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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법의 상관관계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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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0월 14일 (토) 11:49:21
최종편집 : 2017년 10월 14일 (토) 18:07:00 [조회수 : 9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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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인 사망을 유발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의 욕심이다. 육체의 욕심으로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법 곧 그 힘의 지배를 받는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을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키지 못했다.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언약의 백성을 해방시킬 만큼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연약하기도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 죄와 사망의 법 곧 힘에서 벗어나게 하는 온전함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된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다.

산상수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모세의 율법이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예수님의 율법이다. 신학에선 후자를 율법의 정신 또는 율법의 원 의미라고 말하는데, 아니다. 모세의 율법과는 다른 새 율법이다. 이것은 새 언약 백성의 심비에 새겨졌다. 예수님의 것으로 일하시는 성령께서 모든 신자에게 내주하심으로 심긴 것이다. 성령께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며 예수님의 율법을 신자에게 적용시키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율법은 성령의 율법이기도 하다. 만드신 분과 적용 또는 실현하시는 분이 그 뜻과 말씀하심과 행하심에 아무 괴리가 없는 한 분과 같은 하나님이시기에.

율법의 대강령은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이다.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하나님 사랑,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웃 사랑이다. 이스라엘에게 이웃은 같은 언약의 백성이기에 이웃 사랑은 지체 사랑이다. 예수님의 율법의 대강령은 그것을 완전하게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사랑,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서로 사랑이랄 수 있다. 후자는 예수님이 직접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바이다. 새 계명은 새 율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하는 지체 사랑이 신자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한다.

모세 율법 때엔 음욕 품기가 죄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죄로 규정하지 않았기에. 음욕을 품었다고 사함을 위한 어떤 행동을 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의 율법에선 죄다. 예수님이 간음이라고 규정하셨기에. 음욕을 품었다면 하나님께 자백하고 돌이켜야 한다. 둘의 차이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엄청난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못하지만 후자는 자유하게 하기에. 모세 율법에선 음욕이 죄로 얘기되지 않아서 육체의 간음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었다. 간음이 죄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죽음을 유발한다. 죄와 사망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모세 율법 아래의 언약 백성들의 연약함과 함께 작용하여 죄와 사망의 지배를 벗어나질 못했다. 예수님의 율법에선 음욕이 차단되어 그 여지가 없어졌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사망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원리의 업그레이드다.

십계명을 생각해보자. 십계명도 완전하게 되었다. 안식일을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4, 6, 7계명만이 1, 2, 3, 5, 8, 9, 10계명에서도 완전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문자로 주어지지 않았기에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가르치며 지키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의 신자에게 모세의 율법은 아무 효력이 없다. 곧 폐해졌다. 예수님의 율법만이 효력이 있다. 십계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업그레이드되면 그 이전 건 사용하질 않는다. 업그레이드 된 것에 업그레이드되기 전의 것이 다 녹아있기에 업그레이드된 것으로 충분하다. 폐해진 율법을 신자에게 되살리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께 범죄이다. 천사라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을 다른 복음인 것이다. 업그레이드 되기 전의 것을 향수하고 그것의 사용을 추구한다면 업그레이드한 이를 무시 내지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신서에서 바울 사도가 율법에 대해 언급할 땐 모두 이런 신학적 바탕을 깔고 있다. 율법이 폐해졌다(엡 2:14)는 진술도 이런 문맥이다. 근데 폐해진 건 성전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된단다. 에베소 교회가 성전과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그것만 폐해졌다는 말을 할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신약 성경에서 어떤 수식어가 붙지 않은 율법이 일관되게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는 것에도 맞지 않다.

이 이해는 서신서의 진술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진술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얘기되는 이신칭의의 바른 의미 파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루터 이후로 개신교에선 그것을 구원에 관한 것으로 읽어왔다.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온 것이다.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로마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 문제는 어떤 유대인 교사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삶의 원리로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한 것이다. 자신들과 같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십계명을 말하며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서 용서받는 방편으로 율법 준수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 로마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서 이미 용서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들이 과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에. 삶의 원리로 율법 준수를 말한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바울 사도가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고 편지의 수신자들도 이미 알고 내용을 말했다? 도무지 논리적 대응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소리를 했다는 것인데, 그냥 당연하단다. 루터나 칼뱅이 그렇게 말했기에. 바울 사도는 삶의 원리로 제시된 율법 준수를 반대해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는 원리로 믿음을 말한 게 아니다. 동일한 삶의 원리로 믿음을 말한 것이다.

물론 그것을 신자에겐 미래인 영원한 구원과 연관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옛 언약에서 율법 준수는 그 시점의 언약 백성에게 미래의 영원한 구원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율법 준수는 순종이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하면 멸망하고 순종하면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바울 사도가 율법 준수를 반대할 때에 그 언약 시대에 요구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한 반대였을까?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한 반대였을까?

신자에겐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는 믿음과 삶의 원리인 믿음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인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곧 출생과 직결되는 믿음이다.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신뢰인 믿음이다. 출생 후 삶과 직결되는 믿음이다. 율법과 연관된 진술에서 믿음은 후자다. 이방인 신자가 행위 곧 모세의 율법 준수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완전하게 된 새 언약의 주인이신 그분이 새 언약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가 아니라 전 인격으로 곧 전 삶으로. 이는 그분의 뜻을 따른다는 것까지 포함된다. 새 언약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그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율법을 준수함으로. 성령의 율법을 따름으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킴으로. 새 언약의 백성인 신자에게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 곧 믿음이냐 불신앙이냐의 문제다. 의지하면 곧 믿으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삼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신다. 이신칭의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인 이신칭의는 법정적 칭의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여 곧 믿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인 이신칭의는 관계적 칭의라고 한다. 이 말은 예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로마서의 경우에 12장의 ‘그러므로’ 이후에 삶의 원리로 진술된 것이 예수님의 율법의 세부 내용들이다. 신약 성경은 둘 다를 진술하고 있다.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율법 준수에 대한 대응으로 얘기된 것은 후자다.

이제까지의 진술은 루터나 칼뱅이 말한 것과는 다른 나의 풀이다. 루터나 칼뱅과 나. 이름 값에서 비교가 안 된다. 그럼에도 상기 내용에 대해 성경의 진술과 비교하며 진지하게 성찰하기를 바란다.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바를 잘 분별하고 바른 것을 수용하여 지키고 가르치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사족

의롭다함을 얻었다(롬 3:22). 영접함인 믿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 법정적 칭의이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롬 4:22).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곧 순종함으로. 관계적 칭의이다.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행위를 따라 심판이 이루어지는 최종심판대에서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음으로.

거룩해졌다. 세상에 속해 세상 임금인 마귀의 종이었다가 하나님 나라로 옮겨짐으로.

거룩해진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죄와 분리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으로.

거룩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됨으로. 곧 삼위의 하나님과 완전하게 연합됨으로.

영화롭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다. 곧 그분 안에서 우주의 통치자가 되었다.

영화롭다. 의와 진리를 따른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여 드러냄으로.

영화로워질 것이다. 몸의 부활과 함께 삼위의 하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씌움받음으로.

칭의는 과거, 성화는 현재, 영화는 미래인 것이 아니다.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구원얻었다, 구원얻는다, 구원얻을 것이다”라는 구원론과 같은 맥락이다. 구원론의 하부 구조로서 지극히 당연하게. 구원얻는다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시는 성령을 좇음으로 죄와 사망의 법의 영향력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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