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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믿는가, 가슴으로 믿는가?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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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1월 24일 (화) 13:13:34
최종편집 : 2017년 02월 05일 (일) 00:30:17 [조회수 :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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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산회원들과 함께 산행을 하는 날이다. 요산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주변의 산을 오르는데, 10명의 회원 가운데 가장 연장자는 새해로 88세가 되고 가장 젊은 사람은 75세가 된다. 그중에 80세 이상이 6명이고 70대가 4명이다. 우리는 30여 년 전부터 같이 산행을 해왔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요즘은 높은 산을 오르지 못하고 주변의 낮은 산을 골라서 두 시간 아니면 세 시간씩 다녀온다.

오늘은 새해를 맞아서 처음으로 산행을 하기 때문에 예년처럼 시산제를 지내는 날이다. 시산제 이야기를 꺼내고 보니 당당뉴스 독자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우리 회원들 가운데에는 불교신자들이 많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독실한 불자임을 자처하고 어떤 분은 부인이 절을 다니니까 덩달아서 자기도 불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지 않는 회원들은 모두 시산제에 적극 참여한다.

산에 올라가서 적당한 자리를 잡아서 제물을 차려 놓고 축문을 읽은 다음 제단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1년 동안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애국가를 제창하고 나서 제사를 위해 차려 놓았던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면서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고 웃으며 떠든다.

 

   
▲ 시산제 장면. 본 칼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 요산회에는 나를 포함해서 기독교인이 2명 있다. 우리 두 사람은 다른 회원들이 진지하게 시산제에 참여하는 동안 뒷전에 서서 시산제를 구경한다. 그러고는 그들이 애국가를 부를 때 같이 노래하고, 제물을 먹을 때는 같이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과 함께 서로의 건강을 빌어준다.

회원들과 함께 제물을 먹을 때면 나는 항상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바울의 말을 생각한다. 바울은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지만, 양심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제물을 먹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내 기독교인 동료는 나보다도 더 열심히 먹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에게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는 시산제를 구경만 하고 있었으니까 시산제를 드린 사람들과 어울려서 맛있게 먹어주어야 그들과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를 얻기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 같이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들을 얻으려고 시산제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늙을수록 고집이 세어지는 법인데, 80줄에 든 사람들이 내가 그들을 개종시키려 한다고 해서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게는 바울과 같은 전도의 열정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젊어서부터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한 일이 없으니 말이다.

특별히 올해는 그들이 시산제를 드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축문에서 날자, 장소, 시산제를 드리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자기들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산신에게 빈다. 자신뿐 아니라 가정을, 나라의 안정을, 남북의 평화통일을, 거창하게 세계평화까지 빈다. 이렇게 비는 것은 불교에 들어온 샤머니즘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불자들은 집착을 버리라고 공(空)을 강조하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부처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런 시산제를 드리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신에게 의지하려는 종교심의 발로 아닐까?

시산제를 드리면서 이 불자들은 아무도 부처의 가르침이나 어느 종파의 계율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신비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종교인이라고 말 한 것처럼, 우람한 산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면서 그 산에는 우리 인간이 범할 수 없는 혹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어떤 영이 있다고 믿는다.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범신론적 종교심이다. 오늘 그들이 진지하게 시산제를 드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원시적이면서도 소박한 그들의 신앙심이 원초적인 신앙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신이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것은 좀 유치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원래 신앙은 그런 것 아닌가? 그들이 산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단지 의지하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내가 만일 그들에게 산신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산신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반박해 올 것이다.

신학자들은 인간의 언어란 단지 인간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올바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화적 표현이나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하는 그리고 우리의 이성의 한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 너머에 있는 신비로운 존재다. 그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신비감을 배제하고는 종교 의식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신비체험을 언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성적인 논리로 구축한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요즘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만들어진 신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인들이 허상을 좇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은 실상 교회가 만들어놓은 교리를 공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론,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론 같은 기독교의 교리는 과학적으로 이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성적인 논리를 앞세워서 교리를 반박해 올 때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들을 설득하기가 어렵다. 일부의 기독교인들이 과학자들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를 옹호하기 위해서 창조과학을 내세웠지만, 창조과학은 도리어 과학자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신을 공격하는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들뿐 아니라 많은 현대인이 교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지금 교회가 서구에서 외면당하는 것은 바로 이성적인 서구인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종교심이 강한 것은 우리의 감성이 풍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살라망카 대학의 총장을 지낸 스페인의 사상가 미구엘 데 우나무노는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대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니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한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학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어린 아들이 불치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자신은 협심증에 걸려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자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서 사제를 찾아갔다. 그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고 싶어서 갔는데, 사제의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서는 옛날의 신앙을 회복할 수 없었다.

우나무노가 사제가 설명하는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그의 이성적 사고로는 교리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믿고 싶은 열망과 불신 사이에서의 갈등을 『기독교의 고뇌』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그리고 그는 이성이 강한 현대인의 신앙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예수님에게 간청한 백부장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확신이 없으면서도 믿고 싶어 하는, 의심하는 신앙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중반의 영국소설을 대표하는 그레이엄 그린은 가톨릭 신자인 아가씨와 결혼하기 위해서 영세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사제를 만나서 교리를 배웠지만, 사제가 가르치는 교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때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그는 신을 믿으려는 몸부림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다만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가 가능하겠다는 막연한 믿음에 이르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9년 후 리베리아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그는 진짜 개종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개종을 감정적 개종이라고 부른다.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달빛 아래서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그들의 종교의식을 지켜보면서 그린은 그들의 순수한 신앙에 감동했다. 그는 여기서 신앙이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신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는 교리를 통해서 머리로 만나지 못했던 신을 가슴으로 만날 수 있었다.

영어로는 믿음을 belief와 faith로 구분하는데, belief는 논리적으로 납득하는 믿음을, faith는 그런 논리와 관계없이 우리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faith가 belief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머리로 납득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라고, 성령에 취하라고 말한 것 같다. 우리에게 아무 교리도 가르치지 않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당신의 영적 연합을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요 17:21)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 다시 말해서 가슴으로 만남을 말한 것 아닌가? 그리고 예수님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어린아이가 아빠의 품에 안기는 그런 마음에서 나온 말 같다.

오늘 시산제를 구경하면서 그들의 원시적인 신앙에서 신에게 의지하려는 원초적인 신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의외의 일이다. 매년 그들의 시산제를 참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 구경했었는데, 올해의 시산제에서는 그들의 신앙을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포스터는 『인도로 가는 길』에서 포용적인 마음을 ‘황혼기의 비전’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내가 젊은 날의 열정이나 아집을 점차 벗어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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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예수를 위하여 (39.119.34.241)
2017-02-05 18:18:15
화평씨의 글이 참 적절한 예인것 같군요. 사회철학자의 질문에 답한 일본인 신주의 대답이 아 주 적절한 답변인것 같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춤을 출 뿐입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마음이 평화로우니까요. 이와 마친가지로 시산제를 지내는 사람들은 "산을 오르고 산에서 건강을 찾고 산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또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므로서 자신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믿고있는 대상이 가장 옳은 것이고 진리라고 믿는 것은 Faith에서 시작하여 Belief로 정리를 하는것이 아닐까요. 믿음의 세계는 원래 머리에서 시작되기 보다는 가슴에서 시작되어 머리로 정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 되네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도 먼저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이론화시킨것으로 보면 어떨까? 하지만 의학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인간의 뇌를 살펴보면 해마(감정뇌)로들어온 지각된 자극을 전두엽(이성뇌)에 전달하면 전두엽이 그것을 판단해서 혈관을 통해 우리의 혈류를 통해 행동이나 생각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이런 감성과 이성을 분리해서 활동하지는 않는다고 최근의 뇌과학자들은 말하고있읍니다. 시산제를 지내는 사람들도 그것의 진실여부를 떠나 가슴으로 느끼고 이성으로 판단해서 행동으로 나타난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할것이 아니가요? 그것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독선이 아닐까요? 과학도 사실은 믿음의 카테고리에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실을 믿지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는 사람에게는 ?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내생각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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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화평 (122.35.176.192)
2017-01-27 15:59:10
일본에서 열린 세계종교학회에서 뉴욕의 사회철학자와 일본 신도의 신주가 나눈 이야기가 이 글과 연관이 있네요.

사회철학자가 신주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신도의 종교의례를 숱하게 보아왔고, 귀국의 성지도 여러 곳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신도의 종교적 이념을 모르겠어요. 신도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거든요.'

이 말을 듣고 일본인 신주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대답했답니다.
'글쎄요, 우리에게는 종교적 이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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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may (61.77.142.171)
2017-01-25 12:43:4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죽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도 많은 순교자들도 지금의 선교사들도 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순종한 겁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둘중하나지요.
그들이ㅡ지옥을 가든 말든 상관 없던지 내가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던지.
산신령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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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
잔나비 (221.167.227.42)
2017-01-24 21:58:31
50은

머리와 가슴 사이.

백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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