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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어지지 않는 사람들과 교회를 보고서필자 <이민성도>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분(현직 장로)
당당뉴스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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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8월 23일 (수) 00:00:00 [조회수 : 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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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과 희망(www.gospel-hope )에 "이민성도" 라는 필명으로 올린 글 내용이 하도 좋아서, 필자를 확인하고 필자의 허락을 받아 익명으로 전재합니다. 필자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분(현직 장로)으로 미주교회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쳤는 바, 오늘날의 한국교회 실상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어느 평신도의 외침"이라고 판단하여 연재합니다. 필자는 당당뉴수 자유게시판을 통해 기고합니다. 당당뉴스가 책임지고 실명을 보호합니다. (당당뉴스 운영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평생을 조직폭력배 생활을 하다가 목회자가 되었던 사람이 있다. 조폭사회에서 맹활약(?) 하다가 마약에 손을 대고 죽음직전까지 갔다가 복음을 받아서 변화를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다가오자 과거에 조폭 생활을 할 때 몸에 익혔던 옛버릇이 그대로 다시 올라오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목회자를 보고서 사람이 바꾸어진다는 것이 간단치 않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이민교회에서 특히 많이 일어나는 재정의 불투명성과 항목분산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수 년이 흘러서 돌아보면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는 곳이 많음을 볼 것이다.

더구나 자기 주관이 강하고 옹고집을 가진 목회자와 직분자들(장로와 안수집사들)을 바꾼다는 것은 하늘 별 따기 보다도 어렵다는 말들을 한다. 명확히 드러난 불법과 비리 때문에 심한 비판을 받아 체면상 조금 바뀌어진 듯 하다가 또 다시 세월이 흐른 후, 본래 위치로 돌아 와 있는 것도 볼 것이다. 결국 바꾸어 보겠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실망하면서 두 손을 털고서 포기하는 일들이 훨씬 많다.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자들과 무신론자들과 안티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과거를 조사해보면 그 뿌리가 교회출신들과 상당한 관련이 많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바꾸어지지 않는 사람들과 교회를 보고서 “도저히 안되겠다” 는 마음을 먹고서 극단적인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이나 계급투쟁을 통해서라도 확 뒤집어 엎어 버리고 부르조아들은 모조리 사상학습을 시켜서 의식구조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일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1970년대~1980년대 나라가 어려웠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학벌차, 지역차, 빈부격차 등에 따른 극심한 차별과 고통을 겪었을 때 “전쟁이라도 확 났으면 좋겠다” 는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 비참한 전쟁이 정말 나기를 바라면서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도저히 바꾸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회의 모순적인 구조와 권력자들의 횡포와 부조리에 대한 울분이 그렇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주로 중대형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향하여 아무리 외치고 때로는 법으로 고발도 해 보고 언론에 공개를 하여 망신을 주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들의 길로 나아 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비판의 강도를 가하면 가할수록 그 반작용 또는 반동으로 뭉쳐진 힘의 의지를 발동하면서 거대한 인맥과 조직과 물질로 정치분야와 언론분야와 심지어 사법분야에까지 힘을 뻗치고서 자기들이 만든 조직의 방향과 목적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기도 하는 것을 목격한다.

불법 속에 있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바꾸어지기는 고사하고 시간이 갈수록 힘의 의지가 작동하면서 기괴한 정당성과 주장하는 사람들과 맞서서 “그건 아니다” 라고 끝까지 진리와 진실을 붙잡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앞으로 과연 몇 명이나 남을 수 있을까라는 우려도 해본다.

나는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고 있는 한 가정이 있는데 세상 말로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하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가정이다. 미국 안에서 적어도 20% 안에 들어가는 경제력을 가지고서 살아가는데 가장인 그리스도인 형제가 자기의 가정을 생각하는 정도는 정말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사람보다 진실되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이다.

내가 그 형제의 가족사랑과 가슴을 보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 가정이 행복한 방향 만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부부관계, 형제관계, 부모관계를 볼 때, 참으로 옆에서 보는 내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그 형제의 사랑과 진실과 헌신이 있는 그대로 교회와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하셨고, 뜨거운 사랑과 헌신과 희생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가졌는데 왜 가까운 가족들은 그의 진실과 진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까에 대하여 안타까움과 안스러움으로 지켜 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늘 부족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 안에서는 사소한 감정 문제 외에는 교인들끼리,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수백명, 수천명의 교인수가 모이는 교회의 덩치가 커지고 재정이 늘어나며 담임목회자와 직분자들의 활동영역이 늘어가기 시작하면 소리 없이 문제들이 쌓이게 된다.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공로로 담임목회자는 영웅이나 우상시 되고 중견기업의 CEO와 같은 행세를 하면서 결국 교회는 성경적인 원리보다는 경제논리에 사로잡힌 지독하게 세속화된 구조로 나아간다. 차라리 지독할 정도로 세속화 되었다면 세상 회사처럼 제대로 된 정책감사와 재정감사도 받고 평가로 받고 견제와 비판도 받아야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봉건주의나 전체주의에서나 볼 수 있는 1인 독재 또는 집단 이권 또는 집단 권력주의로 전락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절대 권력이 생기면 어떤 집단이고 부패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부패와 비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는 이래서 되겠는가?” 하고 고치기 위하여 열심히 건의하고 외쳐보지만 결국 교회의 본질과 진실은 전부 사라져 버리고 힘의 조직만이 돌아가는 것을 깨닫고서 실망하여 교회를 옮기는 일이 벌어진다.

왜 교회를 사랑하는 그 진심을 몰라줄까라는 마음과 왜 가정을 사랑하는 그 진심을 몰라줄까라는 마음은 주어진 환경과 여건은 전혀 다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할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에도 나라와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양심세력들이 동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환경이 좋아진다고 하여도 그 속에 있는 사람이 온전하게 바꾸어져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도 없거니와 살아가는 기쁨이나 소망을 전혀 가질 수 없으며 고통만이 가속화 될 수 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성경을 동원하지 않더라고 일반론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로 보아도 절대로 바꾸어지지 않는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사람들, 반복적인 악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리들 스스로 도전적인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도전적인 질문 앞에서 비정상적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조금 괴롭지만 비정상적이 되어주거나 비상식적으로 되어 주면서 참는 것이 최고라는 것으로 도를 닦으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날마다 스트레스를 받아 갈등하고 괴로워하면서 비정상적인 사람의 의식구조와 환경이 확 바꾸어지도록 금식하고 통회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우리들 앞에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가정을 너무나 사랑하고 아내와 자식들과 부모를 자기 목숨과 같이 사랑하였던 그 형제도 이러한 도전적인 질문 앞에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외견 및 수치상으로 적어도 영향력을 가진 교회의 목회자가 언론을 통해서 법정을 통해서 완전히 불법과 비리가 드러나 형무소에서 콩밥까지 먹고 나왔는데도 뻔뻔하게 강단에서 “나는 죄없다” 고 하는 일이나 그를 도리어 감싸는 정신 나간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외쳐보아도 외치지 않는 것과 똑 같은 결과가 나오는 이 사태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처절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적인 방법이라면 가정을 확 뒤집어 엎어버리고, 교회도 확 뒤집어 엎어버리는 방법이 가장 속전 속결이고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며 성경적인 방법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물어보고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 형제가 고통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부탁할 때 마다 그에게 반복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묵상해보라” 는 것이었다. 물론 그 형제도 많은 기도와 말씀 묵상을 하기 때문에 나의 이 한마디가 전부 이론적이고 교과서적이거나 정답이 정답이 아니라고 들려질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과 교회와 가정에서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기 힘든 도전적인 질문 앞에서 정확한 해답은 결국 성경밖에 없으며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내가 성경을 잘못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기간 중에 크게 웃었다는 표현이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사역을 하시면서 즐거운 일보다 힘들고 어렵고 슬픈 일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태어날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서 나셨으며 살 곳이 없어서 가장 척박한 땅인 나사렛에서 살았겠는가? 당시 세계를 통일한 로마제국의 영광은 대단하였다. 식민통치를 받았던 유대인들을 위한 예루살렘성전의 건축기간은 46년이었으며 고고학에 의하면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고 한다.

전세계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유월절과 같은 절기를 보내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는 숫자가 수백만명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일하는 제사장이나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과 종교권력과 연합된 형태로 백성들에게 군림하였으며 모든 권력을 누리는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세상 상식으로 볼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의 띠가 연결된 집안에서 태어나면 훨씬 복음증거가 쉬울 수도 있었지만 정반대로 예수님은 출생에서부터 성장기간과 공생애 기간 동안 겪는 삶 전부는 가난과 탄식과 고통과 수고의 연속이었다.

수 많은 기적을 행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지만 사람들에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의심과 멸시와 위협이었다. 심지어 유대지도자들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당하고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당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버림을 당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들에게 그 버림받는 십자가의 주님을 영접하고 그 고난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구원을 받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가장 힘들게 살았으며 가장 가난하고 연약하며 고통으로 살다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조차 버림을 받았던 그 십자가의 주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 놓은 그 사랑의 가슴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전하고자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은 그 주님의 가슴을 거부하여 왔으며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 놓을 정도로 희생과 헌신과 사랑을 가족들에게 쏟아 붇고자 하는 그 형제의 가슴을 가족들이 진심으로 받아주지 않는 것과 무엇인가 비슷하지 않는가?

교회가 바르게 되기를 위해서 수 많은 기도와 권면과 간언과 섬김이 있지만 그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인가 비슷하지 않는가?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거부하고 싫어하며 멀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아파하고 탄식하는 주님의 가슴과, 가족을 목숨과 같이 사랑하는데도 알아주지 못함에 아파하는 그 형제의 가슴과, 교회의 불법을 보고 아파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은 전부 동일한 하나님의 가슴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가슴 속에는 놀라운 역설의 복음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세상과 교회들이 바꾸어지지 않으면 않을수록, 아픔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바꾸어지지 않을 것 같은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고서 다가오는 절망감이 깊어질수록 바로 성경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성경의 이루심-하나님의 주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강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셨겠는가? 힘이 없어서 포승줄에 묶여서 바보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뺨을 맞고 침 뱉힘을 당하고 수욕을 당하고 매질을 당하여 벌거벗김을 당하였겠는가?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하는 고통의 지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구원받아야 마땅한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처절하게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남겨둔 고난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가슴을 우리들도 느끼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베드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라고 증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바꾸어지지 않고 사람들이 바꾸어지지 않는 점에 대하여 고통으로 아파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분노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더구나 “너희들은 언젠가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숨겨진 복수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나는 한 때 교회 안에서 지독하게 이중인격적이며 비도덕적인 목회자와 직분자의 모습과 그리고 그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서 아파하는 어떤 형제의 가슴을 보고서 극도로 분노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육체의 질병으로 죽음 일보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어떤 형제에게 극심한 상처를 주었던 어떤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를 보고서 더욱 분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족을 목숨처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거부하는 가족들을 보고서 분노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분노하여도 고통을 가하였던 사람들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바뀌어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반대로 자기 길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결국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스스로 분노하는 나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 형제가 당하는 고통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 모두가 당하는 고통이며, 그 고통이 바로 세상이 바꾸어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주님이 당하는 고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마지막에 총정리를 하는 말씀 가운데 세상은 절대로 바꾸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의 환경 자체를 바꾸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가진 믿음으로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을 이기게 하신다는 복음의 역설과 비밀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만 실망과 아픔만을 되돌려 받는다는 형제들과 자매들을 향해서 변함없이 대답해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러한 복음의 역설과 비밀이다. 우리들이 받는 아픔의 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들이 가지는 탄식의 지수가 깊으면 깊을수록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로 나아가신 주님의 가슴을 더욱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개나 돼지는 의식의 레벨이 대단히 낮다. 배가 고프면 고통을 느끼는 정도의 의식수준만 가지고 있다. 개나 돼지가 아무리 주인에게 욕을 얻어 먹어도 욕먹은 그날도 주인이 주는 밥을 열심히 먹고 그날도 열심히 잠을 청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개나 돼지를 키우는 주인에게 “당신 왜 개 같이 살아, 왜 돼지새끼처럼 처먹기나 하면서 살고 있어” 라고 말한다면 아마 그 주인은 그렇게 말한 사람의 멱살을 잡고 흔들거나 성질이 급하고 주먹이 센 사람은 몇 대 날릴 것이다.

개돼지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인 주인은 개돼지와 달리 고통지수가 대단히 높은 의식수준을 가졌기 때문에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높은 의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고통지수와 탄식지수가 훨씬 높고 깊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고통지수와 탄식지수를 가지고 계셨던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지금도 예수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교회와 세상을 보고서 우리 속에서 아파하시고 탄식하시고 계신다.

반면에 이 세상과 교회의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어떤 고통을 느끼지도 탄식하지도 않으면서 신나게 낄낄거리는 자가 바로 마귀라는 것도 알 것이다. 무엇인가 부조리하고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세상과 교회와 사람들을 보고서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탄식도 하지 못한다면 개돼지가 가진 의식이나 마귀가 가진 의식과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보고서 느끼시는 고통지수가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의 잔을 옮겨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기 조차 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아가실 때에 자기를 위해서 울고 있는 여자들을 보시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고 하셨다. 하나님이신 메시아가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주로 영접치 아니하고 도리어 때리고 침뱉고 모욕을 주면서 살인강도들과 함께 매달리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아버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과 그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에수님의 가슴이 사라지고 없는 교회와 가정을 바라 볼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그들을 바꾸어 달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가슴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격하는 그들을 위해서 아파하며 탄식하며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의 제도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서 세상과 마귀에게서 포로된 자리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면서 세상과 교회의 모습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녀들의 생명일 것이다. 그런데 종교조직과 야망에 찬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로 모아 놓고서 다시 얽어 매어서 종으로 삼는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보시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들이 아파하시는 것보다 훨씬 아파하시고 탄식할 것이다.

조직과 사람의 노예가 된 증거가 바로 불법과 비리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며 눈이 멀어서 비리의 지도자에게 끌려 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알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목회자가 함부로 어두운 곳에서 바지를 내리며 몸부림 치다가 감옥소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고., 교회 돈을 자기 것처럼 횡령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것이 전부 범죄사실로 드러나 인격과 삶을 보여준 벌거숭이 상태가 되어 있는데도 그 벌거벗은 몸뚱이를 가지고서 강단에서 여전히 잘난 체 하고 거룩한 척하는 이 처참한 상태를 보고서 사람들이 아파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감싸는 교인들을 향해서 그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논리적으로 본다면 의식이 없는 개돼지나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불러야 하지만 눈먼 상태이기 때문에 하는 짓이기에 아파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불법과 비리와 거짓을 보고서도 어떤 아픔도 없고 탄식도 수 없으며 목 놓아 울 수 없는 상태라면 암이나 에이즈나 중증의 정신분열증보다 훨씬 더 심각한 난치병에 걸려 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을 내어 놓을 정도의 헌신과 희생과 섬김으로 살아왔던 한 사람의 진실과 가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들이 있다면 아마 그 가족들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우리들은 이제 앞에서 주어졌던 도전적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해답을 알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한 고통과 탄식이 크고 깊으면 깊을수록 십자가의 주님을 더욱 체험하고 만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바꾸어지지 않을 것 같은 세상과 교회와 사람들을 보고서 이 세상에 단순한 먹기 위해서 태어나 내 만족대로 살다가 의식과 이성이 없이 살다가 죽는 개 돼지가 아닌, 십자가의 주님과 같이 고통 지수를 느끼면서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나를 통해서 전해지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나고 피어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가슴을 가졌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꾸어지지 않는 사람들과 교회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불법과 비리와비례하는 고통을 느끼는 우리들의 가슴과 입술은 불평과 불만과 분노가 아닌 세상을 향해서 가장 깊은 고통지수를 체험하신 십자가 주님을 더욱 알게 되는 감격과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기도의 삶으로 성숙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과 마귀에게 포로된 자들을 보시고서 아파하고 탄식하시고 우셨던 주님의 가슴을 알리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서 저지르는 수 많은 불법과 비리를 보는 우리들이 얼마나 아파하며 탄식하고 있는지를 체면 불구하고 “강도야!” “불이야!” 하고 소리를 쳐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셨지만,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화 있을 찐저, 위선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자들아, 네 아비는 마귀다, 나보다 앞 선자들은 전부 도둑이요, 강도다” 라고 알리셨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던 주님께서 유독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그들의 정체를 알리신 것은 바로 그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과 방향이 아닌 그들이 만든 종교권력에 종 되고 포로 되어서 꼼짝 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법과 부정의와 불의가 넘치는 것을 보고서 아파하고 탄식하면서 외치는 사람들의 목적과 방향은 바로 불법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닌 그 속에서 종이 되어 있는 교인들의 눈이 진실과 진리로 인하여 열려져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주님께로 나아가 보호를 받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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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속한 교회의 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고 탄식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십자가의 주님을 주권자로 모신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가정의 신앙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고 탄식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십자가의 주님을 가장으로 모신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아무 고통을 느끼거나 탄식도 없으며 고통하고 탄식하는 자들을 도리어 욕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적도 없고 이름뿐인 가짜 신자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여러분이 속한 가정의 신앙문제로 인하여 전혀 고통을 느끼거나 탄식도 없으며 고통하고 탄식하는 가족을 도리고 욕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십자가의 주님을 가장으로 모신 적이 없는 이름뿐인 가짜 신자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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