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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의 토대 위에 세운 세상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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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4월 20일 (금) 03:02:08 [조회수 : 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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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젊은이들이 벌이는 뜨거운 열정의 축제를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아레테(arete)였습니다. ‘탁월함‘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지만 그 쓰임새가 다양합니다. 운동선수의 아레테도 있고, 요리사의 아레테도 있고, 재단사의 아레테도 있습니다. 어떤 일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달인‘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연스러울 뿐더러 매우 쉽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억지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포정해우(庖丁解牛)란 말을 아시는지요? ‘포정이 소를 해체하다‘라는 뜻일 겁니다. 포정은 장자의 양생주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어느 날 그는 위나라 혜왕 앞에서 소 한 마리를 잡습니다. 포정이 칼을 다루는 솜씨는 신묘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리듬을 탄 칼질 소리를 듣던 혜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탄사를 발합니다. “아! 참으로 신기로다!” 그때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혜왕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기술이 극한에 이르면 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제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그 결과 감각이 멈추고 자연의 섭리에 따를 뿐이라고 말합니다. 소의 몸에 자연스레 나 있는 틈을 따라 칼질을 하므로 뼈와 근육 그리고 살까지 흐트러짐 없이 발라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정말 고단한 수련 과정이 필요했을 겁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몸을 단련해야 하는 운동선수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발레리나의 발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나무에 생긴 옹이처럼 구부러지고 굳은살이 박힌 그 발을 볼 때마다, 그들이 견뎌야 했던 아픔의 시간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마라토너였던 황영조 씨는 자신의 선수 시절을 돌아보며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도로를 질주하다 보면 마주 달려오는 차 밑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알기에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달을 딸 가능성이 없지만 최선을 다한 후 경기장을 떠나는 이들을 보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집니다. 경기의 룰이 공정하게 적용된다면 선수들은 패배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공정함’이라는 단어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물론 이전부터도 이런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는 문제로 인해 뜨거운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단일팀 구성이 올림픽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선수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에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대의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것을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온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의 그런 반응에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 아이스하키 팀의 올림픽 출전이 자기들의 순수한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북한의 핵 실험으로 인해 조성된 긴장이 언제 전쟁으로 비화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모처럼 찾아온 대화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의 반응을 철딱서니 없는 행위로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이런 반응에 조금 놀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를 뿐입니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이 서 있는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왔다는 사실을 이번 일을 계기로 인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서 상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칫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입장의 동일함은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자리로 내려갈 때 비로소 작동됩니다.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약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공정한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분노하는 겁니다. 그렇지요? 

지난 1월 29일에 발표된 공공기관 채용 비리 결과를 보면 그런 분노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1190개 공공 기관을 전수 조사한 결과 946개 기관에서 문제가 발견되었고, 4788건의 비리가 적발되었다고 합니다. 은행의 경우 소위 말하는 sky 대학 출신 합격생을 늘리기 위해 면접 과정에서 점수를 올려주고, 다른 대학 출신 학생들의 점수는 일부러 깎았다고 하더군요. 일류대 카르텔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교수들 가운데는 자기 연구 논문에 미성년자 자녀를 공저자로 등록한 사례도 다수 발견되었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게임의 룰을 어기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젊은이들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분노에 집중할 때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관용의 마음이 스러진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경쟁하려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힘 있는 이들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에 무관심해지고, 공동체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차가운 공정함에 대한 집착은 결국 차가운 세상을 낳게 마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기초가 정의와 공의라고 말합니다. 정의는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것(juridical justice)과 관련됩니다. 법은 인간의 욕망의 각축장인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맺은 사회적 협의입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 동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도 이런 현실이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큰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능력자로 인정받고, 빵 한 조각 훔친 이들이 감옥에 갇히는 세상입니다.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말했던 트라시마코스의 진술이 여전히 통용되는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성경에서 공의는 사법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빚을 삭쳐주는 해인 면제년이 다가온다고 하여 궁핍에 처한 이들을 냉대하거나 꾸어주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신15:11). 희년이 되면 빚에 몰려 땅을 남에게 넘긴 이들은 자기가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고, 종으로 팔렸던 이들도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10).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한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요구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하나님의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지만 세상은 공평함이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병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외모가 뛰어나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로 인해 차별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차이를 차별로 바꾸어온 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차이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차별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늘 짓눌린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어느 분은 율법의 특색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세상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놓는 간극을 가급적이면 좁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정함은 성경이 말하는 공의의 정신과는 다소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의는 경쟁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연민에 근거합니다. 내 코가 석 자나 빠졌는데 어떻게 남을 배려하라는 말이냐고 불퉁거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심정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내가 어쩌다 넘어져도 공동체가 내 삶을 떠받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것도 능력이라고 말했던 어느 철 없는 젊은이의 말에 분개하면서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정녕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땅의 논리에 따라 우리 삶을 구성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하늘 뜻에 따라 마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어렵지만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 잘 아시지요? 어느 날 창기 두 사람이 왕 앞에 나와 자기들의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청합니다. 한 여자가 고발하듯 말합니다. 한집에 살던 두 여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저‘ 여자가 자기 아들 위에 누워 아들이 죽자, 슬그머니 자기 아들하고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발을 당한 여인 역시 자기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은 두 여인의 진술이 팽팽하게 엇갈리자 칼을 가져오게 한 후에 이렇게 명령합니다.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왕상3:25)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청합니다.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다른 여자도 입을 열어 말합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이쯤 되면 누가 진짜 엄마인지 판단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김민웅 목사는 이 이야기를 해설하면서 솔로몬의 명령은 “상대를 칼 위에 세워 그 속마음을 시험하려 했던 것”(김민웅, <동화독법>, 이봄, 2012년 7월6일, 104쪽)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탁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천 번 드렸다는 말이 아니라, 일천 마리의 제물을 바쳤다는 말일 겁니다.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은 나라를 다스릴 지혜를 구합니다. 사실 솔로몬이 구한 것을 지혜라는 말로 요약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듣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크게 와 닿습니다. 잘 듣는다는 말은 외이도를 따라 들어온 외부의 소리가 고막에 잘 전달된다는 뜻만이 아닐 것입니다. 누가 잘 듣는 사람입니까? 발화된 말을 잘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숨겨진 말까지 듣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듣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거기서 지혜가 발생합니다. 예전에는 솔로몬의 평결이 너무 차갑고 반생명적인 것 같아 저항감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내린 판결의 탁월함은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구별해낸 것이 아닙니다. 다시금 김민웅 목사의 견해를 빌어봅니다. “솔로몬의 초점은 이 아이가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이 자신을 위해 좋은지에 맞춰진 겁니다.“(앞의 책, 106쪽) 중요한 것은 소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온전히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반목과 대립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연약한 이들’을 가치 판단의 중심에 놓는 정치가 과연 가능할까요? 경제가 우리 삶을 과잉 대표하는 사회에서 정치의 역할이 있다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적 불평등과 인위적 불평등을 조절하는 것일 겁니다. 과연 솔로몬의 통치가 생명 중심의 통치였느냐고 묻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성전을 건축하고 궁궐을 짓는 일에 너무 많은 물자와 사람을 동원했습니다. 성전 건축자라는 영예로운 호칭 뒤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솔로몬 사후에 남북 분단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생명보다 앞서는 가치는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풍부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있다면 바로 이런 가치를 우리 사회에 끌어들이는 일이 아닐까요?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아모스는 종교적인 행위는 넘치지만, 동시에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에 대한 학대와 불의가 넘치는 세태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추상같은 정의가 앞서 나가되 따뜻한 공의가 함께 행진하는 세상의 꿈이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그런 목표를 향한 순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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