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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을 개혁하라"종교개혁 500주년, 그리고 존 웨슬리
웨슬리는 루터의 지지자인가 비판가인가
김동환  |  drdonghwan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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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5월 13일 (토) 19:46:11
최종편집 : 2017년 05월 17일 (수) 09:57:08 [조회수 :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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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회심주간을 기념하여 "종교개혁 500주년, 그리고 존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주제로 지난 11일 감신대 웨슬리 제1세미나실에서 감신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김동환 교수의 웨슬리 회심 기념 세미나 자료 전문을 공개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웨슬리의 영성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종교개혁 500주년, 그리고 존 웨슬리

-종교개혁을 개혁하라-

 

김동환 교수
영국메도디스트교회 정회원, 감신대 객원교수
웨슬리목회연구원장, 하늘숲공동체 원장

 

   
 

 

들어가기

종교개혁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 마르틴 루터이다. 일반적으로 루터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버그 성의 한 교회 앞에 ‘95개 논제’를 내걸어 카톨릭 교회와의 치열한 논쟁을 촉발했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인정받는다. 사실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그 역사적 진위가 의심스럽지만(루터 자신은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한 적이 없다. 다만 멜랑히톤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후대에 정설처럼 굳어졌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많은 교회들은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설정하여 종교개혁자 루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한국감리교회도 이 흐름에 기꺼이 동참, 매년 종교개혁주일을 지켜왔고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기리는 일이 연례행사로 반복되는 과정에서 많은 감리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웨슬리를 루터의 후예로 인식하는 듯 하다. 즉 웨슬리의 지도로 이루어진 영국의 메도디스트 운동을 루터의 종교개혁의 일부로 이해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형식화되고 화석화된 신앙에서 생동감 있고 살아있는 신앙으로의 회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웨슬리의 메도디스트 신앙운동 또한 종교개혁이라는 범주에서 이해 못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 ‘루터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종교개혁이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웨슬리의 신앙운동을 루터 종교개혁의 계승으로 보기에는 명백한 차이점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웨슬리의 루터 이해를 관찰해 보면 명백해 진다. 루터보다 약 2 세기 후에 영국에서 메도디스트 운동을 이끈 또 한 사람의 빼어난 신앙적 인물 웨슬리는 어떤 형태로든 종교개혁의 영웅 루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격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루터를 넘어서는 길로 나아가려 시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루터의 강력한 지지자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비판자였던 것이다.

본고는 이 같은 웨슬리의 루터 이해의 변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이 과정을통해 웨슬리는 루터의 어떤 부분을 적극 수용했고 또 어떤 부분을 비판하고 루터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개혁 전통과 관련해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재고하는 기회도 갖게 될 것이다.

 

루터의 충실한 추종자 웨슬리

웨슬리의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전에는 웨슬리의 루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시기엔 오히려 루터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적 노선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삶’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는 웨슬리 자신이 언급한 신앙적 모델들(테일러 감독, 토마스 아 켐피스, 윌리엄 로) 안에 종교개혁자들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은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이 있었던 35세 이전의 웨슬리가 루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해서 그가 루터에게 무관심했다고 단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1703년 생인 웨슬리가 1483년 생인 루터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을지라도 웨슬리는 다른 경로를 통해 루터를 만날 수 있었다. 루터가 남겨 놓은 저작물들 중 일부는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이미 영국에 전해져 있었고 독서를 좋아했던 웨슬리가 이것들을 접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특히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과 종교개혁 전통의 장점을 두루 수용하려는 신학적 입장, 곧 ‘중도적 길’(via media)을 표방했기 때문에 루터의 사상, 그 중에서도 ‘칭의론’은 성공회 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고 이것이 영국성공회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웨슬리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아야 한다.(1) 무엇보다도 웨슬리는 루터교 경건주의라 할 수 있는 모라비안과의 접촉이 본격화 되면서 루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갔을 것이다. 1736년 1월 25일 미국 조지아를 향해 가던 배에서 시작된 모라비안과의 만남은 조지아에서, 그리고 런던에서 심화되었다. 특히, 런던에서 만난 모라비안 목사 피터 뵐러와 나눈 대화는 웨슬리로 하여금 루터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라는 주제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다.(2)

웨슬리의 루터에 대한 언급은 널리 알려진 그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에서 처음 언급된다. 소위 말하는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strangely warmed)’ 심령의 체험을 가져다 준 동기는 루터가 로마서 주석 앞에 붙인 서문을 읽을 때였다. 웨슬리 자신의 고백을 들어보자.

“이날 저녁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은 채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위치한 한 경건모임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저녁 8시 45분쯤 되었을까. 그 모임의 리더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의 심령 깊은 곳에서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 순간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3)

웨슬리가 언급한 로마서 서문은 1522년 루터가 독일어 신약성경을 처음 선 보일 당시 각 권에 서문을 첨부했는데 로마서 서문은 그 중의 하나이다. 로마서 서문은 로마서가 지니는 무한한 가치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지, 무엇을 중심으로 읽어야 하는지, 각 장의 중심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접할 때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고백한 사실만 가지고선 웨슬리가 로마서 서문의 어떤 특정한 부분을 직접 듣고 마음의 감동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로마서 서문을 설명한 사람의 설명을 듣고 감동을 받은 것이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웨슬리가 자신의 일기 말미에 언급했던 “나는 그 순간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을 비추어 볼 때 웨슬리가 들었던 내용은 루터가 로마서 3장 요약한 다음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공로 없이 주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속죄소’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하신다. 즉 우리가 살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는 것이다.”(4)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웨슬리에게 루터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킨 사건이었고 이를 기점으로 웨슬리는 루터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올더스게이트 체험 후 약 한달 후 1738년 6월 18일 옥스포드의 마리아 교회(St. Mary)에서의 설교를 보면 이 당시 그가 얼마나 루터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이 날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웨슬리는 루터를 “만군의 여호와의 전사”(the champion of the Lord of hosts)라는 말로 극찬할 정도였다.(5)

 

   
김동환 박사

 

루터의 거친 비판가 웨슬리

그러나 루터를 향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옥외집회를 막 시작하던 1739년 4월 4일 저녁, 이전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날 저녁 웨슬리는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약 5:16 참조)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는” 정기 소그룹 모임을 계획하면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만일 야고보 서신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 루터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지만 않는다면 그 누가 이 모임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은총의 수단임을 부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6)

웨슬리에게 엿보이기 시작한 이 같은 반 루터적 성향은 약 2년 후 1741년 6월 15일자 일기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날 웨슬리는 런던을 향하던 중에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읽었는데, 이때 웨슬리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진술하였다.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읽고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동안 그가 루터를 과대평가한 사실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다른 이들의 호의적 평가에 따라 그것을 얼마나 그것을 과대평가했던가. 때때로 그 책에서 인용되는 가장 좋은 문장들만 보며 그 책을 과대평가했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그렇지만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내 눈으로 직접 읽은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루터)는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가 다루고 있는 갈라다아서의 특정 본문들에 관한 글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고 전체적 이해에 있어서도 뒤섞여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비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음으로 해서 위험할 정도로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한 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루터는 여기에서 (신비주의자 타울러의 용어를 사용해서) 이성(reason)을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화해 불가능한 적이라고 헐뜯지 않았던가? 이성이 하는 일은 (즉 이성의 기능은) 이해하고 판단하며 표현해 내는 것 아닌가(apprehending, judging, and discoursing)? 이 중 어느 것도 보거나 듣거나 느끼는 것과 달리 저주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또 다른 한 예가 있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서 선행과 하나님의 율법을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그는 지속적으로 율법을 죄, 죽음, 지옥 혹은 마귀와 동일시 하고 그리스도는 이런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7)

콕스(Cox)는 웨슬리의 루터에 대한 거친 비판을 그 당시 매우 바쁜 생활을 보내던 웨슬리의 성급한 루터읽기(a hurried reading)로 해석한다. 즉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서를 깊이 읽지 않은 데서 야기된 오해라는 것이다.(8) 월즈(Jerry L. Walls) 또한 웨슬리의 루터 비판을 조목 조목 반박하며 웨슬리의 성급한 루터 읽기가 루터를 그릇 이해하게 했다고 본다.(9) 그렇지만 필자에게는 이들의 웨슬리 비판이야말로 ‘성급한 웨슬리 읽기’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웨슬리가 평상시에 독서광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한 독서를 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 독서의 깊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그의 독서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그가 만든 ‘기독교문고’(Christian Library)이다. 1750년 웨슬리는 자신이 읽은 많은 양의 서적들 중에서 신앙의 증진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에 대해서는 직접 요약 발췌하여 일반인들이 읽기 편하게 편집하여 제공하였는데 무려 50권에 달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웨슬리의 루터를 향한 거친 비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숙고하기 보다는 ‘성급한 루터읽기에서 비롯된 성급한 비판’으로 간주한 것 자체가 ‘성급한 평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이 갑작스런 태도의 변화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변화를 야기한 원인을 당시의 모라비안과의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1739년 후반부터 1740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그 동안 웨슬리와 모라비안 사이에 지켜오던 밀월 관계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 온 시기이다. 1739년 웨슬리가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한 옥외집회에 전념할 무렵 런던의 페터레인에서의 모임(신도회)은 모라비안 목사 필립 묄터의 등장으로 어수선해 지기 시작했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있을 때와는 달리 이 모임은 ‘정숙주의’(quietism)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페터레인 신도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의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740년 7월 결국에는 페터레인 신도회로부터 분리하고 만다.(10)

이 과정에서 웨슬리가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정숙주의’이다.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서를 읽고 예를 들며 비판한 내용들은 정숙주의가 내포했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웨슬리가 제기한 문제는 1. 신비주의 색채 2. 율법폐기론이다. 이 둘은 하나님께서 공통적으로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로 허락하신 ‘은총의 수단’을 무력화 시키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루터의 갈라디아서는 어떤 수단에도 의지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신비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에 선행이나 하나님의 율법을 무용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웨슬리의 이런 비판의 대상은 루터라기보다는 루터를 추종하던 모라비안, 특히 정숙주의를 추구하던 모라비안을 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주장이 루터에 기초해 있음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갈라디아서를 읽고난 후에는 그 어떤 은총의 수단도 배격하는 모라비안 정숙주의의 주장이 루터에게서 야기되고 있음을 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을 무효화시키는 모라비안의 주장과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서 이들의 논리에 바탕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루터의 갈라디아서를 접했기 때문에 격한 비판을 쏟아내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라비안의 가르침에 매우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피력한 설교 ‘은총의 수단’이 웨슬리가 루터의 갈라디아서 비판을 쏟아낸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11)

 

   
 

 

종교개혁의 개혁자 웨슬리

웨슬리는 루터의 충실한 지지자인가 아니면 격렬한 비판가인가? 적어도 루터는 웨슬리에게 1738년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의 시기까지는 신앙의 멘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모라비안과 심한 갈등을 겪었던 시기에는 격렬한 비판가의 입장을 드러내었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루터에 대해 극단적으로 상반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는 아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웨슬리의 루터에 대한 태도는 보다 성숙한 형태로 자리잡는다.

루터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했던 웨슬리에 달라진 태도가 나타난 때는 1749년 7월 경이었다. 이 즈음 웨슬리는 ‘마르틴 루터의 생애’라는 독일어판 책을 영어로 축약하여 옮기고 자신의 ‘기독교문고’에 포함시켰다. 7월 19일에 쓴 자신의 일기에서는 루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은 자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복된 하나님의 도구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웨슬리는 루터가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 즉 거칠고 고집스러운 성격과 자신의 의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성향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루터에게 그의 이 같은 점들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충고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음을 한탄하고 있다.(12) 이런 웨슬리의 진술에 대해 콕스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그렇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을 한다. “웨슬리는 루터를 자신의 클래스(class meeting)에 넣어 죄를 서로 고백하라는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을 적용하여 루터의 삶에 섞여 있는 ‘지푸라기’를 제거하게 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여기는 것 같다.”(13)

웨슬리의 루터에 대한 보다 성숙한 판단은 이로부터 약 40년 후 웨슬리가 사망하기 약 4년 전쯤인 1787년 경에 작성한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해’(On God’s Vinyard)라는 설교에서 나타난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에 관해서라면 그 누가 마르틴 루터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성화에 관해서 누가 그 사람만큼 무지하고 개념적 혼돈에 잘 빠져들 수 있겠는가?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고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주의 깊게 읽기만 하면 그가 성화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광범위하게 확인할 수 있다.”(14)

이 발언을 얼핏 보면 웨슬리는 루터의 갈라디아서에 가졌던 부정적 견해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웨슬리의 루터 비판은 보다 체계화 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전에는 루터의 갈라디아서를 모라비안의 정숙주의라는 거울로 들여다 봄으로써 갈라디아서 자체를 다소 감정적으로 대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보다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루터의 문제가 ‘성화에 대한 무지와 혼돈’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아우틀러는 이 같은 웨슬리의 루터를 향한 비판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정교한 신학적 비판이라 평가한다.(15) 웨슬리의 이런 관점은 루터를 넘어 종교개혁 전반에까지 확장되어 나간다.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가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1787년 같은 해에 기록된 설교 ‘지난 시대’(Of Former Times)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진술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믿음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많은 나라에서 신앙관에 관한 상당한 개혁이 이루어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다른 몇몇 나라에서 예배의 갱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 그 자신은 임종의 순간에 다음과 같이 탄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 이름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나는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부름받았기를 바랬다.) 자신들의 신앙관과 예배에 대한 개혁은 일구어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내적 성품과 삶은 여전히 그대로이다.”(16)

웨슬리의 종교개혁을 향해 믿음과 예배에 관한 올바른 관점은 제공했지만 이에 따른 합당한 삶의 열매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올바른 믿음을 가르쳤지만 그에 따른 삶의 변화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왜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지는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해’에서 지적 한 것처럼, 루터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즉 그의 성화에 대한 무지와 혼돈 때문에 이런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웨슬리의 루터를 향한 이 같은 비판은 루터의 한계를 정확히 꿰뚫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 평가할 만 하다. 루터와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들은 일반적으로 ‘칭의의 사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는 성화의 자리가 없다. 성화는 칭의라는 사건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 당시의 개신교 교회들이 대다수 루터의 이 같은 견해에 젖어 있을 때 웨슬리가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종교개혁을 또 한번 개혁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평가할 만 하다.

웨슬리의 루터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을 대하면서 루터도 그리스도인 삶의 변화를 강력히 촉구하지 않았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물론 루터 또한 삶의 변화를 믿음에서 분리시킨 적이 없다. 그러나 구원을 말할 때, 루터는 칭의만을 말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루터의 다음 진술을 보면 분명해 진다.

“율법의 행위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의미이다. 여기서 사랑과 선행이 덧붙여질 때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궤변론자들의 사악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라…우리는 선행과 사랑 또한 가르쳐야 할 주요 덕목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때와 장소에 주장되어야 한다. 즉 이 주장은 이신칭의의 핵심 가르침과 별도로 어떤 일을 행할 때 고려해야 할 항목이다.”(17)

웨슬리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명백하게 서로 구분되고 구원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두 가지 초점이다. 즉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우리 영혼에 처음으로 은혜의 동이 들 때부터 그것이 영광으로 완성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전체 사역”이며 압축하여 볼 때는 “칭의와 성화”를 의미한다.(18) 웨슬리가 성화를 구원 사건에서 탈락시키지 않고 칭의와 함께 구원을 구성하는 또 다른 핵심적인 축으로 이해한 것은 믿음에서 삶을 삶에서 믿음을 이탈시키지 않는 매우 중대한 변화이다. 즉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케 하시는 은총으로 인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 웨슬리의 루터 이해의 함축성

웨슬리의 루터 이해는 단번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천되었다. 초기에는 루터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듣고 난 직후 있었던 1738년 5월 24일의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는 루터의 광팬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삶과 사상에 몰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741년에는 이런 태도가 돌변하여 루터의 주요 저작물 중 하나인 갈라디아 주석에 대해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웨슬리는 루터의 충실한 지지자인가 아니면 루터의 적대자인가? 웨슬리의 말년에 해당하는 1787년 경에 기록된 웨슬리의 저작물들을 검토해 보면 웨슬리의 루터 이해는 이런 이분법적 질문을 넘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리는 ‘루터를 비판적으로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웨슬리는 루터에게서 ‘칭의’에 함몰되어 ‘성화’라는 중요한 주제를 간과하는 문제를 발견했고 구원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두 축을 복원했던 것이다.

이 같은 웨슬리의 루터 이해는 종교개혁과 관련한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재고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감리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가? 그렇다! 감리교회는 종교개혁 전통과 마찬가지로 ‘이신칭의,’ 곧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공로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데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리교회는 종교개혁 전통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다! 감리교회는 종교개혁전통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 있다. 즉 웨슬리가 루터를 향한 이해를 성숙시켰듯이 감리교회는 종교개혁을 ‘개혁하는’ 길로 나아갈 책무가 있다. 그 방향은 명백하다. 칭의의 가치를 회복하는데 머물지 말고 성화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삶이 배제된 믿음만이 아닌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믿음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필자는 감리교회의 이러한 정체성 회복이 현재 위기 상황에 처한 한국교회에도 절대적으로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는 한국교회에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지금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믿음과 삶의 분리를 일으킨 ‘한국판 정숙주의의 범람’이다. 놀랍게도 한국감리교회조차 이 조류에 편승하고 있다. 칼빈학자로 명성을 얻은 김세윤 박사는 이 같은 한국교회의 실정을 매우 신랄한 어조로 진단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는데 그 근본 원인은 윤리와 분리된 왜곡된 칭의론을 복음이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한국교회는 의로운 삶이 없는 칭의론으로 인해 싸구려 복음과 구원파적 복음이 판을 치고 있다.”(19)

거친 표현이 표현되어 있지만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지금 칭의에 함몰되어 성화라는 주제를 상실한 한국판 정숙주의에 물들어 있는 바람에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시점에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 정신의 회복을 통한 감리교회의 정체성 확립은 감리교회의 회복을 위한 길일뿐 아니라 한국판 정숙주의의 깊이 물들어 방향을 상실한 한국교회에게 그 길을 제시할 나침반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곧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다. 나는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정신을 회복해 진정한 자기개혁을 이루어내고, 이 일을 통해 ‘종교개혁을 개혁해 내는’ 감리교회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한 심정으로 기도해 본다.


 

[1] Leo G. Cox, “John Wesley’s View of Martin Luther,”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p. 83.

[2] 김동환, 목사 웨슬리에게 목회를 묻다 (서울: KMC, 2004) pp. 71-77.

[3] John Wesley, Journals, May 24, 1738. 앞으로는 Journals.로 표기.

[4] Martin Luther, Preface to the Letter of St. Paul’s to the Romans, tr. by Andrew Thornton, http://www.ccel.org/l/luther/romans/pref_romans.html.

[5] John Wesley, Sermons, “Salvation by Faith,” III. 9. 앞으로는 Sermons 으로 표기.

[6] Journals, April 4, 1739.

[7] Journals, June 15, 1739

[8] Cox, “John Wesley’s View of Martin Luther,” p. 87.

[9] 월즈에 따르면 웨슬리는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철저히 읽지 않아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고 비판한 것처럼 웨슬리 자신이 루터의 갈라디아서를 철저히 읽지 않음으로 루터를 오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Jerry L. Walls, “John Wesley’s Critique of Martin Luther,” Methodist History Book Reviews (October 1981) p. 38.

[10] 김동환, 목사 웨슬리에게 목회를 묻다, pp. 102-104.

[11] Sermons, “Means of Grace” 참조.

[12] Journals, July 17, 1749.

[13] Cox, “John Wesley’s View of Martin Luther,” p. 88.

[14] Sermons, “On God’s Vineyard,” I. 5.

[15] C. Outler, ed. John Wesley, A Library of Protestant Thought, New York (Oxford Press, 1964) p.107.

[16] Sermons, “Of Former Times,” 14.

[17] Luther’s Works, ed. Jaroslav Pelikan and Walter A. Hansen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3) Vol. 26, pp. 136-37.

[18] Sermons,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 I. 3.

[19] 김세윤, 2013년 12월 16일 영동교회 강연 일부, http://www.newsnnet.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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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리 (1.XXX.XXX.199)
2017-05-14 08:03:17
시기마다 시대마다 당대의 과제가 있기 마련이다. 루터는 카톨릭의 행위 우선의 구원론을 비판하여야 했고, 2백년이 지난 웨슬리 대에는 원래 예수의 복음이 가지고 있었던 거룩한 삶(행위)을 성취하기 위한 성화에 다시 주목할 만하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후대인으로서 극복처럼 보이는 인식의 진전을 가졌던 것이다. 아울러 양자는 독일과 영국이라는 서로 다른 전통 위에 있었던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웨슬리의 업적이 의미있지만 그를 또하나의 바울이나 루터처럼 지나치게 숭모하여 그의 신학에만 머물려 한다면 이 또한 고인물이 될 듯하다. 성화를 강조하는 웨슬리의 후예들인 한국 감리교회 내에도 사회적으로도 비판받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백약이 무효한 현대 기독교의 상황을 볼 때, 기독교 신학의 문제는 더 큰 근본적인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 지 젊은 신학도들은 더욱 깊고 높은 차원의 고뇌가 있어야 할 듯하다. 신도들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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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XXX.XXX.23)
2017-05-15 15:51:24
논리적으로는 다 정확한 해석과 판단임을... 특히 우리나라 신학자분들 다 똑똑하십니다.
저도 석사과정에서 기독교역사를 쭉~ 공부하다 보니 요즘과 딱! 한가지 다른점이 있더군요,
즉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당대에 개혁을 하기 위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하셨다는 현실 입니다.

잘못되면 화형 당하거나, 돌팔메질에 죽거나...
요즘 이렇게 까지는 못하더라도 논리적인 말 몆마디보다, 말없이 크고 원대한 그뜻을 향하여 조그만 것이라도 "실천"하는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페친중 어느분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사비 털어서 매일 짜장면 으로
봉사하시는분 계십니다. 말 필요없이 늘 실천 하시지요, 저부터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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