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사람은 잊었지만

박 교수님,

소식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셨다니 무척 기쁩니다.

게으른 탓으로 안부는 자주(?) 전하지 못하지만

 박 교수님의 온후하신 인품은 내추억 속에  늘 숨쉬고 있습니다.

몇해전 박 교님을 뵙고 친정아버님 같은 체취를 느꼈다는 케롤과도

종종 박 교수님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박인환 시인의 시 ‘세월이 가면’을  혼자서 읊조리며

시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합니다.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올해가 미국이민 40년째입니다.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12년을

미국에서 더 산 셈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미국에서 살면 살수록

된장국과 김치를  더 찿게되고, 한국문화가 더 그리워진다는 사실입니다.

한국드라마도 더 자주 보고,  한국 음악도 더 자주 듣고,

한국 詩도  더 자주 읽습니다.

최근에는  최순실 덕분에 한국  TV 뉴스도 거의 매일 시청하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에는 페이스북에 오른  ‘진도북춤’ 영상물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나머지

지난 몇달째 진도북춤을 개인지도 받고 있습니다.

나보다 훨씬 뒤늦게 이민 온 한 목사친구가 우리집에서 며칠을 머문 후

“ 너같은 사람은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공통품이다” 고  비아냥거린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60-70년대 한국 골통품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지난  40년 미국 이민생활을

자유와 기회의 나라인  미국사회를 액면 그대로 신뢰히고

돈을 찾아 헤매이는 상사꾼 삶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아무런 후회는 없습니다.

그런 덕분에 이제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싸구려 짜장면집를 찾아다니거나,

불편한 야간 비행기를 표을 구입하려고 인터넷 엡싸트들을 서치하며 시간을 낭비하거나, 

전화비를 아끼자고 남들이  잠자고 있는 깊은 밤중에 전화를 거는

천박한 신세는 면했습니다.

그러나 은퇴를 결심하고  ‘계영배’로 널리 알려진 조선 최대의 거상 임상옥이 남긴,

‘장사는이문은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는 말을  음미해 보며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곤 합니다. 나는 평생 장사를 하면서도

임상옥처럼  사람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인간은 이름을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남기고 간다.’ 는

말을  나름대로 만들어 하루하루를  자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창조문예  실릴  시와 수필 10여편을 이멜로

보내달라는 박 교수님의 부탁에 약속만 해놓고 여지껏 지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도 마음 속 부담으로 남아있습니다.

솔직히 지인들에게 보낸 이멜일들을 며칠간 뒤지며  맘에드는 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 내가 그때 이런 헛소리를 했었나? ‘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리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의 글들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이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순간순간 성장하고, 성숙하고,  변하고, 변형되는

살아있는 한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우상은 없습니다.

그것이 설령  나라라 할찌라도 내 앞길를 가로막고 있으면

목을치고 가려고하는 무지한 인간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제자신을 문학인이니 글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10여년전에 워싱톤 문인회로부터 받았던 시부분 신춘 문예상도 나에게는

과분하고 부끄러운 우연이었습니다.

저는 가슴 속에 바람이 불어오고  물결이 일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 스쳐가는 감상들을 그대로를  글로 옮겨봅니다.  두서, 철자, 문법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잡필을 쓰고나서 다시 읽어보거나

수정하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지인들 몇분에게

이메일로 보내곤 합니다.  

대부분 나의 잡필들은 하나님에게  띄우는 나의 편지들이라고

간주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국어선생님들처럼 철자나 문법에 신경을 쓰고

따지는 않으실 거라고  믿고있습니다.

저의 구차한 변명들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 교수님과 만난 후 그 뒷날 새벽에 일어나 두서없이

수정도 거치지 않는 잡필을 귀한 “창조문예’ 지에 실려주신다니

무척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좀 다듬어서 보낼걸’ 하는 후회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는  헤라클레이토스  주장에

항변할 자신이 없습니다.

숲속에 바람소리가 요란합니다.

바람은 본래 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찰에서 나오는 진동소리라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인간도 서로 만나야  울림이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건강을  완전 회복하셔서

올여름에 다시 뵙기를 소망해 봅니다.

올해는 보다  더 맛있는 김치로 대접하겠다는 각오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김치 담그는 비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부디 강건하소서.

믿는자에게는 모든 것들이 협력해서  선을 이룹니다.

02/13/2017  아침

버지니아 숲 에서  

해암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