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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열 가지 말씀
김종길  |  kimzongg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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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6월 02일 (금) 23:53:15
최종편집 : 2017년 06월 06일 (화) 00:07:41 [조회수 : 9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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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열 가지 말씀

― 계약구조에서 본 십계명 ―

 

김종길 / 구약학

 

1. 서론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십계명’이 하나님의 뜻이 담긴 법이라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면서도, 실상은 십계명을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십계명의 입지는 좁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찬송가의 앞에 나오고, “십계명”은 뒤에 배치되었다. 예배 시에 십계명을 교독하는 교회는 별로 없는 듯하다. 교인들이 십계명을 암송하는 것은 차치물론하고 그 내용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구약의 율법 조항들보다는 복음, 은혜, 용서 등의 주제를 선호한다. 십계명을 지키는 행위는 율법주의로 취급된다. 게다가 과학적으로 사유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서 유대 종교의 계율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종교개혁가들은 십계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십계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현대 교회에서 십계명이 경원시되는 것은 루터(Martin Luther)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루터 신학의 바탕은 칭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으로 성서를 바라본 루터는 구약을 율법으로 신약을 복음으로 이해하고, 율법은 복음에 비하여 열등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율법과 행위가 옛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죄 용서와 은혜는 새 시대의 교회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루터는 유대교와 바울의 싸움을 ‘행위’와 ‘믿음’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으로 보았다. 유대교는 인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에 의존했고, 바울은 믿음을 구원의 근거로 보는 은혜의 신학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이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과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 사상은 개신교회가 윤리적 행위를 경시하고 신앙 일변도로 나아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 아래 있는 한국 교회는 대부분 루터의 율법관과 칭의론을 편향되게 수용하여,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함이 조화를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루터의 성서해석을 점검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십계명을 해설하는 데에 공을 들였지만, 십계명 해석에서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루터의 견해처럼,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상반되는가? 유대교는 행위 구원론에 입각하고, 기독교는 은혜 구원론에 근거할까? 과연 바울이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함을 배척했을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폐기하고 복음만 고수하면 되는가? 유대교를 은혜에 대립하는 율법의 종교로 보는 전통적 입장에 대하여, 샌더스(E. P. Sanders)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유대교 연구는 예수와 바울 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했다. 샌더스에 따르면,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존재한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에 근거하고 있었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교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공로주의 종교가 아니라 은총의 종교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으로 구원받았다. 율법 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유지하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걸어야 할 길이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임을 보여주며, 기독교와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이 글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십계명을 연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루터의 성서해석을 바로잡는 데에 기여하리라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역사-비평 방법을 수용하고, 특히 계약(契約)의 빛에서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검토하며 평가하고자 한다. 크뤼제만(F. Cruesemann)이 제시한 ‘사회사적 관점’(sozialgeschichtlicher Perspeklive)에서 율법의 사회적 기능을 설명할 것이다. 이에 더해서, 필자는 십계명의 존재론적 의미도 고찰할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이 현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밝히고자 한다.

 

   
▲ 렘브란트, '십계명 석판을 든 모세', 1659, 베를린 시립박물관.

2

. 십계명의 구조 및 성격

 

(1) 십계명의 구조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율법, 예언, 지혜, 묵시 등 여러 전통이 어울려 야웨 신앙과 히브리 성서를 형성하였다. 계약신학은 언제 발생하고,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계약사상은 예언전통과 관련이 있다. 인류의 정신문화가 비약적으로 개화한 축의 시대(Axial Age, 기원전 900-200년)에 활약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왕정과 함께 등장한 예언자들의 주요 본분은 야웨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왕권을 견제하여 정의사회를 추구하며,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다.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국운이 쇠하고 위기에 처한 남왕국에서 비로소 과거에 예언자들이 선포한 메시지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회복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계약신학이 등장하였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율법에 관심하였다. 신명기법전(신 12-26장)은 앗시리아의 종주권조약의 형식을 빌려서 기록된, 요시야 왕 치하에서 추진된 개혁의 청사진이다. 기원전 587년에 남왕국마저 멸망하고 나서, 바벨론에 거하던 유대인들이 율법서인 오경을 편찬하였다. 그 뒤에 예언자들의 메시지도 수집되고 편찬되었다. 요컨대, 예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하여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기원전 8세기 이래로 예언자들이 활동한 결과로 계약이 등장하고, 뒤이어 율법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 고고학에서 이룬 고대 근동의 종주권조약(suzerainty treaty)에 대한 연구 성과는 성서연구에 크게 공헌하였다. 코로섹(Viktor Korosec)이 고대 히타이트 제국과 속국들이 체결한 ‘히타이트의 종주권조약’(Hethitische Staatsvertraege)을 연구하고, 거기에 일정한 양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비커만(E. Bickerman)은 종주권조약과 구약성서의 계약 사이에 유사한 면이 있다고 제안했다. 종주권조약에 대한 연구 결과를 구약성서 연구에 적용한 구약학자는 멘덴홀(G. E. Mendenhall)이었다. 히타이트의 조약문서에 나타난 양식은 신명기를 구성하는 양식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가 분석한 신명기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I. 전문(前文): 신명기 1장 1-5절

II. 역사적 서언: 신명기 1장 6절-4장 49절

III. 기본 조항: 신명기 5-11장

IV. 세부 조항: 신명기 12-26장

V. 축복과 저주: 신명기 27-28장

VI. 증인: 신명기 30장 19절; 31장 28절; 32장 1-43절

 

클라인(M. G. Kline)과 크레이기(P. C. Craigie)와 맥카시(D. J. McCarthy) 등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명기에 사용된 언어와 문체가 종주권조약과 유사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원신명기의 형성시기를 요시야 왕이 남왕국을 다스리던 때로 본다면, 신명기의 형식과 내용이 앗시리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바인펠트(M. Weinfeld)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종주권조약의 구조에서 보면, 신명기 5-26장은 계약 규정에 속한다. 5-11장은 일반적 조항이고, 12-26장은 세부적 조항으로 구분된다. 신명기에서 율법이 중심적인 위치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율법의 비중을 드러낸다. 전체의 구조가 부분의 구조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는 프랙탈(fractal) 구조가 신명기 본문에서 나타난다. 신명기의 종주권조약 구조는 신명기법전의 요약판인 십계명(신 5:6-21)의 구조에서도 발견된다. 멘덴홀이 분석한 십계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I. 전문(前文): “나는 … 야웨다” (출 20:2a; 신 5:6)

II. 역사적 서언: 출애굽 사건 서술(출 20:2b; 신 5:6)

III. 계약 조항: 열 가지 말씀(출 20:3-17; 신 5:7-21)

 

위에서 보듯이, 열 가지 말씀은 계약 규정으로 작성된 것이다. 십계명에는 부분적으로 조약형식이 결여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강복과 저주, 문서의 보관 등에 관한 언급이 십계명에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조약 양식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강복과 저주는 이미 전제되어 있으므로 생략된 것이다. 이를테면 제2, 제3, 제5계명 등에는 저주와 강복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십계명 자체에는 없는 나머지 절차는 계약 체결을 묘사하는 다른 본문에 나타난다. 신명기 31장 26-29절에서 계약체결의 증인으로 야웨 하나님 이외에 하늘과 땅이 등장한다. 그리고 신명기 27-28장에 순종과 불순종에 따르는 축복과 저주가 제시된다. 그리고 십계명이 기록된 석판이 두 개라는 것도 종주권조약의 관례에서 설명될 수 있다. 종주국은 동일한 내용의 조약 문서를 두 부 기록하여 본국이 한 부를 보관하고, 상대국에 한 부를 보관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모세는 두 장의 십계명 석판을 법궤 안에 보관한 것이다. 그리고 법궤는 조약 문서를 보관하는 신전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십계명의 형식과 내용은 많은 면에서 고대 근동의 국제조약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원신명기(신 12-26장)는 앗시리아의 종주권에 저항하여, 참된 종주인 야웨와 봉신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확인하는 증서라고 말할 수 있다. 신명기법전을 집약한 십계명은 계약 규정의 정수다.

십계명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기록한 석판을 받았다는 전승과는 달리, 십계명은 후대의 작품이다. 알트(A. Alt), 폰 라트(von Rad), 노트(M. Noth) 등은 십계명이 왕정시대 초기나 중기에 형성되었다고 본다. 크뤼제만은 십계명의 형성 연대를 북왕국이 멸망한 시기와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한 시기 사이로 추정한다. 하지만 페얼리트(L. Perlitt)나 호스펠트(F. L. Hossfeld) 그리고 슈미트(W. H. Schmidt) 등은 십계명은 그보다 늦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한다. 십계명은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개별적으로 발생한 각 계명이 첨가되면서, 포로기에 신명기사가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십계명의 저자 및 독자는 누구인가? 므낫세의 통치에 대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에는 자유농민(ץראה םע/암 하아레츠)을 비롯하여 상류층 인사들 그리고 예언자들이 포함된다. 이들 가운데 서기관 집단이 개혁 입법의 개념 정립과 법전 편찬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십계명을 수용할 자들은 누구인가? 전반적인 내용을 고려할 때, 십계명의 청자가 토지를 소유한 자유민이라는 크뤼제만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십계명은 법적으로, 종교적으로 권리를 가진 성인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2) 십계명의 성격

① 십계명은 윤리인가?

십계명을 대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입장이 있다. 하나는 십계명을 윤리로 파악하고, 다른 하나는 율법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십계명을 윤리로 보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보편타당성을 강조하고, 십계명을 세상을 향한 도덕적 헌법으로 규정한다. 그들은 십계명을 모든 율법을 아우르는 강령으로 여기거나, 성서윤리를 포괄적으로 요약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유대교 전통에서 십계명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율법은 인간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신적 명령이며 생활 규범으로 작용한다. 기독교 일부에서도 십계명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윤리로 인식되기도 한다.

과연 십계명은 구약시대 윤리의 핵심인가? 크뤼제만은 십계명이 온전한 윤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십계명에서 구약성서 윤리의 핵심적인 주제들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에 윤리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바알 종교나 샤머니즘에는 윤리가 없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에는 높은 수준의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성서적 신앙의 강점이다. 그러나 윤리가 십계명의 본질이 아니다. 십계명은 윤리 그 이상이다. 십계명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윤리라는 주장에는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것을 준행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윤리와 계약의 차이를 간과한 것이다. 윤리에는 요구와 의무만 있고, 그에 대한 보상은 없다. 계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약속과 아울러 쌍방이 부담하는 의무를 포함한다.

 

② 십계명은 종교적 계율인가?

많은 사람들은 십계명이 모든 율법을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십계명을 율법의 총체로 보기에 미흡하다. 크뤼제만에 따르면, 성결 규정, 음식 규정, 제의법 등 구약의 중요한 규정들이 십계명에서 빠져있다. 십계명이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율법의 모든 기본적인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지는 않다.

십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인가? 아니다. 야웨 하나님은 히브리 사람들을 먼저 구원하고, 그 다음에 율법을 주셨다. 율법이란 은혜로 구원받은 히브리 사람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길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약인 십계명은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 즉 ‘구원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한 방편, 즉 ‘성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이 단지 인간을 속박하는 종교적 계율이 아닌 것이다.

 

③ 십계명은 계약의 말씀이다.

출애굽기 34장 27-28절에서 십계명을 ‘언약의 말씀’과 ‘열 가지 말씀’이라고 정의한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말을 기록하여라. 내가 이 말을 기초로 해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기 때문이다.’ 모세는 거기서 주와 함께 밤낮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십계명은 ‘계약’이자 ‘말씀’이다.

첫째로, 십계명은 ‘계약’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명기는 종주권조약의 구조를 따라서 기록되었다. 신명기법전의 요약판인 십계명에서도 계약 구조를 찾아볼 수 있다. 십계명은 야웨와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증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계약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대화이며 협약이다. 둘째로, 십계명은 말씀이다. 출애굽기 20장 1절에서 십계명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םירבדה) 말씀하셨다(רבדי).” 한 문장 안에서 ‘רבד/다바르’가 동사와 명사로 사용되어 그 뜻을 강조하고 있다. “그 때에 주께서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시면서, 그 언약을 선포하셨으니, 이것이 곧 그가 두 돌판에 손수 쓰신 ‘십계명’이다”(신 4:13). 여기서 십계명은 ‘열 가지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셰레트 하드바림’을 번역한 것이다. 열 가지 말씀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계율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교류하는 대화이며 소통이다. 그러므로 ‘계명’보다 ‘말씀’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는 ‘열 가지 말씀’과 아울러 편의상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십계명’이라는 용어를 병기하겠다.

정리하면, 십계명은 형식에서 종주권조약의 구조를 따라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내용에서 성서본문이 십계명이 언약의 말씀임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열 가지 말씀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율법과 복음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하는 계약 프레임(frame)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3. 십계명 해석

 

십계명을 구분하는 방법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① 유대교는 탈무드의 전통을 따라서 야웨 하나님과 해방에 대한 서술을 첫 계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신(異神) 숭배 금지와 신상(우상) 제작 금지를 하나로 묶어서 둘째 계명으로 만들었다.

② 천주교회와 루터교회는 이신 숭배와 신상 제작 금지를 하나로 묶어서 첫 계명으로 보고, 끝에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둘로 나누었다.

③ 정교회와 개신교회(루터교 제외)는 유대교의 첫 계명을 머리말로 보고, 이신 숭배와 신상 제작을 따로 구분하였다.

이 글은 세 번째 전통을 따라서 열 가지 말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머리말: 자유의 강령

앞에서 본 대로, 신명기 및 열 가지 말씀의 구조는 고대 근동에서 통용된 종주권조약의 구조와 유사하다. 십계명은 야웨와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 맺은 언약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5:6). 이 문장은 십계명의 전문(preamble)과 역사적 서언(historical prologue)을 포함한다. 전문(前文)은 야웨 하나님을 소개한다. “나는 네 하나님 야웨다”(신 5:6a). 역사적 서언은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킨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냈다”(5:6b). [이후로는 전문과 역사적 서언을 합하여 ‘머리말’로 표기하겠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와 아울러 출애굽 사건이 결합된 머리말은 십계명을 여는 열쇠다. 그것은 개별 계명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각 계명의 성격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모든 계명들은 머리말의 빛 아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루터는 머리말을 다루지 않았는데, 그 중요성을 간과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머리말을 제1계명으로 간주하는데, 그만큼 이 구절이 지닌 비중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초기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머리말의 실제적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열 가지 말씀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머리말은 과거의 역사로 소급하여 설정되어 있지만,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주께서 이 언약을 우리 조상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세우신 것이다”(신 5:3). 크뤼제만은 머리말에 사회적 차원과 함께 신학적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먼저 당대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자. “종살이하던 집”은 이스라엘이 소유한 가나안 땅과 대조를 이룬다. 신명기 6장 10절 이하 및 8장 7-13절은 아름답고 풍성한 땅을 묘사한다. 야웨 하나님은 히브리들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종살이하던 집”과 “이끌어 낸”이라는 대조적인 구절은 청중의 사회적 지위, 곧 청중이 누리는 실제적 자유가 야웨로부터 기원한 것임을 설명한다. 여기서 자유는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근거를 가진다.

다음으로, 신학적 차원에서 머리말을 다룰 수 있다. 여기서도 자유의 개념이 핵심이다. 야웨의 자기 정의는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분으로 표현된다. 머리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고, 하나님과 청중들 양자간의 ‘나와 너 정의’에 대한 확인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에서 ‘상호관계적 자유’가 작동한다. 관계는 자유를 통하여, 자유는 관계를 통하여 정의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주권의 개념이 아니라 자유의 개념으로 설정된다. 상호관계적 자유는 오직 절대자 안에서 수립되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실현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및 타인과의 관계가 머리말에 이어지는 계명들의 주제다.

머리말의 첫 구절인 “아노키 야웨 엘로헤카(ךיהלא הוהי יכנא)”에서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야웨(הוהי)”를 고유명사로 보고 “엘로힘(םיהל󰔞)”을 보통명사로 취급한다. 초기 이스라엘에서 ‘엘/엘로힘’은 하나님의 이름이었고,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쓰인다. 엘/엘로힘은 문맥에 따라서 고유명사 또는 보통명사가 된다. 예를 들면, 창세기 33장 20절에 나오는 “엘 엘로헤 이스라엘(לארשׂי יהלא לא)”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엘”(공동역)이라고 읽어야 옳다. 앞의 엘(לא)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리말에 나오는 야웨와 엘로힘을 고유명사로 보면,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나는 야웨, 네 엘로힘이다.” 다시 말하여, “야웨는 곧 엘로힘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야웨’와 ‘엘로힘’은 어떤 관계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에서 도시들이 쇠퇴하면서, 사회의 하부층이 대거 도시를 이탈하여 산악 지대와 광야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집트를 탈출한 소수의 출애굽 공동체와 가나안의 산악 지대로 이주한 다수의 집단은 연합하여 군주제에 반대하는 형태로 ‘이스라엘’이라는 지파 동맹체를 조직했다. 팔레스타인 변방에 거주하던 집단은 외부에서 유입된 출애굽 집단과 협력하여 사회변혁을 이끌어 갔다. 양 집단은 출애굽의 경험을 공유하고 한 하나님을 신봉했다. 두 집단이 결합하면서 엘과 야웨가 하나로 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되고, 신명은 ‘야웨’로 통일되었다. 공히 지배세력에 저항하여 자유를 열망하는 두 집단은 야웨의 이름으로 한 이스라엘을 구성했던 것이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야웨”라는 구절이 규명하는 바, 야웨는 히브리 사람을 해방하는 하나님이다. “십계명에서 야웨의 자기 정의는 청중들의 해방이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야웨’(םיירבעה יהלא הוהי, 출 3:18; 7:16; 9:1, 13; 10:3)라는 칭호는 하나님은 해방과 자유의 근거임을 나타낸다. ‘히브리(ירבע)’란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라, 노예, 용병, 강도, 떠돌이 등 사회 하층민을 일컫는 사회학적 용어이다. 야웨는 이러한 밑바닥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다. 출애굽 사건은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다. 십계명은 히브리 사람들이 다시는 남의 종이 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해방 공동체는 야웨의 은혜에 응답하여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를 구현할 의무를 지닌다. 이러한 계약의 의무가 십계명으로 구현된 것이다.

위에서 본대로 열 가지 말씀의 주제는 ‘자유’다. 열 가지 조항은 머리말에서 선언한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지켜야하는 기본적인 요구들이다. 자유의 강령인 머리말은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사회적 자유와 아울러 존재의 자유를 명시한다. 존재의 자유란 “신이 그의 백성들에게 부여하려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자유”다. 프롬은 인간의 삶을 ‘소유적 존재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으로 구분한다.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성향이다.” 인간 실존에 대한 프롬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은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종교의 기초를 구성하는 이집트 탈출은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벗어나서 ‘존재적 실존양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이집트를 벗어나서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탈(脫)-향(向)’의 과정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소유적 성향을 따라서 생존한다. 머리말은 자유의 근원이 야웨임을 역설한다. 신을 떠난 인간은 자만하게 되고, 탐욕을 추구하게 된다. 죄에 지배된 인간은 존재의 자유를 상실하였다. 십계명은 신을 떠난 인간이 자기 파괴적인 자만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열 가지 언약의 말씀인 것이다.

 

(2) 첫째 말씀: 이신(異神) 숭배 금지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5:7, 표준역)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5:7, 개정역).

알-파나이(ינפ־לע)라는 구절을 개정역은 “나 외에는”(beside me)으로 읽고, 표준역은 “내 앞에서”(before me)로 읽는다. “나 외에는”은 유일신론(monotheism)을 강조하는 번역이고, “내 앞에서”는 단일신론(henotheism)을 전제한 해석이다. 유일신론은 오직 하나의 신을 신봉하는 것이고, 단일신론은 여러 신들 가운데 한 신을 선택하여 주신(主神)으로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단일신론을 택일신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서”라는 용어는 다른 신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뤼제만은 “제1계명이 유일신론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제2이사야서에 나타나듯이, 이스라엘의 유일신관은 포로기에 비로소 등장한다. 그러므로 첫째 말씀은 유일신론을 선언한 것이라기보다, 여러 신들 가운데 오로지 야웨를 섬기라는 택일신론이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편집 시기를 고려하면,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십계명 형성 초기에는 단일신론을 염두에 두었으나,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유일신론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 성서는 택일신론에서 발전된 유일신 신앙을 제시한다. 그러한 신앙고백은 신명기 6장 4절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난다: “야웨 엘로헤누 야웨 에하드(דחא הוהי וניהלא הוהי).”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개역).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새번역). 이 구절에서 “에하드(דחא)”는 야웨의 유일성을 강조한다. 야웨가 유일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유일’은 숫자상 하나의 개체를 뜻하지 않으며,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여호와” 또는 “한 분”은 하느님의 궁극성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유일신이란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첫째 말씀은 오직 야웨만을 예배할 것을 선포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 6:4-5).

그러면 “다른 신들(םירחא םיהלא/엘로힘 아헤림)”이란 무엇인가?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 및 바벨론 제국에서 여러 신들을 보아왔다. 이집트와 바벨론의 신은 지배자의 신이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신들과 신전의 규모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특히 가나안의 신은 비를 내리게 하고 다산을 허락하는 풍요의 신이다. 가나안 땅에 살게 된 이스라엘은 야웨와 아울러 바알도 함께 섬겼다. 그리하여 다른 신들이 침투하여 야웨 신앙은 오염되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를 금지했다. “엘리야가 그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왕상 18:21). 신명기 역사서인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에 만연한 혼합주의를 지적하고, 야웨 신앙을 회복할 것을 권면한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를 섬길 것이오”(수 24:15).

요컨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두지 못한다”라는 문장은 야웨와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성을 보여준다. 야웨 하나님과 히브리 사람들의 관계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이다. 양자 사이에 다른 신들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면전에 다른 신들을 둘 수 없다. 따라서 첫째 말씀은 야웨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야웨는 다른 신들과의 관계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야웨의 백성이 다른 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보여준다. 오직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배타적인 요구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세상에서 야웨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요, 해방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간의 권력을 신격화하는 것도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다. 야웨는 지배계층의 신들과 맞서 싸우는 해방의 하나님이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야웨”(출 3:18; 7:16; 9:1, 13; 10:3 등)라는 칭호는 지배자에 맞서 약자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야웨는 불공정한 지배 구조를 인정하는 만신전의 신들과 싸운다. “다른 신들”을 거부하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인간을 해방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한다.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3) 둘째 말씀: 신상 제작 금지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신 5:8).

둘째 말씀의 요지는 “너희는 …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명기 5장 8절에서 “우상과 형상(הנומת לכו לספ)”이 웨(ו)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본문의 접속사를 등위접속사나 설명의 접속사로 볼 수 있다. ① 등위접속사로 보면, ‘그리고’ 및 ‘또는’으로 번역된다. 그러면 ‘만들다’라는 동사는 우상과 형상을 이중 목적어로 취한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개역). ② 설명의 접속사인 경우에, 접속사 웨(ו)가 이끄는 어구는 앞에 있는 용어를 설명한다. 형상이 이끄는 구절이 우상을 수식하고 설명한다. 이러저러한 형상으로 우상을 제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표준역). “그 모습을 본떠 새긴 우상을 모시지 못한다”(공동역). 개역개정은 웨(ו)를 등위접속사로 보고, 표준새번역 및 공동번역은 설명의 접속사로 읽는다. 문맥을 고려하면, 후자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러면 “우상”(לספ 페쎌)은 누구의 상을 가리키는가? 다른 신의 상인가, 야웨 하나님의 상인가? 아니면 다른 신의 상과 야웨의 상을 함께 말하는가? 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마르틴 루터는 우상과 다른 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첫째 말씀과 둘째 말씀을 묶어서 제1계명으로 취급한다. 이미 첫째 말씀(3절)에서 다른 신을 경배하기를 금지하였기에, 우상을 이방 신상으로 보면 그 내용이 중복된다. 우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말한다. 8절은 사물의 형상(모양)을 본떠서 하나님의 상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따라서 제2계명은 하나님의 상을 제작하는 것을 금지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 야웨 하나님의 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일까? 첫째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임재하기 때문이다.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 형상도 못 보았다. “주께서 호렙 산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여라”(신 4:15). 하나님은 우상을 통하여 존재하지 않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주께서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셨으므로,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다. 너희는 오직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신 4:12).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체험한 하나님도 말씀으로 임재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왕상 19:11b-12). 성서의 하나님은 ‘모습’이 아니라 ‘말씀’으로 현존한다.

둘째로, 이방 종교에 대항하기 위함이다. 우상 제작을 금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집트와 가나안 그리고 바벨론 등 이방의 종교에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야웨는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인데 반하여, 이방의 신은 지배자들을 위한 신이다. 따라서 이방과 같이 신상을 만들면서 불의한 체제를 승인하고 사회 구조악을 유지하는 숙명 신앙을 수용할 수도 있다. 신상 금지는 고대 근동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현상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조종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알종교는 인간이 우상을 통하여 신을 조종하고자 자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만드는 주된 목적은 신을 조종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며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뜻하는 대로 사용하고 조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조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야웨 하나님은 불길 속에 계시면서 흑암 가운데 계신다. 인간이 함부로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계시의 말씀에 청종하는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의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신상을 만들면 하나님이 형상 안에 제약된다. 신앙의 대상이 형상화되면 그 형상은 섬기는 신과 동일시된다. 그것은 창조주를 피조물로 전락시키는 행위이다. 삼라만상 가운데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한다. 신은 인간이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제작한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형상은 자유를 제한한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계명의 머리말에서 표명되었듯이, 야웨는 ‘해방하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정의한다. 하나님의 실재는 어떤 형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방하는 행위에 있다. 해방하는 야웨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제약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해방과 자유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고대인은 구태여 신상을 만들었을까? 김지찬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물질적인 형상 안에 신이 거한다고 보았다. ② 특정 장소에 신을 고정시키고자 하였다(localization motive). ③ 신을 통제하고 조종하려 하였다(manipulation motive). 이러한 유혹은 현대인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우상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우상에는 물리적 우상뿐만 아니라 개념적 우상도 있다. 성화상(icon)에 관한 논쟁은 간단하지 않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그 입장을 달리한다. 성화상이 경건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경배의 대상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현대인을 위협하는 것은 정신적인 우상이다. 현대인의 심각한 우상은 내가 만든 하나님의 이미지일 것이다. 많은 경우에 유신론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없는 신’을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 방식대로 신을 믿는다. 라너(Karl Rahner)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제 나름의 신을 만든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구절은 “네 구미에 맞게 하나님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기 입맛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본회퍼(D. Bonhoeffer)의 말을 빌리면,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 또는 작업가설로서의 신을 부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신명기 5장 9-10절은 논리상 다른 신을 섬기기를 금하는 첫째 말씀을 선언한 7절에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질투는 셋 이상의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이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님이 질투하게 된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사랑 받기 원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만약에 9-10절을 둘째 말씀과 연결시킨다면, 우상 제작을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보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4) 셋째 말씀: 신명 오용 금지

“너는 네 하나님 야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신 5:11).

1인칭 화자로 등장한 야웨가 셋째 말씀부터 3인칭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후대의 편집자가 이 구절을 삽입한 것임을 보여준다. 제3계명이 8세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계명을 통하여,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권에서 이름은 곧 실재이다. 야웨의 이름이 있는 곳은 하나님이 현존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에 신중해야 한다.

셋째 말씀은 “로 티사 에트-솀-야웨 엘로헤카 라샤웨(אושׁל ךיהלא הוהי־םשׁ־תא אשׁת אל)”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문장에서 ‘라샤웨(אושׁל)’라는 어구에 대한 번역이 관건이다. 샤웨(אושׁ)에는 ‘헛되다,’ ‘쓸모없다,’ ‘속이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라샤웨’는 헛되이(in vain); 쓸모없이(worthlessly); 거짓으로 (falsely)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번역된 성서들을 살펴보면,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라.

‘샤웨’는 ‘거짓,’ ‘속임’이라는 뜻을 지닌다. 신명기 5장 11절을 레위기 19장 12절과 병행하여 읽으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레 19:12).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위증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유대인 성경인 TANAKH은 이렇게 해석했다.

“You shall not swear falsely by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하지만 “거짓 증언”(אושׁ דע, 신 5:20)을 금지하는 제9계명의 내용과 중복되기에, 이러한 번역은 보류된다. 게다가 여기서는 ‘해석’이 ‘번역’을 대신하고 있다. 제3계명은 보다 깊은 뜻을 내포한다.

 

②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해서는 안 된다.

‘샤웨’에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힘이 들어 있다. 모빙켈(S. Mowinckel)에 따르면, 고대의 저주 문서에서 확인하듯이, 고대인들은 신들의 이름으로 원수를 욕하거나 저주하는 일이 있었다. 신의 이름에 신의 능력이 있어서, 축복과 저주가 실현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남을 욕하거나 저주하는 일에 거룩한 이름을 주술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필립스(A. Philips)가 주장한 바대로, 셋째 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주문(呪文)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God damn you!,” “Holy Jesus!” 등의 욕설을 삼가야 할 것이다.

 

③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번역이다. 일찍이 루터가 “티사 … 라샤웨(אושׁל … אשׁת)”를 “missbrauchen”고 번역한 것은 적절하다. 그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Du sollst den Namen des Herrn, deines Gottes, nicht missbrauchen.”(루터역). 여러 번역 성경들이 ‘라샤웨(אושׁל)’를 ‘헛되게(in vain)’라는 뜻으로 읽는다. “Thou shalt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thy God in vain”(KJV, NASV, JPS, RSV). NRSV 및 NIV가 루터의 번역을 수용했다. “You shall not make wrongful use of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NRSV). “You shall not make misuse of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NIV). 개역과 개역개정은 ‘라샤웨’를 “망령되게”로 읽는다. ‘망령되다’라는 번역의 뜻이 모호하고 부적절하기에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함부로”라고 읽는다.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표준역). 요컨대, 셋째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거나 도용하거나 악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릇된 목적으로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솀-야웨 엘로헤카(ךיהלא הוהי־םשׁ)”라는 어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겠다. 출애굽기 3장 15절에서 소개된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הוהי)”라는 고유명사이다. 오늘날 ‘הוהי’가 왜 다양하게 읽혀지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인 ‘הוהי’를 四聖文字(Tetragrammaton)로 여겼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는 계명을 따라서 ‘הוהי’(YHWH)를 발음하는 대신에 ‘아도나이(י󰗺󰕌󰔣, Adonay)’라고 읽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신명의 발음을 잊게 되었다. 히브리어 성서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으로 기록되고 전승되었다. 기원후 5-6세기부터 성서를 기록하여 전승하는 랍비들인 마소레트(Masorete)들이 자음에 모음부호를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히브리어 본문에 모음부호를 첨가하는 과정에서, 아도나이에 있는 모음을 הוהי에 붙여서 ‘ה󰕯ה󰕵’라는 이상한 조어를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YHWH에 아도나이에 있는 모음 a, o, a, 라는 모음을 넣어서 YeHoWaH라고 발음하게 되었다. 번역 성서에서 ‘הוהי’는 Yehowah, Jehovah, Yahweh(NJB), the Lord(KJV, RSV, NIV) 등으로 표현된다. 우리말 성경에서도 “여호와”(개역), “주”(표준역), “야훼”(공동역)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야웨’(Yahweh) 또는 ‘야붸’가 원음에 보다 근접한 발음으로 받아들여진다.

셋째 말씀은 이스라엘의 자유를 보존하기를 목적한다.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고자 야웨 하나님과의 관계를 취소하거나, 무가치하게 하거나, 악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자유를 주시는 야웨의 이름을 빙자하여 타인의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공동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 이름이 오용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거룩한 전쟁을 내세운 중세의 십자군, “Gott mit uns”라는 구호가 새겨진 군복을 입고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나치군, 정당한 전쟁이라고 우기며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한 신성모독을 범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결부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레 19:18). 그래서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마 6:9)라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의 첫 구절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 이어서 열 가지 말씀(십계명)에 대한 해석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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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효 (112.172.83.213)
2017-07-15 23:02:14
십계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었습니다. 좋은 글 참 감사합니다.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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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
장동우 (118.91.123.100)
2017-06-05 16:39:13
제가 섬기는 광명 비전순복음교회는 매주일 예배 때, 십계명을 합독 봉독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얻는 길을 묻는 부자 청년,관원의 질문을 대답하실 때, 계명을 지켜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값없이 죄에서 구원 받은 의로운 백성이 됐기에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또 영생의 구원을 얻기위해서도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런 취지의 교수님의 강론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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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옥 (183.100.181.211)
2017-06-04 20:36:4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애써 쓰신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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