897, Dec 13, 1899.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List or Manifest of Alien Immigrants for the Commissioner of Immigration』, 1895.
『Maryland Medical Journal』, 1907.
『Pittsburg Christian Advocate』, Feb 23, 1899.
『Twelfth Census of the United State, Baltimore』, 1900.

 

각주 ==========================

1. 1882년 개교해, 1910년 폐교 될 때까지, 수많은 여성 의사를 배출한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은 필자가 조사, 확인한 결과,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으로 흡수되거나 합병된 것이 아니라, 1910년 폐교 후 사라졌다.(참고: Harold J. Abrahams. The Extinct Medical Schools of Baltimore, Maryland. Maryland Historical Society; 1969.) 당시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은 대학교육을 거쳐야 들어 갈 수 있는 대학원 과정이었다. 볼티모어 여자 대학(후에 가우처 대학으로 학교 이름을 변경함)을 졸업한 여학생들에게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 입학 자격을 준적은 있었다.

 2. 박여선의 묘비가 있는 로레인 파크 공동묘지(Lorraine Park Cemetery & Mausoleum)의 주소는 5608 Dogwood Road. Baltimore MD 21207 이고, 묘지 번호는 Garden of Prayer Section 3의 #337번 묘이다. 묘비에 새겨진 중간 이름(Middle Name) ‘Chairu’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3.  보통 박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원래 이름은 박여선(朴汝先)이다. 선교사들이 영어로 발음하기 쉽게, 박유산이라고 불렀고, 영문 이름도 그렇게 사용한 듯하다. 1897년 당시 주미공사(駐美公使)였던, 서광범이 작성해, 조선 정부에 보고한 주미내거안(駐美來去案)이라는 책을 보면, 그 당시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21명의 유학생 이름이 나온다. 그곳에 ‘박여선(朴汝先)과 그의 처’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00년 11월에 발행된 신학월보의 박에스더 환국 소식에도 박여선이라 기록되어 있다.

4.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283쪽.

5.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155쪽.

6.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기독교문사, 1990, 68쪽.

7.  보구여관의 첫 여의사였던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가 건강 악화로 사임하자, 1890년 10월 로제타가 후임으로 파송되었던 것이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혼자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기에, 자신을 도울 보조원과 통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영어를 잘하는 이화학당 학생 몇 명이 로제타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고, 그 중에 특별히 영어를 잘하며, 많은 도움을 주던 학생이 김점동이었다.

8.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207쪽.

9.  그 동안의 박에스더 관련 글들에서, 박에스더의 생년이 1876년으로 되어있지만, 1900년 6월, 박에스더가 미국 체류 시 작성된, 인구조사서에 의하면, 1877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필자는 1877년을 따른다.

10.  언니인 김마리아(1873-1921)는 결혼 후, 정신여학당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졸업 후 1896년부터 모교의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들의 교육과 전도에 힘썼다. 동생 김배세(1886-1944)는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 과정을 최초로 이수하고, 첫 정식 간호사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했다.

11.  Rosetta S. Hall Ed.,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 Eaton & Mains, 1897, 200쪽.

12. 『Pittsburg Christian Advocate』, Feb 23, 1899.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68쪽.

13 『Pittsburg Christian Advocate』, Feb 23, 1899.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68쪽.

14.  『Pittsburg Christian Advocate』, Feb 23, 1899.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69쪽. 그 당시 보통의 조선 여성들이, 결혼 후에는, 그녀들의 원래의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지 않다가,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누구 누구의 엄마’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선교사들은 조선의 여성들이나 소녀들이 세례를 받으면, 보통의 경우, 성경 속 여성들로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다. 김점동은 에스더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정동은 김에스더로 불리기 시작한다.

15.  이덕주, ≪스크랜턴≫, 공옥출판사, 2104, 282쪽. 이덕주 교수는, “이들 이화학당 학생 교인들은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삶의 목표도 바뀌었다. 봉건시대 집안에서 침묵과 복종을 강요받았던 여성들이 기독교 복음 안에서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아직 모르는 여성들에게 전하려는 의지와 열정의 소유자들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16.  Rosetta S. Hall Ed.,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D.≫, Eaton & Mains, 1897, 392-395쪽. 로제타 홀은 윌리엄 홀 순직 후, 그를 기념하는 책을 만들면서, 박여선에게 추모의 글을 부탁하는데, 이 책에는 박여선이 한글로 쓴 글을 에스더가 영어로 번역한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박여선이 뉴욕 리버티에 머물고 있을 당시인 1897년 8월에 작성됐다. 이 글에 의하면, 박여선은 윌리엄 홀이 1892년 순회전도를 하며, 평양을 방문할 때, 마부로 고용됐던 사람이다. 훈장이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서울로 올라와 마부 일을 하고 있었던 박여선은, 평양으로 가는 윌리엄 홀과의 여행을 통해, 그가 불편한 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피곤한 중에도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게 되어,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7.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229쪽.

18.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문화를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기에, 초기 기독교 여성들도, 서양 여성처럼, 결혼 후 남편의 성으로 자신의 성을 바꾼 듯하다.

19.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71쪽.

20.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305쪽.

21.  보통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발생하는 병으로, 전쟁이나 기근 등, 위생에 신경 쓸 수 없을 때, 자주 발생했던 질병이다. 보통 갑작스런 두통, 오한, 발열 등을 동반한다.

22.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315쪽.

23.  1895년 1월 18일, 셔우드 홀의 고향집에서 태어난 둘째, 이디스 마거릿 홀(Edith M. Hall)은 안타깝게도 1898년 5월 23일, 평양에서 이질로 인해 사망했다.

24.  『List or Manifest of Alien Immigrants for the Commissioner of immigration』, 1895. 미국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소장. 1894년 12월 21일 일본 요코하마항을 출발해, 1895년 1월 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한, 박에스더 일행이 탔던, S.S. China호의 승객명단에 의하면, 박에스더는 고용인(Servant)으로, 박여선은 요리사(Cook)로 직업이 적혀있다.

25.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320쪽.

26.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411쪽.

27.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411쪽. 1895년 9월부터 뉴욕 어린이 병원에서 1년 정도 근무하며 의대 입시를 준비하던 중, 과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자궁에 문제가 있었는지, 두 번째 조산을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아이를 잃었다.
  『Twelfth Census of the United State, Baltimore』, 1900. 미국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소장. 1900년 6월, 박에스더가 미국 체류 시 작성된, 인구조사서 질문 11번 항목에, ‘몇 명의 아이들의 어머니’인지 묻는 질문이 있는데, 이곳에 2라고 기록되어 있고, 12번 항목에, ‘그 아이들 중 현재 살아있는 아이의 수’를 묻는 질문에는 0으로 기록되어 있다.

28.  『Pittsburg Christian Advocate』, Feb 23, 1899.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72쪽.

29.  Harold J. Abrahams, ≪The Extinct Medical Schools of Baltimore≫, Maryland Historical Society, 1969, 73쪽.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은 1882년 개교 이래, 28년 여 년 동안 운영되었지만, 의학교육 시설 충족 요건 미달로 인해, 1910년 폐교되었다. 박에스더는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 대학 진학 실패 후, 상대적으로 자격 요건이 낮아 입학이 가능했던,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을 선택한 듯하다.

30.  『Pittsburg Christian Advocate』, Feb 23, 1899. 미감리회 피츠버그 연회의 여성해외선교부에서 박에스더의 의과 대학 공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31.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72쪽.

32.  현재도 발행되고 있는 볼티모어 지역 신문인 Baltimore Sun지의 1897년 2월 1일, 1899년 12월 13일자 신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33.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72쪽.

34.  『Maryland Medical Journal』, 1907, 388쪽.

35.  공동묘지의 지적도를 확인하는 과정 중에 발견된 사실이다. 필자가 스미스 일가와 연락을 하고 확인해 본 결과, 자신들의 가족묘지에 박여선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스미스 일가와 어떤 관계로 인해 매장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답변을 받았다. 스미스 일가의 허락하에, 익명의 감리교인들의 도움으로, 2018년 4월 3일 박여선과 박에스더 부부의 삶과 헌신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4월 21일 기념비 제막식 행사를 했다.

36.  시를 쓴 이는 박송수 목사(워싱톤 연합감리교회, 부목사)로서, 필자와 함께 2015년 5월 17일 로레인 파크 박여선의 묘지를 방문하고, 그날의 회한을 글로써 표현했다.

37.  박정희, ≪닥터 로제타 홀≫, 다산북스, 2015, 416쪽.

38.  특별히 위생학을 가르쳤던 이유는, 그 당시 많은 질병의 원인이, 가정에서의 잘못된 위생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부인들을 교육시켜, 전국 각지로 보내, 각 가정을 계몽시키기 위함이었다.

39. 『Maryland Medical Journal』, 1907, 388쪽.

40.  Sherwood Hall, ≪With Stethoscope in Asia : Korea≫, MCL Associates, 1978, 223쪽.

41.  『Gospel in All Lands』, June, 1899,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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