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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의 한국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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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1월 12일 (목) 21:40:10
최종편집 : 2017년 01월 13일 (금) 07:13:51 [조회수 :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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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의 한국개신교회

 

이말테 박사 (루터대 실천신학 교수)

   
 

16세기에 서구교회에 문제점들이 많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문제점들을 비판했고 교회의 개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교황청과 주교들은 그들의 비판을 거부하여 종교개혁을 요구했던 사람들을 파문했다. 이렇게 종교개혁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회들이 설립되었고 서구교회가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로 분단되었다. 천주교회가 나중에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20세기 후반부터 개혁을 시작했다. 특별히 제2바티칸 공의회 때의 예배 개혁과 1999년의 “칭의론 공동선언문”이 중요했다. 이로써 1960년부터 종교개혁자들의 요구가 드디어 천주교회에서도 실천되기 시작했다. 천주교회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 개신교회들도 종교개혁의 500주년의 기회로 종교개혁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묻고 21세기의 개신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된다.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종교개혁의 의미가 논쟁되고 있고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의 필요성 자체에 대하여 모두가 동의하는데 어느 개혁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논쟁 중이다. 오늘의 모임도 그 논쟁의 일부이다.

발표자가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16세기의 유럽종교개혁으로부터 배울만한 것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1.) 16세기 초의 서구교회와 오늘의 한국개신교회 사이에 공통점들이 많다는 것을 주장한다. 두 번째로 (2.) 한국개신교회가 유럽보다 미국의 영향을 받았고 유럽 중에 루터보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교회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여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하여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에 주요한 루터 사상의 요점들을 논의하려고 한다. 그 다음 (3.) 루터의 입장에서 한국 개신교회가 어느 개혁을 필요한 지에 대하여 그리고 그 개혁을 위한 루터의 기여를 서술하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 구체적 개혁 제안 두 가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1. 한국 개신교회와 500년 전의 천주교회 사이의 공통점들

 

발표자가 2012년에 용인시에 위치하고 있는 루터대학교가 주관했던 독일 종교개혁지 탐방을 안내했다. 탐방 여행이 끝나기 전에 평가회의에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와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참여자들에게 제시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여행 참여자들이 총 10 가지의 공통점들을 말했다. 이 10 가지의 공통점들이 다음과 같았다:

1.1. 율법주의적 예배 이해

1.2. 하나님의 은혜나 복을 얻기 위해 재물로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있 다고 생각하는 것

1.3. 선행을 통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1.4. 교회의 지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용

1.5. 교회의 교권주의

1.6. 성직매매

1.7. 많은 목사들의 지나친 돈에 대한 관심과 잘못된 돈 사용

1.8.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개인적 소유로 착각하는 것

1.9. 많은 목사들의 도덕적, 성적 타락

1.10. 많은 목사들의 낮은 신학적 수준

참여자들이 루터 당시의 천주교회를 부정적으로만 보았던 결과이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개신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참여자들이 말하지 않았던 다른 공통점들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00년 전의 천주교회와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를 이렇게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의심할 수도 있다. 좋은 공통점들도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의 공통점들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이 공통점들이 교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발표자가 루터의 입장을 숙고하려고 한다.

 

2. 루터의 신학사상과 종교개혁. 위에 언급된 16세기의 천주교회와 오늘의 한국개신교회의 공통점들에 대한 루터 입장에서의 판단

 

2.1. 율법주의적 예배 이해 (ad 1.1.)

 

루터가 1520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에서도 예배의 율법주의적 이해를 문제로 설명했다. 멜란히톤이 나중에 루터의 예배 이해를 성례전적 차원(sacramentum)과 제사적 차원(sacrificium)의 구별로 해석했다. 성례전적 차원은 하나님의 행위로써 우선적이고 제사적 차원은 인간의 응답으로서 이차적인 의미일 뿐이다. 루터가 1544년 10월 5일 토르가우(Torgau) 성교회 입당예배에서 설교했을 때 멜란히톤이 구별한 것과 동일한 말을 했다: “이 집에서 우리 주님은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그에게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 예배 정의를 토르가우의 문구(Torgauer Formel)라고 한다.

이 새로운 예배 이해에 따라 ‘예배’ 용어를 위해 ‘고테스딘스트’ (Gottesdienst)라는 새로운 용어도 등장했다. 고테스딘스트는 루터의 예배 사상을 완벽하게 표현해주는 용어이다: ‘하나님의 섬김’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문법적으로 2격이 2격 소유격의 의미(Genetivus subjectivus)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섬기심을 뜻하며, 동시에 4격 목적격의 의미(Genetivus objectivus)도 있다: 하나님을 섬김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테스딘스트라는 용어가 토르가우의 문구의 의미와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응답한다. 영어가 이와 비슷하다: 서비스(Service)란 하나님의 섬기심과 하나님을 섬김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의 예배 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개신교회의 예배에 결정적이다. 예배의 우선적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응답만 한다.

한국어 용어를 만들 때 미국 선교사들이 고테스딘스트 혹은 서비스라는 용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대신에 종교개혁의 예배이해와 어울리지 않는 워십(Worship)이라는 말을 선택하여 예배라는 말로 번역했다. 예(禮) 와 배(拜)라는 한문이 둘 다 인간의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제사적 차원만 표현된다. 더 심각한 말은 ‘예배드린다.’라고 하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세 번이나 인간의 행동만 표현된다. '예배' 혹은 '예배드리다'라는 표현은 잘못된 토착화의 예이다. 이 한국어 용어들을 볼 때 한국 개신교회가 율법주의적 예배 이해에 놓여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예배 이해에 있어서 종교개혁을 필요로 할 것이다. 2012년 독일 종교개혁지 탐방 참여자들이 그 문제를 잘 발견했다.

 

2.2. 하나님의 은혜나 복을 얻기 위해 재물로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 (ad 1.2.)

 

한국개신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낸다. 하나님의 복을 얻거나 복을 얻으려고 헌금을 드리는 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더 많은 헌금을 얻기 위하여 헌금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사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오해를 사용하는 교회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한국 개신교회의 큰 부분이 잘못된 기복사상을 전파했다. 기복사상은 교회 안팎에서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물질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복을 약속한다.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공동예배 때 헌금을 거둔 후에 헌금을 낸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비는 기도가 이러한 기복 사상적 헌금 이해를 부추겼다. 이렇게 헌금이 감사헌금이 아니라 복을 비는 헌금으로 이해된 경우가 많다. 낸 헌금을 없어진 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열심히 헌금을 내는 자에게 더 많은, 돈을 포함한, 복을 준다는 생각으로 큰 헌금은 자기에게 보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도 많다. 이렇게 헌금이 종교적 투자로 변했던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헌금이 드리는 자에게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보람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루터 시대에는 그 기대가 사후의 삶을 향한 것이었다.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교인들이 500년 전에 수많았다. 그 때 교인들이 연옥을 두려워했다.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는 교인들의 연옥에 대한 두려움을 돈을 모으기 위해 악용했다. 돈을 내는 사람들에게 죄 값의 면죄를 약속했다. 교인들의 입장에서 면죄부가 비쌌지만 할만 했다. 신자들이 안심했고 교회도 좋아했다. 양쪽에게 다 유익한 비즈니스이었다. 한국 개신교회가 약속하는 기복과 같았다. 그 차이는 다만 그 때의 희망은 사후 세계를 향한 것이었고 오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현재의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이다.

루터가 면죄부 제도를 95개 논제를 통해 공격했다. 이러므로 종교개혁은 올바르지 않은 교회의 돈 문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인들에게 잘못된 안전을 주고, 운명을 돈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약속을 비판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돈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서도 운명을 변경시키려 하는 시도도 있다. 기도를 하나님께 영향을 줄 수 있는 도구로 이해하는 개신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기도를 이렇게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기도에서 빌었던 것을 얻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러한 염치없이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교만함은 루터 당시의 천주교인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이 루터 당시 천주교회보다 더 시급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2.3. 선행을 통하여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 (ad 1.3.)

 

하나님께 영향을 주고 자기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려고 하는 방법들 중에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도 있다. 루터도 이것을 시도해보았다. 루터가 검은 수도원 입회와 열심히 기도하는 일을 통하여 천국 입장권을 얻을 수 있는 줄 알았다. 수도자로서 그의 위기는 먼저 기도를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과 죄를 충분히 발견하고 고백했는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의 위기는 자기 자신을 솔직히 알았고 자신을 속이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깊숙하게 죄에 빠져 있는지를 알았다. 그러나 천국 입장권을 자기 노력으로 얻으려 하는 시도가 교만한 것임을 발견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루터처럼 천국 입장권을 얻으려고 하는 한국 교인들이 있다. 그리고 사는 동안에 이미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심히 공동예배에 참여하고, 십일조를 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전도하는 사람이 모범적인 교인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우선 목사에게 보람이 되는 것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종교적 행동만이 모범적인 교인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평소에도 용감하고, 솔직하고, 남을 도와주고, 약한 자를 변호하고 보호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강한 자의 양심에 호소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루터는 온 삶을 예배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에는 직장생활도 포함된다. 개인 생활도 포함된다. 요즈음 그 문제를 인식하는 한국교인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회에게 아직 그 길이 멀다.

모범적인 교인이 되는 것을 일부 한국 개신교 목사들처럼 이렇게 너무 쉽게 여기게 만들면 교인들에게 잘못된 안전을 주고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자기 자신을 좋은 교인으로 보는 사람은 종교개혁을 아예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개신교인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은 기본이다. 개신교인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한다. 우리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안다. 그래서 2012년 종교개혁지 탐방 참여자들이 여기에서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와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 간의 공통점을 보았던 것이 옳았을 것이다.

 

2.4. 교회의 지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용 (ad 1.4.)

 

위에서 이미 루터 시대 사람들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면죄부에 대하여 말했다. 그리고 그들과 달리 한국 개신교인들은 헌금을 많이 내면서 현재 사는 동안 보람을 얻기 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선교할 때 그렇다. 명동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수막을 보면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예수 믿는 자 천국; 불신자 지옥.’ 인간의 사망과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교회가 악용하는 일이 많다. 500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하다. 세례 요한의 심판의 경고와 같은 전파와, 예수의 하나님께로 초청하는 전파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한국 개신교인들이 많은 모양이다. 어쨌든 종교개혁지 탐방 참여자들이 한국 개신교회가 500년 전의 서구교회와 비슷하다고 하면 이 분야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2.5. 교회의 교권주의 (ad 1.5.)

 

고대시대부터 교권주의가 발달되었다. 그 이유들은 다양했다. 그 중에 천주교회가 공식교회만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한 교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원죄만 없앴고 각 사람의 현재의 죄를 없애지 않았다는 교리도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현재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성찬식 때의 예수의 희생의 반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희생 제물의 반복적인 바침을 위하여 제사장이 필요했다. 미사의 진행을 위하여 중세에 회중의 참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사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전통이 생겼다. 회중의 중요성의 약화로 인해 제단과 회중 간의 사이가 계속해서 점점 더 멀어졌다.

정교회의 제단은 성화벽(Ikonostasis) 뒤에 있기 때문에 아예 보이지 않는다. 회중을 위한 설교도 필요 없어졌고 중세에 미사에서 사라졌다. 모국어 설교예배에는 남아 있었는데 그 예배는 이차적인 중요성만 가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사제와 평신도의 절대적 구별을 반대했다. 모든 신자들 혹은 모든 세례교인들의 만인제사장직을 가르쳤다. 루터에 의하면 성경말씀이 분명하고 모두에게 이해가 쉽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없으며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사제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터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죄를 사했다. 원죄뿐만 아니라 모든 나중에 생길 현재의 죄들도 포함된다. 그래서 개신교회에서 미사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제물의 반복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도 필요 없었다. 또한 개신교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신자에게 중매역할 하는 성인과 성모와 같은 중보자들이 필요하지 않다. 개신교회의 목사들은 다른 교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아니라 한 지역교회에서 목회하기 위하여 사명을 받은 교인들이다. 공식 설교와 성례전 인도 때문에 교인들의 상대방이어도 교인에 속한다.

한국개신교회에서 이러한 종교개혁의 특징이 거의 안 느껴진다. 위계질서적 사상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회에서 예를 들어서 자기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온 공동예배 동안 중앙 위치에 있는 설교대에 서 있는 장로교 목사들이 많다. 찬송이나 영광송 때도 비켜서지 않는다. 목사가 비키면 예배가 멈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교리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가 예배한다. 목사가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설교 때 청중이 동의하면 이것을 아멘으로 표현한다. 만약에 설교가 진리와 다르다고 생각되면 주로 친절하게 침묵으로 이의를 표현하지만 중요할 때 아니라고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신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들이 스스로 아멘이라고도 하고 교인의 이의 표현을 허락하지 않는다. 목사 중심이 한국 개신교회에서 심각하다. 함께 찬송이나 신앙고백을 할 때 목사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리고 목사들이 대부분 회중 가운데 앉아 있지 않고 제단이 있는 높은 좌석에 앉아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을 바보로 보는 느낌이 날 정도로 교만한 태도와 목소리로 말하는 목사들도 많다. 안수를 높은 자리를 주는 특권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는 목사들도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권위적 목회스타일이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갈등들 중에 3번째로 큰 원인이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의 교권주의가 종교개혁시대의 서구교회와 비슷하다고 하는 여행 참여자들의 의견이 사실일 것이다.

 

2.6. 성직매매 (ad 1.6.)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면죄부이었다. 루터는 이 면죄부를 반대하기 위하여 95개 논제를 작성했다. 종교개혁이 천주교회의 성직매매와 비리 사건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직매매는 신약시대부터 금지된 범죄이다. 마술사였던 시몬이 성령을 돈으로 사려했던 시도에 따라 성직매매를 그의 이름을 따서 시모니라고 한다. 서기 313년과 381년 이후에 성직매매가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451년에 열렸던 칼케돈(Chalkedon) 공의회에서 돈을 받고 사제를 서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법이 중세에 여러 차례 확인되었지만 성직매매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났다. 돈으로 자기 성직을 받은 신부들과 주교들과 교황들이 많았다. 루터가 이러한 뇌물사건인 성직매매를 공격적으로 비판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뇌물을 주고 고위 성직을 얻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큰 교단에서 총회장 혹은 감독회장이 되고 싶으면 수 억 원을 써야 한다고 한다. 장로가 되고 싶을 때에도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어야 하는 것도 문제이다.

 

2.7. 목사들의 지나친 돈에 대한 관심과 잘못된 돈 사용 (ad 1.7.)

 

루터시대와 마찬가지로 돈을 너무 좋아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2012년 여행 참여자들이 거기에서 공통점들을 네 가지나 언급했다:

- 성직자들의 지나친 물질주의적 관심

- 교인들이 낸 돈을 성직자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

- 헌금을 강조하는 것

- 교회 건축을 위해서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것

루터가 이미 1520년에 천주교회 사제들의 성직록과 이자 수익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비판했다. 중세에 성직자들이 제1국민 계급이 되었다. 성직마다 녹이나 다른 정기적 수입이 있었다. 곡식과 큰 가축의 십일조 외에 농민들의 대다수가 작은 가축과 과일과 야채의 십일조도 내어야 했다. 십일조 외에 세금과 관세와 이자와 부역과 고역도 의무이었다. 농민들의 전체적 헌신과 헌금이 수입의 30%이상이었다. 루터 시대에 영적인 동기나 목적 대신에 재정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보람을 얻기 위하여 성직을 택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수입을 높이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지나친 압박까지 하는 사제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제들이 서민들을 희생시키며 살았다는 것이 과언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현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크기와 교회 재정의 양적 현황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이 있는 목사들이 많을 것이다. 1990년대에 발표자가 당시 한국 개신교회의 영향력 있던 대표자와 대화했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이 전에 목회했던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었다. 필자가 그 교회를 알았기 때문에 교회가 크다는 말을 했다. 그 목사가 맞다고 대답하며 12억이라고 했다. 교인수를 말하지 않고 일 년의 총수입을 말했던 것이었다. 그 목사가 사람들보다 재정을 생각했다. 이것이 교회를 성직록으로 본 루터 시대의 천주교 사제들과 비슷하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십일조와 다른 헌금을 내도록 교육을 한다. 각 교인에게 재정적 부담이 크다. 더 많은 헌금을 얻기 위하여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목사들이 많다. 헌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헌금의 양까지 알리는 목사들도 있다. 최소한 후자가 신약성서를 위반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한국 개신교회가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헌금의 일부를 목사가 사례비로 받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목사들이 교회를 위하여 낸 다른 헌금을 목사의 출세나 선거운동 같은 개인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 목사들이 결혼식과 장례식 때 얻은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은 전통일 것이다. 물론 교회가 목사에게 충분한 사례비를 주어야 하지만 그렇다면 목사가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온 시간과 힘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헌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목회를 통하여 받는 돈을 교회에 주어야 한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담임 목사들의 잘못된 돈 사용이 교회 안에서 생긴 갈등들 중에 가장 잦은 원인이다. 목사들의 돈 욕심이 가끔 무섭다. 목사 한 명이 아파트 8채나 소유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리고 목사가 왜 큰 차를 타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한 루터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와주지 않는 것을 도둑질과 십계명의 위반으로 해석했다. 여러 참여자들이 한국 개신교회가 재정적인 상황에 있어서 종교개혁시대의 천주교회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에 근거가 있다.

 

2.8. 목사들이 교회를 개인적 소유로 착각하는 것 (ad 1.8.)

 

2012년 종교개혁지 탐방 참여자들 세 명이 이 문제를 공통점으로 말했다. 그 중에 한 명이 성직 세습을 비판했고 한 명은 족벌주의나 친인척 천거주의를 예로 들었다. 한국에서 자기 돈으로 교회를 개척한 목사들이 많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구입한 부동산을 목사의 개인 소유로 이해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담임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유산으로 맡겨 주는 습관을 언급할 수 있다. 다행히 지금 담임 목회직 세습을 금지시켰던 총회들이 있지만 불법을 피하며 편법으로 할 수 있는 세습 방법들이 있다. 교회를 개인 소유로 보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 개신교회가 500년 전의 천주교회와 비슷하다.

중세부터 영주들이 사적으로 세운 성당들이 많았다. 거기에서 사제의 사례비와 교회 건축비를 내는 책임이 영주에게 있었다. 문제는 교인들이 결정권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낸 헌금을 어디에서 어떻게 써야 할지를 교인들이 결정하지 못했다. 다른 보통 교회에서도 사제에게 성직록과 이자 수입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500년 전의 천주교회와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의 돈 문제가 매우 비슷하다. 독일식으로 표현해보면, 교회와 돈이란 뜨거운 감자이다. 즉 까다로운 문제라는 의미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담임목사 임명과 세습 문제가 모든 교회공동체 내의 갈등들의 원인 중에 두 번째로 잦은 것이다.

 

2.9. 목사들의 도덕적, 성적 타락 (ad 1.9.)

 

천주교회의 도덕적 상황이 루터 시대에 좋지 않았다. 교황까지 루터가 비판했다: “교황의 변덕과 거짓을 통해 로마시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나쁜 영향을 받는다. 적그리스도도 이 보다 더 모독적으로 지배하지 못할 만큼 장사와 무역과 소동과 거짓과 속임과 강탈과 도둑질과 호화와 간음과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남색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다양한 것들로 가득 찼다.” 한국 개신교회에 착한 교인들과 모범적인 목사들이 많지만 드러나는 추문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성적 추행에서부터 간음과 사기와 탈세와 횡령까지 하는 목사들이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목사의 성적 문제가 교회 공동체 안의 문제 원인 중에 4번째로 잦은 것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약하다. 그리고 중소교회 목사들 중에 올바르게 살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수많다. 권력과 돈이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은 모양이다. 보도된 추문들이 많은 것은 윤리적 그리고 도덕적으로 한국개신교회가 개혁을 필요로 함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도 여행 참여자들이 틀리지 않았다.

 

2.10. 많은 목사들의 낮은 신학적 수준 (ad 1.10.)

 

많은 목사들의 낮은 신학적 수준이 특별히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학업 능력 수준이 높은 학생들과 수준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대부분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다.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시험이 온 삶의 미래의 진로를 결정하다시피 하는 시험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분리되기는 하지만 수준이 매우 낮은 학생들도 돈만 있으면 다닐 수 있는 대학교를 찾을 수 있다. 대학교 교수들이 대부분 F점수를 주지 않아서 최하 수준의 학생들까지도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만 신학을 전공해도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에 수많은 목사들이 3년 동안만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항상 학위를 소지한 교수들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신학자가 아닌 일반 목사들도 돈을 기증하거나 강의를 결정하는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거나 다른 유익을 줌으로써 학교에서 강의 자리를 얻는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적 수준이 매우 낮다. 이러한 교회가 흥할 수 없다. 한국 개신교회가 세례를 아무에게나 쉽사리 주거나 세례 예비자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개신교의 양적 성장주의가 세례의 ‘대 바겐세일’을 만들었다. 잘못된 동기를 바탕으로 충분한 준비 없이 사람들이 교인이 될 수도 있고 목사도 될 수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낮은 교육 수준과 잘못된 동기로 성직자가 된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뿐만 아니라 루터시대에도 천주교회의 문제이었다.

루터가 하나의 좋은 예이다. 루터는 1501년부터 1505년 초까지 자유과목들(septem artes liberales)을 공부했고 1505년 봄부터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법학 공부를 포기하여 1505년 7월 17일에 검은 수도원에 입회했다. 2년도 안 된 1507년 4월 4일에 신품식을 얻었다. 그래서 루터가 신학공부 없이 사제가 되었다.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신학공부 없이 신부가 될 수 있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도 못하는 사제가 수없이 많았다. 그래서 성경도 읽지 못하는 사제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참으로 소경으로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었다. 루터가 1508년부터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1509년 성서학사(Baccalaureus Biblicus)를 얻었고 몇 달 후에 교리학사(Baccalaureus sententiarius)를 받았다. 그리고 1512년에 신학박사학위를 얻었다. 칼뱅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자유과목들과 법학만 공부했다. 루터와 달리 법학을 끝까지 했지만 대학교에서 신학 전공을 하지 않았다. 으며 사제도 아니었다. 칼뱅과 루터는 둘 다 위대한 신학자들이 되었지만 수많은 천주교 사제들이 신학은 물론 성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루터는 이것을 꼭 변경시키려고 했다. 루터는 수준 높은 국제적인 교회를 원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터가 목사 후보생들의 수준과 전체적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라틴어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교육을 위하여 교리문답서를 작성했다. 루터가 수준이 있는 교회를 원했다. 루터의 꿈이 이루어졌다. 루터교 목사 가족들에서부터 나온 위대한 학자들과 문화인들이 수많다. 그리고 독일에서 루터교인들의 교육수준이 항상 천주교인들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았다.

한국 개신교회의 목사 후보생들을 위한 교육을 개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학과와 신대원들이 신학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총회가 안수 조건으로 6년이나 7년의 신학 전공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늦게 목회자의 사명을 받는 분들을 위하여 예외를 만들 수 있다. 6년이나 7년의 신학전공 과정의 조건을 통하여서만이 학부에서 가르쳤던 것을 대학원에서 또 다시 가르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대학교들이 국가의 법에 따라 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들은 교회법에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총회만 이러한 신학전공 개혁을 결정할 수 있다. 총회들이 결정하면 대학교들도 새로운 커리큘럼(curriculum)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하여 학부에서 언어와 학문적 방법론 중심으로 가르치고 신대원에서는 신학과 실천에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수준이 많이 좋아질 것이다. 항상 예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말할 때 한국 개신교회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은 분명하다. 2012년 여행자들이 이 문제를 잘 발견했다.

 

2.11. 기타 공통점들 (ad 1.11.)

 

화려한 교회건물들을 건축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대표적인 화려하고 큰 교회건물(들)이 교단마다 필요할 것이다. 성공회도 덕수궁 옆에 있는 대성당 덕분에 에큐메니컬(ecumenical) 예배와 행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과 땅 구입을 위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 개신 교회가 요즈음 너무 많다. 유럽의 천주교회가 대형교회 건물을 짓기 원했다. 자기 권력을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목적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공개 학술 논쟁에서 루터가 1518년 4월 26일에 매우 일찍 영광의 신학을 비판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된 것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신학자들은 신학자들이 아니다.”라고 했다. 올바른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라고 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기복사상을 따랐던 목사들이 수많았다. 기복사상은 번영의 신학(Prosperity Gospel)의 한 형태이고 현재의 영광의 신학의 대표적 사상이다. 루터가 영광의 신학을 반대하고 거부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기복사상을 벗어나는 한국 목사들과 교회들이 많다. 영적 그리고 정치적 권력을 둘 다 원하는 것과 교인들이 조건 없이 성직자들의 말을 순종하기를 원하는 태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를 원하는 입장도 루터가 제안한 종교개혁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회가 500년 전에 천주교회처럼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어떠한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500년 전에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인가 아니면 다른 개혁이 필요한가?

 

3. 한국 개신교회에 필요한 개혁과 루터의 기여

 

한국 개신교회가 루터시대의 천주교회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는 말이 매우 놀랍다. 개신교회 내에 종교개혁에 반대되는 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만드는 종교개혁의 특징들이 한국 개신교회에서 부분적으로 실천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교회를 개신교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루터의 신학 사상에 의하면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16세기 천주교회처럼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필요성에 대하여 개신교 신학자들과 목사들과 다른 신자들의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어떠한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500년 전에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인가 아니면 다른 개혁이 필요한가? 한국 개신교회에게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대다수이다.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신교회가 첫 종교개혁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와 비슷하다면 둘째 종교개혁이 아니라 첫째 종교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반면에 오늘의 한국 교회와 사회의 상황이 16세기의 독일이나 유럽과 다르기 때문에 그냥 16세기의 종교개혁에 따라 하는 것이 맞는지도 의심할만한 것이다.

 

3.1. 한국 개신교회가 필요로 하는 개혁이 바로 16세기의 유럽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인가, 아니면 다른 개혁인가?

 

지금까지 소개했던 공통점들이 한국 개신교회와 16세기의 천주교회가 비슷한 문제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한국 개신교회가 이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면 500년 전의 종교개혁에 따라 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문제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의 비판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이다. 두 가지 차이점만 언급 하려고 한다:

1. 문제들이 비슷해도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 상황이 루터 시대의 개신교회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적 차이가 매우 크다. 사고의 조건들도 다르다. 한국의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전통들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서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그리고 과학적인 상황도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온 세계 차원에서 이러한 변화를 일으켰다: 새로운 자의식을 주었고 이 자의식은 계몽주의와 민주주의와 현대적 자본주의의 발상에 있어서 크게 기여했다. 현대의 근원은 종교개혁이지만 종교개혁시대와 다르다. 우리가 종교개혁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오늘의 상황에서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합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조건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다수적이며 점차적으로 자본주의의 영향이 강해지는 세상에서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의 과제가 한 면으로는 500년 전보다 더 쉬울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훨씬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의 상대성과 우리 입장의 한계성에 대해 루터보다 훨씬 더 잘 안다. 그래서 우리는 루터처럼 강하게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훨씬 더 다양해진 세계관과 신앙의 다양성 때문에 500년 전보다 도전이 더 클 것이다.

두 번째 차이도 있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16세기의 천주교회와 비슷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개혁 시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문제들도 해결해야 한다. 한 가지만 설명하겠다: 이 문제가 아마도 제일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논쟁될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와 문화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종교개혁자들도 이와 비슷한 문제와 마주쳤다: 복음과 전통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문제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숙고했던 전통은 다만 그리스도교의 전통이었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는 완전히 다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의 문화들과 종교들 간의 올바른 관계가 무엇인가? 그 문제를 잠시 설명하고 종교개혁과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려고 한다.

 

3.2. 토착화에 대한 보수적 입장 (초기 조선 개신교회로 돌아가자)

 

총신대 등의 토착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현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를 교회가 한국 문화와 종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문제를 한국 개신교회의 물질주의와, 모더니즘을 받아 들였던 세속화로 보는 신학자들도 많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한국 개신교회가 잘못된 동양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든, 서구에서 온 현대의 물질주의적 영향을 받았다고 하든, 동일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원래의 순수한 그리스도교의 형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다수가 순수한 그리스도교를 초대교회나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로 생각하지 않고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왔던 그리스도교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기 선교사들 중에서도 처음으로 조선을 선교하러 온 유럽 개신교 선교사들이 아니라, 오직 조선에서 살게 된 북미 선교사들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초까지 조선으로 전승된 북미개신교 형태를 순수한 그리스도교로 이해한다. 그들이 돌아가자고 하는데, 이것은 조금만 돌아가자는 뜻이다.

 

3.3. 토착화에 대한 진보적 입장 (서구화를 극복하자)

 

반면에 토착화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한국 개신교회의 북미 개신교회의 형태를 문제로 본다. 그들 중 대다수가 북미를 서구의 대표적인 것으로 본다. 미국교회와 매우 다른 유럽교회를 구별하는 신학자들은 소수이다. 대다수가 미국만 아는데 유럽 상황이 그것과 비슷하다고 착각한다. 토착화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미국 교회이든 유럽교회이든, 서구 교회가 위기에 빠진 것으로 본다. 그 위기의 근원으로 서구교회의 신학을 본다. 서구교회가 당하는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한국개신교회가 서구 교회의 신학과는 다른 새로운 신학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한국 개신교회가 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가 서구교회와 그 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립적인 한국 신학을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한국개신교회가 이미 크게 한국문화로 문화화 되어 있고 또 한국종교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되돌아가자고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3.4. 제 3의 입장 (교회의 본질을 되찾자)

 

발표자가 또 다르게 주장한다: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동의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회가 북미 개신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 사람으로서 한국 개신교회가 유럽 개신교회와 극심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진보적 신학자들과 달리 한국 개신교회가 이미 그리스도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종교적 전통들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심각한 유교적 위계질서와 물질적 번영에 집중하는 무속적인 기복사상이다. 반면에 불교와 도교의 전통들은 한국 개신교회에 영향을 별로 주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개신교회가 교회의 과거를 검토함으로써 개혁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100년 정도만 돌아가는 것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500년이나 2000년 정도까지 돌아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본다.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3.5. 그리스도교와 문화에 대한 두 가지의 모델들

 

기본적인 질문은 동양 문화들과 종교들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핵심으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핵심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인가이다. 두 주장들이 다 가능해 보인다. 그리스도교가 원래 중동에 위치했기 때문에 나중의 교회의 서구화가 본질에서 멀어진 것으로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화된 교회가 동쪽 방향으로 나가면 교회가 본질적인 그리스도교와 가까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멀어지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만약에 신학에 지리학적인 상황이 유효하다면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겠다. 중동에서 출발하여 서구로 이동한 후에 다시 중동으로 되돌아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그 지리학적 해석이 옳은가? 서방과 동방이 만나면 중동이 나오는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를 서구문화화 후에 동양문화화도 시키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더 멀어지는 것인가?

3.6. 그리스도교와 문화의 관계 해명을 위한 종교개혁의 기여

발표자가 생각하기로는 두 번째가 맞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더 한국 문화화 되고 한국 종교화 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더 멀어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서구의 문화와 종교가 동방의 문화와 종교를 만나면 중동의 문화와 종교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서구의 숲과 풀밭이 동방의 숲과 논을 만나면 사막이 나오겠는가?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동방의 불교와 유교와 도교를 만나면 성서 종교나 유일신교가 나오는가? 그리고 한글과 한문이 영어를 만나면 히브리어나 아랍어가 나오는가?

아닐 것이다! 발표자가 보기로는 한국 개신교회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유럽교회와 미국교회가 본질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것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본질로 이해하는 것과도 다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본질을 새롭게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끼리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할 때 본질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다. 나눔과 교류와 토론으로만 예수와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교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세계교회에서 사용되는 코이노니아(koinonia) 혹은 코무니오(communio) 사상이다. 우리가 모든 지구의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 모든 대륙, 모든 교단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특별히 중요한 대화의 파트너들은 천주교인들과 정교인들이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새롭게 찾는 일에 종교개혁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은 모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 모델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그냥 자랑만 하거나 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4. 한국개신교회의 개혁을 위한 두 가지의 제안

 

4.1. 목회자 교육 개혁

 

많은 목사들의 낮은 신학적 수준이 특별히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학업 능력 수준이 높은 학생들과 수준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대부분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다.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시험이 온 삶의 미래의 진로를 결정하다시피 하는 시험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분리되기는 하지만 수준이 매우 낮은 학생들도 돈만 있으면 다닐 수 있는 대학교를 찾는다. 대학교 교수들이 대부분 F점수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최하 수준의 학생들까지도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만 신학을 전공해도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에 수많은 목사들이 3년 동안만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항상 학위를 소지한 교수들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신학자가 아닌 일반 목사들도 돈을 기증하거나 강의를 결정하는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거나 다른 유익을 줌으로써 학교에서 강의 자리를 얻는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적 수준이 매우 낮다. 이러한 교회가 흥할 수 없다. 한국 개신교회가 세례를 아무에게나 쉽사리 주거나 세례 예비자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개신교의 양적 성장주의가 세례의 ‘대 바겐세일’을 만들었다. 잘못된 동기를 바탕으로 충분한 준비 없이 사람들이 교인이 될 수도 있고 목사도 될 수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낮은 교육 수준과 잘못된 동기로 성직자가 된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뿐만 아니라 루터시대에도 천주교회의 문제이었다. 루터가 하나의 좋은 예이다. 루터는 1501년부터 1505년 초까지 자유과목들(septem artes liberales)을 공부했고 1505년 봄부터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법학 공부를 포기하여 1505년 7월 17일에 검은 수도원에 입회했다. 2년도 안 된 1507년 4월 4일에 신품식을 얻었다. 그래서 루터가 신학공부 없이 사제가 되었다.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신학공부 없이 신부가 될 수 있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도 못하는 사제가 수없이 많았다. 그래서 성경도 읽지 못하는 사제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참으로 소경으로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었다. 루터가 1508년부터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1509년 성서학사(Baccalaureus Biblicus)를 얻었고 몇 달 후에 교리학사(Baccalaureus sententiarius)를 받았다. 그리고 1512년에 신학박사학위를 얻었다. 깔뱅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자유과목들과 법학만 공부했다. 루터와 달리 법학을 끝까지 했지만 대학교에서 신학 전공을 하지 않았으며 사제도 아니었다.

칼뱅과 루터는 둘 다 위대한 신학자들이 되었지만 수많은 천주교 사제들이 신학은 물론 성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루터는 이것을 꼭 변경시키려고 했다. 루터는 수준 높은 국제적인 교회를 원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터가 목사 후보생들의 수준과 전체적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라틴어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교육을 위하여 교리문답서를 작성했다. 루터가 수준이 있는 교회를 원했다. 루터의 꿈이 이루어졌다. 루터교 목사 가족들에서부터 나온 위대한 학자들과 문화인들이 수많다. 그리고 독일에서 루터교인들의 교육수준이 항상 천주교인들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았다.

한국 개신교회의 목사 후보생들을 위한 교육을 개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학과와 신대원들이 신학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총회가 안수 조건으로 6년이나 7년의 신학 전공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늦게 목회자의 사명을 받는 분들을 위하여 예외를 만들 수 있다. 6년이나 7년의 신학전공 과정의 조건을 통하여서만이 학부에서 가르쳤던 것을 대학원에서 또 다시 가르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대학교들이 국가의 법에 따라 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들은 교회법에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총회만 이러한 안수 조건 변경을 결정할 수 있다. 총회들이 결정하면 대학교들도 새로운 커리큘럼(curriculum)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하여 학부에서 언어와 학문적 방법론 중심으로 가르치고 신대원에서는 신학과 실천에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수준이 많이 좋아질 것이다. 항상 예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말할 때 한국 개신교회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은 분명하다. 2012년 여행자들이 이 문제를 잘 발견했다.

 

4.2. 교회의 사회적 역할의 회복을 위한 기독교윤리

 

윤리적 위기에 처한 한국사회와 기독교교육의 가능한 기여 (Ethical Crisis of Korean Society and Possible Contribution of Christian Education)

 

이상과 같은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기 위해 우선 먼저 두 가지 문제를 이해해야한다. 한국사회에서 윤리적이 이슈를 어떻게 할 것이며 기독교윤리적인 과제는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과 한국의 개신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르치고 행동할 것인가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한국사회에 주어진 근본적인 사회 질서가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한국사회의 문화는 단일형태의 문화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배경의 서로 다른 문화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농사짓는 사회로써 공동체안의 인간관계가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산업화 혁명이 있던 60년대 전까지 한국은 농경사회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지역사회 중심의 전통은 아직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보편화 된 ‘우리’라는 표현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어머니, 아주머니, 아버지,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제 한국은 중국의 유교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중국어를 읽을 수 있는 교육 받은 사람들만 중국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육을 받지 못했던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중국 유교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유교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다양한 규범들로 이해하고 있다. 반면에 농촌에서는 구성원 들 사이의 통합과 평화를 유지하는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유교사상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위계질서를 통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따름으로써 안정성을 이룬다고 여긴다. 유고 질서는 열린 논쟁을 막으려 노력하여 오히려 사회 내에서의 구조적 폭력으로 그 값을 치루고 있다. 이를 통해 ‘한’, 우울증, 마약복용, 그리고 억압된 부분의 자살과 같은 문제가 일어난다. 유교적 질서의식은 우세한 자전거 탄 사람 심리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먼저 사회적으로 상급자나 강자에게는 약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약자들에게는 잔인한 폭군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최고 탑(TOP)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사회적 성취를 꿈꾸고 있듯이 유교적 질서는 한국사회를 무한 경쟁사회와 더 비싼 브랜드와 더 좋은 차를 탐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려고 하는 현상을 만들어 버렸다. 유교사상의 피상적인 이해로 만들어진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 사람들의 행동이 이유가 아닌 관계로써 정해진다는 점이다. 한국 사람의 행동들은 무언가 옳고 좋다는 본인의 신념보다는 외부적으로 어떻게 비추고 평가받는 지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철학적이 배경이 없는 피상적인 유교질서는 개인의 책임감이나 반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을 떠밀리고 있다. 그리고 주위로부터의 떠밀림을 받아들이는 것을 옳고 공손하다고 여겨진다. 문제는 이러한 동기가 윤리적이고 책임적인 행동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유교적인 전통이 영향력을 잃고 있다. 가까운 예로 들자면 가정교육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일이다. 가정에 있는 부모들이 직장 일에 쫒기고 있는 동안에 아이들은 방과 후에 있는 과외학원에 매달려 있다. 도시화는 사람들의 행동이 과거보다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적어진 익명의 사회를 만들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령하던 타자가 있는 사회에서 인간관계란 분명하게 규정되지 않게 되었다. 공동체 귀속의식이라든지 연대의식이 살아나는 사회가 아니란 이야기이다. 유교적 사회질서는 현대사회와 적합하게 맞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는 현재 유교적 사회질서의식보다 잘 맞는 다른 사회의식이 도전해 오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새롭고 보다 효율성 높은 윤리개념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개신교체에는 이러한 다른 윤리개념을 적절하게 소개하는 집단이 희소하다는 것이다. 개신교의 주요 흐름은 오히려 유교적 전통을 되살리려고 몸부림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유교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중단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이성적인 방안을 찾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보다 나은 기독교윤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목사들이 유교적 가치관을 보강하려는 이유는 많다. 아마도 목사들은 유교적 질서 같은 것이 더 좋고 그것이 자신들의 지위를 높여준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종교 지도자나 교사들은 지금 최상층에 위치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자신들을 유교적 지배질서가 자신들의 지위를 높여준다고 믿고 있는 지도 모른다. 또한 대부분의 목사들은 보수적이다. 그리고 유교의 세계관이 과거지향적인 세계관으로 이끈다. 대부분의 한국 목사들은 기독교 윤리와 유교질서의 차이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십계의 4나 5계명에 관한 설교를 들어보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공경’(Honor)하라는 말보다는 부모에게 ‘복종’(obedience)하라는 말씀으로 하는 것을 종종 들었다. 이러한 해석은 출애굽기 20:12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였다. 이것은 부모가 나이 들면 명예롭게 돌보라는 권면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십계명에 대한 해석이 유교적이라는 것이다. 결혼식에서 행하는 설교의 경우도 극소수의 목사들만이 성경을 인용할 뿐 부모 곁을 떠나 결혼하는 젊은이들에게 예수가 모친에게 매우 불친절한 말씨로 언급한 것을 인용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한국목사들은 유교적 관점에서 기독교 윤리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마태 5장-7장에 나와 있는 산상설교를 그들의 신학에 적용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 개신교가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면 진정 적절한 기독교의 이해를 되찾아야 하고 유가가 바라보는 사회적 이해를 비판적으로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기독교 교육의 변화를 위한 필자의 제안은 기독교 교리신학적 성찰과 함께 기독교윤리적인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첫 번째 걸음은 분명히 기독교 윤리를 바르게 이해한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기독교윤리의 실천 이고 세 번째는 교육이다.

현장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윤리의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두개의 요절이 핵심이다. 첫째는 마태 7:12절에 나와 있는 황금률(Golden Rule)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그리고 마태 22:37-40절 말씀에 있는 위대한 계명(Greatest Commandme-nt)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황금률은 한국어 번역이 매우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렇게 이웃에게 타자에게 행하라 (Do to Others)하였다. 여기에서 섬기고 환영하고 봉사하는 ‘Treat, welcome, serve’의 말들은 ‘do ut des’인데 주고받는(Give and Take) 뜻이고 이것이 때로 너도 그렇게 하라(you too)는 기독자가 전적으로 이웃에게 행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 대목이 결정적으로 황금률을 잘못 이해하는 대목인 것이다. 황금률은 상대에게 기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의 행동을 바라지 말고 먼저 행하라는 말이다. 선한 행동을 의롭게 행하라는 것으로 상대의 대응에 구애받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황금률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예수님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여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떠한 대접받는 것을 예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의 확신에 의하여 확고한 동기를 가지라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저 스스로 결정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것으로써 유교에서는 높은 사람에게 복종하고 다른 이들에게 따르라고 하는 것이지만 예수는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 자신의 결단으로 움직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거지를 만나든지 대통령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유교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시하고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윤리는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매우 다른 것이다. 황금률은 역시 사회적 계급을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모든 인류는 동등하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윤리에서는 사람은 높은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열등한 것도 아니라 ‘다 같은 형제요 자매’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누구든지 황금률에 의하여 공정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확신과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태도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윤리는 현대의 익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고 반면에 유교질서는 현대사회에 맞추어야만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예수께서는 황금률을 말하시면서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라라 하셨던 이유이다. 율법과 선지라는 구약성경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토라(Torah)율법 예언서(Nebiim)이다. 예수 시대에는 여기에 시편(Ketubim)이 정전(cannon)이 되기 전이었다. 이 말들은 율법과 선지서는 예수의 성경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기준해서 살고 있다. 예수의 말씀에 다르면 황금률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같은 맥락의 말이지만 예수는 위대한 계명의 중요성에 대해 또한 설명하였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성경구절이 위대한 계명이 황금률과 같은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가장 위대한 계명은 첫째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 첫 번째 계명은 신명기 6:5 쉐마 이스라엘(Shema Israel)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유대인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었다.

여기에 예수님 식으로 표현하여 너의 힘과 마음과 인간의 이성과 인식능력을 최대화한 이해를 구하고 있다. 예수에 다르면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의 두뇌를 쓰고 생각을 모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철학적 성찰과 생각을 한데 모으고 하라는 말이고 구약의 전통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당부말씀이다. 그러면서 그는 추가하기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쉐마 이스라엘을 덧붙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사랑과 분리시키지 않은 것이다. 이 계명은 처음과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웃사랑은 자기 사랑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은 이웃의 신앙을 미워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지만 예수의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과 뗄 수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심지어 이웃이 적이라 할지라도 같은 말이다. 통전적인 사랑은 단순히 십계명의 사랑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사랑은 실제로 유교적 가치에서나 복종으로 보면 전혀 다른 것이다.

개신교 공동체의 회중들은 기독교 윤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여 실천에 옮겨야 한다. 먼저는 자신들이 속해 있는 교회에서 그렇게 할 것이고 차차 매일의 생활에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많은 토론이 실행되고 인내가 필요로 할 것이다.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이것을 뒷받침해주고 특권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공동체의 성인들은 기독교윤리 의식을 함양하여 공동체를 사랑이 넘치고 성도, 형제, 자매들에게 자유와 공평이 실현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육받고 장성하여 진정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고 청년들에게 전파하여 배우고 익히고 실제로 체험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황금률을 가르치고 진정한 의미를 살아간다면 이것은 위대한 계명을 실천하고 유교의 복종을 대신할 것이다. 개신교회들은 다시 한 번 사회변화와 사회적 안정을 이룩하는 동반자로서 엄청난 기여를 하면서 비-유교적인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축복이 되어 구조적 폭력을 잠식하고 억압을 물리칠 것이며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부장적인 위계질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필자는 확신하기를 역시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새로운 기여를 하는 종교가 될 것이라고 굳게 확신한다.

 

 

 

 

 

[이말테 목사 프로필]

성 : RHINOW

이 름 : Malte, Friedrich

국 적 : 독일(Germany)

학력(Ausbildung und Qualifikation):

1981년: 신학사

1985년: 신학석사

1987년: 목회신학석사

1988년: 바이에른주립교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2011년: 노이엔데텔사우 아우구스타나 대학 선교종교학 박사

이력 및 경력(Berufsgang):

1985년 - 1987년: 독일 기독교바이에른주루터회에 소속된 프라일라싱(Fre-ilassing) 루터교회에서 준목으로 목회함

1987년 - 1992년: 독일 기독교바이에른주루터회에 소속된 도나우뵈르 (D-onauwoerth) 루터교회에서 목사로 목회

1992년 - 2000년: 기독교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교회 베를린선교 (Berline-r Missionswerk)의 파송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한신대학교 독문학과 교수 활동

2000년 – 2004년: 독일 전국 기독교연합회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파송으로 재한독일어 권교회 목회

2000년 - 현재: 독일 기독교바이에른주루터회 선교회 (Mission EineWelt의 파송으로 기독교한국루회 선교사 활동

2002년– 2005년: 기독교한국루터회 교회개발원 원장

2005년 - 현재: 루터대학교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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