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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문명전환을 위한 종교윤리생태문명시리즈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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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9월 08일 (금) 17:00:01
최종편집 : 2017년 09월 12일 (화) 22:15:42 [조회수 :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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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시리즈 002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문명전환을 위한 종교윤리

 

 래리 라스무쎈 지음, 한성수 옮김, 생태문명연구소, 2017년 9월 20일,

신국판, 640페이지, 값 24,000원.

ISBN 979-11-958240-3-8 04230 ISBN 979-11-958240-2-1 04230 (세트)

원서: Earth-Honoring Faith: Religious Ethics in a New Key (2013)

 

 

 1. 책소개

 

이 책은 래리 라스무쎈 교수(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의 Reinhold Niebuhr Professor Emeritus of Social Ethics)의 역작으로서,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에서 2013년에 간행된 책이다. 지속 불가능한 산업기술 자본주의문명으로부터 생태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 윤리적 통찰력과 분석을 토대로 하여 삶의 다양한 이야기들과 아름다운 시들로 엮은 감동적인 교향곡이 되어, 명성 있는 Grawemeyer Award in Religion을 받은 명저이다.

우리가 직면한 총체적 위기, 즉 극심한 시장경쟁과 양극화, 소비주의와 영적인 공허, 전쟁경제체제와 핵위협, 기후변화와 대멸종, 전체 생태계의 파괴 같은 전대미문의 위기는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이처럼 자기파멸적인 문명으로부터 지속가능한 생태문명으로 전환할 것이냐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 지구적 위기들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한 후, 에고(ego) 중심의 문명을 생태(eco) 중심의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 우리가 이웃 사람들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의존하고 있는 원초적 요소들인 물, 흙, 공기, 불, 햇볕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영적이고 생태학적인 삶의 방식을 치열하게 모색한다. 개인주의와 경제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산업공학기술시대로부터 모든 생명에 대한 현명한 청지기 역할을 회복하는 생태학적 시대로의 문명전환을 이룩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심리적, 종교적, 사회구조적 문제들은 무엇인지를 밝히고, 이미 앞서가는 공동체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패러다임 변화들도 추적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강철 새장” 안에 갇힌 채 “유물론적 폭군들”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참 자기를 찾고 문명전환을 이루기 위해서 저자는 영성과 생태학의 연합을 주장하며, 신비주의, 성례전주의, 예언자적인 실천들, 금욕주의, 그리고 지혜의 양육을 위한 오랜 종교전통들 속의 보물들을 새롭게 발굴해낸다. 우리를 대멸종이라는 한계에까지 내몰아온 소비지상주의, 공리실용주의, 소외, 억압,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항하여, 세계적인 신앙들의 합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인류가 공유한 영적인 실천들이다. 열정적인 헌신과 깊은 통찰력으로 쓴 이 책은, 이 시대에 종교들이 문명전환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깨우쳐준다.

 

2. 저자와 역자

 

   
▲ 라스무센

래리 라스무쎈 교수는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의 사회윤리학 명예교수로서 수많은 논문과 저서들을 발표했다. 대표적 저서들은 이 책을 비롯해서, Earth Community, Earth Ethics, Dietrich Bonhoeffer: Reality and Resistance, Reinhold Niebuhr: Theologian of Public Life, Bible and Ethics in the Christian Life 등이 있다.

한성수 목사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감신대, 예일대학교신학부,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미국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한 후 은퇴했다. 『성경을 해방시켜라』,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참사람: 예수와 사람의 아들 수수께끼』,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무신론자들의 망상』, 『내 몸과 영혼의 지혜』 등을 번역했다.

 

 

3. 목차

 

  전주곡 __ 11

제1부

 1장: 피조물인 우리들 __ 23
 2장: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__ 77
 3장: 우리가 찾는 신앙 __ 137
 4장: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 변화와 상상력 __ 191
 5장: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 좋은 이론 __ 217
 6장: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 공동체 기반 __ 271
 7장: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 경작하기와 보존하기 __ 319

  간주곡 __ 376

제2부

 8장: 금욕주의와 소비주의 __ 395
 9장: 성스러운 것과 상품화된 것들 __ 425
10장: 신비주의와 소외 __ 479
11장: 예언자적-해방적 실천과 억압 __ 513
12장: 지혜와 어리석음 __ 557
13장: 맺는 말 __ 597

  후주곡 __ 611

 참고문헌 __ 613

 

4. 서평

 

“이 책은 종교들이 그 생태학적 위상에로 변혁되기를 주장하기 위해, 신학적 성찰과 윤리적 설득을 함께 엮은 위대한 걸작이다. 저자는 지금 생겨나고 있는 지구 공동체를 위해서 매우 필요한 비전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데서 웅변적이고, 포괄적이며, 강한 흥미를 돋구어준다.”

Mary Evelyn Tucker, 예일대학교, 종교와 생태 포럼 공동지도자

 

“종교 윤리에 대한 이 새로운 저작은 생명의 거룩한 연결망에 대한 서정적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산업화가 자연을 실용성만 생각하여 사용한 것에 대해 치열하게 고발한다. 저자는 신비주의 전통, 예언자 전통, 그리고 지혜 전통들에서 이끌어 와서, 생태학적으로 의식하는 문명에로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지역 공동체들에 의해 고취되어,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이 <노래들 가운데 노래>가 되었다.”

Aruna Gnanadason, Listen to the Women, Listen to the Earth 저자

 

“라스무쎈은 종교가 인간 구원의 드라마를 위한 무대로 자연을 보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거룩한 신적인 것을 경험하는 자리로 볼 필요가 있다고 설득한다. 그의 학자로서의 능력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고 여러 분야들과 다른 학자들의 통찰들을 함께 엮어내는 그의 능력은 참으로 모범적이다. 이 책은 여러 학문분야에 걸치는 사고를 최고로 반영한 위대한 지성적 성취다.”

Jim Martin Schramm, Professor of Religion, Luther College

 

“저자는 문명전환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매우 탁월한 책을 썼다. 그는 고대의 도덕적 전통들을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며, 또 그것들을 새로운 상상의 세계에 맞도록 어떻게 변용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종교 윤리학에 중대한 공헌을 이루었다. 이 책은 해당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서만 진가를 인정받을 것이 아니라, 지구의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염려하고 우리가 공유할 도덕적 상상력을 재형성하기 위해서 문화적 자원들을 찾아보려는 많은 사려 깊은 독자들에 의해서도 그 진가를 인정받을 것이다.”

Willis Jenkins, Ecologies of Grace 저자

 

5. 책 속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지혜로운 영장류, 두뇌가 발달한 종(種), 세이건이 말한 “우리”—는 옛날 어느 땐 고작 600 개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 600여 개체의 부족이 유일하게 생존한 영장류였다. 그 이전에는 다른 영장류들도 꽤 많았었다(Sahelanthropos tchadensis, Australopithecus afarensis, Kenyanthropus platyops, Australopithecus africanus, Australopithecus garhi, Australopithecus sediba, Australopithecus aethiopicus, Australopithecus robustus, Australopithecus boisei, Homo habilis, Homo georgicus, Homo erectus, Homo ergaster, Homo antecessor, Homo heidelbergensis, Homo neanderthalensis, Homo floresiensis.) 그들의 집도 역시 그 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멸종되어 이젠 영원 속에 묻혀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튼튼한 600 개체는 이제 70억이 넘게 불어나서, 모두가 “공중에 매달려 태양빛에 걸린 저 작은 먼지티끌”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집인 지구 행성은 지금 지질학적 시간 속에서 지나간 여러 “시대들”과 비슷한 하나의 변혁적인 순간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번 것은 단지 지질학적인 시간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란 점에서,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다른 순간이다. 더구나 두뇌가 발전된 생물학적 종(species)이 이 순간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지구물리학적 변화의 원인이자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노래 부르기를 배워야 할 전환기를 맞은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시편 137:4). 단지 이번에는 그 낯선 땅이 바빌론이 아니라 지구 행성이며, 또한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든 인류인 것이다. 이제 파종과 수확의 정상적인 계절들에 대해, 거대한 강들의 발원지인 빙하에 대해, 거대한 도시들을 건설해도 좋다고 신뢰할 만한 해수면에 대해, 새로운 곤충 포식자들과 질병들, 혹은 가뭄과 대홍수에 동물들과 식물들이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에 대해, 정부당국이 자원들을 잘 조정하여 절망적인 사람들이 대량으로 집 없이 떠돌고 난감한 지경을 당했을 때 발생하는 갈등들을 완화시키거나 혹은 엄청난 숫자와 강력하게 닥치는 재난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미래 세대들이 파괴된 지구 행성에서 생존하고 번영하도록 확신시켜줄 충분한 강우량, 강설량 그리고 자원들에 대해, 그리고 길고 긴 시대 동안 해저의 식물계들을 유지하기에 충분히 안정적인 바다의 생화학적 환경조건에 대해,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세 번째 바위덩어리(수성, 금성 다음으로 지구란 뜻—역자주)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더 이상 믿고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종교들은 대부분 그 현재 형태들로는 당면 과제를 감당할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 종교들의 과학 이전의 세계관들이 현대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런 신앙들은 다른 나머지 부류들과 마찬가지로, 지구물리학적 변화와 지구 행성 위의 임계점들(tipping point: 이 시점을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퇴행이 지속됨—역자주)에 대한 실험이나 시험을 거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세계 종교 대부분은 생태학적 고려들을(적어도 산업화된 자연의 이쪽 편에서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신앙들은 불사조(Phoenix)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탄생과 재탄생을 알았기에, 그들은 항상 자연의 신빙성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더구나, 그런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구의 시들어 말라감”을 그냥 방관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변혁의 주관자들처럼 그런 신앙들도, 다루기 힘들고 새로운 지구 행성의 현실들에 대해 회심할 필요가 있다. 종교 공동체들도 변화된 지구 행성에 대한 새로운 책임성들을 위한 새로운 능력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 결론은 간단하고 짧다. 즉 우리들의 현재 생활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한 미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변화는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생활방식은 굳어버린 편견들과 이제까지 보호받아왔던 특권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인식이 작용하는 방식과 우리가 자연에 기대하는 방식에 대하여 정확하게 분별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받아들이며 또한 어떻게 힘을 조직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요구된다.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가장 불길한 전조를 지닌 변화는, 대기 중에 내뿜은 더 많은 탄산가스를 흡수하는 바닷물의 결과로 인한, 해양의 산성화일 것이다. 해양들은 지난 80만 년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더 산성이 되었다. 만일 1950년대의 비율이 그대로 지속되면(그래프들을 기억하라), 지난 2천만 년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산(acid)에 의한 부식이 심하게 될 것이라고 고대해양학자들은 말한다. 태평양 굴 양식업자들은 2009년에 보고하기를, 굴의 유충(幼蟲) 폐사율이 80%로 증가했는데, 아마도 해수의 산성도에 의한 것으로 추정한다. 많은 갑각류 어종이 충분히 두꺼운 껍질을 만들지 못하며, 또한 산호초는 금세기 말경엔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의 수준은 여러 시대를 거쳐 유지되어온 체계들을 압도한다.

어떤 신앙이 참으로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인가? 어떤 윤리가 그 동반자일 것인가? 어떤 종류의 신앙과 윤리가 어려운 전환들을 거쳐서 생명을 위한 열정으로 나타날 것인가? 무엇이 여러 세대를 두고 선한 행동을 필요로 하는 과업을 담당할 갱신 가능한 도덕적-영성적 에너지를 창조할 것인가?

결국에는 과학이 지적한다. 우리는 수많은 생명들과 그들의 거주지를 엉망으로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생명의 공동체 안에서 철저하게 창조를 지우는 자들(uncreators), 창조를 거꾸로 뒤집는 자들(decreators), 멸종을 통해 탄생 자체를 끝장내는 자들(terminators)이 되었다. 정확히는 여섯 번째 거대한 멸종이 인간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묵시록에서 창세기로, 창조를 거꾸로 뒤집으며, 시간을 거꾸로 타고 달린다.

우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150억 년 내지 130억 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순례행진과 또한 500억 개 내지 1천억 개의 성운우주(galaxies), 그 성운우주 각각에는 또한 수십억 개의 별들과 아무도 모를 만큼 수많은 행성들이 떠돌고 있음을 포함하지 못하는 어떤 하느님-논의도 단지 기이한 하느님-논의일 따름이다. 또한 나타났다가 없어진, 또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라지고 있는 모든 생물종들을 품어 안지 못하는 어떤 하느님-논의도 단지 기이한 논의일 따름이다. 또한 생명의 전체적 드라마, 그 비참하고 웅대한 드라마를 포용하지 못하는 어떤 하느님-논의도 그저 이상한 하느님-논의일 뿐이다. 우주를 빼고 나면, 하느님 예배는 인류라는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일 따름이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의 얼룩지고 왜소해진 인간 자신들의 이미지로 그려진 것이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세계들과 모든 생명을 오만스럽게 배제하고서, 인간이라는 생물종의 수준에로 오그라든, 루터가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뒤틀려진 심장(cor curvatum in se)이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은 자기 자신에게로 너무도 굽어진 마음과 의식(mens curvata in se)이어서, 그것은 인간 이외의 것들(more-than-human)에서 조상들과 친족(kin)임을 이해하거나 공감함에 들어갈 수가 없다.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에서 고생물학자이자 사제였던 떼이아르 드 샤르뎅 신부는 스스로 이렇게 기도한다: “나의 하느님, 당신의 과감하신 계시를 통해, 이 세상에서 우리들 인간 유기체의 가련한 완전함보다 더욱 위대하고 더욱 생기에 넘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치하고 겁에 질린 사고방식을 깨뜨려 주시옵소서.”

“지구”(Earth)란 심각하게 잘못 붙인 이름이다. “물의 행성”(Planet Water)이라고 불러야 보다 정확하다. 건조한 땅이 아니라, 물이 지구 행성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 표면의 74.4%가 물이고, 그 물의 97.2%는 바다다. 이 물로부터 30억 년 전에 생명체가 생겨났다.

그 30억 년이 우리의 피 속에 전해져오고 있다. 우리 혈관들과 눈물 속의 소금은 바다의 소금과 대등한데, 이것은 우리 몸속의 물의 양이 지구의 물의 양—70% 정도—과 서로 대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극적이고 형성적인 9개월 동안 모든 인간의 생명은 예외 없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따뜻한 물, 소금 물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건조한 땅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당신의 어머니가 충분한 시간이 지나서 그녀의 물(양수)이 “터졌을” 때나 시작된다.

마르크스 자신의 해결책은 이런 일련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서로 간에 기본적인 관계들을 맺는 방식을 바꾸어줄 사회를 상상하고자 했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안식처가 없이 소외된 자기(a homeless and alienated self), 즉 마음대로 “세계의 창고를 약탈하는” 자기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이처럼 단절되고, 이동 가능하며 소외된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는 철창(iron cage) 안이기 때문에(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세속적이지만 어쩐지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그 세계가 진정 자신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완전한 공허” (complete emptiness)(막스 베버는 이를 “이런 전무[this nullity]”라고 불렀다)를 역사의 소망하던 결말이자 문명의 축도(요약)로 여기게 될 것만 같다. 현대의 쓰라린 성취가 그러하다. 신비주의자라면, 루미와 더불어, 이렇게 물을 것만 같다: “하느님의 세계는 그토록 광대한데도, 당신은 왜 모든 곳곳마다 감옥 속에서 잠들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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