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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예수님처럼 사랑할 순 없을까?
원형수  |  paul95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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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5월 16일 (화) 23:37:37 [조회수 : 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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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예수님처럼 사랑할 순 없을까?

고전 13:1-7

 

저는 한때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든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대답이냐?“를 가지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든 것입니다.

 

이런 저의 고민에 대해 여러분은 “할 일도 없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핀잔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의 장이라고 부르는 고전 13:1절을 보십시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전 13:2절에는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비밀과 지식이 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더욱이나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위하여 구제하고 또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일까요?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내게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어째서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요15:13에서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3)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 우선 사전적 의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국어사전 가운데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하는 “연세 한국어 사전”을 보았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출판한 “연세 한국어 사전”에 의하면 “사랑”에 대해 5가지로 설명합니다.

 

①“귀중히 여기어 아끼고 위하며,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라했고,

②“남녀가 서로 아끼고 위하는 열렬한 마음”이라 했고,

③“어떤 사물을 몹시 좋아하거나 즐기는 마음”이라 했고,

④“사랑의 성행위”라 했고,

⑤“기독교에서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덕목”이라고 했습니다.

 

애매모호한 답변들입니다.

성서가 전하려고 하는 사랑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답변입니다.

물론 다섯 번째 항목에 “기독교에서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덕목”이라고 했습니다만 “기독교에서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덕목”이란 말로 사랑이란 말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저는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헬라어의 어원에서 그 의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이란 단어를 크게 4가지 말로 사용합니다.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톨게”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흔히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거룩한 단어로 알고 있지만 헬라어어원적 의미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적 의미와는 달리 “마음에 든다”, “만족하다” “동정”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가페가 오늘날과 같이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을 전제로 한 타자 본위의 헌신적인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성서 기록자들의 해석이지 아가페란 단어가 본래부터 나타냈던 그런 의미는 아니였든 것입니다.

어원학적으로 볼 때 아가페란 단어는 에로스란 단어보다도 훨씬 더 저급한 수준의 내용이였습니다.

 

우리는 “에로스”란 단어가 “성적 욕구에 기초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만 희랍 사람들은 거룩한 것에 대한 동경을 나타낼 때는 “아가페”란 단어보다도 “에로스”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의 개념이였든 것입니다(성서대백과 대사전).

 

“필리아”는 “형제애, 친구애, 인류애”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때로는 “감정”이나 “느낌”과 같은 개인의 애착심을 표시할 때도 “필리아”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스톨게”는 “가족이나 혈족에 대한 자연적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아가페”,“에로스”,“필리아”,“스톨게”란 단어의 어원적 의미 역시 사랑이란 말을 속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요한일서 4: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랑이 곧 하나님이시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랑이실까요?

하나님이란 그 이름이 신비롭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고, 바라볼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일서는 계속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일 4:9-11절까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리고 요일 4:17절에서는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9절, 10절, 11절, 17절에 있는 “이로써”, “이렇게”, “이같이”라는 세 부사와 “여기”라는 처소 대명사를 주목해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부사와 처소 대명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하나님의 성품과 결부시켜 “사랑의 실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3:16절에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도 역시 “이로써”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화목의 제물로 주셨고, 죽음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으며(요3:14-18),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시라(요일5:11-12)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고, 죽이심으로 끝나지 않고, 그를 통해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일 5:13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심으로 인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요일 5:11절에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것이니라”고 하시고 이어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하는 사랑이란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3: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남을 구제하고, 내 몸까지라도 남을 위해 불사르도록 내어 준다 할지라도 그를 다시 살리지 못하는 구제와 희생이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생명”이 없는 사랑, 생명과 관계되어 있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박애주의”나, “희생”이나, “자비”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를 통해 나타난 사랑은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가장 쉬운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다시 살리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홍수로 인해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나의 내산 모두를 나누어 주겠소?”, “내가 당신을 위해 대신 죽어주겠소?”라고 한다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것 보다는 그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그를 살려내기 위해 내가 가진 전 재산을 걸고 헬리콥터라도 동원하고, 119 구조대라도 불러오든가 아니면 뗏목이라도 타고 가서 물속에서 건져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바로 그러한 사랑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신다면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요.

특별히 53::5절부터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53:5-9).

 

이 말씀을 고전 13:4-7절까지를 비교해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얼마나 꼭 같습니까?

그러니까 고전 13:1-3절에 나오는 “사랑”이란 단어를 “예수”란 단어로 바꾸어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수가(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예수가(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예수가(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이란 아담 이후 죽은 모든 사람을 다시 살리기 위해 예수를 전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 일을 위해 나의 재산도 내놓고, 나의 목숨도 내 놓을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94년 아카데미상 12개 부문 중에서 7개 부문의 상을 차지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폴란드에 살고 있는 독일 사람으로서 철저한 나치 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아부와 로비에 능통한 기회주의자 였습니다.

1940년 나치정부가 유태인이 경영하던 그릇 공장을 압수하자, 나치당원이 되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인건비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유태인들을 고용합니다.

이렇게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쉰들러였지만 유태인 회계사인 아이작 스턴을 비서로 맞아들이면서 처참한 유태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계 대전이 더해갈 수록 쉰들러는 점차 나치의 비인간적인 잔악성을 목격하게 되고, 인간적인 양심에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드디어 쉰들러는 자신의 비서인 아이작 스턴과 함께 아우슈비츠 행이 예정된 유태인들을 구해낼 방도를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될 유태인들을 빼내는 숫자만큼 뇌물을 주기로 하고, 아우슈비츠 형무소에서 구해낼 유태인 명단 1,100명의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소개하려는 것은 그 영화의 내용이 아닙니다.

쉰들러와 그의 비서 아이작 스턴이 나누는 마지막 대사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우여곡절 끝에 살아난 1,100명의 유태인들이 자신을 살려준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시로 뺏지를 만들어 주는데 이때 그들간에 나눈 대화가 너무너무 인상적입니다.

 

<쉰들러 리스트 동영상-없는 분은 요청하십시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나의 재산이 무엇을 우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무엇일까요?

 

쉰들러는 돈만 아는 자린 고비였습니다.

그러나 유태인의 참혹한 참상을 보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았고, 마침내 1,100명을 살렸습니다.

그리고도 더 살리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몇 사람을 살렸습니까?

지옥불에 떨어질 영혼들을 몇 명이나 구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부끄러움 없는 삶을 위해,

후회없는 삶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기회,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그 기회를 선용할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지방회가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열중하고, 그 일에 합심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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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원 (220.XXX.XXX.162)
2017-05-21 09:25:55
사람인 내가 예수님 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아니 사랑한다면 그건 모름지기 교만일겁니다. 그런 것이 사랑이라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지도 않으셨겠지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셨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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