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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체험적 신앙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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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7월 09일 (일) 00:00:47
최종편집 : 2017년 09월 23일 (토) 05:54:36 [조회수 : 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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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 시대를 연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하다. 특히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드리려고 한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서 손색이 없는 확고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나이 들어서 얻은 아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20-21)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귀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다는 창세기의 기록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다는 바울의 언급을 접하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놀라운 큰 믿음에 감탄하고 그의 신앙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실상 아브라함은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가 어떻게 아들을 번제로 드릴 만큼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

 

   
 


반복되는 의심

아브라함 내외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반복적으로 의심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해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젊어서 출산하지 못한 사라가 늙은 나이에 아들을 출산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창세기에는 최소한 다섯 차례에 걸쳐서 아브라함 내외가 여호와의 약속을 의심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기록이 나온다.

창세기 12장에서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은 아내를 버린다. 그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그의 아내를 아내라고 밝히지 않고 동생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의 아내가 원래 이복동생이었지만, 바로가 물은 것은 그 당시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이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동생이라고 대답하자 바로는 사라를 그의 궁으로 데리고 가고 그 대가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준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판 셈이다.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을 확신했다면, 그의 아들을 낳을 아내를 바로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지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바로에게 아내를 동생이라고 말할 계획을 세우고 사라 역시 거기에 동의한다. 그들 내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것이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가 아내를 되돌려 받기는 했지만, 그가 여호와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려는 여호와 편에서의 도움이었다.

15장에 가면 여호와께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에게 상속자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시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따른다. 그런데 16장에 가면 그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서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씨를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갈이 임신하자 사라는 그녀를 멸시하는 하갈을 학대해서 결국 하갈이 집을 나가고 만다.

여기서도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확신이 있었다면 아내의 말에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하갈에게서 씨를 얻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고 믿었다면 하갈이 집을 나가지 않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그는 일종의 무골호인으로 보인다. 자기의 주견 없이 아내의 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서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찾아보기 어렵다.

17장에 가면 여호와께서 세 번째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새 이름을 그에게 지어주시고 그의 아내에게도 새 이름을 주시면서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17)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라가 출산할 수 없는데 왜 그런 불가능한 약속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나 잘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세 번째로 여호와의 약속을 듣고 나서 노골적으로 웃는 것을 보면 앞에서 아내를 버린 것 그리고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으려고 한 것 역시 그에게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18장에 가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방문해서 사라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라가 자기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엿듣고는 속으로 웃으면서 여성의 생리가 끊어진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고 여호와의 약속을 의심한다. 지난번 사라의 조언에 따라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한 것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던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부부일체라는 말대로 사라의 의심은 아브라함의 의심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의심은 20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랄에 머물 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간다. 나이가 90이 되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예뻤던 모양이다. 그런데 네 번이나 여호와께서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옛날 바로에게 아내를 넘긴 것처럼 이번에도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넘긴다. 자기 아내를 남에게 넘기는 아브라함은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기까지 반복되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은 사람이다. 15장 6절에서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난 것은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두 차례에 걸쳐서 여호와를 위해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동물의 번제를 드리고, 식구들에게 할례를 행한 데서도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의 믿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거듭 의심한 것을 보면, 그에게 믿음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믿음은 확고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다. 그 멸망은 그 도시의 문제일 뿐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일을 직접 경험한 후에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으로 변했다.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주신 아들을 이제는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 내외의 입장에서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변덕스럽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간 것을 보면 이제 그가 절대 순종의 사람으로 변한 것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100세 된 남자와 90세 된 여자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그리고 신비로운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달라진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된다.

이삭을 얻은 후 사라는 하나님이 자기를 웃게 하신다고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웃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노년에 아들을 낳은 부인의 어색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의심하던 아브라함 내외가 이삭을 얻은 후 절대 신앙의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 그 생략된 부분을 채워 넣어야 한다.

우리는 그 엄청난 선물을 받고 감격한 아브라함 내외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선물에 크게 감사하는 한편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던 어리석음을 엎드려 회개하면서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결단했을 것이다.


마치면서

아브라함은 우리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때가 많다. 성경 말씀을 반복적으로 읽고 들어도 우리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의심하면서 아브라함이나 사라처럼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 체험에 관한 간증을 듣고 그 순간 감동해도 ‘그럴 수도 있겠지’ 정도로, 그것은 나의 삶과는 아주 먼 것으로 생각하면서 곧 잊고 만다.

신학이나 교리가 교회의 기반이고 그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만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체험이다. 우리는 신학이나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기독교 신앙을 납득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납득은 이성을 지닌 우리들에게 필요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 납득만으로는 우리가 감동하지 못하고 확신에 이르지 못한다.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느낄 때, 우리는 감동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의심 많던 아브라함도, 한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도,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도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적인 무신론자들조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이어령은 바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하나님 체험을 통해서 확고해진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체험이 일생동안 단 한번 뿐이라 하더라도 그 체험의 앙금이 우리의 무의식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어서 신앙의 닻이 되어준다. 이것이 바로 웨슬레나 슐라이에르마허가 체험적 신앙을 중시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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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 (175.XXX.XXX.232)
2017-07-09 00:09:22
그래도 의심이 온다.

우주를 생각, 자연을 보며

믿음 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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