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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사태, 소설로 나왔다신기식 목사의 자전적 다큐소설 「황금저울」 출판콘서트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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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2월 20일 (화) 23:23:43
최종편집 : 2018년 02월 23일 (금) 22:02:07 [조회수 : 1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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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식 목사

2008년 이후 감독회장선거 사태의 긴 터널을 지나오며 감리회에 ‘법대로 안하면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 신기식 목사가 자신의 자전적 다큐소설 「황금저울」을 출간하고 20일 오후 감신대에서 출판콘서트를 열었다.

400쪽이 넘도록 제법 두꺼운 「황금저울」은 경의선, 불탄 십자가, 불타는 강, 적자와 서자, 법통과 밥통, 합의하면 죽는다, 보복재판, 여자의 후손 등 여덟 가지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전쟁둥이로 태어난 신기식 목사의 인생 궤적과 목회 이야기, 지역시민운동 이야기 등 보통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로 채운 뒤 본격적으로 감리회 사태의 발발과 진행과정,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감리회 내 굵직한 사건까지 ‘홍목사’를 등장시켜 밀도 있게 전개한다. 물론 홍목사는 신기식 목사 자신이다.

감독회장선거의 불법성을 세 차례나 고발하여 사법 판결로 모두 멈춰 세운 소송 경험이 이 소설을 쓰게 한 자양분이다. 소송의 원고였으므로 그가 겪은 10년간의, 어쩌면 아직도 진행형인 감리회선거사태의 기록을 세세하게 담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신기식 목사는 「황금저울」을 “모순된 현실을 몸서리치게 겪은 목사가 종교개혁 500년을 맞으며 미래 교회에 헌정하는 다큐 소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풍부한 사료와 분석을 통해 절망에서 울려퍼지는 희망 전주곡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집필됐다고 덧붙였다. 교권이 그를 직무정지 시켜 소설을 쓰게 시간을 벌어준 측면도 있다.

다만 신기식 목사의 시각에서 저술된 만큼 독자들 중 어떤 이는 곤혹스러울 수 있다. 감리회사태는 상대가 있었던 사건이었고 등장인물 대부분이 가명으로 처리됐다고 해도 짐작이 가게 쓰였기 때문이다. 직책이나 위원회, 기관 등은 실명으로 등장한다.

황금저울」(2018. 나우북스) 출판콘서트에 신기식 목사의 가족과 교우들, 친구와 지인, 동료목회자 등 100여명이 찾아와 출간을 축하하고 덕담을 나눴다. 또 콘서트에 참석한이 중에서 한 사람을 선정해 즉석에서 「황금저울」 헌정식을 갖기도 했다.

「황금저울」은 수도권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지방회, 연회, 선교대회, 임원대회 등지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 초청사 : 유재덕(신도제일교회 원로목사)
   
▲ 진행 : 임행신 팀장
   
▲ 정명기 목사가 「황금저울」을 헌정받았다.
   
▲ 신생교회 교우들의 축가

 

   
▲ 출판콘서트 진행 ; 이상윤 목사

 

   
 

 

   
   
▲ 북콘서트에 참석해 축사하는 동료 목회자들과 지인

 

   
▲ 마침기도 : 염정식 장로

 

   
▲ 저자 사인

 

 

 

 

「황금저울」 발간에 부쳐

이상윤 목사(감리교미래정책연구소 소장)

 

신기식 목사가 감리교 선거사태 다큐멘터리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10년 간 감리교 사태의 한복판에서 투쟁해 온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그가 두문불출한 지 2년 만에 탈고를 하고 제목을「황금저울」로 정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던 차에 ‘독자를 위한 발문(跋文)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초본을 수차례 읽었다. 그리고 예순 중반 동갑내기의 이야기를 거들고 싶었다.

 

감리교 지형과 감독회장 선거사태

 

한국 감리교회는 ① 초기 민족교회 ② 30년대의 조선감리회 ③ 해방 후 정교유착 패러다임과 70년~90년대 교회성장 시기를 지나 ④ 2008년도의 감독회장 선거사태로 인하여 새 패러다임을 열어가는 출발점에 서 있다. 앞으로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에서 천명한 ‘진정한 교회’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외향적으로는 교세가 늘어났고 대형교회 중심의 교회개척과 해외선교사업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기록하였다. 13개 연회본부 연간 재정 총액은 130억을 웃돌고 감리회 본부 연간 예산은 430억원 이상이다. 본부 행정비만 연간 70억이 넘는다. 반면에 정치인맥을 타고 채용된 총무들은 전문영역을 개발하고 대안을 마련하기는커녕 교권 유지에 안주할 뿐이다. ‘위대한 감리교회’,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 등 빛 좋은 구호가 내걸렸으나 2008년 선거사태가 쓰나미처럼 몰려와 이런 희망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교권 다툼과 수많은 법률소송에 막대한 재원을 허비한 댓가로 비로소 40년간 쌓여 온 병폐, 즉 잃어버린 것, 비틀진 것, 벗어난 것, 기울어진 것, 개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게 되었다.

현재의 감리교회 정체성은 의회주의에 기초한 감독제가 아니다. 연대주의가 상실되어 개체교회 중심의 중도보수성향이 강하다. 미국식의 적극적 사고방식, 성공철학에 젖어 안정 기조를 취하며 중산층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신앙색체는 전통적인 이성적 신앙에서 멀어지고 복음주의 오순절은사주의로 변했다. 교회정치는 패거리 정치로 전락하였다. 그래도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면서도 다원 감독제와 지방 분권화를 통하여 교회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신학노선은 어중간하게 되었다. 과거 이성적인 알미니안주의가 깊은 영향을 끼친 사회복음주의가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엘리트 유학파들은 토착신학을 전개하고 학문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1992년도에 감리교신학대학교 변선환, 홍정수 교수가 대형교회와 교리수호대책위원회에 의한 이단(異端)시비로 기소되어 종교재판대에 세워져 출교당한 후부터 신학자들은 학문적 자유와 성찰보다는 출세지향주의에 빠졌다. 교회현장과 유리되면서 교권에 줄을 대는 궁중신학과 교회자본에 기대는 용역학문에 만족하였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으로 단련된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은 해외원조가 끊어지면서 주류에서 밀려났다. 이것이 감리교 신학의 현실이다.

1980년도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와 민주화 운동으로 사회전반에 격렬한 변화가 몰려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성장신화를 숭배하며 시대현실에 눈감고 신(神)의 영역을 고수하였다. 그 틈에서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군웅할거 하듯 세력화하였다. 이들은 유명세와 막강한 금권을 가지고 교권 수장 반열에 올랐다. 교권은 승자독식형태가 되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영적인 능력이 소진되고 대중과 유리되면서 대형교회와 동거관계로 명맥을 유지하여 갔다. 대형교회 리더십은 의회주의 기능을 점차 약화시키고 1인 체제 교권이 되었다. 이것은 물질이 영혼을 지배해 나가는 자연스러운 경향이었다. 대형교회 측은 집권에 성공하자 측근정치로 대체하여 돈과 인사권으로 정치흥정을 시작하였다. 상생과 타협을 금도(襟度)로 삼았던 감독정치는 내관정치로 타락하였다. 의회주의는 소멸되고 광포한 감독 교권만 존재하였다. 이것이 감리교 감독정치의 내밀한 구조였다.

감독정치는 점점 음흉스럽게 변질되어 갔다. 본부 관료주의가 감독회장을 떠받치는 힘이었다. 본부는 선교국 중심에서 조직과 돈 줄을 거머쥔 행정기획실과 재단사무국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2003년도에 정통 기득권은 대형교회 신흥세력에 식상한 나머지 탁월한 지도력 확립을 구실로 27년 만에 4년제 감독회장 제도를 부활시키면서 교권보수주의로 회귀하였다. 첫 번째 4년제 전임 감독회장에 취임한 신경하 목사는 21세기 희망 프로젝트를 가지고 4년 동안 재판법, 선거법, 신은급법, 임시조치법 등을 개정했으나 개혁실험은 실패하였다. 진보진영이 교권의 그늘로 기어들면서 교권을 두고 보수와 진보로 이등분되는 권력지형이 생겨났다. 인격적인 관계가 위력을 잃고 진영논리로 갈리는 맷돌짝 구조가 되고 말았다. 지성적인 대화나 타협은 힘을 잃고 교권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감리교 본부는 정책구성이나 공동체의 선(善)보다는 차기 교권에 대한 눈치와 과잉충성으로 나아갔다.

감독교회 정치가 점점 장로세력 중심으로 변하였다. 연회, 지방회는 선거 철새들이 기승을 부렸다. 커다란 먹이사슬 구조로 얽혀 있었다. 장로교회보다는 단일 교파라는 자만은 자기기만이었다. 승자독식 구조가 극성을 부리면서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감리교는 몇몇 대형교회의 그늘에 안주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교권주의와 진보진영의 득세를 경계하였다. 결국은 선거 대결구도로 과열되어 갔고 감독회장 선거사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2008년도에 소외세력을 대변하는 대형교회 측 KD가 4년제 감독회장 후보로 나선 결과 1위로 득표하자 그의 위력에 눌린 기득권은 열세를 만회하고자 5년 전에 선거법에 심어 놓은 피선거권 제한규정을 가지고 사회법정에 나가서 승부수를 두었다. 서자(庶子)들에게는 절대로 교권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적자(嫡子)의식의 발로였다. 이에 KD측은 막강한 힘으로 대치하였다. 1위, 2위가 서로 총회에서 감독회장에 취임하려는 대치 속에 총회가 박살이 났다. 감독회장이 오락가락 하는 사이 큰 저지레를 친 것이다. 기득권과 대형교회 체제의 정면대결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어 내란수준의 대혼란으로 이어졌다.

‘감리교 선거사태’가 시작되었다. 제도는 선거사태를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교권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하염없이 표류하였다. 모두가 하나님의 황금저울에 달리게 될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 감독회장 선거판은 치열한 소송 전쟁으로 비화되면서 감리교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총 106번의 선거재판이 있었다. 이런 중에도 기회주의자들은 틈새만 보이면 손가락질과 젓가락질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대다수는 사법정의를 갈망하고 있었다.

신목사는 서로가 감독회장 당선자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선거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총회 선거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사회법정에서 호소하면서 사법 정의를 추구하는 패러다임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었다. 그는 두 세력 중간에 끼어서 계속된 회유와 협박,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을 오히려 전략적으로 활용하였다. KD세력 위세에 눌린 기득권 나팔수들은 초초한 나머지 대형교회 측에게 차라리 탈퇴하여 독립교단을 만들어 나가라고 떠들어 댔다. 대형교회 측에서 독립교단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신목사가 주도하는 소송 정국에서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가 두 차례 조정이 결렬되자 ‘이제 두 분은 불타는 강을 건너게 된다’고 한 말은 감리교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감리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타는 강’을 건너는 형국이 되었다. 학연간의 감정대립이 극에 달하고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었다. 욕망과 불신이 폭발되었다. 악성 루머와 비생산적인 감정풀이가 난무하여 감리교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모두가 욕망의 불길에 화상을 입으면서도 어떤 결과에도 승복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목사가 손에 든 법원의 판결문은 정국 전환의 기폭제가 되었다. 감독회장 직위에 오른 4명이 선거무효 판결 선고로 두 달 혹은 여섯 달 만에 물러났다. 권력의 공백에서 기회적으로 갑질하던 3명의 감독회장 직무대행들도 사법판결로 물러났다. 감독회장 즉위식을 거행했던 제28회 총회도 사회법정에서 무효 선고를 받았다. 감리교 역사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제4회 총회에 이어 제28회 총회가 단절되었다. 이와같이 「황금저울」은 역사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되었다.

 

「황금저울」의 구성

 

신목사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황금저울」을 쓰면서 문득 소년시절 뛰놀았던 문산 당동리 언덕으로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그러다가 여러 번 윤문하고 교정을 하던 중, 서초동 법정을 오가면서 눈여겨본 정의의 여신 디카(Dike)에서 문득 영국의 대문호 ‘밀턴’의 실낙원 제4부에 등장하는 ‘황금저울’을 연상하였다. 디카의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고, 오른팔에는 수평저울이 있고, 왼팔에는 칼이 들려져 있다. 이것은 법의 심판이 사사롭지 않아야 하고, 칼날처럼 준엄해야 하며. 공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황금저울」은 각고(刻苦)한 산물이었다. 여기에는 8가지 함축적인 언어, 즉 ‘경의선, 불탄 십자가, 불타는 강, 적자와 서자, 법통과 밥통, 합의하면 죽는다, 보복 재판, 여자의 후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경의선’에서는 신학순례, 첫사랑과의 애달픈 이별, 어머니와 옛 교회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소박한 인생여정을 그렸다. ‘불탄 십자가’는 시련에 순응하며 쓰임받은 목사의 면모를, ‘불타는 강’에서는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정신을 드러냈다. ‘적자와 서자’에서는 파벌정치라는 원죄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대담한 필체로 교권을 해부(解剖)하였다. ‘법통과 밥통’은 법통을 가장하여 교인들을 기만하는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단죄를, ‘합의하면 죽는다’에서는 교활과 배신으로 더렵혀진 교권에 대한 고발을, ‘보복재판’에서는 망나니 같은 정치재판의 실체를, 그리고 ‘여자의 후손’에서는 사람에 대한 희망과 구원에 대한 강한 믿음을 연상케 한다.

이 소설 분량의 절반은 10년간 교회가 사회법정에서 심판받는 이야기로 채웠다. 법정에서는 모든 인생사가 드러난다. 때로는 거짓으로 출세해 보려는 모습도 드러난다. 독자들에게는 다소 인내를 요구하는 내용이지만 성역 안에서 일어나는 교권의 민낯을 나름대로 사람 사는 이야기로 묘사하면서 희망 패러다임을 여는 전주곡(前奏曲)이 되었다.

주인공 시골뜨기 소년 ‘기수’는 쉰 살 중반 목사가 되어서도 ‘희망 달리기’를 구상하여 열이틀 동안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연속 주자로 나설 정도로 무모한 면이 있다. 기수는 일평생 변방으로 몰려 살았던 어머니와 함께 호흡하며 살았다. 언제나 변두리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교권 다툼의 불똥이 변두리 교회에 까지 옮겨와 15년 동안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부정과 횡포를 일삼는 교권의 실체를 몸으로 뼈저리게 겪었다. 설상가상 교회 화재로 광야로 내몰리고 주변의 냉대 속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따듯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았다. 그러면서 종종 이런 고백을 하였다. “모세가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민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그는 늘 ‘목사로서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자문에 응답하며 살았다. 모처럼 20일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다가 화재 후 땅을 찾고 교회건축을 하고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안주하려고 할 때 감독회장 선거사태가 발생하였다. 기수는 오로지 교회를 돌보는 심정으로 무지와 횡포, 탐욕과 공모, 배신과 좌절로 점철된 상황과 정면으로 맞섰다. 수 십 차례의 소송은 감리회의 꼼수 정치를 뒤엎으며 사법정의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었다.

「황금저울」에는 예언자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평범한 한 목사가 불의를 보고 몸을 일으키고 어떻게 자기희생을 감내했는지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득권층의 부정 부패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벙어리 개가 된 교권주의자들을 향하여 공의를 지키자고 호소하고 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교회에 사법정의를 외치며 예언자적 비전으로 의회법, 선거법, 재판법을 개정해야 살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 정상배(政商輩)들은 불의한 교회재판을 견디자고 한다. 지금도 교회재판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정치적인 재판을 계속하고 있다. 교회는 금권에 약하다. 그리고 이권관계에 얽힌 모순과 구조악 속에 내팽개쳐지고 있다. 여기에서 상처받은 수많은 교인들이 있다.

주인공 기수가 소송의 달인이라는 말은 맞다. 교권욕에 찌들은 정치파벌이 종식되고, 사법정의의 테두리 안에서 감리교회 분열을 방지한 것도 사실이다. 동료들로부터 배척받고 외면당한 것도 맞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기수에게는 언제나 어린시절 다녔던 하얀교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이런 꿈은 「황금저울」 끝에 어린시절 교회 친구들과 만나서 나눈 대화 속의 5월 아카시아 향기처럼 퍼져나갔다.

「황금저울」의 백미(白眉)는 감리교 선거사태로 10년 동안 겪은 투쟁사가 하나님의 시간계획에 의한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소년의 꿈과 청년시절의 자각은 의외로 노모(老母)의 마음속에서 배태되었다. 교회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는 기수의 모습은 노모의 기도와 감리교 희망을 이어주는 고리와 같다. 「황금저울」은 바로 이러한 내력이 깃든 이름이다. 권력을 좇는 일, 지루한 쟁송사건, 위엄있는 판결문, 현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일, 모두가 「황금저울」에 달린 먼지와 티끌 같을 뿐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답답하고 숨막히는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가치를 중시한다. 권력과 재물도 사람의 가치만 못하다. 제5부에서 여자의 후손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신목사와 「황금저울」

 

신목사를 이해하는 것은 감리교 선거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감리교 사태의 중심에 서서 사법정의를 외치며 소송 전에 나섰다. 정치적 노림수나 뒷거래 흥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전략은 단순하였다. 단독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판결문을 받아서 정국을 헤쳐 나갔다. 대개는 비아냥거리다가도 결국은 판결문에 끌려 다녔다. 신목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어떤 이는 그가 수차례 나홀로 소송으로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을 상대로 승소하는 것을 보고는 하버드 법대 출신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미소로 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전공할 때 율법 정신을 배웠을 뿐이라고 답하였다. 또 누군가가 ‘왜 한남파 KD를 변호하는지’가 궁금해서 물어왔을 때도 “나는 위법한 법통하고만 싸워!”라며 대답이 의외로 간단하였다. 그러나 소송이 한창 중일 때 “감리교회,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언론 인터뷰한 것을 보면 ‘소송의 달인’이라는 별명은 적합하지 않다. 물론 그자신도 총회재판에서 두 차례나 담임목사 정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은 가해자를 사회법에 고소했다가 취하해 준 일로 사회법에 고소하였다는 범과로 교회법에 역고발 당해서였고, 다른 경우는 교회에서 부당하게 내쫓긴 목사를 돕다가 감독과 그 교회 교인이 공모한 정치성 고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크게 억울해 하지 않고 묵묵히 대의를 추구하였다.

그는 미래적 현실주의 성향이 강하다. 생각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결코 감상에 빠지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정을 책임지고 고아를 돌보아 온 어머니를 보며 교회에 유익한 모습으로 살아보려는 행보를 마다하지 않았다. 위법하게 공금에 손을 댄 감독회장과 감독 행위를 주시하며 교회재판에 세우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누가 감독회장이 되느냐 보다는 미래 교회를 위하여 어떤 법과 제도를 만드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교리장정연구회를 가동시켜서 장정개정에 필요한 연구활동을 벌였다. 앞으로 20년 동안은 그의 연구결과를 넘어설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또한 독특한 전략을 가지고 바른감독선거운동에 함께 하며 금권선거 기세를 꺾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외유내강의 성격 소유자이다. 섬사람 기질인 것 같다. 그는 강화도에서 휴전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제주도 출신으로 청소년 시절 일본에서 태평양 전쟁을, 해방 후 귀국한 제주에서 4.3 사건을, 그리고 시집 온 강화에서 6. 25.전쟁 등 3차례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인고의 세월을 살았다. 두 아들을 데리고 문산으로 이사와서 영생원 보모로서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여우고개를 오가며 임진각 주변의 미군 기갑연대를 찾아가 구호물자를 얻어다가 고아들을 먹이고 입혔다. 문산중앙교회를 거쳐 금촌 한사랑교회를 섬겼다. 신목사는 이러한 신앙분위기에서 살았다. 문산에서 꿈 많은 소년기를 보내며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 풍토에 세워진 문산중앙교회에 다녔다. 문산북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 있는 중동고로 진학하였으나 3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서 중퇴하였다. 좌절 중에서 회심의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는 전방부대에서 전역한 후 대입검정시험을 거쳐서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나는 대학원 졸업반 때 동년배들 보다 6년 늦게 대학에 입학한 그를 눈여겨보았다. 몇 번 말을 걸어도 대꾸가 없자 부아가 나서 ‘염병할 놈’이라고 쏘아댔다. 그는 주목받지는 못하였지만 천성이 부지런하여 무난하게 신학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지금 변두리 신생교회 목회만 30년이고 지석교회까지 포함하면 평생을 목회현장에서 떠나지 않고, 교권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히며 천덕꾸러기로 살면서도 자기정체성에 충실한 목회와 봉사활동에 전념하였다. 19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 중에 공개적으로 목회자정의평회실천협의회의 삭발 단식투쟁에 참가하는 등 지역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그는 단독자적인 삶에 익숙하였다. 기득권과 내통하거나 아부하지 않았다. 그는 범상하지 않은 인생길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훗날 감리교 사법정의를 위한 투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평범한 사람의 가치를 알고 있다. 「황금저울」에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충주에서 오랫동안 농촌 목회를 하던 전생수 목사의 가슴 저미는 유언과, 정의에 목말라 하는 괴산의 이의만 목사 이야기, 그리고 평생 가난하게 살다 은퇴하는 목사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애잔한 찬하사는 매우 감동적이다. 특히 1975년 감리교회가 분열하면서 재산권 소송에서 총리원 측 흑석동교회가 갱신측 흑석동제일교회에 패하자 총리원 김창희 감독이 무마책으로 유지재단이사회의 결의 없이 신생교회 땅을 흑석동 교회에 이전해 준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신목사는 신생교회에 부임하여 이러한 내력을 알기까지 감리교 총리원과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부패한 교권에 대하여 분노하고 항의하였다. 작은 교회의 앞길을 막는 교권 횡포에 마음의 상처가 매우 컸다. 신생교회는 땅을 다시 반환받기 위하여 은행 빚을 내어 유지재단에 1억 5천만원을 지불했다. 너무나 억울한 사연이다. 15년간의 처절한 싸움에서 얻어낸 것은 유지재단이사회 회의록 변조사실을 시인하는 한 장짜리 감독회장의 고해성사 통지문이었다. 이것이 평범한 목사를 정의의 투사로 키워 낸 토양이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목사가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같이 빈농 출신인 것을 알고는 무시하였다. 배후 세력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서 물어 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 후 이어서 옆에 있는 아내를 가리켰다. 그는 수많은 소송에서 변화무쌍한 전술로 끈질기게 상황을 주도하였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숙고하여 재판에 임하는 한편 이해관계를 멀리하고 초지일관으로 소송에 전념하였다. 수차례 사회재판 판결문으로 교회재판의 정치적 판결을 뒤집어 버렸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제50부, 제51부는 감리교 정치운명이 달린 법정이었다. 사법정의가 무너진 감리교회에서 신목사가 찾아 들은 「황금저울」은 21세기 스토리텔링이다. 교권중독자, 선거협잡꾼, 정치재판꾼, 정치 패거리, 사이비 개혁가, 기회주의자 모두가 「황금저울」에 달려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지금도 감리교는 정책적으로 취약하고 현장분석과 전면에 내세울 만한 담론을 집필하질 못한다. 신학대학은 자류에 빠져서 정보혁명시대에 정책적 자문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 그나마 몇몇 연구소나 NGO가 생긴 것은 다행이다. 아직도 선거에는 인물론, 교회 크기, 학연이 이슈가 되고 있다. 정책대결을 피하고 상대방의 허점이나 스캔들을 들추려 한다. 법적으로 허술한 교회는 변호사들의 비즈니스에 적합한 곳이다. 이런 법조인들에게 감리교의 명운을 맡길 수는 없다. 앞으로는 정치입법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명료한 장정을 만들고 실무행정 능력이 구비된 감독을 선출해야 한다.

신목사는 「황금저울」을 탈고한 후에는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하지만 현실문제의 본질을 사고하는 깊이를 더해 갔다. 현재 우리는 함께 미래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교리장정연구단과 바른감독선거모임 활동을 함께 한 이후 미래정책연구원에서 그동안 모아둔 100개도 넘는 쟁송사례를 분석하였다. 우선 올바른 교리장정을 제정하는 이정표를 세워나가려고 함께 「감리교 교회법 이해」를 저술하여 세대 계층간 미래정책의 공감대를 만들었다. 나는 이 발문을 탈고할 즈음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Methodist Movement)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는 새로운 교파(church)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신앙운동을 하였다. 우리도 황금저울에 달려 다시 종교개혁자의 꿈을 꾸어 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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