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년 08월 30일 (수) 23:58:15 최종편집 : 2017년 08월 31일 (목) 00:05:00 [조회수 : 6607]
요즘, 하루 중 저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간입니다. 어느 새 저만의 성사가 되어버린 듯,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커피를 내려 피아노 옆에 두고 모차르트를 폅니다. 제게 있어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그 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같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차르트를 연주하노라면 그와 함께 하늘과 닿아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유독 모차르트만 그렇습니다. 다른 작곡가들의 곡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피아노 악보에는 거룩한 가사도 없고 모차르트는 다소 삐딱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의 피아노 음악에서 기도를 체험하다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느낌은 기도에 깊이 침잠했을 때의 느낌이나 하나님 품에 편안히 안겨 있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 진중한 신학자가 이미 150년 전에 죽은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썼다니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되어갈수록, 모차르트를 알아갈수록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목회자로서 문자와 생각과 말에 치여 온갖 원고들과 강단 위의 퍼포먼스적인 삶을 살다 보니 피아노가 더 좋아졌습니다. 피아노는 성악과 달리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찰현악기, 취주악기와 달리 개개의 울림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뽑아내고 연결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한 음 한 음이 울릴 뿐이지요. 옛 선비들이 거문고를 친구삼아 여흥을 삼았던 것도 뽑아내고 연결해 내려는 지성적 작업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픈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피아노는 선율악기라기 보다 실로폰과 같은 타악기에 더 가깝습니다. 이 특성을 알아야 피아노의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진주 목걸이처럼, 아무 말 없이 울리는 하나하나의 울림들이 연결 되어 음악이 되는 것이지요. 모든 음과 음 사이에는 공백 혹은 침묵이 있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사실 이 침묵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피아노 음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피아니스트 글랜 굴드의 연주의 미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알기 원하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이 이야기를 해 줍니다. 음표가 없는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쉼표가 있어야 할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쉼표 역시 침묵과 한숨과 머묾과 쉼과 멈춤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말입니다. 쉼표를 제대로 알아야 비로소 음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피아노를 그리 잘 치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하여 2년 동안 배운 체르니까지가 정규 피아노 교육의 전부였습니다. 한 곡을 제대로 치려면 남들 보다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아무리 쉬운 곡에도 위대한 예술적 힘이 있기에 저 같이 피아노를 잘 못 치는 사람도 깊은 음악적 감동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본보기 삼아 피아노 전도를 많이 합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곡은 한때 피아노 광고에 쓰인 16번(Piano Sonata No.16 in C major, K.545)의 1악장일 것입니다. 새벽 아침의 풀잎 위로 이슬방울이 굴러가는 것만 같은 선율이 인상적이지요.
그러나 16번 소나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2악장 안단테에 있습니다. 대부분 이 2악장을 1악장처럼 빨리 치는데 이는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모차르트를 재간둥이 악동으로만 생각하는 것만큼 말입니다. 안단테는 이탈리아어로 ‘걷다’라는 뜻을 가진 ‘안다레’에서 온 말입니다. 즉 편안히 걷는 템포로 연주하라는 것이지요.
이 곡은 사뭇 단순해 보여서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으로 오해 받지만 사실 1788년, 모차르트가 죽기 3년 전에 쓰인 곡입니다. 일본의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츠코는 한국의 아이들이 동네 콩클 대회에 가지고 나가기 창피해 하는 이 곡을 주빈 메타와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음악회의 마지막 앙코르 곡으로 연주했습니다. 날개가 꺾인 천사가 되어 하나님 품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모차르트가 생각나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