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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과 한반도 평화- 북핵문제와 미국의 대응을 걱정하며
장준식  |  junsikch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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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2월 01일 (목) 12:30:17
최종편집 : 2018년 02월 04일 (일) 22:53:34 [조회수 :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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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과 한반도 평화
(사무엘상 7:1-14)


- 북핵문제와 미국의 대응을 걱정하며

오랜 시간이 흘러 사무엘이 다시 등장한다. 시간적으로는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나온다. 20년 동안의 사무엘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2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건강하게 성장한 것 같다. ‘미스바로 모이라’는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이 미스바로 모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부르심대로 성장하는 것은 공동체의 축복이다. 특히나 어려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의 끝자락을 산 사람인데, 사시기의 이야기와 엘리 제사장 가문의 이야기, 그리고 법궤를 빼앗긴 이야기를 보면 사무엘이 살던 시대가 얼마나 혼탁한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시대 가운데서도 그 시대를 보듬으며 이겨나갈 ‘복 있는 자’를 세워 가신다.

그러한 사람은 룻기서와 사무엘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일반 사람들 중에서는 보아스와 룻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 있는 자’이고, 지도자들 중에서는 사무엘이 돋보인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때문에 사회가 혼탁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할 당신의 일꾼을 세워 가신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할 일꾼으로 택함을 받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것만큼 인생에서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무엘이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의 이스라엘은 매우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시기가 어떠한 시기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법궤사건’이다. 법궤는 원래 성막에 있어야 하는 거룩한 물건이다. 그러나 법궤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엉뚱한 데 가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타포이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다른 것이 들어가 있으니,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는 2절 말씀에 등장하는 ‘사모하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사모하니라’로 번역했지만, 이 말은 히브리어의 ‘나하’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lamented’로 번역하고 있다. 즉, ‘나하’는 ‘울부짖다’, ‘신음하다’, ‘애도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 “하나님, 못 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탄식(lament)’는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다. 탄식은 성령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이다. 우리가 탄식할 때 성령은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 하나님께 간구한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해지면 ‘탄식’하지 않는다. 그저 ‘불평’할 뿐이다. 불평과 탄식은 질적으로 다르다. 불평은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만 바라보며 그 너머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고, 탄식은 그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손을 뻗지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뻗는 손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탄식하자, 하나님은 오랜 세월 준비된 사람, 사무엘을 보내신다. 사무엘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보냄 받은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탄식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3절).

이게 굉장히 쉬운 말이고, 쉬운 행동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지 모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아플 때 왜 아픈지 모른다. ‘아파,아파’하면서도 왜 아픈지, 그리고 어떻게 그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생명을 잃는다. 그런 현상이 이스라엘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한 말씀은 쉬운 말 같으나 결코 쉬운 말이 아니다. 그의 선포는 이스라엘이 왜 아픈지, 그 아픔 가운데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적인’ 처방전이다. 다행인 것은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처방전을 받아들고, 그대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탄식은 거짓 탄식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탄식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한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다. 그들의 결단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미스바에 모여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한 행동은 기도와 회개였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은 세 가지의 행위를 한다.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 ‘종일 금식하는 행위’, 그리고 ‘자신의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는 세례를 연상시킨다. 예레미야 애가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나온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 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애 2:19). 이것을 미루어 보건데,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종일 금식했다. 금식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이시라’는 신앙고백이다. 밥이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우리는 금식하면서 이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금식은 단순히 극기 훈련이 아니다. 금식은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지에 대한 자각이다.

미스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참으로 거룩한 일이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자복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순간에 그 거룩한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블레셋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7절).

사탄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했던 일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끄집어 낸 뒤, 그곳을 잡동사니로 채우는 데 집중한다. 보통 사람은 그러한 사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마음의 중심을 잡동사니로 채우고 산다. 그러면서, 자기의 삶이 어지러운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로, 그때 믿음이 없는 자와 믿음이 있는 자의 행동이 갈린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된 회개와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블레셋의 공격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도망쳤을 것이다. 하나님이고 뭐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고 미스바를 탈출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겠다고 결단한 ‘미스바의 이스라엘’은 다르게 행동한다. 그들은 두려웠지만,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8절).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사무엘은 그들의 부탁대로 ‘온전한 번제’를 드리며 기도했다. 여기서 ‘온전한 번제’란 그들의 ‘간절함’을 표현한 예배라는 뜻이다. 보통 번제를 드릴 때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가죽과 내장은 태우지 않고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온전한 번제’를 드렸다는 뜻은 제사장(사무엘)에게 돌아갈 가죽과 내장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다.

간절한 예배와 간절한 기도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똑똑히 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간절한 예배와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역사를 이루어 주신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10절).

간절한 예배와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여기서 신비로운 방식이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큰 우레’로 표현하고 있다. 우레는 천둥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한 잘못된 표기는 ‘우뢰’이다. 마가복음 3장 17절에 보면,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를 예수님은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데, 많은 곳에서 ‘우레의 아들’을 ‘우뢰의 아들’로 잘못 표기하는 것을 본다.)

하늘에서 ‘우레’가 발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로 인식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도망치는 블레셋을 벧갈 아래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물리친다. 블레셋을 물리친 뒤, 사무엘은 돌을 하나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그 돌을 세워놓고, 그것을 ‘에벤에셀’이라 칭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가려져서 그렇지, 대한민국의 상황이 풍전등화와 같다. 프럼프 정부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태세이다. 이는 올림픽을 통하여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도모하는 세계와 반대되는, 블레셋과 같은 행동이다. 북한이 핵개발을 완성하고, 그 핵무기를 미국 본토까지 실어나를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개발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판단한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하여 대한민국을 제껴놓고 독자적으로 북한을 폭격할 태세이다.

핵폭탄과 같은 대량 살상무기가 양 진영에 갖춰진 시대에 전쟁은 공멸하는 지름길이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국지전과 핵폭탄을 사용하는 전쟁은 그 피해가 질적으로 다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걱정스러울 뿐더러, 대한민국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좁게는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두려움’과 ‘간절함’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탄식해야 한다. 지금은 한국의 모든 국민이 하나님 앞에서 물을 붓고 온종일 금식하며, 온전한 번제와 기도를 할 때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미국도 북한도 서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평창이 ‘미스바’와 같은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 올림픽이 ‘에벤에셀’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간절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주시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해 주셨을 때, 이스라엘에는 회복과 평화가 깃들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렛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14절).

조국 대한민국, 한반도의 평화는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평화를 다른 사람 손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손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손으로 평화를 이루려면, 한국 교회는 평창 동계 올림픽 기간(2월 9일 ~ 25일)을 미스바 성회로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한 예배와 온종일 금식하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탄식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신비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한 돌(또는 십자가)을 가져다가 평창에 세우고, 그것을 ‘에벤에셀’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여, 한반도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한반도에 평화를 내려 주소서!”

 

장준식 목사, (북가주) 세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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