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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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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8월 11일 (금) 00:34:57 [조회수 : 6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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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잘들 지내고 계신지요? 무더위에 지쳐 몸과 마음이 다 소진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여름을 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혼자 있는 곳에서는 부채질로 더위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지만, 공적 공간에서는 늘 바람을 피하느라 애를 쓰곤 합니다. 버스에 빈 자리가 있어도 앉을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찬 바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체질상 유난히 더위를 타는 분들도 있기에 내색은 하지 않는 편이지만, 가는 곳마다 너무 냉방을 세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몇 해 전 여러 목회자들과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때가 오후 5시 무렵이었습니다. 습도가 높아서인지 유난히 무더웠던 날이었습니다. 다들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쉬고 싶은 생각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좀 당황했습니다. 바깥보다 더 후텁지근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방 배정이 끝나고 짐을 들고 각자 방으로 올라간 이들은 금세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에도 냉방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무를 담당하던 이들이 프론트로 달려가 왜 냉방을 하지 않냐고 항의하자 정말 뜻밖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런 날에 무슨 냉방이 필요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고객들의 불편을 해소해 줄 생각은 하지 않는 그들의 모지락스러운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또 사소한 불편을 견딜 생각 없이 오감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우리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불평은 또 다른 불평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괜히 함께 여행에 참여했다는 후회감이 밀려왔습니다.

생각과 지향이 다르고,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 그런 경험들이 많으실 겁니다. 부모와의 갈등, 형제자매간의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지요. 갈등(葛藤)이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갈은 칡이고 등은 등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는 생태가 비슷한 듯하지만 다른 점도 있습니다. 칡은 왼쪽으로 감으며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으며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둘이 얽히면 풀기 어려운 것이지요. 갈등을 즐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갈등은 회피할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풀어야 합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쓴 사회학자 정수복 박사는 '갈등 회피주의'를 한국인들의 기본적 성향으로 꼽습니다. 우리는 서로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문제가 될만한 것은 아예 건드리지 않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라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짐작하고 반응을 살피면서 거기에 맞추어 조금씩 자기의 의견을 내놓는 것이 신중하고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p.153)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공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때 한 사회는 심각한 문제를 노정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를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풀려는 태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갈등의 창조적 기능도 있습니다. 잠시 불편하더라도 문제를 문제로 드러낼 때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소설가 황석영 선생은 소설가로 살아온 긴 세월을 돌아보며 자기는 지식인이 아니라 광대로 살아왔다고 말하더군요. 역사라는 엄처시하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쳤다는 것이지요. 황석영 선생과 대담을 진행한 이진순은 작가의 문학 여정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좌충우돌 부딪치는 모난돌이었으나 그 덕분에 우리 문학과 삶의 삼엄한 경계가 이완되고 금기가 부서져나갔다"(한겨레, 2017년 6월 24일, '이진순의 열림' 중에서).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부딪쳐 나갈 때 허용의 한계가 확장되고 타자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들도 마음에 갈등을 느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랫 동안 출석하던 교회에서 자기의 신앙 양심상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때, 혹은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설교에 절망할 때, 사람들은 떠남을 심각하게 고려합니다. 그러나 떠난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떠남은 그동안 공들여 맺어왔던 다양한 관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묻는 이들에게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당장 떠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들이 감내해야 할 아픔과 고독에 생각이 미치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어떻게든 견디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타성에 빠지거나 신앙적 우울감에 잠길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곳에 머물며 변혁을 위해 노력하면 좋겠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가리켜 흔히 공동체라 말합니다. 공동체를 뜻하는 '커뮤니티'는 '함께'를 뜻하는 'com'과 '선물'을 뜻하는 'munus'가 결합된 말이라 합니다. 공동체란 서로가 선물이 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일 겁니다. 누군가의 선물이 되려는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취향과 형편을 존중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현전하여 있는 이들은 생각이 없는 사물이나 도구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는 또다른 현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그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이들은 그를 고유한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한 바울 사도의 상상력이 정말 빼어납니다. 교회는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는 일종의 공동 생명입니다. 너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통찰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라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나 거기 서 있다' 부분


중심은 불변의 장소가 아닙니다. 순간순간 변하는 실체입니다. 굳어진 마음으로는 그 변화하는 중심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어긋남 없이 중심에 잇댈 수 있습니다. 토라는 '고아, 과부, 나그네'를 세심하게 배려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아주 숨터 카운티에는 '코이노니아 팜'(Koinonia Farm)이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침례교 목사인 클라렌스 조던(Clarence Jordan)이 1942년에 세운 일종의 농업공동체입니다.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미국 남부에서 교회학교에 열심히 다니던 클라렌스는 어느 날 한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 어린이 찬송가에 "붉은 색이든 노란 색이든, 검은 색이든 흰색이든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 존귀하다네. 예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신다네"라는 가사가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보기에 흑인 아이들은 늘 넝마를 걸치고 있었고, 씻지 못해 더럽고, 늘 배가 고파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그런 아이들도 사랑하실까?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어렴풋한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잘못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흑인들을 교회에서 돌려세우지 않았고, 그들을 마을의 변두리에 있는 헛간 같은 곳에 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소년들이 썩은 오렌지를 줍거나 쓰레기 통을 뒤져 과일 조각을 입에 가져가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만든 그릇된 현실이었습니다(Dallas Lee, <The Cotton Patch Evidence>, Wipf & Stock, Eugene, Oregon, 1971, p.7-8 참고)

그런 잘못된 세상에 대한 아픔이 어린 그의 가슴에 씨앗처럼 심겨졌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의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했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 스데반 그 누구도 부활의 증거로 빈 무덤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성령 충만한 이들의 친교였습니다. 그가 코이노니아 팜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예수께서 일찍이 시작하신 화해의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의 친교를 의미했습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친교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노동하고, 예배드리고,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코이노니아 팜이 순탄한 길만 걸은 것은 아닙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그 공동체가 미국 남부의 전통을 깨뜨리고 있다면서 그런 위험한 실험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클라렌스는 당연히 그런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밤마다 트럭을 탄 사람들이 몰려와 공동체에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두건을 쓴 KKK 단원들이 몰려와 위촉즉발의 상황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을 전체가 공모하여 코이노니아 팜에 어떤 물건도 팔지 않았고, 그곳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사지도 않았습니다. 지역의 교회들조차 그 공모에 가담하여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클라렌스와 공동체 구성원들은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공동체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념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방식, 즉 예수의 정신을 육화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앞의 책, p.88).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클라렌스는 주저하는 공동체 식구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정탐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그 땅의 형편을 알아보고 오라는 특명을 받은 정탐꾼들이 보고한 내용은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이 분명하지만 그곳에는 아낙 자손과 같은 사람들, 곧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곳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메뚜기처럼 보잘 것 없더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클라렌스는 두려움이 현실을 얼마나 왜곡할 수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정착민들은 기껏해야 15cm에서 20cm 정도 더 컸을 거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정도로 덩치가 큰 사람들을 만나면 공포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클라렌스는 믿는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부활하신 주님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코이노니아 팜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부끄러웠습니다. 복음의 정신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살아낼 수 없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 있는 저의 모습이 아프게 자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교양도 도덕도 아닙니다. 그것을 내포하지만 그것 이상이어야 합니다. 핑계만 대는 종교에 대해 염증을 느낀 클라렌스가 한 말이 제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만 말할 뿐, 성육신적인 삶을 낳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공허함을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 길을 잃은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은 '믿음, 소망, 구원(고전13장에 나오는 '사랑' 대신)을 제공받는다". 사랑은 자기 초월인 동시에 자기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웃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는 행위가 사랑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구원으로 간편하게 대치합니다. 클라렌스는 그런 행태를 꾸짖으며 조롱조로 말을 잇습니다. "그 중에 제일은 구원이라."(앞의 책, p.191) 제국적 삶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한 기독교가 구원 담론을 통해 순치되었음을 그는 그렇게 지적한 것입니다.

올해는 내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곳저곳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루터의 개혁 운동은 통상 다섯 개의 '오직'(sola) 담론으로 요약되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간추린다면 '근본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말이 될 겁니다. 여기서 '근본'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제국이라는 악마적 체제의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생명의 존엄을 유린당하는 이들을 찾아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심어주시고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로마제국에 맞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깨워주시고 보이지 않으나 강고하게 작동하여 사람들을 갈라놓던 장벽을 사랑으로 허무신 예수님, 절망의 자리에 처한 이들을 찾아와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 부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을 향해 우리 마음을 늘 들어올려야 합니다.

투덜대며 살기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기엔 우리 삶이 너무 고귀합니다. 날마다 우리 마음에서 시도때도 없이 올라오는 절망감과 두려움을 신앙의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슴을 내밀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을 따라 걷다가 '나는 길이다' 하신 분과 만나는 기쁨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의 초입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더불어 아름답게 물들어가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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