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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라는 용어, 합당한가?
김택규  |  petertk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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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4월 24일 (월) 18:02:13
최종편집 : 2017년 11월 11일 (토) 20:54:31 [조회수 : 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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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에서,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라는 용어, 성서적, 신학적으로 합당한가?

 

김택규 (전,감신대 객원교수, UMC목사)

 

예배에서, 어떤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축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여기 모인 성도들과, 그들의 하는 모든 생업 위에, 그리고 이 교회 위에와, 또한 여기 모인 성도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 위에, 우리의 조국인 한국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나는 여기서 축도에 대하여, 그 정의나, 혹은 늘 논란이 되고 있는, ‘있을지어다. 혹은 ‘축원합니다’ 중 어느 것이 맞는것인가? 등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예를 든것처럼, 흔히 많은 목사님들이 잘못하고 있는, 한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축도’는 (하나나님께 향한) ‘기도’가 아니다. 

축도를 ‘기도’의 한 형식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한국 말, ‘축도’라는 말 자체가 ‘축복 기도’의 약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어, ‘축도’ ‘benediction’ 은 축복의 ‘기원’(invoke), ‘축원’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목사님들이 대부분 예배 시에 사용하는 축도문은 고후 13:13절의 말씀이지요.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개역). 사도 바울이 쓴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편지 형식에서 말미에 적는 ‘후속사’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축원'입니다. 영어성경에는 ‘...be with you all'이라고 했습니다. ’당신들 모두에게 있기를 !“ 입니다. (개역개정 번역은 ”있기를 빕니다.“로 번역) 그러므로 축도는 기도형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식이 되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축도자가 회중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형식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축도에서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 용어를 사용해서 축도를 합니다. 어떤 교단 목사님들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축도에서, 이 ‘영원토록’ 이란 용어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성경의 모든 축원, 특히 모든 ‘서신 서’ 말미에 나오는 ‘축원’을 찾아보면, 그 서신의 수신자 즉 ‘회중’을 대상으로,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할지어다’라고 표현한 구절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축도의 원형인 고후 13:13에도 ‘영원‘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서신서중에 벧후 3:18 (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및 유다서 25절(“...영광과 위엄과.. 권세가 만고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등에는 ‘이제와 영원 까지’ 란 말이 있습니다. 아마 그런 말씀을 원용(援用)해서 “영원까지 함께..”라는 축도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모두 하나님께, 혹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원입니다. ‘회중’에게 그런 영광이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축도에서, 성도들의 가정, 성도들이 하는 사업‘, 이교회’, 미국, 한국, 등에게 ‘영원히’ 라는 용어로 축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 유한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업’, ’한국‘이나 ‘미국’에 ‘영원히’ 축복이 있으라고 하는 것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가요? 영원한 존재일까요? 한스 큉 교수는 그의 ‘교회’론에서, “교회는 ‘펜테코스트’(오순절 )와 ‘파루시아’ (재림)사이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임시적’(temporary) 공동체” 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땅에 있는 ‘교회’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파루시아’ 후에는 이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 위에.. 영원히..“라는 축원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끝으로, 축도는 현재 그 예배나 그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회중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는 축원을 할 때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 편지의 말씀을 받는 고린도교회 회중들입니다. 축도의 대상도 그 예배의 ‘회중’입니다.

축도에 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들은 ‘신학적으로, 또 성서적’으로 올바른 축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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