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한국 교회와 두 칭의
박창진  |  5016park@para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7년 03월 21일 (화) 07:15:54
최종편집 : 2017년 03월 27일 (월) 22:34:02 [조회수 : 1107]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롬 4:3). 자신의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다가 그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그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이다(창 15:6). 곧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믿음이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행위는 없었다. 어떤 행위도 없었다. 믿음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이신칭의라고 한다.

칭의는 여기에서 끝인가? 최종 종결로서 불변인가?

가정을 한 번 해보자. 아브라함이 시간이 지나고 그를 통해 자식이 태어날 기미가 없다. 처음엔 고민하다가 시간이 더 흐르면서 아무래도 자기를 통한 자식이 태어나지 않겠다 싶어 다시 자신의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그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의롭다고 하실까? 한 번 칭의가 선언되었기에 불변일까?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사고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상태는 하나님께 불의하다.

신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이다(롬 3:22). 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신다. 주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그분이 약속을 주신다. 죄와 사망의 법에 해방되는 삶에 대한 약속이다. 바울 사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을 율법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은 하신다고 했다(롬 8:3). 하나님이 신자에게 하시는 일이 그분의 약속이다. 그분을 의지하면 그 약속을 받아들이게 된다. 인생은 연약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이루실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그 약속은 그분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과 함께 주어진다. 로마서에선 12장의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내용이 신자를 향한 그분의 뜻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법, 성령의 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얘기되는 것의 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법이라고 번역된 노모스는 그 앞에서 계속 율법으로 번역되었기에 율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모세의 율법과 대조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것이다(마 5:17).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율법이다. 곧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규례로서 삶의 원리이다.

그가 그 후에 주님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을 포기하거나 저버리는 것이다. 그분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내용을 따르지 않는다.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 그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 하실까? 당연히 아니다. 불의하다고 보신다.

로마서의 이신칭의가 의미하는 바이다. 로마서의 이신칭의는 12장 이후까지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의롭다하심을 얻는 법정적 칭의와 그분을 주님으로 의지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관계적 칭의를 함께 말씀하고 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다. 신약 성경은 둘 다를 기술하는데, 문맥에 따라 그중의 하나를 진술하는 방식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칭의가 법정적 칭의인가? 그는 이미 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창 12:1) 믿었다(히 11:8). 그의 나이 75세에 있었던 일이다. 당연히 그때에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는 셈의 후예로서 모태 신앙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75세 때까지 믿음으로 산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들에 대한 약속과 관계된 칭의를 법정적 칭의로 본다면 그 칭의는 반복적인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삶에 찾아오셔서 약속이 주어질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첫 하나님의 부르심 때에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법정적 칭의라면 아들에 대한 약속과 함께 주어진 칭의는 관계적 칭의를 가리킨다.

율법에 관한 장황한 진술과 함께 얘기되는 것은 관계적 칭의다. 그 시점의 이방인 신자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다. 율법으로 불가능하고 성령의 법(롬 8:2),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 가능하기에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령에 담겨 있는 바이다. 신약 성경은 관계적 칭의에 더 많은 양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다. 개혁주의 칭의론의 취약점은 관계적 칭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법정적 칭의만을 말한다는 것이다. 관계적 칭의를 말하더라도 최소한으로 말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고 그분을 주님으로 의지함으로 곧 그분의 뜻을 따름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최종 심판 때에 전 삶에 대한 평가가 성령을 위하여 심었다고 판정받으면 의롭다하심을 얻을 것이다.

첫 의롭다하심은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자에게 예외가 없다. 그들이 다 믿고(행 13:48)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원리적으로 용서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영생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어 그분과 사귀는 삶을 뜻한다(요 17:3). 그의 마음을 열어 들려진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다(행 16:14). 이를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한다. 여기에서 은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을 가리킨다. 알미니안주의에선 이를 제대로 인지 못하고 있다. 그 은혜도 사람이 저항할 수 있단다. 잘못되었다. 만약 저항할 수 있다면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엡 2:1)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엡 2:2) 아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빛을 받아들일 수 없고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질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론과 구조가 같다. 구원 얻었고(엡 2:8) 구원 얻고 구원 얻을 것이다. 성화와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해졌고(고전 6:11) 거룩하고 거룩할 것이다. 영화롭게 되었고(롬 8:30) 영화롭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미래와 관계된 부분은 행위를 따른 하나님의 최종 심판(계 20:12)의 결과물이다. 성령을 위하여 심었는가 아니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었는가에 대한 판결이다. 전자라면 영생을 얻고 후자라면 썩어질 것 곧 영원한 멸망을 얻는 것이다(갈 6:8).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은 거둔다면 은혜에서 탈락한 것이다. 영생을 얻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서의 탈락이다.

지금 한국 보수 개신교계에서 이신칭의는 면죄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개독교라는 조롱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다. 칭의론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정립되기만 해도 신자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런데도 이를 한사코 거부하는 교회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감을 느낀다. 언제쯤이면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날까?

박창진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7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박창진 (211.197.96.159)
2017-03-22 07:27:59
개혁을 외치는 이들의 실상
한국교회에 개혁을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이 주제에 있어선 요지부동이다. 칼빈주의에서 알미니안주의로, 알미니안주의에서 칼빈주의로 바꾸는 경우는 있지만 한 노선을 고수하는 것엔 다르지 않다. 각 주의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부분을 진리라고 말하며 듣는다. 거짓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돌이켜야 하는데, 바로잡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목사라면 직접 노회에 신학적 평가를 청원하면 된다. 평신도(?)라면 담임목사에게 요청하면 된다. 누구라도 시도하면 바로잡을 여지가 있다.

그런데도 이를 한사코 거부하는 교회 현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감을 느낀다.
리플달기
0 2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