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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표준설교] 원죄
김동환  |  drdonghwan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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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7월 31일 (월) 23:57:58
최종편집 : 2017년 08월 03일 (목) 23:54:15 [조회수 :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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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박사의 ‘풀어쓴 웨슬리 표준설교 44편’

누구나 알아야 할 구원의 핵심을 다룬 설교, ‘웨슬리표준설교’

누구나 쉽게 읽고 응용하도록 풀어 쓴 설교, ‘풀어쓴 웨슬리표준설교’

 

8월에 함께 읽을 설교

제 목: 원 죄

원문제목: Original Sin

 

성경본문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설교 읽기를 위한 도움말

하늘가는 길의 첫 걸음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다름 아닌 하늘나라의 현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우리가 행한 어떤 잘못에 대한 후회나 반성의 차원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심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회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문제를 야기시키는 근본 원인을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죄악으로 인도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우리는 ‘원죄’라 부릅니다. 이 원죄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이미 마련해 두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전 과정을 우리는 후회할 것이 없는 진정한 회개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를 하는 사람에겐 하늘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다음 설교들은 우리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산출하고 있는 원죄의 본질을 밝히고 이런 구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설교 38: 원죄 Original Sin

설교 3: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Awake, Thou That Sleepest


 

   
▲ 존 웨슬리

 

웨슬리는 비교적 젊은 시절부터 원죄에 대한 확립된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약 26세 때였던 1729년에 창 1:27에 기초하여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이미 원죄에 대한 매우 명확한 이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 같은 그의 원죄 이해는 나이가 든 후에도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창 6:5을 근거로 한 설교 38편의 주요 주제 또한 원죄에 관한 것입니다.

웨슬리는 이 설교를 통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강조합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의견과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 마귀의 형상이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형상은 곧 자기를 드높이고자 하는 교만, 자기를 주장하는 아집, 피조물을 향한 끊임 없는 사랑이며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질병은 각양의 부작용을 만들어 내며 인간을 더욱 죽음의 수렁으로 이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치명적인 질병이 회복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웨슬리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만이 마귀의 형상, 곧 교만과 아집과 피조물을 향한 갈망을 끊어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근본적 치유책이라는 것이지요. 웨슬리는 원래 이 설교를 구두형태로 1751년과 1758년 사이에 약 10회 정도 사용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정교하게 표현하기 위해 1년 후에 지금의 원고형태로 재 작성했습니다.

 

 

풀어 쓴 설교

 

 서 론

 

인간을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은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대의 문학작품들은 인간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인간 안에 내재된 고상한 덕을 찬양하며, 인간의 미래에 보장된 행복을 확신하며 흐뭇해 하기도 합니다.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인간을 향한 낙관론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희미한 이성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방인들은 인간의 이성이 구축해 낸 세계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칭송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의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인간 안에 있는 가능성을 주목하고 인간을 꽤 괜찮은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도 인간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은 여전합니다.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이 경향은 더욱 농후하여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 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을 공공연하게 위대한 존재로,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시 8:5, 히 2:7, 9 참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런 주장에 환호를 보내며 적극 환영합니다. 사람의 심리란 자기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이들은 이런 심리를 활용하여 인간은 위대함을 마음껏 찬양하고 그 대가로 사람들의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간에 대한 평가는 이 같은 세상의 평가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가치라고는 찾을래야 조금도 찾을 수 없는 티끌 같이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이렇게 한 마디로 묘사합니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다.’(고전 15:22, 롬 5:19 참조)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불의한 죄인으로 이미 죽은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런 처지를 죄와 허물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엡 2:1 참조). 아담의 후손 인간은 이 아담의 운명을 그대로 상속받았기 때문에 아담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을 잃어버린 채로 불의 가운데 태어나며 영적으로 사망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이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반드시 걸머져야 할 운명적 현실입니다. 이 운명을 본문 창 6:5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찼다.’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 지금부터 이 같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이 운명을 타개할 수 길이 무엇인가 찾아보려 합니다.

 

1. 홍수 직전의 인간

 

세상은 인간을 향해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매우 가치 있고 위대한 존재로 묘사하지만 성경은 이와는 전혀 반대의 시각으로 아무런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는 무가치한 존재로 간주합니다. 물론 성경이 인간을 처음부터 이렇게 본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본래 인간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위대하고 가치 있는 존재, 한 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존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담의 타락 이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 이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로 전락한 것이지요. 아담의 타락 이후 그 후손들은 이런 아담의 운명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습니다. 그들은 죄의 본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이 상황은 갈수록 심화되어 노아 시대 때에 이르러서는 그 최대치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홍수심판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이 즈음의 인간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한 발짝 더 들어가 살펴 보겠습니다.

홍수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 본문에 따르면, 온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했습니다. 여기서 ‘관영했다’는 말은 ‘차고 넘쳤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어느 특정 지역에 살던 특정 사람들만이 악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조리 다 악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에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인해 적지 않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노아라는 단 한 사람의 의인만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노아를 제외하고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로 물들어 있었다는 것이지요(창 6:8, 눅 1:30). 한 마디로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죄악으로 물든 인간의 형편을 성경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모든 계획이 악했다.’ 다시 말해 인간 내면의 모든 것, 곧 성향, 기질, 감정, 욕구, 계획, 사상 이 모두가 물들어 있고 여기에서 말미암은 행동 또한 죄로 물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어째서 이렇게 광범위 하고 깊게 인간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타락 이전의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인간 영혼에 심어두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던 순수함과 거룩함만이 인간 영혼에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순수함과 거룩함은 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마귀의 형상이 그 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붙들리게 된 것입니다. 이 정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100% 악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부는 선하고 일부는 악한, 선악이 혼합된 상태라거나, 악한 부분이 억압되고 선한 부분이 보충되면 더 선해질 수 있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발끝에서 머리까지 성한 부분이 없는 그 존재 뿌리까지 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설교 이해를 위한 팁] ‘고장 난 저울’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상태를 ‘원죄’라 말하면서 이 상태를 ‘고장난 저울’에 비유합니다. 양쪽에 무게를 달 물건을 달 수 있는 저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저울은 이미 완전히 한 쪽으로 기울어져 고장 난 저울입니다. 기울어져 있는 채로 있기 때문에 반대쪽에 그 어떤 것을 올려도 저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미 죄로 기울어진 고장 난 저울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의로 반대편에 올려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항상 죄일 뿐입니다.

 

 

2. 지금 인간의 상태

 

죄악으로 관영했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홍수로 인해 인간의 운명이 바뀌었을까요?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노아의 자손들은 죄로 물든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났을까요?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있었던 후 수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예언자들에 비친 세상 사람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사 1:5-6) 신약 시대는 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을 들어 보십시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여전히 죄에 매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홍수 직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있고 마귀의 형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여전히 죄가 관영하여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는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인간의 자연적 상태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삶의 영역 밖으로 밀쳐 놓고 하나님 아닌 것을 좇습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점에서 무신론자이면서 실제로는 우상숭배자인 이유입니다. 우상숭배는 단지 조각된 우상에 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 아닌 것을 세우고 그것을 숭배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우상숭배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광을 자신이 가로챈다는 의미에서 우상숭배의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마귀가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 놓은 자신의 형상입니다. ‘마귀의 형상’이죠. 마귀는 자신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심어 놓았고, 인간은 이 마귀의 형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의 형상이 이끄는 삶은 교만의 삶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 깊숙이 박혀있는 이 교만이라는 뿌리가 이끄는 대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첫째는 ‘육신의 정욕’이고 둘째는 ‘안목의 정욕’이며 셋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세상의 피조물을 향한 애착’입니다. 즉, 피조물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만족감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육신의 욕망을 끊임 없이 추구하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 없이 매달리는 삶을 산다는 점에서 짐승과 다름 없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짐승보다도 더 피조물을 집착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교육과 종교적 삶을 통해 어느 정도 이 성향을 절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에 정복당해 살아갈 수 밖에 없기에 육신의 정욕을 정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피조물에 집착을 보이는 직접적이고 물리적 의미의 육신의 정욕과는 달리, ‘생각’에 의한 간접적이고 의식적인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욕구는 주로 기분 좋게 하거나 아름답다거나 신기하다거나 하는 쾌락을 추구하는 욕구이기에 한 번 충족되면 그대로 사라지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심화되어 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즉, 이 욕구는 한 번 충족된 이후에도 이내 갈증을 느끼게 되며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거나 더 강한 것을 찾아 충족시키려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타인에게 자기 자신을 인정받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이는 타인보다 높아짐으로써 인기를 끌고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인데, 흔히 명예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적게 받았거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간에 이 욕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공공연히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 욕구에 쉽게 노출되는데, 서로 높아지려고 다툼을 벌였던 제자들의 경우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교만이라는 죄의 뿌리에서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탐욕이 내 안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형태의 탐욕은 전개의 순서로 본다면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으로 진행됩니다. 이생의 자랑은 곧 교만이라는 뿌리와 가장 가까운 탐욕이고 안목의 정욕은 이런 교만의 뿌리로부터 자란 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줄기는 다름 아닌 ‘내 생각에 매인 고집,’ 곧 ‘아집’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교만과 아집에서 꽃피운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이 죄의 뿌리라면 아집은 그 뿌리에서 자란 줄기라 할 수 있죠. 이렇게 뿌리와 줄기가 터를 내리면 죄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즉, 교만은 아집을, 아집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으로 전개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형상이 차지한 인간의 운명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악에 매여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죄의 올무에 빠져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올무에 걸린 짐승을 생각해 보십시오. 올무에서 빠져 나오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얽어 매여 들어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죄라는 올무에 빠져들었기에 때문에 설혹 무슨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죄이며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정황을 한 마디로 표현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참조)

 

[설교 이해를 위한 팁] ‘욕망에 사로 잡히다’

마귀의 형상의 대표적인 특성은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자신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가 본격화 되는 것은 ‘욕망’이라는 통로를 통해 진행되는데, 이 욕망의 형태가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셋이 어우러져 작동됨으로써 우상숭배를 향한 실제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처음 인간의 타락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마귀 곧 뱀은 인간의 심령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의 씨를 뿌립니다. 교만의 싹이 트니(이생의 자랑)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암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먹음직도 하게 되어(육체의 정욕) 처음 사람은 마침내 범죄를 결행하고 맙니다.

 

 

3. 구원의 길

 

더욱 심각한 사실은 인간이 이 같은 비극적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눈먼 상태로 태어난 소경이 그 사실을 누군가가 알려 주지 않으면 자신이 눈이 멀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우리는 이와 같은 상태를 ‘영적 감각이 마비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 감각이 마비되면 영적인 세계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자신의 영적 결함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자란 아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사람들의 언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듯이, 영적인 무지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는 물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닫혀진 이해의 눈을 뜨게 할 때만 감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적인 세계를 감지하게 하는 이해의 눈을 허락하시는 은총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롬 5:8) 다시 말해 영적인 소경이 되어 자신이 처해 있는 심각한 처지조차도 알지 못할 때에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은총을 베푸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방주가 준비되던 120년 동안 인간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로부터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인간에게 어떤 선한 것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악 만을 만을 향할 뿐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 자신 안에는 그 어떤 선한 것도 생길 가능성은 전무했습니다. 교육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을 결코 선한 존재로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인해 오직 한 가지,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만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방종교에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방종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희미하게나마 인간에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지만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또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방종교 중에서도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 특히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죄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즉, 인간의 문제가 죄로 인해 파생됨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더라도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선한 요소 또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한 부분을 확대시키고 악한 부분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런 접근으로는 인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 참다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밖에는 없습니다. 참된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죄 중에 태어나고(시 51:5), 영혼전체가 더럽혀져 있어서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롬 7:18)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먼저 인간이 치명적 병에 걸려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이 병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한 영혼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혼의 뿌리부터 죄에 잠식되어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하며 죄악의 열매만을 맺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기독교는 이런 상태를 명확하게 알 뿐 아니라 이 병의 치료제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이미 예비되어 있음을 압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치명적 병에 걸려 소망이 없던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고 누구든지 이 분을 믿는 자마다 치명적 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치유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갈 2:20 참조)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형태를 달리하며 치명적 병에 걸린 영혼을 치유해 들어갑니다. 교만(영적인 병, 이생의 자랑)은 ‘회개와 겸손의 믿음’을 통해, 아집(자기의지, 안목의 정욕)은 자기부정 곧 하나님의 의지에 온유와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성화의 믿음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육체의 정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의 믿음으로 치료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죽음으로 이끄는 치명적 질병은 믿음으로 치유되는데, 죄 사함의 믿음과 온전한 구원을 소망하는 소망의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사건입니다. 기독교만이 이러한 구원의 사건을 분명하게 밝혀준다는 점에서 유일한 참된 종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 이해를 위한 팁] ‘거짓종교/ 유사종교/ 참종교’

세상에는 셀 수 없이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종교들 중에 어떻게 참된 종교를 선별할 수 있습니까? 참된 종교를 선별하는 기준은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종교는 그 해결책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교를 우리는 ‘거짓종교’라 합니다. 인간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종교는 그 해결책 또한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교를 ‘유사종교’라 합니다. 인간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또 그 해결책 또한 정확히 제시할 수 있는 종교를 ‘참종교’라 하고요. 즉, 참종교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종교인 것입니다. 영혼의 회복을 이끌 수 없는 종교는 무익하고 위험합니다. 영혼의 회복을 이끌지 못한다면 기독교라 이름을 붙일지라도 거짓종교요 유사종교일 뿐입니다. 그 같은 능력이 없으면서 온갖 포장으로 그럴 듯 하게 꾸며 말하는 거짓 교사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속임수를 가지고 말해도, 아무리 그럴싸해도, 심지어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결 론

 

모든 인간은 죄의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죄에 매어 있어 죽음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셈입니다. 이 상태를 우리는 ‘치명적 질병에 걸려 있다’고도 말합니다. 이 병은 아담으로부터 유래되었지만 아담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허리에서 난 모든 인류에게 해당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병이 가져올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 병의 치유 없이는 인간에겐 소망도 행복도 없습니다. 우리는 첫 아담 안에서 죽었지만 이제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합니다.(고전 15:22)

이를 위해서는 치료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 병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할 일은 분명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죄로 범벅이 된, 전혀 순결한 것을 기대할 수 없었던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유 1:3)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전한 믿음 안에 거하십시오. 이제부터 우리의 모든 병이 치료되고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온전히 품을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히 6:1 참조)

 

 

   
▲ 김동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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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99.XXX.XXX.49)
2017-08-01 07:10:13
기독교는 과거만 있고 미래가 없습니다.
매일 종교개혁, 칼빈 루터나 찾고 있는데,
세상은 미래를 향해서 달려 나가고 있는데,
성도들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찾아야 하는데,
맨날 과거에서 헤메고 있으니...
안탑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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