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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호 교수의 논문 "루터, 참된 믿음을 말하다"에 대한 논찬
구영철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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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0월 25일 (수) 03:15:19
최종편집 : 2017년 10월 25일 (수) 05:08:34 [조회수 : 1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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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호 교수의 논문 "루터, 참된 믿음을 말하다"에 대한 논찬

 

구영철 목사(영등포중앙교회)

   
 

 

권진호 교수의 논지는 아주 분명하다. 세간에서 종교개혁자 루터에 대한 일말의 오해를 그릇된 것임을 지적하고 이 맹점을 불식시키고자 하는 논지가 역력하다. 그 오해는 다름아닌 루터의 종교개혁적 강세가 „오직“ 믿음에 있기에, 사랑이란 주제의 맥락에서 ‚선행‘에 비교적 강세점이 약하다는 점이다.

먼저 살펴볼 내용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련하여서 1520년 독일 내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520년대 루터의 주저는 대체로 3가지를 말한다.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바빌론 유폐“,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이다. 그러나 “선행에 관하여“가 포함되어 4대 문서로 불려도 좋다.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 당시 푸거 가문 출신의 야콥 푸거(Jakob Fugger, ~1525년)는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대부호였다. 광산업과 은행업 등 그가 손대는 사업은 모두 일사만리 대박 가두를 달렸으며 그의 부는 오늘날 계산으로도 산정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거 왕조와 로마 교황청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황제 막시밀리안 1 세의 조카인 칼을 다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만드는 데 아주 중추 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추기경 알브레히트가 1513년과 1514년에 각 각 브란덴부르크와 마인츠 대주교좌 직의 성직을 사기 위해 4만 8천 굴덴(최소 65억원)이라는 거금을 빌렸던 인물도 바로 푸거 가문의 야콥 푸거였다. 알브레히트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선포된 새로운 면죄부를 판매한 대금의 반을 이 대출을 갚는 데 사용했다. 때문에 루터는 1520 년에 쓴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라는 글에서 푸거 가문에 대해 신랄 하게 비판했다. “참으로 푸거 가문이나 그런 사회 집단에게는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할 것이다.” 당대 재벌에 대해 과감하게 쓴소리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야콥 푸거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도 같이 학문을 장려하는 등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의 이름 에는 ‘부자’라는 아명이 붙어서 불리기도 했다.

고타 Gotha - 이곳은 또한 종교개혁 시대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이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내가 고타 출신이며 그의 딸 중 두 명이 이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이 도시의 프리덴슈타인 성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성의 연구 도서관에 있는 루터와 멜란히톤과 칼빈 등의 저술들 가운데 루터의 1520년도 초판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토마스 뮌처 Thomas Müntzer - 1520년 루터는 자신의 개혁사상을 매우 열정적으로 따르던 뮌처를 츠비카우의 마리아 교회에 설교자로 추천했다. 여기서 소위 ‘츠비카우의 예언자들’ 운동에 심취하게 된 뮌처는 종말이 곧 오리라는 종말론적인 급진사상을 전했는데, 이로 인해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계급질서로 규정된 사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규정된 사회를 철저 하게 요구했던 게 화근이 됐던 것이다. 그는 결국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할레 Halle - 이곳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철저하게 이루고자 애쓴 도시가 됐고 그의 정신을 충실히 따르는 여러 인물을 배출하게 됐다. 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프랑케다.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년)는 ‘고아원의 아버지’라 불리며 사회복지사업을 중심축으로 삼아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밝히 비추고자 애쓴 사람이었다. 루터가 ”선행에 관하여”에서 말한 정신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데 주력한 결과 오늘날 프랑케 재단이 그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업을 전승하고 있다.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은 경건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됐다. 그 중에서도 할레는 경건주의의 모태 역할을 톡톡히 해낸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프랑케를 통해 개혁 정신이 확장됐던 것이다.

메르제부르크 Merseburg - 1485년 이후로 알베르트 계열 작센의 공작령에 귀속된 이곳은 1517년 루터의 95논제 게시 이후로 종교개혁에 대해 아주 완강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1520년에는 루터에 대한 교황의 파문경고장이 공적으로 낭독되고 게시됐고, 1년 후에는 루터의 저술들이 대성당 앞에서 소각될 정도였다.

나움부르크 Naumburg - 나움부르크 대성당은 나움부르크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데, 13세기에 대부분 완공됐으며 후기 로마네스코 양식과 초기 고딕 양식이 뒤섞인 건축물이다. 이곳이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유명하게 된 것은, 이 교회에서 1542년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가 개신교 최초의 감독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가 참여 한 가운데 집례는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이루어졌다.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 Nikolaus von Amsdorf - 그는 루터와 동일한 해 에 태어난 종교개혁가로서 나움부르크에서 1546년까지 봉직했다. 초기에 루터에 대한 감정이 그리 뜨겁지 않았으나, 결국 종교개혁의 대 열에 합류하고 나서는 가장 열렬한 개혁가가 됐고 1519년 라이프치히 논박 때에는 루터를 대동하게 됐다. 루터 또한 그에 대한 신뢰가 깊어 졌으며 1520년의 주요 작품 중 하나에 속하는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라는 글을 그에게 헌정했다. 더욱이 1521년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참여할 때도 동행했고 위장 납치사건 때에는 증인이 되기도 했다. 선제후와 루터와 비텐베르크 개혁가들 사이에 중개인 역할도 도맡았던 사람이다. 1537년 슈말칼덴 신조에 서명한 신학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는 가족 내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공정성과 형평성을 잃었고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을 위 하여 공금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비텐베르크 Wittenberg “루터의 참나무” - 1520년 겨울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전해 받은 ‘파문 경고문’을 불태웠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루터의 참나무’로 시작하여 서쪽 끝에 위치한 성교 회까지 약 1킬로미터를 양방향으로 산보하며 탐방의 시발점으로 삼아도 좋은 곳이다. 대체로 비텐베르크에서 탐방하게 될 첫 장소가 바로 ‘루터의 참 나무’가 될 것이다. 루터는 이곳에서 1520년 교황의 교서와 교회법전을 소각했다. 루터의 단호한 모습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루터가 1517년 95논제 게시와 더불어 논쟁의 중심인물이 되자 로마 교황청은 이를 점진적인 위기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15일자로 교서를 발송했다. 소위 ‘파문 경고장’으로 불리 는 이 교서명은 ‘Exsurge domine(주님, 일어나소서)’였는데, 여기서 루터의 이름이 수차례 거명되고 그의 41개 항에 해당하는 오류가 지적됐으며 60일 안에 철회할 것이 요구됐다. 60일이라는 기간은 당사자가 교서를 수령한 이후의 기간을 말하며 11월 27일이 데드라인이었다. 루터는 교회들이 자신의 저작물을 불에 태운 사건들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 파문 경고장을 그해 12월에 시 입구에 있는 ”루터의 참나무” 근처에서 불태워버렸다. 파문 경고장 화형식과 더 불어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절연을 공개적으로 확증한 것이다. 그 결 과, 레오 10세는 1521년 1월 3일에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교황에게 합당하도다) 파문 교서를 통해 루터와 그 추종자 모두를 최종 파문했다.

위터복 Jüterbog - 시교회는 급진주의자였던 토마스 뮌처가 1519년 4~5월에 설교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가 아직 1520년에 츠비카우로 가서 대소 동을 일으키기 이전이었으니 여기서 어떤 설교를 했는지 사뭇 궁금할 따름이다. 아울러 면죄부 논쟁의 발원지 격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뮌처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와 면죄 사상’에 대해 무엇을 선포했을까?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유명한 말을 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물의 자유로운 주인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섬길 줄 아는 종이며 모든 이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문서는 츠비카우 시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츠비카우 Zwickau - 천년의 역사를 지닌 츠비카우 는 작센 주 최남단에 있으며 800여 년간 석탄과 은을 채굴하는 중심지였고 루터 시대에는 작센 선 제후 영지에서 진주와도 같은 곳이었다. 아울러 20세기 초 자동차 회사 아우디 등이 창설되면서 츠비카우는 작센 주 자동차 산업의 요람이 됐고 독일 통일 이후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낭만주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도시로도 알려진 이 도시는 루터와 뮌처가 공동으로 등장하여 참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경합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1520년 루터는 자신의 개혁사상을 매우 열정적으로 따르던 뮌처를 츠비카우의 마리아 교회에 설교자로 추천했다. 여기서 소위 ‘츠비카우의 예언자들’ 운동에 심취하게 된 뮌처는 종말이 곧 오리라는 종말론적인 급진사상을 전했는데, 이로 인해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계급질서로 규정된 사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규정된 사회를 철저 하게 요구했던 게 화근이 됐던 것이다. 그는 결국 이곳을 떠나야 했다.

1520년에 출간된 루터의 작품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 도시의 시장 헤르만 뮐포르트에게 헌정됐다. 그만큼 츠비카우는 종교개혁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루터의 지대한 관심을 얻고 있었다. 1521년에 벌써 이곳은 성 마리아 교회 목회자인 니콜라우스 하우스만을 통해 루터의 개혁사상에 따른 예배가 진행됐던 것이다. 그 결과 이곳은 비텐베르크 다음으로 종교개혁이 완전하게 관철된 곳이 됐다. 토마스 뮌처는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개혁사상을 접하고 뜨거운 지지자가 됐고 루터는 이런 열심에 신뢰를 보냈다. 그러던 차에 츠비카우의 성 마리아 교회에 임시 설교자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뮌처를 적극 추천해줬다. 사실 뮌처에게 있어 이 교회는 종교개혁 사상을 취하 고 나서 루터의 추천으로 등장하게 된 최초의 사역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뮌처는 1520~1521년 성 마리아 교회의 설교자로 활약했으나, 요한 에그라누스가 돌아오자 1520년 10월에 카타리나 교회의 설교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뮌처는 이 기간에 소위 ‘츠비카우 예언자들’의 주도적 일 원인 니콜라우스 슈토르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운동에 몸을 담았고 이것은 그의 불끈한 야성을 깨우는 데 결정적인 촉매역할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 및 에그라누스와 충돌 하며 난관에 봉착했다. 시의회도 소요를 일으킨 사주자로 뮌처를 의심했고 이로 인해 그는 1521년 시에서 추방되어 보헤미아 지역 프라하로 떠나게 됐다. 루터 자신은 1522년 이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그륀하인 수도원을 덮치며 엄청난 소요가 일어나자 시의회의 초청으로 이곳에 와서 4번이나 설교를 했다. 이미 루터는 유명 인사였기에 그가 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시청사 광장에서 설교를 했을 때, 만 4천여 명이나 모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내 그의 감화력으로 시의 분 위기는 가라앉았다.

여러 정황이나 뮌처가 앞으로 행할 일들을 역으로 추론해본다면, 츠비 카우에서 대소요가 일어났을 때에 뮌처도 가만히 관망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담했을 듯싶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여러 관계자들의 판단이 들어맞는 것이었다고 동의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카타리나 교회 광장에 설치된 ‘얼굴 없는 사나이’ 뮌처의 동상에 도 얼굴은 작가의 염원대로 만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태도나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던 그의 당시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카타리나 교회의 백미는 역시 크라나흐 공방의 제단화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겸손하게 꿇어 기도하는 제후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시는 결국 복음을 통한 개혁을 최종 선택했고 1524년에 전면적으로 독일어 예배를 드렸고, 니콜라우스 하우스만의 제안으로 루터는 소 교리문답을 1529년에 작성했다. 폭력이나 혁명이 아닌 복음의 승리였 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변상황의 여러 사건 속에서 루터의 “참된 믿음을 말하다”란 상기 논문에서 권진호 교수는 루터의 믿음과 사랑의 공속성과 의존성과 상호보완성에 대하여 밀도 있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sola fide’라는 명제 속에 갇혀 오해를 받았던 세간의 의혹에 대하여 ‘선행’이라는 루터의 또 다른 강조점과 함께 루터의 균형감을 제시하고 있다.

이 모든 주도 명제를 권진호 교수는 1520년대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철저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며”,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의 모습을 분명하고 상세하게 서술한 작품이 드물기”(1쪽) 때문이다.

권진호 교수는 루터 신학의 중심 요소로 “믿음과 행위(=이웃사랑)”(2쪽)로 제시한다. 논문에서 루터가 이해한 믿음을 여러 가지로 정의 내리고 있다. “영혼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게 하고”(4쪽), “최고의 예배”(6쪽)요 “행위의 주인”(7쪽)으로 간주된다. 또한 “놀라운 교환”(8쪽)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 시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결국 이 믿음은 “왕직과 제사장직”(9쪽)을 특권으로 제공한다. 그렇다면 믿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권진호 교수는 “붙잡는 믿음”(fides apprehensive)을 제시한다. “믿음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붙잡고 소유하기 때문이다.”(10쪽)

 

이제 이런 믿음의 상호 보완적이며 믿음의 또 다른 모습인 ‘선행”은 어떤 것일까?

권진호 교수는 루터의 입장을 제시한다. “루터에게서 행위의 필요성은 인간이 육신과 결합되어 있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11쪽) 선행이란 “첫째, 자신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며 “둘째, 선행은 사심 없는 이웃사랑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실현하는 것”(12쪽)이다.

권진호 교수는 루터 신학에서 ‘믿음과 행위’를 크게 두가지로, 즉 “믿음이 행위를 규정하며”(15쪽)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 루터의 신학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는 선행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선행을 강조한다. 그런데 참된 선행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므로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에 대한 오해는 루터의 주장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며 논찬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로 루터가 집필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독일어판(19쪽)과 라틴어판(25쪽) 사이에 작품규모 이외에 내용적인 차이가 어떠하며 그 중요도에 있어서 중차대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각주 58)에 인용된 라틴어 문장이 독일어판 문장에는 그 의미가 그리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권진호 교수는 이런 루터의 문서에 나타난 미세한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나타난 “믿음과 선행 혹은 믿음과 행위”라는 주제의 통일성이 1520년 이전과 이후에 어떤 변화와 일관성이 갖고 있는지?

루터가 ‘오직 믿음만’을 강조했다는 식으로 오해 받고 있는 여러 상황에 대하여 루터의 문서를 근거로 ‘선행’의 상호 연관적인 중요성을 적시해준 권진호 교수의 노고에 감사 드리면서 깊은 치하의 마음을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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