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생

▲ 맨발로 산길을 다녀 발바닥이 모두 갈라졌습니다.

건기가 시작되는 아열대의 섬에는 이제 서서히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더위를 피해 산속 꾸보에서 가난한 부족민들을 치료하는 중인데 k선교사님(타교단)이 한국에서 방문하셨다는 건장하고 잘 생긴 60세나 되신 목사님을 모시고 오십니다. 혹시 신분이 드러날까 염려되어 지명과 인명은 밝히지 않습니다. 키가 6척은 되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신 모습이 마치 젊은 영화배우 같으며 인사성도 밝고 금방 만난사람에게도 처세술이 대단합니다. 영어는 못하시지만 한국말과 몇 마디 아는 따갈로그로 현지인에게 매우 친절하게 접근합니다. 잘생긴 신사분에 비해 첫인상이 거만하거나 교만해 보이지도 않고 사교술이 능숙해 보입니다. 그분이 오신 목적은 산속부족들에게 찬양공연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전답사를 오신 것입니다.

그날 치유사역을 마치고 그분과 내가 묵고 있는 산속의 k선교사님 선교센터에서 하루 밤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분은 잠시 틈날 때마다 자기 프로필을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매우 건장하고 부지런한 분이라 일도 열심히 하는 것은 분명히 느껴지지만 너무 장황한 그분의 이력이 약간 의심이 가기도하는군요.

한국의 한 시골 면단위 작은 교회에서 목회한다는 그분은 앉자마자 물어보지도 않았고 연관도 없는 사설을 늘어놓습니다. 아들이 독일유학 가서 음악을 전공, 시골교회에서 양로원 운영, 신학박사 학위를 받음, 고대 최고경영자과정을 나와서 많은 CEO들을 알고 있고 자기도 CEO임, 필리핀 한인회에 8억 원어치 약을 공급한 적이 있음, 현재도 필리핀에 코피노 사역을 하며 선교센터도 있음, 스키와 스쿠버 다이버 강사로 수만 명의 제자를 양성하였음, 자기가 속한 교단의 목회자 골프회의 총무임, 그래서 한국 들어가기 전에 까비떼 골프장에 가서 골프회동을 하고 갈 것임, 4월경에 데리고 올 성가대원은 오래전부터 지역교회 교인들로 구성된 연합성가대며 자기가 이사장인데 이분들이 앞으로 산속 부족민들을 후원할 수 있도록 할 것임 등등을 말하는 것으로 봐서 대단히 수완이 좋으신 분 같습니다. 대인관계를 잘하고 성격이 원만하고 자기 삶을 열심히 잘 사는 부지런한 분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라기 보단 사업가 냄새가 나는군요.

저녁식사 후 그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그분이 요즈음 잠을 못 자서 수면제를 먹고 잔다고 하여 치료해 드리며 엎드려 치료받는 그분의 등 뒤에서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한마디 하였지요. “이렇게 침대위에 누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은데, 산속에서 몸을 꾸부리고 환자를 치료하다보면 허리가 무척 아픕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대뜸 한다는 말이 “그런 개고생을 왜 합니까!”라며 나무라듯 말합니다. 자기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선교사에게 하는 언어표현이 매우 험악하더군요. 나는 그 당시 너무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하였지만, 가끔 그분이 ‘개고생’이라고 한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그 이튿날 그분을 배웅하고 돌아오신 69세 되신 k선교사님의 말이 더욱 가관입니다. 지난 밤 유흥가가 몰려 있는 모 비치의 호텔에서 그분을 모셨는데 그분의 주량이 대단하더랍니다. 맥주 4병을 마시고도 끄덕도 않더라는 군요. 그러면서 그분은 위도 참 튼튼하더라고 부러워하시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산속 가난한 부족민을 치료한 게 ‘개고생’이 아니고 그분을 치료하여 잠을 잘 주무시도록 한 게 ‘개고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되었든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흉내라도 좀 내보자고 배낭을 짊어지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다니는 나에게는 매우 김빠지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얼떨결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말이니 나무랄 이유는 없지요. 그분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리에 밝은 잘나가는 목사님들이 보시기엔 내가 하는 일이 아무런 이익도 명예도 권세도 없는 분명 ‘개고생’이고 측은하게 보이겠지요. 협력은 못할망정 비방이나 하지들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맨발에 훈도시만 걸친 한 부족남자가 볼일을 마치고 산 속 마을로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