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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는 사람들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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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2월 19일 (화) 10:46:37
최종편집 : 2018년 01월 01일 (월) 21:33:47 [조회수 : 2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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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모두 성경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서,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르침이 다르고 감리교와 장로교의 가르침이 다르다. 500년 전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그는 가톨릭과는 다른 교리를 내세우면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고 나서 두 교회가 맞서서 1618년에서 1648년까지 독일을 주요 무대로 30년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피를 흘렸다. 이러한 두 교회의 갈등과 참혹한 전쟁은 내 교회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런데 두 교회가 내세우는 가르침은 그렇게 생명을 걸고 싸울 만한 절대적 진리인가? 중세의 가톨릭교회에서는 공덕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고, 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에 반대하여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존 스토트나 김세윤을 비롯한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은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은 결과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은 진리지만, 성경의 일면만을 내세우는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감하는 때에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위를 간과한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전혀 실수하지 않았다고, 그들의 가르침은 절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인간이 아닌 신으로 모시는 일, 다시 말해서 그들을 우상화하는 일이다. 우리는 개혁자들이 그 시대가 낳은 신학자들이라는 점, 그 시대의 울타리 안에서 사고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해돈 로빈슨, 브라이언 채펠, 팀 켈러 등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강해설교를 성경적인 설교라고 주장하면서 강해설교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믿음만을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행위에 관한 구절에 발목이 잡혀서 강해설교를 제대로 진행시켜 나가지 못한다. 여기서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행위를 외면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은 결과며,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는 일이다.

 

강해설교

 

교회용어사전에서는 강해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성경의 한 책, 정해진 본문을 순서대로 설명해 가면서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설교다. 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성도 각자의 삶에 적용시키는 데 효율적인 설교로서, 성경의 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해서 설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회의 설교 범위는 몇 구절에서 한 장 전체를 강해하기도 한다. 설교자와 듣는 청중이 함께 성경의 가르침에 몰입하며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설교 형태다.”

강해설교에서는 본문이 설교를 지배해야 하며 하나의 주안점을 설정하는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메시지는 성경 본문에서 나와야 한다. 강해 설교자는 먼저 본문의 뜻을 찾고, 하느님이 그의 메신저로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에게 어떻게 인격과 신앙에 변화를 주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강해설교의 주체는 말씀이 되어야지 설교자의 사상과 의도가 본문을 꿰어 맞추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강해설교를 성경적 설교라고 말한다.

강해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설교할 성경의 본문을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 본문에 나오는 단어, 문법, 나아가서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야 한다. 여러 가지 주석을 참고해서 그 본문에서 기록자가 이야기하려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야 한다. 먼저 성경 전체 안에서 그 본문의 의미를 살피고, 다음으로는 마태복음에서 본문을 택했다면 마태복음 전체의 문맥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본문이 바로 앞뒤에 나오는 구절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문맥을 소홀히 하면 선택한 본문을 엉뚱하게 해석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강해 설교자는 주어진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한다.

특별히 성경 전체의 문맥을 살펴야 한다는 말은 신약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처럼, 구약도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서뿐 아니라 서신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수주의자는 구약을 선호하고 진보주의자는 신약을 좋아한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선택할 때,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것들만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신약도 구약도 강해하고, 로마서뿐 아니라 야고보서도 강해해야 한다. 그리고 에베소서면 에베소서 전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강해해야 한다.

설교자는 단순히 성경의 해석자에 머물지 않는다. 성경의 특정한 구절의 뜻을 회중의 필요와 환경에 맞게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깨닫게 해야 한다. 강해 설교자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문화적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과거에 선포된 말씀을 현대의 언어로 바꾸어서 선포하고 교인들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강해설교와 이신칭의 교리

 

이신칭의론자들은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지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신칭의 교리에 집착하면서 행위를 외면하는 설교자들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같은 바울 서신서들에서 믿음을 강조한 구절들을 찾아 설교한다. 반면 행위를 강조하는 구절은 피한다. 그런 경우 그의 설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렇게 성경의 일부만을 선택하는 설교는 진정한 강해설교가 아니다. 설교학자들이 말하는 강해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성경적인 설교이기 때문이다.

의신칭의의 교리에 집착하는 설교자가 이사야를 처음부터 강해하기로 마음먹고 설교본문을 택한다면 두 번째 주일의 본문은 1장 10-17절이 될 것이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제사에는 열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질책하고 있다. 그런데 믿음만을 강조하는 강해설교자는 그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16-17절에서 발목이 잡힌다. 거기에 오면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버리고 선행을 배우며”라고 행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전체를 강해하기로 계획을 세운 마당에 둘째 주일에 본문을 건너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거부감을 느끼는 16-17절의 결론부는 빼고 제사에 관한 부분만을 가지고 그 날의 설교를 어물어물 넘기려고 할 것이다. 그는 교인들 가운데에 자기가 제대로 강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등에서 진땀이 나게 마련이다.

특히 이사야 1-5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질책하고 있다. 따라서 행위를 외면하는 칭의론자는 아예 이사야서를 가지고 강해설교를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사야서뿐 아니라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선지자들의 권면을 담고 있다. 따라서 칭의론자는 예언서를 가지고 강해설교를 할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신약에 와서 행위를 중시하는 야고보서는 가장 먼저 강해설교자의 설교 계획에서 제외되기 마련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행위가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생명책에 기록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하는 요한계시록도 빠져야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라고 권면하는 복음서도 칭의론자의 강해설교 본문으로 마땅치 않다.

특히 마태복음 7장에 가면 진땀이 나게 마련이다. 마태복음 7장 15-27절을 본문으로 택할 경우 인간의 행위를 경시하는 강해설교자는 할 말이 없다. 특히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구절은 분명히 그가 지지하는 교리에 맞지 않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그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구절을 제외하고는 마태복음 7장 15-27절을 가지고 강해설교를 할 수 없다.

인간의 행위를 무시하는 강해설교자가 겪는 고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신칭의를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도 믿는 자의 삶에 대한 권면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경우 1-11장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지만, 12-16장에서는 삶을 다루고 있다. 갈라디아서의 경우에는 1-4장에서는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5-6장에서는 할례로 시작해서 성령의 열매를 말하고 행함에 대한 권면이 6장 9절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에서 절정에 이른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목사가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강해하기 시작한다면, 믿음을 언급하고 있는 3장까지는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의 삶에 관해서 말하는 4장에 가면 당황하면서 4장을 다 끝내지 못하고 히브리서 같은 책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그러면 히브리서로 가면 행위에 관한 권면을 만나지 않는가? 6장 처음 부분과 13장에 가면 거기에도 행함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함을 외면하는 강해설교자는 복음서든 서신서든 중간이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행함에 대한 언급이 그의 발목을 잡기 때문에 어느 책을 택하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해 나갈 수 없다.

이런 설교자가 강해설교를 하려면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들만을 여기저기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강해설교가 아니고 성경적인 설교도 아니다. 설교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성경구절들만을 택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일부만을 전하는 것이지 성경 전체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게 되고 그들의 신앙은 병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해돈 W. 로빈슨은 『강해설교』(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설교자의 신학이 성경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면서, 설교자의 선입견이나 교리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때 과감히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이를 해석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그의 교리적 확신을 재검토하고, 그가 가 장 존경하는 선생의 이론까지도 배척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이전에 가 졌던 그의 성경에 대한 이해가 성경 기자의 개념과 상치될 때에는 기꺼이 입장을 180도로 바꿀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선입견이나 교리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때,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바꾸기보다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책들만을 골라서 ‘정경 안의 정경’을 만든다. 정경을 정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많은 책 가운데서 참 복음을 담고 있다고 판단되는 책들만을 골라서 정경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믿음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믿음에 관한 책들은 중시하고 행위에 관한 책들은 무시함으로써 ‘정경 안의 정경’을 만들어 낸다.

‘정경 안의 경전’을 만든 대표적인 사람은 루터다. 그런데 G. F. 하젤은 『현대 신약신학의 동향』(대한기독교출판사)에서 현대 신학계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심지어 루터파 신학자들까지도 ‘정경 안의 정경’을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젤은 현대 신학자들이 ‘정경 안의 정경’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약의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임의성(큉, 에벨링, 디임), 주관성(쿨만, 마이어) 및 감소주의(큉)를”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편향적으로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E. F. 하젤뿐 아니라 존 스토트, 리처드 린츠, 팀 켈러 등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들은 한 목소리로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마감하는 지금 우리는 “정경 안의 정경”을 만들어서 성경을 임의적으로, 주관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 교회 조직이나 교회의 행정을 개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개혁은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지 말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성경은 교회의 조직이나 행정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 올바로 읽기’가 우리의 모토가 되어야 한다. ‘오직 성경’을 모토로 내세운 루터는 성경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의 ‘공덕’ 중시를 비판하면서 ‘오직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는 우를 범했다. 이제 우리는 믿음과 행위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말고 그것들의 균형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함께 ‘성경 올바로 읽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

여기서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지만, 성경은 믿음이나 행위 외에 아주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소외된 자들에게 대한 관심을 비롯해서 십자가, 순종, 전도, 봉사, 화평, 사랑 등 여러 주제들이 모두 합력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을 버리고 성경이 담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맛에 맞는 한두 가지만 취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것은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는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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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어떤한분 (223.28.157.90)
2017-12-22 20:37:51
미쿡에서 건너와 113년된 교회를 3년도 안되 말아 잡수신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순종, 전도, 봉사, 화평, 사랑 전혀 없고
교만충만,자아도취, 왕자병, 위선, 거짓말, 잠드럽게많이자고, 식탐마왕, 노동경멸,빈부차별,
말만 구제 강조 하고 하는거 딱히 없음. 십일조 매우 강조.
교인들과 맛집이야기 , 먹는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자기 반대편 성도 무식하다고 흉만봄
성경적으로 올바른 목사인지 저런분 가르침으로 신앙생활 하다가 나도 피폐해짐
근데 목사 안수 받았다는 사실이 히한함.
제대로 올바른 지도자 만나길 소원하고 기도함
현재는 목사님들 설교에 의존하기보다 보다 기도를 많이함
이상한 목사 잘못만나 신앙생활 꼬임 은혜단절됨.
목사님 잘 만나는것도 복임.
리플달기
9 12
잔나비 (175.223.38.150)
2017-12-21 21:25:20
천국, 영생, 구원, 택함 받은자, 성령세례자

그날에 예수님만 아신다.!!!


성경강해가 어렵구나.

[방이동 나라도둑놈과 세습자는 할 능력도 안 되겠다.]
리플달기
5 12
아는체 하지 마라 (99.225.193.49)
2017-12-20 04:45:50
성경 조금 알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떠들고 다니지 마라.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아는 지식이 정말 세상의 일부분임을 알고,
고개 숙일 줄 아는데,
목사들은 성경 몇 구절 암송하면서,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떠드는 것 보면,
.....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알면 내가 체험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종교 개혁시대에 목사들이 할 일이다.
리플달기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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