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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원했는가?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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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7월 29일 (토) 21:47:45
최종편집 : 2017년 09월 23일 (토) 05:54:48 [조회수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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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교 초기에 예수 믿는 사람을 예수쟁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 쟁이라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다. 이러한 용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보다 예수를 더 중시해 왔고 지금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는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원했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기독교를 식별하는 특징인 동시에 기독교의 기반이기 때문에, 이 물음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복음서보다 바울 서신을 더 중시하는 것을 흔히 본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얼마나 알고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오늘의 기독교가 달라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의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이 물음은 단지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서 제기된 아주 중요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예수를 그들의 구미에 맞게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해 왔다. 기독교 2천년의 교회와 사회에서 아주 많은 것이 예수에 근거해서 정당화 또는 합법화되어 왔다. 기독교인 통치자, 영주, 그리고 기독교 정당, 계급, 인종들이 자주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내세웠다. 예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온갖 시도에 대해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는 교회와 사회의 기성 체제에 안주하는 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시류에 따라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가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원했는가를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한스 큉의 『왜 그리스도인인가』(분도, 1982)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책은 오래 전에 나왔지만 예수가 한 일이나 원한 일을 이 책만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독자들은 여기서 저자가 삼위일체나 십자가의 구속 같은 교리적인 면이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에서 예수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제사장이나 신학자가 아니었다.

역사적인 면에서 예수는 성직자가 아니었다. 예수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설명하는 히브리서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는 예수 부활 후의 사후 해석이다. 예수는 ‘평신도’였다. 처음부터 평신도 운동가로서 제사장들의 의혹을 샀다. 예수의 추종자들도 평민이었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예수의 비유 이야기들에도 제사장이 등장하는 경우는 한 번밖에 없다(눅 10:31).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과는 달리 강도들에게 맞아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으로, 모범 사례가 아닌 경고 사례이다.

역사적인 면에서 예수는 신학자도 아니었다. 누가가 예수의 소년기 이야기로 전하는, 성전에서의 열두 살 적 예수 이야기는 이 사실의 간접 증거이다. 반대자들이 비평한 대로 예수는 ‘배우지 못한’ 시골뜨기였다. 예수는 신학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를 내세운 일이 없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랍비’라는 존칭으로 부른 것은 사실인 듯하지만, 정식으로 안수에 의해서 랍비 직분이 그에게 부여된 일은 없다.

예수는 교리, 윤리, 율법에 관한 모든 문제의 전문가로, 신성한 전통의 보존자나 해석자로 행세하지 않았다. 물론 구약성서에 따라 살았으나 성서 신학자인 것처럼 성서를 주석하지 않았고 조상들의 권위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방법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예수는 놀랄 만큼 자유롭게 직접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런 이치에 따라 피력했다.

예수의 가르치는 방식은 서민적, 대중적, 직접적이다. 필요하면 날카롭게 논쟁적이고 종종 일부러 야릇하게 역설적이면서도 언제나 함축적이고 구체적이며 생생하다. 정확한 관찰, 시적 영상, 수사적 열정이 묘하게 결합된 표현으로 정곡을 찌른다. 공식이나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심오한 사변이나 해박한 율법적 논리를 구사하지 않는다. 누구나가 마주치는 일상사에서 누구에게나 이해되고 적용될 수 있는 격언, 예화, 비유들을 이끌어낸다. 예수의 말씀 가운데서 많은 것들이 격언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수의 견해와 요청은 단호하되 특정한 지성적, 윤리적, 세계관적 성격의 전제가 없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망되는 것은 듣고 깨달아 구체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예수가 ‘나를 따르라’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정통 교리의 이론적 사변이 아닌 절실한 실천적 결단이다.


예수는 집권자 편이 아니었다.

역사상 예수는 집권당의 일원이나 동조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사두개파에 속하지 않았다. 정규적으로 대제사장을 배출해 온 사회 특권층인 이 귀족 성직자 집단은 대외적 자유주의와 대내적 보수주의를 결합하고 있었다. 외교적 면에서는 현실적응과 긴장완화 정책을 위해서 로마의 종주권을 무조건 존중하는 한편, 내정의 면에서는 어떤 수단으로든 일종의 성직자 중심 교회국가를 수호하여 자기네 권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예수는 이런 성격의 자유주의뿐 아니라 보수주의도 배격했다.

그리고 예수는 사두개파 집권층의 보수적 율법관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록된 모세율법(오경)만을 구속력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들보다 엄격하지 않은 후기 바리새파의 여러 해석을 배격했다. 그들은 특히 성전 전통을 고수했고 따라서 안식일 법의 타협 없는 준수와 율법에 의한 엄격한 제재를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는 전통이나 율법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 보다 나은 미래 세계와 인간의 개선된 미래만이 예수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예수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로나 행동으로나 철저히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기성 체제를 문제 삼았다.


예수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의 공적 활동 개시를 세례 요한의 각성 운동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신약성서가 기록될 때까지도 일부에서 예수의 경쟁자로 여겼던 세례 요한을 마가는 ‘복음의 시작’으로 삼았고 그 후의 복음서들에서도 같은 노선을 지켰다. 그의 설교는 요한과 결부되어 있고 요한의 종말론적 회개 호소를 받아들여 거기서 실천적 결론을 이끌어 냈다.

복음서들이 한결같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부터 예수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의 권위를 의식하고 있었다. 예수에게는 요한의 세례 운동과 특히 그의 체포야말로 때가 이르렀다는 표징이었다.

이리하여 예수는 이 고장 저 마을로 오르내리며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것은 고행자 요한이 음울하게 외치던 심판의 위협과는 달리, 처음부터 고맙고 반가운,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기쁨, 평화의 나라를 알리는 소식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심판이라기보다는 만인을 위한 은총이라고, 질병, 고통, 죽음만이 아니라 가난과 압제도 끝나리라고 가난하고 고달프고 죄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전하는 소식이었다.

백성에게 반가운 이 소식은 성전예배, 율법준수 같은 기존 질서의 보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는 특별히 제사만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견지를 취한 것이 아니고, 임박한 종말에 성전 자체가 파괴될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혁신적인 생각을 선포한 예수는 유대교 기존 체제 집권자들에게 심상찮은 위험인물로 보일 만큼 율법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의 성직자들과 어용 신학자들은 ‘이 사람은 사실상 혁명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철저한 변화를 원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혁명 이념과 매우 가깝고 열심당 혁명가들에게 매력이 있었다. 정치적 급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상황이 철저히 변화되기를, 인간의 지배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가 조속히 개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예수는 집권층과 부호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회비리, 권리침해, 수탈, 학정을 고발하고 가난한, 억눌린, 박해받는, 불우한 자들을 변호했다. 궁궐에서 고운 옷을 입고 사는 자들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하는 폭군들을 신랄하게 비꼬았다. 심지어 헤롯을 무엄하게도 ‘여우’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혁명가들처럼 군사적이나 준군사적 활동에 의하여 폭력으로 달성되는 민족적 정교일치 신정체제나 민주체제를 선포하지 않았다. 물론 분명한 정치적 또는 사회비판적 참여 없이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탄압집단에 대한 돌격 나팔을 불지 않았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반정부 운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이 가져다주실 변혁을 기다렸다. 폭력 없이 기다려야 할 하나님 자신의 제한 없고 직접적인 세계통치를 선포했다. 아래로부터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안배되는 변동을 말이다. 그러나 물론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깨달아 전력으로 여기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하나님 나라야 말로 맨 먼저 추구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걱정하는 다른 모든 것이 곁들여 주어지리라고 선포했다.

예수의 ‘혁명’은 오히려 진정하고도 보다 엄밀히 규정되어야 할 의미에서 ‘급진적인 혁명’이었고 영속적으로 세계를 변화시켜 왔다. 예수는 체제냐 혁명이냐, 영합이냐 배타냐의 양자택일을 뛰어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혁명가보다 더 철저한 혁명을 촉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원수 타도가 아닌 원수 사랑을, 보복이 아닌 무조건 용서를, 폭력 행사가 아닌 인내를, 증오와 복수가 아닌 화해와 축복을 내세웠다.

예수에 의해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단연 비폭력 혁명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인격의 중심, 마음에서부터 사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런 혁명 말이다. 구태의연하게 살지 말고 사람이 철저히 달라져야 한다고, 자기로부터 하나님과 타인에게로 전인적인 방향전환을 이루라고, 정작 인간이 해방되어야 할 외세란 적국의 세속 권력이 아니라 악의 권세들, 곧 미움, 거짓, 불의, 불화, 폭력 따위의 온갖 이기심의 발로라고 말했다. 예수가 추구한 것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의식의 변화, 사고의 혁신, 가치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인간 안에 있는 악의 극복을, 외적 세력에서 해방시켜 줄 내적 자유를 강조했다. 나아가서 예수는 개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마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한스 큉을 통해서 예수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원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는 기존의 체제나 정치 세력을 추종하지 않았고 그들이 표방하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인간을 억죄는 교리, 윤리, 율법을 비판하면서 그것들의 경직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추상적인 사변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었다.

그가 선포한 복음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소외자들이 해방되는, 사랑, 용서, 인내, 화해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는 소식이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서 모든 악의 근원인 이기심을 버리라고, 자기로부터 하나님과 타인에게로 철저하게 방향 전환을 하라고 가르쳤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이러한 내적 자유, 타인을 위한 삶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삶의 모범을 보이면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삼위일체 하나님, 이신칭의 같은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가 가르치고 행한 대로 살아야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가 원하는 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예수는 마태복음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그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온 예수의 뜻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믿는 자에게는 모름지기 예수의 뜻대로 사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 믿음의 고백과 더불어 행함이 있어야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고, 그 나라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고, 장차 재림의 날에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선포된 예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낭만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 나라는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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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12.150.53.39)
2017-08-28 11:06:37
아멘!
동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참제자되기 원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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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존경합니다 (218.155.76.81)
2017-08-03 10:16:52
한스큉 신부님의 책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시며 소개하시는 님은,
예수님을 따르시는 진정한 따르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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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잔나비 (110.70.50.186)
2017-07-30 01:0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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