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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새드엔딩
최창균  |  onnuree@mensa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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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1월 17일 (수) 17:52:25
최종편집 : 2018년 01월 18일 (목) 01:18:54 [조회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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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 제1독서의 말씀이 이번 주일은 삼상 3:1-20 이고, 다음주일은 욘 3:1-5,10 입니다(https://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lections.php?year=B&season=Epiphany). 한편, 저는 이번 주의 엘리 제사장과 다음 주의 니느웨 백성의 차이점을, 회개하여 용서를 받고 안 받고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주님은 요나에게 단지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그리고 나서 불구경하려고 성 바깥에다가 자리를 깔고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회개하자 주님께서는 용서를 하셨고, 거기에 대해 요나는 화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게 생각하는 성경의 인물 두 사람을 들자면 엘리 제사장과 사울왕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를 도와 기도함으로써 아이를 갖게 해 주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을 위탁받아 잘 양육해 주었습니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사무엘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화를 선포하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듣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무엘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전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라는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고려할 때, 저는 개인적으로 엘리 제사장이 당대의 제사장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님의 뜻하신 바를 실현해 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사역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완벽하진 못한 관계로 자식농사에서는 실패하고, 아들들을 사람을 만들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자식 교육을 고의로 등한시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청소년 이상이 되고 나면 생각처럼 쉽게 제어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제 상상력에 의한 소산이긴 한데, 저는 엘리 제사장이 끝까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을 타일렀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밭이 길가 혹은 돌짝밭이라서 아들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책임은 결국 엘리제사장의 몫이긴 합니다.

사울왕의 경우도 며칠을 사무엘을 기다리다 안 와서 병사들이 떠나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왕의 권위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세상의 권세에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원인은 사무엘의 지각때문이었습니다.

다윗도 제단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두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으며,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중세에는 왕이 교황을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제사장은 아니었지만 한 국가의 왕이 종교차원의 권위를 어느 정도 갖는 것은 부적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엘리 제사장과 사울왕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생각을 합니다. 저와 신학적 견해가 다른 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견해차를 가지고 서로 이단이니 아니니 할 꺼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에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은 해피엔딩으로 끝났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 이야기는 어린이 동화나 인형극의 소재로도 많이 사용되며 관객에게 웃음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두 가지를 모두 얘기해 줍니다. 우리의 삶도 결국 이렇게 잘 해결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엘리 제사장처럼 해도 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을 꾸짖었지만 이 녀석들이 들어먹지를 않았습니다. 제사장의 눈으로 보기에 얘네들 앞날은 뻔히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얘네 때문에 집안이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린이집이나 다닐만한 유아의 입에서 확인사살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들들이 전쟁에서 함께 전사할 때까지, 그 기간이 몇 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리제사장의 삶은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올 걸 알면서 그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포로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이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었던 것과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은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처럼 간단히 돌이켜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엘리제사장처럼 알면서도 비극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비극적인 길밖에 안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악은 면하지만 차악의 길을 선택하여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기도 합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삶을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의 시편도 여러 편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며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기도할 뿐입니다. 예방할 뿐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삶이 안 되고 니느웨 백성과 같은 삶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삼상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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