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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목사의 말은 허공만 치는가?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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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0월 14일 (토) 19:01:46
최종편집 : 2017년 11월 11일 (토) 20:49:01 [조회수 : 2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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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복음주의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에서는 성경의 기록이나 성경 해석에 문화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 팀 켈러는 『센터처치』(두란노서원, 2016)에서 호소력 있는 설교를 하려면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 현대의 문화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해서 보수 신앙을 지닌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현대의 문화에 대한 강조다. 그는 성경이 기록된 사회·문화적 상황과 현대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목사는 설교할 때 성경의 메시지를 청중의 문화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자가 현대의 문화를 외면할 때, 달리 말해서 교인들의 삶의 정황을 이해하지 못할 때,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되지 못하는 그 목사의 설교는 교인들의 심금을 울리지 못하고 허공만 칠 뿐이란다.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현대인의 지식이나 문화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오염시키고 신앙을 뿌리 채 흔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창조과학자들처럼 과학을 비롯한 현대인의 지식과 문화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들은 성경 해석과 설교에서 현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팀 켈러가 정말 보수적인 개혁주의자인지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상황을 외면하는 설교는 호소력이 없다는 그의 주장은 눈높이 교육을 중시하는 교육계의 논리와 잘 어울린다. 실상 현대 교회가 기울고 있는 것은 교회가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보수적 복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켈러가 최근에 낸 책에서 설교와 선교의 현장에서의 문화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주의가 문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팀 켈러의 『센터처치』의 3부 2절 ‘균형 잡힌 상황화가 중요하다’를 정리하여 소개한다. 이 글이 설교자와 선교사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성경과 현대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자는 보수적 복음주의자 팀 켈러의 주장은 문화를 외면해 온 복음주의자들에게 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 무료 이미지 ⓒpixabay.com

존 스토트는 『현대 교회와 설교: 성경적 강해설교』에서 기독교의 소통을 성경과 현대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에 비유했다. 그는 어떤 설교는 ‘도착지가 없는 다리’와 같아서 성경 본문에 대한 견실한 주석은 있지만 전혀 현실로 내려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토트는 ‘출발지를 찾아볼 수 없는 다리’와 같은 설교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설교에서는 현대의 관심사들은 잘 반추하지만 현대사회의 문제와 필요에 대한 영감이 성경 본문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적절한 상황화를 통해서 성경의 메시지가 다리를 건너 올 수 있도록 특정 문화 안에서 일관된 언어로 그것을 다시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학자들은 성경을 이해하기 원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두 개의 지평 사이를 오고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존 스토트의 비유에 따르면 두 개의 강둑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성경 본문과 독자의 문화적 상황 사이에 말이다. 성경은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기에 틀릴 수 없으며 수정될 수도 없다. 하지만 설교자의 성경 이해는 틀릴 수 있다. 실상 자주 틀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수정의 여지가 있다. 복음 설교자가 청중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더 많은 통찰과 수정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이 주제를 염두에 주지 않거나 이 주제를 다룰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성경 교리를 새로운 문화권에 연결할 다리로 가져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들은 다리 위로 성경의 복음이 다른 정보와 함께 유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의 말씀에 다른 정보를 섞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견해의 문제점은 다리 한 쪽에 있는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다른 쪽에 있는 문화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우리는 죄인일 뿐 아니라 유한한 존재며 그래서 무엇에 관한 분명하고도 포괄적인 지식을 갖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는 대체로 사물에 대한 이해를 규정하는 문화의 힘에 대해서 무지하다.

내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대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학생들 중에 많은 수가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었다. 우리는 한국 학생들과 영미 백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실제 목회 상황에 대한 세미나를 열곤 했는데, 모든 학생이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회 사역을 매우 다르게 접근했다. 그 차이점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이 인간의 권위를 이해하는 태도였다.

한국인들은 목회자와 아버지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반면, 미국인들은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국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에게 정부, 부모, 연장자, 목사의 권위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지적해 주었다. 반면 미국 학생들은 그런 구절들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미국 문화가 제도와 권위를 불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바로 다리 위에서 정보가 오고 갔다.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서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를 던지게 되었고, 전에는 명료하게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성경 분문을 보면 복음에 대해서 가졌던 우리 문화만의 제약과 전제들을 파악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서 의사소통자로서 우리가 가진 문화적 맹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서구 문화에서 세속적인 사람들은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인종을 근거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어디나 존재하는 인종적 편견에 대한 민감함으로 연결된다. 세속주의자들과 교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차별의 악에 대한 것이 성경에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수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 밖의 철학자들과 진솔하게 의견을 나누다 보면 성경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수정하게 된다. 우리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도덕적으로 깨우쳐진 양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다(롬 2). 그들의 전반적인 세계관이 충분한 근거가 되어 주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은 악과 진리를 판단한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왜곡되는 또 다른 주요 경로는 소위 ‘정경 안의 정경’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성경 안의 어떤 부분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나머지 부분은 사소하게 여기거나 무시할 때 ‘정경 안의 정경’을 만들어 내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향이나 경험, 문화에 따라 어느 정도 이러한 실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D. A. 카슨은 이런 사례들을 여러 번 언급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당신의 신적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가르치면서도,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자비로운 사랑을, 악한 자들에게는 분노를 나타내신다고 가르친다. 각기 다른 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의 이러한 성경적 측면들에 대해서도 상이하게 반응한다. 서구 문명의 일원이라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관점은 좋아하지만,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교리로부터는 뒷걸음질 치려고 한다.

반면 보다 보수적이고 집단적인 문화에서는 심판의 하나님이 별 문제가 되지 않으며, 도리어 어떻게 그분이 모든 사람들이 속한 그룹을 평등하게 사랑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각각의 문화마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은 강조하고 다른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정경으로부터 작은 정경들을 모은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첫 번째 성경의 가르침을 강조하면서(하나님의 보편적, 신적 사랑) 두 번째를 경시한다면(하나님의 심판), 또는 반대로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왜곡하게 된다. 우리는 다른 문화와 접촉하면서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제거하는 데에 도움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더 온전한 성경적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른 예들도 많다. 성경은 부와 가난에 대해서도 많을 것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에는 매우 다양하고 섬세한 부분들이 있다. 어떤 곳에서는 사유재산과 부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욥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부의 복을 주셨다. 그런데 다른 본문들에서는 돈의 위험성에 대해서 엄하게 경계한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정의를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강하게 선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어느 한쪽의 가르침은 무시하고 다른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주로 자신들이 부유한 조건에 살고 있는지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문화적 지점에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축소하거나, 어떤 부분은 무시하고, 다른 부분은 과장한다. 그런데 다른 문화나 사회 환경에서 온 사람들과 교류할 때 우리가 가진 어느 특정한 왜곡들이 도전을 받을 수 있다. 이때 복음 소통자는 반드시 듣는 사람들의 문화적 신념을 복음으로 수정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리는 양방향으로 왕래되어야 한다. 성경이 비그리스도인의 문화에 의해 수정될 수 는 없지만,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성경에 대한 문화적 이해는 수정될 수 있고 수정되어야만 한다. 다리 위에는 양쪽을 향한 많은 교류와 교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말하고 듣고 말하고 듣고 다시 말해야 한다. 이것을 매번 계속하다 보면 더 성경적으로, 더 강력하게 문화 속에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리처드 린츠가 『신학의 기본 구조』에서 설명한 스펙트럼에서의 양쪽 극단을 피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 스펙트럼의 한 쪽 끝에는 문화적 근본주의가 있는데, 이는 성경을 문화와 상관없이 본다. 성경을 보편적인 용어로 읽고 신학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다. 다른 쪽 끝에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있는데, 이는 성경이 현대 상황의 개념들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다.

린츠 교수는 균형 잡힌 상황화의 중간 지대를 찾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특정 사항들에 대한 의견 일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복음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스펙트럼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문화에 더 많은 발언권을 주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스펙트럼의 다른 쪽으로 기울어서, 우리의 신학적 사고가 어떻게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지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 책은 실천가들을 위한 것이므로 상황화와 관련된 좀 더 이론적인 이슈들은 상세히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다만 린츠와 많은 학자들이 말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선에서 마치려 한다.

 

   
▲ 무료 이미지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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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자 팀 켈러는 설교자와 선교사는 기독교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처한 문화적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설교자가 문화적 상황을 외면함으로써 성경의 메시지를 교인들의 삶의 구체적인 정황에 적용하지 않고 그 메시지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면, 그 설교는 교인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허공만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켈러가 존 스토트, D. A. 카슨, 리처드 린츠 같은 현대 복음주의를 주도하는 신학자들의 말을 빌려서 그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톰 켈러뿐 아니라 대표적인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목소리를 모아서 성경 이해를 위해서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문화를 외면하던 복음주의가 이제 균형 잡힌 신학을 위해서 문화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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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47.216.79)
2017-10-16 11:55:36
에스키모, 인도, 사도바울 관련 문화적 차이
영화 베닌(The Savage Innocents, 1960년)을 보면 선교사가 예수를 전도하자 에스키모 주인공이 열심인 이방인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기 위해 자기 마누라와 잠자리를 가지기를 청하나 이 선교사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를 거절합니다. 이에 심히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주인공이 선교사를 죽이게 됩니다. 어느 곳에서의 간통죄가 다른 곳에서는 극도의 환대가 되는 셈입니다.

오래전에 TV로 인디라 간디 수상의 장례식을 보았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들 라지브 간디가 장작더미에 올려진 모친의 시신을 망치로 내려치는 장면에... 화장하기 전에 亡者의 두개골을 부숴 그 영혼을 먼저 하늘로 올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곳에서의 시신훼손죄가 다른 곳에서는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구약에 보면 롯의 근친상간, 敵에 대한 가차 없는 무지막지한 몰살 등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가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간과한 채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무지막지하게 분노하는 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가지 단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의 위대한 점은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에 속에 갇혀있던 여호와를 다른 문화에도 수용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문화와 다른 문화를 무리 없이 융합시키는 사도바울의 비상한 능력 때문에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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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99.225.193.49)
2017-10-16 03:26:56
미국 문화가 제도와 권위를 부정한다고요...
우리 눈에는 제도와 권위를 부정하는 것 처럼 보여도, 그 안에 질서 있게 제도와 권위를 지켜 갑니다. 이유는 인권이라것을 어려서 부터 보고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인권이 아니라 계급문화속에 어려서부터 자라와서 제도와 권위를 잘 지키는 것 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엄청난 차별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제도와 귄위는 자기를 지키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형, 동생, 누나, 언니, 님자 부치는 문화속에, 사람은 점점 이중적인간으로자랍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서구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입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시각으로, 신학적 시각으로 서구인들을 보면 이해가 안되지요. 서구인들도 한국인을 보면 이해를 못합니다. 또한 한국인들도 이제는 서구식 교육의 영향으로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문제는 남을 이렇게 비판을 하지만, 자기가 이러한 비판의 대상이 되면 분노하는 것이 한국인의 모습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글을 쓰면서 왜 다 서양학자들의 글만 인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문화속에서 쓴 글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습니다. 부탁이니 한국 학자들이 성에 차지 않거나, 보시 싫어도 인용하도록 하세요. 서양인들 중에 말씀하신 학자들 인정하지 않는 부류도 꽤 많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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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 (221.167.226.172)
2017-10-14 20:25:27
잠실 유리성 교회.

1. 애가 어른에게 성경을 가르친다.

2. 예배 순서는 화려하나 설교자 기본 상식과 전달력이 지진아다.

3. 설교에 자신이 없으면, 순수 말씀 해석으로 방향을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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