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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폭력이 결합할 때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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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2월 18일 (일) 00:29:57 [조회수 : 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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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인간의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지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가끔씩 멈춰 서곤 했다지요? 너무 빨리 달리면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랍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삶이 분주할수록 영혼은 묵정밭으로 변해갑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것은 좋지만 가끔 멈추어서 자기가 가는 방향을 가늠해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스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자기의 좌우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문장이지만, 그것처럼 삶의 실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진리와 깊이 접속하여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교회는 사람들을 참된 자유의 길로 인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속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친 비관론인가요? 저는 가끔 화가 납니다. 그렇게도 아름답고 당당하고 따뜻한 예수의 길을 치열하게 따라 걷기보다는,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대상화한 채 옹색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 때문입니다. 신앙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가? 콘스탄틴 이후, 권력의 맛에 취한 교회는 어느 정도 예수의 길에서 멀어진 게 사실입니다.

 

억압의 권부가 된 종교

얼마 전에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소설집 <미하엘 콜하스>(황종민 옮김, 창비, 2016년)를 읽었습니다. 그는 겨우 34살의 나이에 암에 걸린 연인 헨리에테 포겔과 권총으로 동반자살하고 맙니다. 남긴 작품이 많지 않지만 그가 던지고 있는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오늘은 ‘칠레의 지진‘이라는 단편 소설을 통해 그가 제기하는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연구자들은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은 1755년에 일어난 포르투갈의 리스본 대지진의 충격 때문일 거라고 말합니다. 소재는 지진이지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유럽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프랑스 대혁명일 거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지진과 혁명, 왠지 이미지가 겹치지 않나요? 

소설은 “칠레 왕국의 수도 싼띠아고에서 1647년 대지진이 일어나 수천 명의 생목숨을 앗아갔다”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헤로니모라는 젊은이가 우연히 구한 밧줄을 감옥 기둥에 감고 막 목을 매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는 왜 자살이라는 극한의 선택을 하려 한 것일까요? 자초지종은 이러합니다. 그는 도시의 제일가는 갑부이자 귀족인 돈 아스떼론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르치던 아스떼론의 고명딸 돈나 호세파와 애틋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언제 어디서나 있을 법한 상황입니다. 가난한 고학생과 딸의 사랑을 용납할 수 없었던 아스떼론은 가정교사를 내보냅니다. 하지만 헤로니모를 향한 딸의 연모의 마음조차 추방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딸이 몰래 그 젊은이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딸을 까르멜 수녀원으로 내쫓습니다. 수녀원을 일종의 감옥으로 삼은 셈입니다. 가부장적인 억압과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수녀원이라는 공간이 묘하게 공명을 일으키지 않나요? 그러나 두 젊은이의 뜨거운 사랑은 수녀원의 담장이나 규율로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둘은 수녀원 정원에서 운우지정을 나눕니다.

그런데 성체축일을 거행하려는 찰나에 호세파는 산기를 느낍니다. 수녀들은 그 불경한 사건에 경악합니다. 호세파는 감옥에 갇힌 채 종교재판을 기다립니다. 재판은 몸을 푼 후에 진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수녀원 담장 안에서 벌어진 그 일은 사람들의 천박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온 도시가 들끓었습니다. 마침내 재판날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하늘의 징계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몰려들었습니다. 종교재판관은 호세파에게 화형을 언도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게든 손을 써보려 했지만 죽음을 돌이키긴 어려웠습니다. 참수형으로 감형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긴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종교재판소에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사회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종교가 폭력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호세파를 처형장으로 끌고 가는 종소리가 들리자 감옥에 갇혀 있던 헤로니모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창살을 뚫고 달려가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어 밧줄에 목을 매려 했던 것입니다. 절망의 극단에 이르면 사람들은 체념으로 도피하기도 하는 법입니다.

 

혼돈

지진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벽이 갈라지고, 건물이 쓰러졌습니다. 숨탄것이란 숨탄것 모두 다 잿더미에 묻혔습니다. 앞뒤에 있던 건물이 넘어지면서 이룬 아치 덕분에 목숨을 구한 헤로니모는 아비규환에 빠진 성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 씁니다. 그리고 성 밖에서 의식을 잃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은 그의 앞에 전개된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하늬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와 되살아난 생명을 어루만지고, 눈길 던지는 곳마다 백화만발한 산띠아고 성 밖 풍경이 펼쳐지자, 그제야 헤로니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었다.”(186-187) 아이러니하지요? 그 압도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생명이 스러졌는데, 바람은 여전히 불고, 꽃들도 난만하게 피어있으니 말입니다. 달콤한 인생의 정경을 즐기던 헤로니모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려, 기적을 베풀어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이 대목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다른 이들에게 닥친 불행은 유감이지만, 여하튼 그 불행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뻐하고 감사해도 되는 것인지요? 이 질문은 그저 질문으로 남겨놓겠습니다.

손에 낀 반지가 눈에 띄자 헤로니모는 호세파를 떠올립니다.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슬픔은 이렇게 사적입니다. 피난 나온 사람들에게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지만 호세파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처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그는 절망합니다. 죽음을 피해 달아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사람들이 몰려든 모든 봉우리와 골짜기를 뒤지다가, 샘터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갓난아이를 샘물로 씻기고 있는 것을 봅니다. 호세파였습니다. 호세파는 지진으로 도시가 혼돈에 빠졌을 때 처형장을 벗어나 수녀원으로 달려가 불구덩이 속에서 아기를 구해 나왔던 것입니다. 수녀원장도, 대주교도 비참하게 죽었고, 호세파에게 화형을 선고했던 재판소도, 갇혀 있던 감옥에 다 불에 탔습니다. 호세파는 어린 필리뻬를 품에 안고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여겨지는 사나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리던 차에 헤로니모와 재회했던 것입니다. 작가는 전지적 시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참변이 세상에 닥쳐야 했는지 생각하자 가슴이 느꺼웠다!”(191) 두 연인은 지진의 혼란이 수습되는 대로 꼰셉시온을 거쳐 배를 타고 에스빠냐로 이주하자고 말합니다.

 

차이의 소멸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우고 아침을 때울 빵을 굽고 있는 가족들이 보였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젊은 사내(돈 페르난도)가 다가와 호세파에게 잠깐만이라도 젖을 물려줄 수 없겠냐고 묻습니다. 아이의 엄마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젖을 물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호세파는 “이런 끔찍한 시기에 콩 한쪽이라도 함께 나누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192)라고 말하며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돈 페르난도의 가족은 헤로니모와 호세파를 자기들의 아침 식사에 초대합니다. 가족 모두의 상냥한 환대에 둘은 마음이 흔연해집니다. ‘삶은 아름다워‘인 셈입니다. 이 순박한 낙관주의가 왠지 불길합니다.

천재지변이나 사회적 격변은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흉흉한 소문이 나면서 약탈과 방화와 폭력이 도처에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재지변 혹은 혁명적 열정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지우고 서로를 동료로 대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인간이 가진 이 세상 온 재물이 땅으로 가라앉고 온 자연이 흙더미에 묻히는 듯한 이 소름 끼치는 순간에, 인간 정신만큼은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오른 듯싶었다. 눈앞에 펼쳐진 들에는 사람들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한데 누워 있었다. 영주든 거지든, 귀부인이든 시골 아낙이든, 공무원이든 삯일꾼이든, 수사든 수녀든 서로 동정하고, 서로 도와주고, 연명하려 아껴뒀던 음식을 함께 나눴다. 재난을 다 함께 겪다보니 살아남은 사람들 모두가 한 가족이 된 것 같았다.“(193)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위기상황 가운데 발현되는가 봅니다. 세상이 뒤집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헤로니모는 유럽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총독에게 선처를 빌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는 현실을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집단적 광기를 넘어

성 밖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에게도 소문이 들려옵니다. 지진에 무너지지 않 유일한 성전인 도미니쿠스 성당에서 수도원장이 집전하는 장엄한 미사가 열릴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재난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돈 페르난도의 가족들은 다소 망설였지만 “창조주께서는 지금 불가사의하고 숭고한 힘을 눈앞에 보여주고 계세요. 저는 창조주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묻고 싶은 욕구를 바로 이 순간보다 더 뜨겁게 느껴본 적이 없답니다”라고 말하는 호세파의 열정을 가라앉힐 수는 없습니다. 성당에는 살아남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든 것 같았습니다. 사제의 강론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는 어제의 지진은 최후의 심판의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공포심을 더욱 조장했습니다. 또한 지진은 도시의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쓰나미가 서남아시아를 휩쓸었을 때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말했던 어느 목사가 떠오릅니다. 그들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두려움에 휩싸인 영혼들을 지배하기 위함입니다. 변형된 지배에의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왜곡하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자기 열정에 사로잡힌 사제는 특히 까르멜 수녀원 정원에서 저질러졌던 죄악을 장황하게 언급하며 죄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합니다. 지진의 책임이 그들에게 덮어씌워진 것입니다. 일종의 희생양 만들기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확실한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성숙한 삶은 불확실성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제의 단정적인 말이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던 폭력을 일깨웁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돈 페르난도와 헤로니모 일행이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광포한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이 호세파를 알아보고는 불경스러운 자들이 여기에 있다고 외칩니다. 페르난도는 헤로니모와 호세파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만 역부족입니다. 헤로니모와 호세파 또한 페르난도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잠시 혼돈에 빠집니다. 누가 헤로니모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소설에서 가장 황당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소설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헤로니모의 아버지가 등장하여 몽둥이로 아들을 내리쳐 죽입니다. 종교적 확신과 폭력이 결합할 때 광기가 발생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광기 앞에서 속절없이 해체됩니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 애쓰던 호세파도 사람들이 무작스럽게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죽습니다. 한 무뢰배가 돈 페르난도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의 다리를 낚아채 성당 기둥 모서리에 내리쳐 죽게 합니다. 호세파의 아이 필리뻬인 줄 알았던 것이지요. 지진 이후에 헤로니모와 호세파, 그리고 페르난도 가족이 맛보았던 그 차별 없는 세상의 꿈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앞서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라고 말한 것 기억나시지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혁명의 결과를 이렇게 암담하게 전망한 것일까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페르난도가 아내 엘비라와 더불어 필리뻬를 양자로 맞아들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 대목은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을 새로운 가족으로 맺어주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는 폭력과 광기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누군가의 그늘 혹은 둥지가 되려는 사람이 있는 한 희망은 스러질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어쩌다 보니 소설 이야기로 편지가 다 채워졌네요. 그만큼 이 작품이 제게 준 충격이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탈하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불행 앞에서 함부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무분별한 열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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