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비가 내리는 봄이 계속되고 있다. 처음 비가 오기 시작한 날, 그날 비는 한밤중에 시작되었고 무척이나 강했다. 깊이 든 잠을 깨워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들 만큼 비는 그렇게 강하게 내렸다. 꿈결에 들리는 빗소리에 지레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봄꽃 걱정이 들었다. 아, 이제 막 예쁘게 피기 시작했는데, 내일이면 우수수 떨어져버렸겠구나..

그리고 밝은 아침. 의례 떨어졌을 꽃잎을 아쉬워하며 밖으로 나가 나무들을 올려다 본 순간 놀라운 장면이 내 앞에 펼쳐졌다. 꽃잎은 하나도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이상하고 신비롭게 단단히 가지에 붙어있는 작은 꽃잎들을 보며 그 아침 작은 깨달음에 도달했다. 떨어뜨리는 것은 시련이 아니라 때라는 지혜에.

꽃잎은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때가 이르기까지 꽃들은 힘차고 강하게 생명력을 제 안에 품고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아무리 강한 바람이라도, 아무리 강한 빗줄기라도 그 생명력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질 때가 이르리니 그때 꽃잎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도, 그 어떤 무게가 제 위에 더해지지 않더라도, 그만 속절없이 스스르 떨어져 내릴 것이다. 꽃잎은 결코 때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삶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무너지게 하는 것은 흔한 착각처럼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나 역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너지게 하는 것은 그저 때일 뿐이고, 때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때가 되면, 때가 되어야, 무너지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묘하게 절망적이면서도 묘하게 희망적인 전망이다. 그 어떤 노력에도 때가 되면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는 절망적일 수 있겠으나, 때가 되기 전에는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때가 오기 전까지는 나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압박에도, 그 어떤 시련에도.

역사에 있어서도 이 믿음은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나 역설적으로 희망이다.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그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아름다움을 품은 꽃잎들이 때가 되면 하룻밤 비에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마치 저 옛날 여리고의 성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예고 없이. 바위를 향해 던져진 계란은 단지 바위를 더럽히는 데 그치지 않고 때가 되면 그 바위를 부술 것이다.

신앙은 때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고백한다. 나의 때가, 역사의 때가, 세상만사의 때가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다고 고백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런 믿음이 바로 신앙이다. 예수께서는 늘 때를 의식하며 사셨다. 때가 이르지 않으면 메시아조차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음을 그분은 늘 가슴에 새기고 계셨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 그 말로 그분은 늘 자신의 삶을 가늠하셨다. 우리 또한 이 말로 우리의 삶을 가늠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전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