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장기영 박사의 글을 읽고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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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0월 11일 (수) 18:32:11
최종편집 : 2017년 10월 11일 (수) 21:35:05 [조회수 :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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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기고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당당뉴스)

‘최덕성 박사, 서철원 박사, 정이철 목사의 웨슬리(안) 이단 시비에 관하여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msfms&logNo=221112414558 -를 읽었다. 나는 이 글에서 언급된 세 분에 대한 평가를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럼 글 내용 전부에 대해서도 동의하는가? 물론 아니다. 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이전 신학자들의 관점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긴 글인데, 결국 핵심은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예정(엡 1:3-11)에 대한 이해다. 글쓴 이는 예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하심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이 많다는 것을 근거로. 개인에 관한 것은 아니란다. 웨슬리나 그 전통 안에서 그렇게 본단다.

그럼 에베소서의 진술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하심이 예정이라는 것엔 동의가 되는데, 에베소서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가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3-6).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바울 사도와 에베소 교회 곧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이다. 바울은 개인이고 에베소 교회도 신자들이다. 신자들은 개인인 신자의 총합이다. 이 문장 그 어디에서 개인의 선택과 예정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가 있는가? 전혀 없다. 개인적 선택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심이 예정이라는 주장은 선이해의 결과이지 바른 주경의 결과는 아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여기에서 작정은 예정과 같은 말이다. 바울 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이 기뻐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대한 설명이다. 당연히 개인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이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생이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지 않고 이 땅에서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요 17:3)을 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건짐을 받아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작정된 사람이 다 믿더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나는 칼뱅식의 예정론을 따르진 않는다. 우주의 모든 것이 예정되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관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개인에 대한 예정을 말씀하고 있다. 자신이 받아들이는 선관점으로 본문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하다.

내가 이해하는 예정은 선택과 한 쌍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조건 없이 사랑하셔서 선택하고 구원 곧 허물과 죄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를 예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론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한다.

장 박사가 언급한 미리 아심도 그것을 진술한 것이다. 안다는 표현이 믿을 것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체험적인 앎으로 사랑한다와 같은 의미이다.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진술은 미리 사랑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신 7:7-8)과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수라는 조건에 의하지 않고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미리 아심을 말씀한 구절의 문맥 그 어디에서 믿을 것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로 생각할 거리가 있는가? 전혀 없다. 자신의 선관점을 본문에 집어넣어 그 의미를 결정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성경의 진술과 상충한다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에 대해 사랑하셔서 선택했기 때문이라심이 스스로 모순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라는 말과 같은데, 전혀 아니다. 선택과 예정은 문맥과 역사적 정황을 바르게 고려하여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제한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랑이신 하나님과 전혀 상충하지 않는다. 그분의 주권이다. 그분은 인류 가운데 어떤 이들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시고 관계 회복의 구원을 예정하실 권한이 있다. 성경은 그 권한이 사용되었다고 진술하고 있고.

이는 구약 시대를 생각하면 매우 분명하다. 이스라엘 만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셨다. 모든 인류가 아니라. 그 역사가 인정되면 신약에서도 모든 인류가 아닌 어떤 이들에 대한 선택과 예정을 인정 못할 이유는 없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더라도 말이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예정을 거부하는 실제적인 이유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자기들도 구원받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하시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 있다. 사람에게 주신 양심이 있는데도 다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회피할 변명의 구실을 제공한다. 또 복음을 듣고 구원얻을 사람들도 그 기회를 단 한번도 갖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도 제기될 수 있다. 아무리 전도해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니 굳이 계속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고 반대로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굳이 전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때와 방법에 따라 구원을 얻을 것이니 수고할 이유가 있겠냐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전통적으로 토기장이 비유를 답으로 제시한다. 이스라엘에게 구원인 출애굽을 위해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심에 대한 인간적인 항변에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며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다는 진술이다. 하나님이 하려는 일을 위해 피조물인 사람의 마음을 강팍하게 한다면 사람이 어찌할 수 없지 않느냐는 인간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반문에 대해 오히려 강하게 책망하는 것이다. 위의 반박이 인간적으로 충분히 일리있지만 하나님은 그에 대해 창조주로서 가지는 권리 행사라고 답하시는 것이다.

장 박사는 토기장이 비유를 다르게 읽는다. 자신만이 선민이라는 의식에 빠진 이스라엘과 달리 이방인을 포함하여 온 인류를 구원 계획에 포함시키시고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시는 하나님을 주권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일단 설명만 따로 떼어 생각하면 전혀 반대할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설명이 정말 문맥에 부합하는가이다.

문맥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은혜를 누린 이스라엘 중에서 믿지 않는 상태인 이들을 바울 사도가 구원하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는 논의를 진행하다가 결론적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고 말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다. 바울 사도가 글을 적고 시점에서 말씀을 맡은 특권이 여전히 유효했던 이스라엘이다. 그 특권은 일정 시점 이후엔 상실되었고 그 이후의 이스라엘은 그 진술과 아무 상관없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한 불신국가일 뿐 그 진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 시점의 이스라엘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분이 있고 그는 전자가 그 은혜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마음의 짐을 얘기한 것이었다.

토기장이 비유는 그 문맥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시점에서 같은 이스라엘인데, 어떤 이는 새언약 안으로 부르심을 받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와 같다. 그뿐 아니라 새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까지 하는 유대인들이 있다. 완악한 것이다. 바로 왕과 같다. 끝까지 예수님을 배척하며 신자들을 핍박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에 해당된다. 바울 사도는 그 모습에 대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새언약 안으로 부르시고자 하신 이들을 부르시는 방편으로.

그 시점의 불신 유대인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장 박사의 설명은 해당사항이 없다. 신자인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구원을 거부하지 않는 상태기에 역시나 해당사항이 없다. 어떤 유대인 신자들이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잘못의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장 박사의 논증은 허수아비 공격일 뿐이다.

전도 건은 포인트가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선택과 예정이 전도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를 전제하고 있기에. 선택과 예정은 우리의 전도를 더 강력하게 요구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복음 수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면서 동족 구원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찬 것처럼. 그가 후에 기근에 빠진 예루살렘에 갔던 것은 그 연유였다. 하나님께서 막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 서바나에 가는 길에 자유인으로 로마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롬 15:23) 하나님은 예루살렘 행을 막으셨는데 그는 갔다. 그는 미결수로 로마에 갔고 서바나를 방문할 순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어긋나게 되었다.

나는 예정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의 앉고 일어섬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시 139:2)이 모든 인류에 대해서도 동일하고 그 예지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을 선택하고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으며 그 사람의 생애 중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전적 은혜이다. 전도에 열심인 시대나 전도를 잘 안 하는 시대나 예외가 없다. 예정이 그 상황을 감안하여 이루어졌기에. 바울 사도가 동족 구원의 열정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의도는 어긋났지만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택과 예정을 확증한 은혜를 입은 신자는 현재적인 은혜인 성령의 역사와 자기 육체의 욕심 사이에서 매순간 어느 쪽을 선택하며 산다. 그 삶의 결과로 영생이거나 아니면 썩어질 것을 거둔다.

배교(히 6:4-6), 믿음에서 파선하고 선한 양심을 저버림(딤전 1:19), 성전 곧 교회를 더럽힘(고전 3:16), 어미와 음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결정적 범죄(고전 5:5), 윤리적 범죄의 지속(고전 6:8-11),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저버림(마 25:14-30, 고전 9:27) 등이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경우에 해당된다.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리라(롬 8:13)는 말씀의 성취이다.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해석은 성경의 진술에 대해 어떤 선관점을 앞세워 끼워맞추는 과정이 아니다. 각 본문이 독립적이면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가운데 각각의 진술을 함께 충족시켜야 한다. 어느 한 진술을 앞세워 다른 진술을 무시하거나 짓밟아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론 장 박사의 주장 전개 방식에 공감한다. 깊이 공감한다. 이런 연구가 더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겠다는 겸손한 태도로. 그렇게 연구하여 일치의 길로 나아가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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