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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예수목회세미나 첫째날 일정 시작, 주제강연 등
방현섭  |  racer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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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1월 22일 (월) 19:09:44
최종편집 : 2018년 01월 28일 (일) 21:52:57 [조회수 : 1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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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연구소(소장 김준우 박사)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예수목회세미나가 1월 22일(월) 오후 2시부터 의왕의 가톨릭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번에 열리는 예수목회세미나는 ‘4차 산업 혁명과 교회의 미래’라는 주제로 열렸으며 올해 열세 번째이다. 매년 40여명이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데 올해에도 40여명이 함께하였다.

방현섭 목사의 사회로 열린 펼침예배에서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공감의 능력’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최 목사는 “1525년 비텐베르크 시 교회에서 개신교 최초의 집사임명이 있었는데 당사자는 루터의 동료이자 필사자로 알려진 게오르그 뢰러이다. 그가 집사로 임명 받을 때 개혁자 루터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거기엔 최초의 개신교 목사이자 시 교회 담임목사였던 부겐하겐, 평생 안수 받지 않은 대학교 신학교수 멜란히톤, 그리고 비텐베르크 시장, 게다가 시 담당 판사까지 입사 임명에 참여하게 된다. 개신교에선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직분자, 신자라면 누구나 사회적-공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신교 초기부터 교회가 사회의 문제에 어떤 식으로 공감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지 고민했던 흔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들리는 교회의 패악들은 끔찍하다. 영적인 능력은 좀 떨어져도 상식적인 사리판단과 평균 수준의 공감능력만이라도 제대로 갖춘 사람조차 찾기 힘들다는 것이 오늘 이 시대 교회의 아픔이다.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는 천국을 전파해야 한다. 전파는 선전포고를 의미한다. 이 전쟁의 무기는 총칼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에게 거저 주신 복음이다. 이 복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우리의 아픔을 창자가 끊어지도록 공감하고 도우신다는 확신이고 신뢰이다”고 설교하였다.

‘4차 산업혁명과 교회의 미래’ 주제강연은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이자 경영연구소 소장 양혁승 박사가 하였다. 양 박사는 거룩한빛광성교회 장로이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상임집행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양혁승 박사는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을 화두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인공지능은 바둑만이 아니라 법조계, 예술의 영역까지 침범, 인류의 육체적 지적 능력이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 넘고 있는 현실을 소개하였다. 양 박사는 4차 산업혁명은 경계 파괴와 융합, 연결과 공유, 분산과 통합, 새로운 생산양식의 부상 등을 통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초연결 사회가 열리고 생산양식과 사회운영 방식에 대변혁이 일어나며 20세기형 고용사회의 퇴조와 더불어 불확실성이 급격하게 증대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런 변화의 문 앞에 선 교회는 디지털 가상세계의 발전방향을 복음으로 리드할 인재 육성,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긍정적 부정적 도전과제에 해안 관심을 가지며 새롭게 대두될 사람들의 영적 필요에 대한 대응을 주문하고 ‘과학기술 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참여자들이 각자의 목회와 생활을 나누는 ‘주제가 있는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고민을 하는 목회자들이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지며 첫째 날의 일정을 정리하였다.

제13회 예수목회세미나는 24일(수)까지 이어진다.

펼침예배 설교문 / 최주훈목사(중앙루터교회)

공감의 능력 본문 : 마태복음 9장 1-13절

 

처음엔 단순한 종교개혁 역사 강연인줄 알고 덥석 수락했다가 <예수 목회 세미나> 개회 설교라는 걸 알고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디 가서 설교할 깜냥도 되지 않는데다가 개인적으론 지극히 ‘보수’인 사람이 이런 모임에서 설교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거절하지 못해서 결국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천연기념물을 넘어 멸종위기 동물급에 속하는 루터파 목사라서 저를 부른 게 아닌가 싶어서 그냥 오기로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봐선 제가 이런 자리에 부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늘 아주 조심스레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번 세미나 주제가 ‘4차산업혁명과 교회의 미래’인데, 보통 4차 산업혁명을 '디지털 혁명에 기반하여 물리적 공간, 디지털적 공간 및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융합의 시대'로 정의합니다. 저는 사실 이런 분야에 문외한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간의 경계가 희석될수록 필요한 것은 개별 카테고리의 공통분모인 것은 확실합니다. ‘경계가 사라진 공간의 공통분모’라는 것을 인간관계로 표현한다면, 그건 아마도 ‘공감’ 이란 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저는 이 공감의 능력을 성서에선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마태라고 하는 인물을 필두로 시작할까 합니다.

마태라고 하는 인물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기준미달입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 라면 마태 같은 인물은 절대 부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태는 이름 값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을 가진 마태는 선물은 고사하고 동족의 혈세를 등쳐먹고 살던 세리이기 때문입니다. 몸도 성한 젊은 놈이 무슨 할 일이 그리도 없어서 세리가 되었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태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 모두 거기서 거기입니다. 세리 말고도 억세기로 소문난 무지랭이 어부들도 끼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가진 분이 이리도 사람 보는 눈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직해봤자 앞으로 전개될 일은 뻔합니다. 어디 스펙도 좀 그럴싸하고 집안도 좀 되고, 성격도 온순하고, 사려 깊고 조직충성도도 뛰어난 그런 인물들을 찾아서 제자 그룹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은 데, 아무리 보아도 제자 그룹은 이런 데서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렇고 그런 인물들만 한데 모아놓구선 자기 제자라고 그리도 챙깁니다.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나라라는 것은 이런 찌질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저런 찌질이들의 무엇을 보고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마9장은 그 이유를 상세히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9:9에서 마태의 앞을 지나가다가 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후 ‘따르라’고 합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내가 긍휼을 원하는 것이지 제사를 원하는 것 아니다’라고 하시지요. 그 다음 구절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면, 곳곳에서 치유의 기사를 찾을 수 있는데 34절 까지 예수님은 아주 바쁘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35절로 넘어가면 이제까지의 사역을 요약하면서 36절에 이렇게 가르칩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나옵니다. 13절에 나온 ‘긍휼’이라는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그저 가슴 아프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아기집’, ‘자궁’이라는 뜻의 ‘라쿰’에서 파생되었지요. 그래서 본문에 나온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생명을 담고 있는 산모가 ‘아기집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 가난한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만날 때 마다 이런 아픔을 느꼈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이 의미를 마태의 소명기사에 적용시켜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보자마자 마태가 혼자 품고 있던 고통을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파했고,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보고 가슴 아리듯 아파했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숨겨진 아픔을 공감했다는 말이 되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공감의 능력은 결국 약하고 어그러진 것들 치유하며 회복시키는 동력, 그리고 예수의 제자로 품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만한 게 있습니다. 세금징수원으로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 없어 보이던 마태의 무엇을 보고 그리도 가슴 아프고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고, 제자로 삼기 까지 했을까요? 그저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동족의 혈세나 빼먹는 뱀파이어 같은 인물인데요.

자, 여기서 마태의 세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길 제안합니다. 성서의 행간이 침묵하고 있는 틈새를 역사의 사다리를 통해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죠. 마태의 직업은 예수의 부친이었던 요셉의 직업이 어떤 것이었는지 따지고 넘어가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직업이 ‘목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테크네’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실은 ‘테크네’라는 직업은 정확히 말하면 목수가 아니라 그저 손재주가 있어서 하루하루 일감으로 먹고 사는 잡부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그랬지만 유대인들도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자기 땅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수탈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권력과 거리가 있던 대부분의 힘없는 일반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 당시 사회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주활동무대였던 ‘갈릴리’의 본뜻이 ‘이방인의 땅’이었을까요? 자기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설움이 바로 지역 명에도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렇게 힘없는 이들의 삶은 모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고통의 제공자도 있고, 거기서 이득을 보는 기득권자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 대표적인 부류가 종교기득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종교의 이름은 있었지만 실상 로마 권력층과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밀접한 공생관계에 있던 부류들이지요.

반면에 대다수 유대 평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일자리를 뺏겨서 타지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나마 요셉처럼 손재주가 있던 사람들은 일감이라도 얻어 벌어 살 수 있는 테크논이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젊은이들은 거의 대부분 새벽시장에 나가 하루벌이 일용직에 종사하거나,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목동이나 어부로, 젊은 여인들은 몸을 파는 여인으로, 그나마 머리 좋은 젊은 남자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손가락질 받더라도 세금징수원이 되기도 하고, 혈기가 있던 젊은이들은 열혈당원이 되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는 그룹에 속했던 것이죠. 이런 아픈 사회상은 복음서 곳곳에서 천국 비유의 빈번한 소재가 됩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지나치지 못하고 가슴 아파했던 것은 바로 이것 아닐까요? 마태라고 꿈이 없었겠습니까?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진 질시와 비웃음을 꾹 참고서라도 살 수 밖에 없는 그 깊고 아픈 사연을 예수님은 보신 것이죠. 눈에 보이는 모습대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간파하고 그런 아픔 속에 있는 마태를 전혀 다른 세계로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예수님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이고 사랑이며 그분의 능력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사랑의 발걸음을 옮기는 것, 그것이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픔을 공감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태복음서 기자는 제자도를 가르치는 마9-10장의 서두에 아주 의미 있는 사건을 담아 놓습니다. 바로 9:1-8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치료 받는 중풍병자 사건입니다. 막2장과 눅5장에도 나오는 사건인데 병에 걸린 친구를 고치기 위해 지붕을 뜯고 예수 앞에 데려오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가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교회 전도용 설교로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병에 걸린 친구는 불신자고, 친구들은 전도하는 교인들이라는 논리이지요. 그야말로 엉뚱한 해석입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로 전도해서 교회 부흥시키고 건물을 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메시지는 친구들이 가진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이고, 당시 편견과 악습에 의연하게 맞서는 우정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도의 핵심이고, 그 핵심은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친구들은 친구의 병이 온전히 낫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으면 그냥 친구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정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중병 걸린 사람을 메고 갔으니 수군대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쯤 다 예상 했을 것이고, 멀쩡한 남의 집 지붕을 헐어내서 재산 피해를 입히는 일이 그릇된 행동이란 것쯤 다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 그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남들이 보지 못한 친구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던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이지요.

그리고 예수님 역시 바로 이 점을 함께 공감하신 것이죠. 그래서 9:2절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낫게 했다고 말입니다. 상황을 소박하게 살펴보면, 제자를 만들고 치유하는 모든 원동력은 언제나 아픔을 공감하는 것에 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이웃의 마음을 함께 공감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공감의 힘이 결국 나비효과처럼 큰일을 만들어 냅니다.

루터파 교회에선 성서의 모든 메시지를 언제나 ‘칭의론’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선언을 들은 우린 모두는 자신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면 내 옆 사람도 가치 있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합니다. 그런 가치 있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데, 그 공동체 안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한 사회 구조를 만들어 냅니다. 목사라고 해서 특별한 것 없고, 아이라고 해서 소외될 수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이게 만인사제직입니다. 그리고 이 만인사제직은 서로가 서로에게 제사장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어 섬기고, 품어주고, 위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책임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루터파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신학적 맥락입니다.

그런데 아주 독특한 것은 이런 만인사제직은 단순히 우리끼리만 ‘홀리클럽’으로 사는 게토를 거부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특정한 그룹들끼리만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는 일은 조폭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그 담장 무너뜨리고 담장 너머로 월담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웃의 아픔을 보듬지 않고,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교회는 스스로 담을 쌓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자를 혐오하고 구별하고 차별하는 집단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바른 신앙인 줄 착각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확연하게 보았습니다. 특별히 세월호 사건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의 질곡을 지나면서 교회의 타락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우리는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교회가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보듬지 못하면 그것이 교회의 종말입니다.

역사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성직자를 어 떻게 임명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톨릭에선 주교가 안수하는 것을 성직자 임명의 절대적 상징으로 꼽습니다. 안수의 순간 은총이 주입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사제는 평신도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 안수는 사도의 권위와 능력이 주교의 손을 통해 주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 사제는 영원한 사제가 됩니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목사서임은 주교의 안수권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에게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개신교회 목사는 ‘청빙’이라는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그 때 꼭 필요한 것이 청빙 위원회입니다. 1523년 비텐베르크 시교회에서 요하네스 부겐하겐이라는 분을 목사로 청빙할 때도 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 때 구성된 위원들이 참 특이합니다. 교회의 성도대표, 대학 교수 대표 그리고 시 의회 대표라는 삼자구도 형식으로 청빙위원회가 구성됩니다. 여기서 교회 대표는 신앙을, 대학 대표는 지성을, 시민사회 대표는 사회적 인격을 판단하는 지표가 됩니다. 그래서 개신교 목사로 청빙 받는 사람은 어디에 내어 놓아도 신앙, 지성, 사회적 인격이 출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개신교 목사는 어딜 가도 자랑할 만한 직임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의 현재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해가 종교개혁 5백주년이었죠. 여기저기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결국 작년의 끝맺음을 명성교회가 아주 멋지게 장식하고 말았습니다. 요즘 어디 가서 목사라고 말하고 다니는 게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지만 개신교회가 시작할 당시는 달랐습니다. 목회자란 교회 안에서만 자랑거리가 아니라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어야 한다는 정신을 최초의 청빙을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그럼 목사만 그렇게 잘나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디아콘’(Diakon)이라고 불리는 집사는 목사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1525년 비텐베르크 시 교회에선 개신교 최초의 집사 임명이 있었습니다. 당사자는 루터의 동료이자 필사자로 알려진 게오르그 뢰러인데, 그가 집사로 임명 받을 때 개혁자 루터 임명한 것이 아니라 거기엔 최초의 개신교 목사이자 시 교회 담임목사였던 부겐하겐, 평생 안수 받지 않은 대학교 신학교수 멜란히톤, 그리고 비텐베르크 시장, 게다가 시 담당 판사까지 집사 임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개신교에선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직분자, 더 나아가 신자라면 누구나 사회적-공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쉽게 말해 ‘개신교회 공동체라면 당연히 사회의 공적 책임을 함께 지고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개신교 초기부터 교회가 사회의 문제에 어떤 식으로 공감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지 고민했던 흔적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라고 하는 이 시대 교회로 눈을 돌려 봅시다. 여기저기 성경책도 많고 성경공부 프로그램도 많고, 신학교와 목사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예언한다고 자랑하면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로 만들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것만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이 땅에 가득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들리는 교회의 패악들은 끔찍합니다. 종교인들의 비윤리적 행태와 혐오와 차별이 우리 가운데 비일비재합니다. 부와 권력을 직계 자손에게 넘겨주는 일은 기업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종교개혁 5백주년 말미에 명성교회가 알려 주었고, 그런 수치스런 일에 대해 추호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건 이 시대 기독교의 민낯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린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능력은 좀 떨어져도 상식적인 사리판단과 평균 수준의 공감능력만이라도 제대로 갖춘 사람조차 찾기 힘들다는 것이 오늘 이 시대 교회의 아픔입니다. 교리로 타자를 정죄하고 교회 밖은 모두 악이라고 말하며, 교회에서만 뭉쳐 사는 것을 거룩하다고 가르칩니다. 주일성수라는 말을 왜곡해서 일주일 중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할 6일은 모두 희생하고 오직 일요일만 교회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아니오. 성경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고, 주일성수는 일주일을 살아갈 쉼과 위로를 얻는 날입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문제입니다. 말로는 모두 형제며 벗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과 조금이 라도 다르거나 지위나 재산의 차이가 크면 서로 반목하고 차별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병자의 친구들은 참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공감의 능력이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지 진중하게 가르칩니다.

물론 전도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조차 반목하고 갈등하는 우리 자신의 좀스러움과 천박함, 그리고 교회라는 모습은 있지만, 이웃들의 아픔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고, 오히려 차별과 혐오로 담장을 높이 올려 세우는 이 땅의 교회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가르쳐 줍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우리 곁에서 아픔을 호소하는 이웃들이 사방천지입니다. 이전과 비교해서 고아나 홀로 경제를 책임지며 사는 여인들은 분명 줄었고, 복지의 사각지대도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독거노인, 또는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취업하지 못한 젊은이, 외국인 노동자 가족, 성소수자들은 분명히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 외에도 가난 때문에 불의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이 땅엔 여전히 가득합니다. 이들의 아픔을 교회가 공감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상호 후견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결한 부인은 매춘부의 후견인이 되어야 하고, 경건한 시의원은 도적의 후견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두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타자를 위해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 일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교회 공동체라면 이와 같은 일을 보여주어야 합니다.”(루터, WA 21, 346,21)

우리가 교회공동체라면 바로 이런 일을 보여주어야 마땅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여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제자 공동체, 교회, 이곳은 예수님이 나를 보고 고통을 공감하며 나를 회복시키셨듯이, 우리도 이웃의 고통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랑으로 회복시키는 곳이 교회입니다. 아픔을 공감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래서 모든 곳을 하나님 사랑이 가득한 나라로 만드는 것,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마10:7 이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기 직전 이런 명령을 하십니다.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는 천국을 전파해야 합니다. 여기서 ‘전파’한다는 원어 ‘케루소’는 전쟁에서 선전포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무기는 총이나 칼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거저 주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우리의 아픔을 창자가 끊어지도록 공감하며 도우신다’는 확신이고 신뢰입니다.

예수를 통해 보여준 이 사랑은 약하고 소외된 이들, 잃어버린 이들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복음을 가슴에 새기고 세상에 나가라는 이 말씀은 명령이고 동시에 의무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라’고 하는 이 말씀은 의무인 동시에 그렇게 발걸음을 움직이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란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속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은 바로 그곳, 이웃의 눈물과 신음 한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호세아 6:1-2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코앞의 일도 모르고 사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 ‘미래’를 우리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교회 공동체라면, 이 땅의 예수가 보여주고 가르치신 일을 따라 사는 걸 마땅하고 가치있는 일로 믿고 살아가야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게 사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꽃길을 걷는 것도 아니라는 걸 우린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길로 나선 이들을 하나님께서 공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그 믿음으로 이웃 한 가운데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공감합시다. 그리고 이웃의 개념을 이젠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로 확장해야 할 때입니다. 신음하는 자연세계의 아픔을 기독교인들이 먼저 공감해야 합니다.

그 공감이 이 땅에 놓인 모든 차별과 구별의 경계를 허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우리의 상처를 싸매고 낫게 하시며 살리고 일으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일상 한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의 이웃 한 가운데서, 그리고 이 땅 한 가운데서 체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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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자 (61.41.138.186)
2018-01-23 09:21:31
좋은 세미나네요
'4차산업혁명과 교회의 미래' 참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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