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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을 위한 기도— 숨 가쁜 길목에서 잠시 쉬며 읽는 여담 —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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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1월 09일 (화) 00:44:36
최종편집 : 2018년 01월 10일 (수) 22:04:10 [조회수 :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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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이 많아 노쇠해지면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힘이 되어 줄만한 일이 별로 없게 된다. 자식을 낳아 기르고 공부시켜 결혼까지 시키고, 그 자식들이 또 제 자식을 낳아 공부를 시킬 때가 되면 늙어 그야말로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무력해진다. 부부가 온통 자식들을 위해 있는 힘, 없는 힘 다 쏟아 부었는데도, 그러고도 모자라 무엇인가 더 해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한 게 노인 된 부모들의 공통된 서글픔이기도 하다.

필자라고 다를 리 없다.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버지,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기도라도 드리려고 아버지 앞에 나왔습니다.”

이때 하나의 말씀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라고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한 베드로의 말이다.

사실을 말하면 필자가 실제로 한 기도에는 ‘기도라도’라는 표현이 없다. 아무리 시답잖아 무늬만이 목사라 해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가리켜 ‘기도라도’라니 있을 법이나 한 말인가. 자식들한테 해 줄 것 하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다보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어 아버지 앞에 나왔습니다’라 한 것을 살짝 바꾸어 여기에 그리 표현해 본 것일 뿐이다. 그런 까닭이 있기에 베드로의 말이 떠오른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다보면 가슴이 벅차도록 부요한 마음이 될 때가 많다. 물질적이나 물리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한들 기도만 하겠는가 싶어서이다. 기도를 온전히 믿음으로 드릴 수 있다면 그렇다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기도를 드릴 때면 자신부터가 믿음에 잠기려는 노력부터 한다.

기도를 한다고 다 이루어 받는 것은 아니다. 이루어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런 기도는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 했는데,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행위’ 아닌 ‘믿음’(갈2:16참조)으로이다. 그러니 자식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모든 기도는 믿음의 바탕에서 해야 한다.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지 않은 채 하는 기도는 사상누각(마7:26-27)이요 바람에 나는 겨(시1:4)와 같다는 말이다.

 

   
 

 

감사는 마중물이 되어 기쁨을 퍼 올린다

 

필자의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한 기도는 그들의 모습을 가슴에 떠올리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아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 이들이 모든 가치의 맨 위에 믿음을 두게, 모든 가치의 중심에 믿음을 두게 하옵소서. 그래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필자는 이 같은 기도를 드릴 때면 감사의 마음에 눈시울이 촉촉해질 때도 있다. 이것이 신앙인의, 신앙생활의 모범답안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기에 드릴 수 있는 기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을 말씀에 의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에 대한 열심은 이단들이 정통신앙을 가졌다는 우리들보다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믿음이라는 것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이해한다는 데에 있다. 교주를 포함한 상층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심대하게 어지럽히고 가정을 파괴하며 개개인의 행복을 깨뜨리는 결과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성경을 공부하되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는 가운데 모든 선입견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하게 하옵소서.”

사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몰라서라기보다 욕심 때문이고, 아니면 그렇게 살려는 의지가 부족한 때문이다. “노루 친 막대기 삼년 우려먹는다”는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교회를 세습한 자들이 그런 짓을 한 게 성경을 몰라서이겠는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믿는 사람치고 살전5:16-18의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이 말씀만 실천한다면 신앙생활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은 성공적으로 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에 필자는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면 이 말씀처럼 살게 해 주시라고 빈다. 다만 순서를 바꾸어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해 주시라는 것부터 시작한다.

필자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한테 드리는 ‘감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사에 다 감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불가능하다 해야 옳을 것이다. 불행이 닥쳐 와 죽을 지경인데 형식 아닌 진정한 감사가 되겠는가. 그러나 감사의 범위는 넓혀 갈 수 있다. 신앙으로 바로 설수록 그 범위는 넓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하면 어떠한 문제보다도, 불행보다도 하나님이 크게 느껴져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고, 불행이 불행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성령충만이고 믿음이다.

‘감사’는 기쁨을 부른다. 마중물이 되어 기쁨을 퍼 올린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악을 행할 수 있겠는가, 남을 미워하며 해칠 수 있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요 기쁨의 토대가 된다.

기도는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공기요, 물고기에게 있어서라면 물이다.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기도는 그 호흡이라 하지 않는가. 음식물은 며칠을 섭취하지 않아도 죽지 않지만 호흡을 중단하면 곧바로 숨이 끊어지고 만다.

한 자리에서 그에 전념하여 하는 것만이 기도는 아니다. 만약 그것만이라면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기도했던 대로 살려는 자세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삶 자체도 넓은 의미에서의 기도가 된다. ‘아멘’으로 마치고 그것뿐이라면 그것은 기도라기보다 종교적 이벤트성 의식일 뿐이다. 기도가 정말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도가 일상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기도를 주로 집에서 하는데, 자식들도 손자들도 그러기를 바란다. 신앙생활의 중심은 가정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 자신보다 이들이 더 깊이 있는 하나님과의 독대를 하도록 해 주시라고 기도한다.

그런 김에 이들이 가정예배도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시라는 기도도 드린다. 그것이 형식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해도 크리스천이라는 자각의 발로이니 드리기를 바라서이다.

 

 

황금 보기를 황금 같이 하라

 

필자는 영적 생활과 육적 생활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 자체, 그러니까 일상 자체가 영적 생활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3)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드리는 예배는 특정한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형식에 따른 의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때 또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니 산과 들도 좋고 시장복판이나 화장실이라 할지라도 안 될 것은 없다. 요약해 말하면 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이요, 신앙생활은 예배이고 산제사가 되어야 크리스천인 것이다.

“이들 모두가 건강하고 어느 정도는 장수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건강한 것만이 꼭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는 없고, 순교가 은총 중 으뜸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이것이 필자 신앙의 한계이다.

“물질도 넉넉히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더불어 살므로, 나누며 살므로, 조금은 빠듯한 생활이 되게 하시고, 그 빠듯함으로 인해 오히려 기뻐하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見金如石)’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 영향도 있어 그는 청렴한 충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사람은 물질 없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금은 황금 같이 봐야 하지 돌 같이 봐서는 안 된다. 물론 최영 장군이 그랬듯이 공직자는, 아니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황금일지라도 그게 검은 것(돈)이라면 돌같이 봐야 함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그러나 검지 않고 깨끗한 그것이라면 열심히 일하여 되도록 넉넉히 소유해야 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사도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이 땅에 건설하는 천국은 더불어 사는 세상, 나누는 세상이다. 그런데 있어야 나눌 수 있지 않은가.

‘더불어 살므로, 나누며 살므로, 조금은 빠듯한 생활이 되게’ 해 주시라 기도한다 했는데, 이 또한 필자의 한계이다. 믿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조금은’이 아니라 ‘아주, 아주 빠듯한’이라 기도해야 했을 것이다.

“하는 일도 다 잘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만사형통하게 해 주옵소서’라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너무 욕심 사납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나, 그리 해 주시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아서이니 어쩌겠는가.

기독교는 믿는다 해서 만사가 형통하는 종교가 아니다. 고난이 있고 뚫고 나가야 할 난관이 있는 종교이다. 십자가의 종교이다. 그러니 이런 기도를 빠뜨리지 않는다.

“연단과 훈련을 위한 고난은 주실지라도 슬픈 일은 만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이제 막 자라나고 있는 손자 손녀들을 위해서는 이런 기도도 드린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들 각자에게 제일 잘 맞는 꿈, 이들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꿈을 갖게 해 주시고, 이들이 기도하며 땀 흘려 그 꿈을 이뤄 가게 하여 주옵소서.”

필자는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 대충 이상과 같은 기도를 공통적으로 먼저 드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개별적인 기도도 드린다. 장점은 그것을 주셨음에 감사드리고 더욱 신장시켜 주시라 기도드린다. 그리고 단점과 문제점은 고치고 해결해 주시라 기도드린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마라

 

필자는 젊었을 때, 늙어 할 일이 없어지면 원도 없이 기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이없는 오산인가. 기도는 중노동인데 말이다. 젊었을 때 한 번 앉으면 두 시간씩 하던 기도가 늙으면 한 시간 하기도 힘에 부친다. 일도 기도도 젊어 힘이 있을 때 더 많이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들어 주시는 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됐건 무리하게 바라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을 칭찬하셨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은총은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앉은뱅이에게 있어 은과 금보다 일어나 걷는 것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중하듯이 우리가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중 기도보다 우선인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하는 일 또한 기도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처럼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혹 무너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삼상12:2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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