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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바보의 성령 충만 행진— 제주도 출사, 은혜의 여행이 되다 —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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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4월 15일 (일) 20:49:26
최종편집 : 2018년 04월 20일 (금) 02:57:57 [조회수 : 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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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굿판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요란해야 성령 충만인가

 

성령 충만이라 하면 대개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떠올릴 것이다. 그때는 정말 대단했다. 120문도로 생각되는 ‘그들’이 다 같이 모인 곳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리지는 것들이 그 사람들 저마다의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자 그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사방으로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모여 와서 머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너무도 신기하여 놀라 소동이 벌어졌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술에 취한 거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그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지금은 오전 11시로 기도 하는 시간인데 당신들의 생각처럼 술에 취했을 리가 있겠소. 하나님께서 선지라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성령에 의한 것이요’라 설명하였다. (행 2장 참조)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성령 충만이라 하면 이처럼 요란스러운 장면을 연상하게 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고전12:8-10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은사들을 이와 연관시켜 생각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 고전12:8-10에 소개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 등인데, 사람들은 흔히 앞부분의 더 중요한 ‘말씀’이라든가 ‘믿음’은 관심 밖의 일로 치부하고, 뒷부분의 병 고치는 은사라든가 방언 같은 것에 꽂혀 성령 충만을 무슨 요란한 굿판처럼 생각하려 들기도 한다.

그런데 고전 12장이 강조하여 말하려 한 것은 이 같은 은사 자체가 아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만을 소중한 것으로 여긴 나머지 다른 사람을 무시함으로 야기되는 ‘분쟁’(25)을 없애고 연합하여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몸에 속한 많은 지체가 다 유용하듯이 은사도 그러하니 네 것은 쓸 데 없다 하지 말고 내가 받은 것처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은사뿐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나 기능도 다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석학의 반열에 든 사람의 능력이나 불학무식한 촌부의 무능이 다르지 않다. 어느 쪽이 더 신실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앞에 열거한 성령의 은사들은 ‘말씀’과 ‘믿음’을 빼면 그것을 받았다 해서 자신의 신앙에 꼭 유익한 것만은 아니다. 치유의 은사로 병을 고쳐 주고 대가를 받았다면 은혜가 아니라 재앙이 된다.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전 12장은 그런 것을 경계하고 있다.

고전 12장의 마지막 절인 31절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하고는 ‘사랑 장’이라고 하는 13장을 제시하는데, 그 3절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강조한다.

 

 

기술이 없어도 카메라의 셔터만 누르면 시진은 찍힌다

 

은사는 좋은 것이로되, 그것을 사랑으로 쓰지 않으면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이 충만하면 반드시 앞에 열거한 것과 같은 은사들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령 충만으로 받은 것들은 무수히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사랑이다. 성령 충만하다 하면서 사랑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필자는 이 자리를 통해 최근에 자신과 함께 해 주신 성령님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지난 4월 26일부터 5월 9일까지 2주 동안 제주도에 출사 여행을 다녀왔다. 5년 전에도 가서 꼭 한 달 동안 사진을 찍고 왔으니 두 번째의 제주도 출사 여행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진작가라도 된 것 같은데, 아니다. 필자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무거워진 머리를 식히기 위한, 그야말로 단순한 취미를 위한 것이었다. 시작하고 십 수 년이 됐으나 아직까지 카메라의 기능도 아는 게 별로 없고, 사진에 대한 이론도 문외한에 가깝다.

조금만 공부를 하면 해결될 문제들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골치 아프게 공부를 하지 않아도 셔터만 누르면 사진이 찍히니 그것으로 된 거라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활자를 주워 읽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오다 보니 취미에까지 그러기가 싫은 것이다.

그래도 일단 카메라를 메고 나가면 중견작가 못지않은 열정으로 피사체에 빠져 셔터를 눌러 댄다. 그러다 보면 시간 가는 것도 잊고 배고픈 것까지 모르게 된다. 쌓였던 스트레스는 한 순간에 날아나고, 머리가 개운해진다. 공부를 한다고 무슨 대단한 걸작을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으로 좋다는 생각이다.

5년 전에는 일감을 잔뜩 싸 짊어지고 갔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일을 하다가 머리가 무거워지면 카메라를 들고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진을 찍다 보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스트레스만 더해 갔다. 그래서 자신에게 한 달 동안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 평생을 숨 가쁘게 살아 온 자신에게 단 한 번 준 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주신 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마음의 부담이라는 부담을 다 떨쳐 버리고 한 달 내내 사진만 찍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카메라만 가지고 갔다. 지난번에 놓친 곳을 찾아 찍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착한 26일은 쉬고 다음날인 27일, 지난번에 찍은 것에 아쉬움이 남아 성산 일출봉이 바라다 보이는 광치기 해변을 찾았다. 물이끼가 파랗게 덮인 너럭바위는 역시 장관이었다. 하지만 밀물 때가 되면 그 아름다운 바위들이 수면 아래로 숨게 되니 물때를 맞춰 가야 한다.

그 익일 28일은 용눈이 오름을 찾았다. 5년 전에 왔을 때 제일 아쉬웠던 게 ‘오름’ 사진을 찍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어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도해 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행운이었다. 너무너무 멋진 오름이었다. 용눈이 오름을 보지 않고는 제주도 여행을 했다고 하지 말라 말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29일은 오후 늦게 애월읍 하가리 돌담마을을 찾았다. 가끔 같이 출사를 하는 지인이 돌담이라든가 돌사람(石人) 같은 돌 사진의 대가여서 그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필자도 그런 사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담이 참 좋았다. 몇 백 년은 족히 됨직한 느티나무를 좌우로 하여 이어진 담은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 족했다. 어느 것이 나무고 어느 것이 돌인지 구별이 잘 안될 만큼 둘이 한 살처럼 느껴졌다. 구름사이로 간간히 비치는 햇살을 따라 찍다 보니 많이는 찍을 수가 없었다.

남은 아쉬움이 커 다음날은 아예 아침 일찍 서귀포 강정마을에 있는 숙소를 출발했다. 도착해 보니 그 돌담 한쪽을 보수하는 공사를 하고, 그 담 안에서도 중장비로 옛집을 부수고 터를 고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축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담에 그늘이 져 있어 몇 컷만 잠깐 찍고 해가 비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데를 돌아다니며 찍었다. 찍을 것들이 많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에게 인격이 살해당하다

 

돌아와 보니 마침 해가 알맞은 각도로 비춰 주고 있었다. 담이 끝나는 부분에 베어 낸지 오래된 고목의 등걸이 좋아 보여 그것부터 찍어 볼 요량으로 삼각대를 접을 수 있는 데까지 접어 낮춘 뒤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화각을 맞추어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뭐라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얼핏 듣기에도 시비조였다. 영문을 몰라 ‘예?’라 하자, 들은 귀를 씻고 싶을 정도의 욕설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뭐라 대꾸할 사이도 없이 목덜미를 거머쥔 손이 필자를 끌어 일으켰다. 그가 내뱉은 욕설들을 주섬주섬 모아 이해해 보니 왜 작업을 방해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다. 길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한참이니 떨어져 있고, 담 안의 사람들이야 방해니 뭐니 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사진을 찍고 있는 필자를 향해 ‘우리도 한 장 찍어 주세요’하고 농담을 건넬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필자는 그토록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망나니 같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그 순간 필자에게 제주도로 떠나기 이틀 전 밤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날 밤, 몇 해 전부터 괴롭혀 오던 육체의 가시가 극성을 부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신경은 곤두서고 어떻게도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잠이 들 수 있게 해 주시라 기도하다 그것도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마음대로 하옵소서’ 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를 했다는 말이 아니다. ‘뜻대로 하옵소서’라 해야 하는데, 그런 식의 마음이 된 것이다.

그런 사이에 금방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자 성령님의 역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죽의 것이로다”(롬14:8)라는 말씀과 오버랩 되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찬송가 가사가 생각나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 하고는, 그 이유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 해서 라 말한다. 그런데 필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이유라는 것이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알려 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 느긋이 먹자 다짐하고 있는 중이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 되었는데, 죽음보다 심한 심적 고통에 기도 중 미쳐 발광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뒤에 보니 은총이었다. 신앙으로 연단시키기 위한 훈련이었다. 이번의 육체의 가시도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잘못에 대한 채찍인지 지금으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은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만은 하고 있다.

아니 그 가시는 이미 필자를 성령의 역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은총은 벌써 시작된 것이다. 내 자신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사실의 재확인을 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재확인이 있은 뒤 필자에게는 뭔가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은,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뭔가가 믿음의 마음 저변을 다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필자는 그 느낌을 소중한 보물로 안고 제주도에 갔고, 그런 제주에서 그 같은 말도 안 되는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봉변은 봉변이 아니었다. 은총, 은총이었다. 대들어 한 바탕 붙었다면 봉변으로 끝났을 것을 무 대응으로 끝내어 은총이 되었다.

한 바탕 붙었다면 아무런들 필자가 지기야 했겠는가. 보아하니 인부들을 관리하는 사람 같았는데,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질리는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기를 가리켜 싸움의 천재라 했다지만, 필자는 그 정도는 못되어도 지기를 싫어한다는 면에서는 남보다 못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부당한 대우에는 참을성이 없어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며 살아 왔다. 군 생활 때에는 상사에게 대들다가 매도 많이 맞았다. 지기를 싫어 한다는 것은 필자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다.

성경은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라고 말하고 있는데,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필자는 지혜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악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곤 한다.

그는 필자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더욱 기세를 높여 가며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이런 저질스러운 말이 남아 있었던가 싶을 정도의 욕설을 퍼붓더니 결국은 필자의 목덜미까지 거머쥐고 끌어 일으켰다. 다툼이 일어나면 대개는 상대방의 대응에 따라 자기 쪽도 그 강도를 높여 가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필자가 자기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한다고 생각했던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런 사람의 기를 꺾는 방법이야 빤한 일, 이쪽이 더 강수로 나가면 된다.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필자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성령님이 사람을 바보로 만들다

 

그 같은 필자가 그 같은 봉변을 당하고도 입도 뻥긋 못하고 바보짓을 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 아닌가. 남들이 봤다면 부끄러워 고개도 못들 일이다. 아니지, 인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그런데 왠지 그들의 시선은 필자가 아닌 그에게 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러며 ‘저 사람이 왜 저러지?’ 하는 생각들을 했을 것 같다. 그만큼 그는 그래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짓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니 안 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비 맞은 개꼴을 해 가지고 비실비실 그 자리를 떠났으니 바보도 상 바보가 아니고 뭐겠는가. 그런데 정작 필자 자신은 부끄럽다는 생각도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참 잘 했다는 생각이었다. 성령님께서 붙잡아 주신 거라 생각했다. 이로서 새로운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도 그보다 잘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다음날부터는 사진을 찍어도 뭔가 마음 든든한 것이 느껴졌다. 세상이 조금은 달리 보였다. 사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자신이 바보가 되기를 바라 왔다. 그리 되기를 기도해 왔다. 그러나 조금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지 못하여 바보가 되는 일에 실패를 거듭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훌륭하게 성공하여 바보가 된 것이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되어야 하는 바보가 된 것이다.

필자는 2주 동안의 제주도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곳에 나의 소중한 바보를 놓아두고 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행여 놓칠세라 가슴에 꼭 안고 돌아 왔다. 그러나 붙잡는다고 그대로 남아 있을 리도 없는 것이다 보니, 나의 그 소중한 바보가 소멸되는 일 없이 성장해 가도록 해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있다. 그 방법이야 이미 알고 있으니 남은 건 실행인데, 기도만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붙잡아 주실 것이고, 그러면 나의 바보도 성장해 갈 것이 분명할 것이다.

필자는 애월 하가리 돌담마을을 떠나 서귀포로 돌아가는 길에 그(분)에게 감사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감사하며 그분에게 복을 주시라 기도하고 있다. 그분으로 인해 그 큰 은총을 입었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고 복을 빌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우월감 같은 것도 없고, 그가 예수를 믿게 해 주시라는 것도 아니다. 그분이 구원을 받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런 기도까지 하면 너무 계산적인 것 같아 그건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그와 그 가정이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시라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

필자는 자신이 바보가 되게 한 것은 성령님이라 확신하고 있다. 환언하면 대단히 송구스런 말이지만 성령 충만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가 첫걸음을 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두 번째 걸음을 떼려다 비틀거리며 넘어질 수도 있을 것인데, 그러면 지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더도 바라지 않는다. 첫 한 걸음이 두 걸음이 되고, 두 걸음이 세 걸음이 되어 아장아장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만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시점에서 불러 주셨으면 좋겠다. 그분께서 당신의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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