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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주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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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4월 15일 (일) 19:24:29 [조회수 : 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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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주님처럼
요일3:1-7
(2018/04/15, 부활절 제3주)

음성으로 듣기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이맘때가 되면 피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는 분들, 특히 세월호 유가족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로 변하고 있는 시리아에도 주님의 돌보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 봄에 사랑 노래, 생명의 노래를 맘껏 부르고 싶지만 현실은 우리에게 그런 한가로운 평화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옛날에 즐겨 부르던 복음성가가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노래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니/우리가 주를 믿을 때에 주의 영으로 하나돼/하날세 하날세 하날세 하날세”. 지금 여기 계신 주님,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연결할 때 우리는 분열의 세상을 넘어설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꾸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라는 권고로 시작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본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이 분주하다는 핑계로, 삶이 고달프다는 핑계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헤아려보는 일에 게을러졌습니다. 물론 지금 흑암과 시련의 골짜기를 거닐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내면의 힘이 다 고갈되어 버린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큰 은혜는 또 없을 겁니다. 이렇게 허물 많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죄로 얼룩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니요? 정직하게 돌아보면 언감생심 꿈조차 꿀 수 없는 호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계신 것 같아 어렵기만 하던 하나님이 실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가장 깊이 개입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일깨워주셨습니다. 일본의 문학가 엔도 슈사쿠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주 친밀한 분으로 그릴 수 있었던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나사렛의 조그만 거리의 가난함과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알고 있었다. 매일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한 땀 냄새도 알고 있었다. 생활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의 약함도 터득하고 있었다. 병자나 불구자들의 탄식도 보고 있었다. 사제들이나 율법학자가 아닌 이들 서민들이 구하는 신은 노여움, 탄식, 벌하는 신만이 아니라고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엔도 슈사꾸, <예수의 생애>, 김광림 옮김, 홍성사, 1993년 9월 15일, p.24)

서민들의 고단한 삶과 연약한 이들의 탄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엄격하고 격렬하고 가차없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경험한 하나님 역시 돌아오는 탕자를 품에 안는 자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과 같이 될 것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초등학교 학생이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에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무지 사랑받을 만한 것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도 성장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누워 있던 아이가 엎드리고, 또 자리에 앉고, 일어서고, 첫 발걸음을 떼고, 한 두 마디 말을 할 때 어른들은 누구나 다 이적에나 접한 듯 놀라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이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셨고, 낙심될 때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는 데도 여전히 자기 욕망 중심을 맴돌 뿐, 타자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도 도통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르심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성장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5:48)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6:36)

우리는 어쩌면 ‘不肖 신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닮지 않은 신자 말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주님을 닮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혹은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예수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합니다. “괴로웠든 사나이,/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十字架가 許諾된다면//목아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어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옛날 표기를 그대로 인용). 시인은 괴로움과 행복이라는 부조화스러운 두 단어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기대합니다. 숙명여대의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가 ‘처럼’이라는 조사를 별도의 행으로 처리한 것에 주목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처럼 우리도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일 겁니다. ‘같이’ 혹은 ‘처럼’은 동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사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예수님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분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들을 통해 조금씩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안다”는 구절을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대할 때 그리스도는 조금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주님의 화육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소명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기
그런 소망을 품은 사람은 늘 자기를 깨끗하게 닦아야 합니다. 저는 죄인이라는 말을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이라고 이해합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의 마지막은 멸망이라면서 그들의 삶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빌3:19)

죄를 짓는 사람은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죄의 실재와 성질, 그리고 그 결과를 잘 알면서도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짓다’라는 동사에는 “모양이 나타나도록 만들다“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던 죄가 모양을 갖추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 죄의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사람됨은 그 욕망을 다스리는 데 있습니다. 죄가 모양을 갖추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죄의 근원이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약1:14-15) 욕심이 우리 삶을 이끌어가도록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욕심이 우리 속에 잉태되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됩니다. 욕심을 물리치려면 자족하는 마음부터 배워야 합니다. 노자는 지족불욕(知足不辱)이요 지지불태(知止不殆)라 말했습니다. 족한 줄 알면 욕된 일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입니다. 쉽지 않기에 자꾸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세상의 인력이 우리를 잡아 끌지 못하도록 하려면 하나님의 은총에 맛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속에 가득 차 있는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채울 수 있도록 비우십시오. 그대, 선으로 채워지도록 악을 쏟아 버리십시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꿀을 채워 주려 하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대가 식초로 가득 차 있다면 꿀은 어디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릇이 담고 있는 것을 쏟아 내야 합니다. 그릇 자체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고생하며 두들겨서 그릇을 이 선물에 알맞게 만들어야 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강해>, 최익철 옮김/이연학·최원오 해제·역주, 분도출판사, 2012년 9월, p.207)

그러나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지 않는 게 우리 욕심이고 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애기 위해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죄를 지적하고 꾸짖는 분이 아니라 죄를 없애는 분이십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스스로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 없으신 주님에 잇대어 있을 때 우리는 죄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요15:4)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사람을 순결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정말로 죄 짓는 것을 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정결하게 되기를 열망할 때 주님은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사회적 성화
주님 안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한 사람들은 이제 공적인 삶에서도 빛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요일3:7). 우리는 ‘홀로’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책임을 느낄 때 발현됩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죄와 모순을 당신의 온 몸으로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까지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사야가 들려주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사53:4a)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53:5)

주님이 다 감당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감사하다고 말만 하면 그만인가요? 아닙니다. 이제 우리도 조금씩 이기주의의 감옥에서 벗어나 조금씩 조금씩 세상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세상의 불의에 맞서야 합니다. 물론 그러기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방향을 그렇게 돌려야 합니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존재가 되기 위한 열망을 품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을 닮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이제라도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열망을 품을 때 주님의 도우심이 주어질 것입니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처럼 우리 삶에도 생명과 평화의 열매가 많이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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