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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 성서적 거룩을 통한 감리교회 개혁과 부흥
강성도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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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1월 12일 (목) 21:39:35
최종편집 : 2017년 01월 13일 (금) 07:08:08 [조회수 : 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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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 성서적 거룩을 통한 감리교회 개혁과 부흥

 

강성도

 

   
 

1. 마틴 루터의 고발

 

마틴 루터가 내건 95조항은 종교개혁의 불씨였다. 95개 조항에서, 루터는 그 당시 종교적 관행의 근본 폐부를 찔렀다. 면죄부 판매에 대한 칼끝은, 교권의 무지와 독선에 대해, 수사가 만들어 낸 판매 전략의 허구를 파헤쳤다. 루터에게 있어 죄 사함을 받는 길은, ‘죽는 날까지 끊임없는 참회’ 밖에 없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에 의존되어 있다. 면죄부를 사기 보다는 ‘가족을 위한 생필품을 사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라 믿었다. 베드로 성당을 지으려면, 교황은 ‘자기 주머니의 돈’을 털어서 짓고, 그 돈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질타했다. 루터는 여기서 한 가지 신학적 논쟁을 제기하는데, 이것이 결정적이다. 곧, ‘교황은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한 것 외에는 누구의 죄도 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황이 남의 죄를 사해줄 수도 없고, 사해주려고 해서도 안 된다. 만일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고 죄 사함을 하거나 면죄부를 파는 것은 신성모독이여,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 된다. 루터는 교황권을 보통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며, 죄 사함의 권한을 하나님에게 국한시켰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면죄부를 사서 죄 사면받기를 원하느냐? 돈으로 구원 받기 원하느냐? 쉽게 편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참회하고 돌이켜 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끊임없는 참회’와 ‘죄 사함 받음의 감격’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 감격이 사람을 살아있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한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며, 돈으로 면죄부를 사서라도 죄를 탕감 받으려고 한다. 또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돈으로 예배당을 치장하고, 자기 영혼을 치장하려 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일이 죄일 수밖에 없다. 루터가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본 것은 탁월한 해석이다.

루터 당시 교황권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일개 영주의 보호를 받고 있던, 루터의 신학적 사색과 지적을 술주정뱅이의 넋두리 정도로 얕보았다. 교황의 권위가 정말 사죄의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믿는 대중들도 있었다. 루터의 도전은 파격적이고, 충격이었다. 루터는 핵심을 찔렀다. “교황은 자기 죄 외에는 누구의 죄도 참회시킬 수 없다!” “교황이여! 그대 자신의 죄나 참회하시오!” 라고 칼끝을 겨누었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교황이 베드로 성당을 지으려는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라고 정곡을 찔렀다. 루터의 칼은 교황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연약하고 무지하고 간교한(?) 대중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서도 날을 세웠다. 대중은 무서웠고, 두려웠고, 무지했다. 교권이 부모형제와 친척들을 연옥에서도 건질 수 있다고 외칠 때, 쉽게 타협하고 말았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서도, 자녀들을 위한 생활비를 제대로 쓰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구원의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루터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오늘 우리 시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관행과 믿음이 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며, 돈이 많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과연 돈이 많아지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돈으로 평안을 살 수 있고, 또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을까? 돈이 차고 넘치면 무병장수할 수 있을까?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좋은 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직장을 포기하고,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자녀출산을 포기한다고 한다. 포기하고, 억울하고, 불안하고, 분노하는 이유의 반 이상이 돈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만일, “돈 없이도 살 수 있다! 돈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돈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 마라! 돈이 많아진다고 더 평안을 누리거나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놓고 말하면서, ‘현대판 95개 조항’이라도 붙이려들면 여전히 술 주정뱅이정도로 여길지 모른다. 미친 자의 광기어린 푸념이라 귀 막을지도 모른다. 정말 돈이 있어야 더 행복해지고, 더 자유로워지고, 더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예수께서 생각하셨더라면 제자들에게 돈 버는 기술을 전수하신 후 아버지께 돌아가셨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교인을 늘리고, 더 많은 헌금을 거두고, 부목사와 전도사들을 부려서, 효율적인 교인 관리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셔야 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여기에 관한 노하우(know-how)를 전수해 주신 적이 없다. 대신 “사랑하라!” 가르치셨고, 온 몸으로 끝까지 사랑하셨다. “너희에게 내 평안을 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함이라!”와 같은 이야기들만 제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성서의 가르침과 교회의 관행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예수님의 가르침과 멀어졌는가? 예수가 하시지 않은 말씀과 전수해주지 않은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외친다면? 바울은 천사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갈 1) 이제 곁길로 뻗어난 가지의 뿌리를 찾아보자. 어떻게 안간힘을 쓰는 것이 다시금 바른 길을 찾는 것인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더듬어보자.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낡고 비뚤어진 집을 바로 세우고, 우리의 심장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담아보자. 예수를 닮은 자들이 늘어나 예수의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해지는 것이,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나고’(復活), ‘참으로 흥해지는 길’(福興)이 아닐까? 뒤쳐진 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있고, 어둡고 그늘진 곳에 빛이 비취고, 썩고 부패한 것들이 소금으로 다시 회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참된 부흥의 모습이 아닐까 그려본다.

 

2. 한국교회의 통속적인 구원관을 고발한다.

 

교황에게 면죄부 판매 대행권을 얻은 알브레히트는 수사 요한 테첼을 택해 이 일을 맡겼다. 장삿술이 뛰어났던 테첼은 판매를 늘리고, 대중들의 주머니를 쉽게 열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 귀에 솔깃하고 한 편으로 설득력도 있었다. 이 이야기 덕분에 면죄부 판매는 늘어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면죄부를 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가 지어낸 이 이야기가 교황의 얼굴과 가톨릭교회 전체를 피멍들게 만들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이야기, 곧 ‘연옥 우화’였다. 그대들이 죽은 영혼을 위하여 면죄부를 사면, 헌금 궤에 동전이 떨어지는 바로 그 때, 그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잘못을 바로 시정하기 보다는 루터를 술주정뱅이로 몰아간 교황의 자기 권력에 대한 과신이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혼돈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구원 우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 = 천당! [불신 = 지옥]’ 으로 축약되는 구원 이야기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구원 이해로 몰아가고, 구원을 죽은 다음에 가는 문제로 여기게 만들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이 땅의 문제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우리의 ‘고난의 행군’도 없다. 고난과 위로, 환란과 연단, 회개와 용서 속에 넘치는 영적 감격과 기쁨도 묻혀버렸다. 루터가 말한, ‘죽는 날까지 끊임없는 참회’의 과정이 빠져버리면, 숨결보다 가까운 하나님의 돌보심과 위로하심, 죄 사함의 기쁨도 맛보기 어렵다. 영적 각성을 통한 품성의 변화와 하나님과의 합일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현실적 성공을 구원의 징표로 제시했다. 이런 현세적인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장차 받을 영원한 구원의 보장으로 교리화 되었다. 대중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하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쉽고 편하게 믿음 생활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니, “참회의 고통”을 굳이 찾아서 할 필요가 없어졌다. 십자가 없는 부활과 구원은 풍요의 신 바알에게 안방을 내주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구원 우화는 대중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현실적 강점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고 그의 대속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해주면, 믿음 생활이 참 쉬워진다. 대중은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 믿음과 행위를 나누고, 누군가가 행위를 강조하면 인간의 자기 우상화이고 공로사상이라고 비판하며, ‘교리를 수호’하면 된다. 땀 흘리고, 힘들고 거친 일은 모두 면제된다. 사랑의 실천과 봉사, 나눔과 베풂이라는 신앙의 또 하나의 축, 곧 웨슬리가 말한 은총의 수단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 믿고,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 는 이야기 속에서는 성화도 강조되지 않는다.

사랑의 실천과 연습 없이, 끊임없는 참회 없이 성화가 가능한가? 보다 근본적으로, 사랑의 실천과 참회가 하나님이 친히 도와주시지 않으면 행할 수 있는 일인가? 교회로 일단 사람을 모아오려는 전도용, 초신자 중심의 설교는 은연중에 대중들의 현실적 이기심을 자극하고, 현실적 축복을 강조해 왔는지도 모른다. 지속적인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참회와 사랑의 실천을 생략해줌으로써, 은총을 부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맛보고 살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은 허물어졌다. 인간의 참회와 하나님의 무제약적 용서를 통한 긴밀한 관계의 회복, 그리고 죄인 위에 끊임없이 부어지는 은총(impartation)으로 인해 맛보는 새 생명과 기쁨은 오늘 이 자리에서는 맛보기 힘들어졌다. 죽은 다음으로 미루어졌고, 세속적인 욕망의 충족과 세속적인 문제 해결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말았다. 내 문제 해결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죽은 다음에 천국을 보장받기 위해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개인 중심적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타적 사랑의 실천은 약화되고, 신앙공동체는 자기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실천과 봉사와 헌신은 자기 교회를 위한 것으로 제한된다. 바깥을 향한 사랑의 실천 대신 내 교회 키우는데 몰두함으로써, 역작용이 파생하기도 한다. 좁은 공간에 함께 머물다보니 서로의 결점이 눈에 잘 띄고, 한 번 갈등과 분쟁이 생기면 화해하고 풀기보다는 교회 분열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단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교인과 교인 사이에도 해소되지 않은 갈등과 반목이 적지 않다. 상당수의 교회 분쟁의 원인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세상을 향해 나누고 퍼주는 사랑의 실천이 빠져버린, ‘자기중심적’, ‘저 세상적’ 구원 이해와 이어져 있다.

이웃 사랑과 대사회적 헌신이 빠져버린 ‘예수=천당’ 구원 이야기는, 물질적 번영신학과 교회 성장신학으로 뒷받침된다.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새 집을 짓기가 쉽지 않는, 그 나름대로 튼튼한 토대를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 세력과 영향력이 남아있다. 미국에서 1960년 대 후반부터 ‘번영신학’이라고도 불리던 ‘물질적 축복의 복음(gospel of material blessing)’과 ‘적극적 사유(positive thinking)’는 한국에서는 조용기 목사와 그의 동료 목회자들에 의해 보급되었다. 인천 숭의감리교회 전임자 이호문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십여 명의 초교파 부흥사들이 매주 모여, 교회 성장 노하우와 교회 관리 기법을 서로 나누었다고 한다. 아울러, 다수의 부흥사들이 특정 지역 교회를 함께 방문하여, 설교, 기도, 안수기도, 축도 등을 함께 해주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사이에 신학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단순화된 복음의 이야기’를 함께 전국적으로 퍼뜨렸다는 점이다. 교회 건축이 한창이던 1980년 대, 교파를 넘어서 여러 교회의 부흥 강사로 청빙되어, ‘물질적 축복’과 ‘예수 천당’ 이야기를 단 시간 내에 퍼뜨렸다. 이들을 통해 ‘번영신학과’ ‘축복신앙’이 획일화되고, 교회 성장 이론까지 접목되어 우리나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호문목사의 경우 부흥사 학교를 설립하고 부흥사들을 물질적 축복의 신학과 교회성장신학으로 교육시키고, 부흥회 인도 노하우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한국 교회에 아직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교회 성장과 개인의 성공, 현실적 축복 신앙의 뿌리에는, 조용기목사의 ‘삼박자 축복’과 ‘적극적 신앙’이 있다. 그의 신학은 한 마디로 ‘돈 복음’이라 불러도 지나친 말이 아닌 듯싶다. 먼저 삼박자 축복은, (그 당시로는) 죽을 병(이었던 폐결핵)에 걸렸던 조용기목사가 기도 가운데 기적적으로 치유 받음으로써 시작된 우화적 교리이다. ‘어제나 내일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의 하나님께서’ 내 영혼의 문제뿐만 아니라 육신의 문제도 ‘좋게’ 해결해 주신다고 믿었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치유해주신 이가 성령이라고 확신했다.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 목표와 자신이 일치됨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영혼이 잘된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래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신앙을 요구한다. 잘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겨냥한 – 시기적절한 - 물질적 신앙관이었다.

물론, 조용기목사의 체험 자체나, 신유 은사의 놀라움 또는 현실적 성취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자신의 체험을 너무나 쉽게 보편화/획일화시키고, 은혜주심의 원인과 결과를 단순/비약시킨다는 점이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기쁜 소식’이며, 예수의 제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먹을 것이 넘쳐나고, 너무 먹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하고, 호의호식하며 분에 넘치는 사치를 하기 위해 더 많은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이들을 만족시키려고 ‘축복을 비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적게 먹고, 근검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복음이다. 뿐만 아니라, 삼박자축복 이야기는 조용기목사의 개인적 체험을 복제 또는, 확대 재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성령 체험을 하는 순간의 자신의 감정, 내면의 변화 등 주관적 체험을 분석하여, “좋으신 하나님이 좋은 것 주신다!”라는 이야기로 단순화시켰다. 이 이야기 속에 모든 과정을 녹여버리고,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은혜 체험을 한 가지 모습으로 획일화시켜버렸다. 단순화된 그의 설명은, 모든 은사의 체험은 결국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으로 환원되고 만다. 잠시 환란도 있고, 고통도 있지만 “좋은 것 주시기 위함이니, 구체적으로 소원하고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떼쓰는 기도’와 ‘바라봄의 법칙’은 거의 주술에 가까운 우화적 설명이다. 줄이자면, ‘내가 빌면 하나님은 반드시 [결국에는] 좋은 것 주신다!’고 복음을 단순화시켜 버렸다. 주님을 따를 때 지고 갈 나의 십자가도, 남을 위한 헌신과 고난도 없다. 바울이 말한 “내 동족을 위해 부어드리는 제물이 될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이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진다”는 말도 없다. 반쪽 복음도 아니다.

자신의 체험과 단순화된 설명을 ‘순 복음’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성서에 기록된 여기저기 내용을 과감하게 짜깁기하여, 논증 자료(proof text)로 사용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조목사는 성공과 축복을 향한 자기 암시와 반복 학습을 강조하고, 인간적/주관적 확신을 지나칠 정도로 요구한다. 치유의 주체이신 성령과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목적과 열매에 대해서는 깊이 고려하지 않는다. 믿는 자를 실패하게 하고 위축시키며, 불안과 두려움을 주며, 자기 욕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유혹과 장난으로 처리해버린다. 고난과 시련을 통한 연단과 품격의 변화, 성화 등은 그의 주관심사가 아니다. 토마스 머튼은, 하나님께서 [종양과 싸우는 자기 아버지 안에] 계시면서, 고통의 뜻을 깨닫고, 그 고통이 선이 되도록 이끄시어 영혼을 완성시킬 빛을 주신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병이, 병이 주는 고통이 인간의 영혼을 완성시키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모두가 질병 귀신의 장난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일이다.

병이 나았다는 사실이나 물질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이,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징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이 함께 계시어 꼭 병을 낫게 해주시지는 것만은 아니다. 바울처럼 세 번씩이나 간구해도, “네가 약할 때 그때 내가 강하다!”라고 대답하시기도 한다. 바울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환란과 고난, 굶주림과 헐벗음을 경험한 사람이다. 때로 성령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시험을 받게 하기도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십자가에 달리는 아픔도 허락하신다. 조용기 목사는, 이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국한시키며, 그가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믿는 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일도, 주님처럼 남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도 없어졌다. 과연 그의 주장이 맞을까? 바울은, 봉사와 섬김 그리고 헌신의 수고 역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교회와 공동체에 덕을 세우며 제대로 행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소명 완수를 위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수적이다.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인격이시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살아계신 현존이다. 그가 함께 계시어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사랑을, 믿음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그리고 소망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소망을 주신다. 하지만 때로 안 주실 수도 있다. 철저히 그분의 자유이며 그의 주권 하에 있다. 아무리 소리 지르고 떼쓰고 매달려도, 필요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

조용기목사가 말하는 ‘삼박자 축복’은 성령의 현존 대신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표지들을 더 강조한다. 성령은 마치 내 기도에 따라 이 땅 위에서 응답되어지는 수단이나 능력처럼 이해된다. 치유와 축마 그리고 성공 기원의 주술로 순 복음이 변질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조목사는, 내가 꼭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달라고 떼쓰고 매달리라!’고 가르쳤다. 자기 체험을 극대화/단순화시켰다.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적용될 수 없는, 지나친 주관주의적 체험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때, 그의 성공(?)을 모방하려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능력받기 위해 밥을 굶고 소리 지르며 기도했다. “능력을 달라!”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조용기목사의 영향은, 교파를 초월해서,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직간접의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축복 우화가 주는 달콤한 유혹과 쉽고 편하게 신앙생활하려는 대중적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자신의 현실적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어리석은 우화의 도취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어려웠던 시절,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이들이 있었고, 병원비가 없어 병원 문턱에서 죽은 아이를 들쳐 엎고 뒤돌아가야 했었다. 아직도 적지 않은 극빈층이 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절대빈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지 않았는가? 최소한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최소한의 사회 보장 제도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조용기 목사가 병마에 시달리던 1960년대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빈곤 때문에, 병원을 가지 못해서, 떼를 쓰며 기도하던 시대는 저무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가지려는 자들의 물질적 욕망을 교회가 채워주려고 부추긴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사술이다. 단 한 영혼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게 하려는 열정으로 타오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성장 기술을 적용하여 교회를 키우는 것은, 하늘나라 확장이 아닐 수도 있다. 수평이동과 과잉 경쟁이 그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도 아니고, 많이 모아서 이 땅에서 이루는 성공도 아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은 그렇지 않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왕으로 세우려했을 때, 홀로 기도하러 가셨다. 그리고 또 다른 마을로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말씀을 가르치려 다니셨다.

 

3. 삼박자 축복과 ‘참(純) 복음’에 대한 성서적 점검: 요한 3서 - 사랑하는 자여!

 

a)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조용기목사가 자기 체험을 뒷받침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성경의 구절들이 몇 있다. 유행의 파도는 지나갔지만, 아직도 한국교회는 그의 열광적인 설교와 단순화된 우화 속에서 ‘성공’과 ‘번영’, 그리고 ‘부흥’을 여전히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차분하게 신학적 점검을 통해 해방의 길을 찾아보자. 참된 부흥을 위해서는 거짓 부흥을 넘어서야 한다. 대안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과거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보자.

누가복음 11장 5절부터 13절의 내용이다. 조목사는, “구하면 얻고, 찾으면 찾을 수 있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가르침 속에서 신앙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고, 내가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는 세상이라면 절대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좋으신 하나님’께 떼를 쓰고 매달려서 구하라!”고 가르쳤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한밤중에 찾아가서 빵을 빌려달라고 하면 들어주지 않지만, 떼를 쓰고 매달려서 조르기 시작하면 마침내 ‘응답해준다! 는 것이다.(눅11:7-8) “‘좋으신 하나님’께서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눅11:11) 는 말도 덧붙인다.

모두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얼핏 보면 성경대로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론이 다르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생선을 달라고 하고 달걀을 달라고 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되어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조용기목사는 ‘좋은 것’을 세속적인 것,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보상으로 환원시켰다. 여기에 교회 성장학파의 교회 성장이론이 가미되면, 교회의 부흥은 ‘좋으신 하나님’께서 고난과 시련을 ‘적극적인 신앙’으로 이겨낸 교회에 주시는 값진 선물로 탈바꿈한다. 교회 성장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아직 좋은 것을 받지 못했으며, 제대로 부르짖고 떼를 쓰지 않은 게으른(?) 목회자들이 되고 만다. 교회 성장과 부흥을 ‘떼쓰고 매달려 얻는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적 욕심의 투사가 아닐까? 우려된다. 성령을 왜 주신다고 약속했는지에 대해 설명도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하나의 본질적인 문제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점이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만큼 교인을 모아주실 것이다. 사람이 원하는 모양을 미리 그려놓고, 그대로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인간적인 욕심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친히 우리의 영과 육과 혼이 완전히 거룩해지도록 일하고 계신다. 마찬가지로, 신앙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거룩한 성도’를 훈련시키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인의 머리수를 세고, 교인의 헌금을 계수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성공과 부흥을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배 출석 인원과 헌금 통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회복한 거룩한 성도’를 재는 자가 될 수 있을까? 특정 성도가 얼마나 온전한 ‘성서적 거룩’(biblical holiness)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성도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헌신하고 있는지? 잴 수 없다. 교회 성장과 축복 신앙은 이 모든 거룩한 것을 수(number)로 측량하려고 들다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거룩(holiness)이라는 신앙의 푯대를 놓치고 말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진리로 거룩해지고,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를 이루는 신앙의 최종 목표를 놓친 채, 교회 부흥과 잘 살기를 가르쳐왔다.

이제 정리해보자! 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신 후,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을까? 바울 서신과 공관복음을 모두 섭렵한 요한복음기자는 요한복음 16장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해주신다고 보충한다. 성령이 오시는 이유는, 참으로 죄를 어떻게 극복하여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의의 심판을 받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시며,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이라 한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1장의 결론은, ‘참된 복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들이(눅11:28),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눅11:34),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으로 귀결된다.(눅11:42) 귀신을 내쫓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령을 받아 모셔 들인 다음 (믿는 자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고, 품성이 거룩해져야 가능하다. 소위 조용기목사가 주장한 ‘순복음 교리’는 바로 이 점을 구부렸다. 성령을 주심은, 가난귀신, 질병귀신을 내쫓고, 물질문제, 질병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고 가르쳤다. 성령은 문제 해결의 하나님이 되고 만 느낌이다. 사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어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인생은 문제투성이다. 문제 해결이 인생의 근원적 해결이 될 수 없다. 문제를 통해 인간을 연단시키고, 인간의 품성을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품성으로 변화시켜가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물질의 축복이나 건강의 축복이 인생과 믿음 생활의 참된 성공도, 하나님의 뜻의 성취도 아니다. 이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b) 요한3서: 네 영혼이 잘 됨과 같이

 

조용기목사가 ‘삼박자 축복’을 이끌어 낸, 요한3서를 좀 더 들여다보자! 그의 성서 이해가 얼마나 편향되었는지? 얼마나 주관적인 이해인지? 밝혀보자. 삼박자 축복의 요절이라고 말하는 요한3서 2절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구하노라!), 전체가 1장으로 구성된 전체 편지의 한 구절이다. 다시 말해, 요한3서는, (요한이라 불리는) 장로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글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단락 첫 부분이 모두 “사랑하는 이여!” 로 시작된다.

제1단락: “사랑하는 이여! ‘신도들 몇이 와서’ 가이오 당신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그대의 진실성을 증언해’주어서 매우 기뻤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나에게는 없다”고 구성되었다. 글쓴이에게 기쁨을 주는 가이오를 칭찬 격려하며, 그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이다.

제2단락: 사랑하는 이여! “낯선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충성스럽게 하고”있음을 “회중 앞에서 그대의 사랑을 증언”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돌보아주어야 마땅”하며, “그래야만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2단락 후반부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가 하는 일들을 들추어내겠다. 그는 신도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까지 방해하고,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고 있다”(10절) 는 사실 보고로 구성되어 있다.

제3단락: 사랑하는 이여! (11절)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시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고, 또 바로 그 진실한 삶으로 그러한 평을” 받았다. “[가이오 당신은] 우리의 증언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를 대조하면서, 가이오의 선한 행위를 격려하고 계속해서 낯선 이들, 순회전도자들을 잘 섬기라고 격려하는 글이다.

 

제1단락,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제2절은 인사와 기원에 해당한다. 이 구절에서 삼박자 축복을 끌어낸 것은 참으로 독창적이다. 하지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건강해지는 것이 믿음의 선물이요, 믿음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간 느낌이다. 성경 구절 하나에서, 복음 전체의 혼과 정수를 찾았다는 주장은 과격해 보인다. 본문 전체와의 관계나 그 구절의 위치와 맥락을 고찰하지 않은 채, 한 구절을 자신의 체험에 맞게 확대시킨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처럼 보인다.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낯선 자들을 잘 섬기고, 디오드레베와 같은 인간이 되지 말고, 데메드리오 같이 행하라!’라는 아주 간단한 권면이다. 초대교회의 가장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목회 서신이다. 남을 잘 섬기고, 낯선 순회전도자들을 박해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이 실천적 권면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변질된 삼박자 축복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당신이 정말 믿음이 있다면, 낯선 이들을 잘 돌보고 으뜸이 되려고 악한 일도 서슴지 않는 못된 인간이 되지 말라! 는 것이 전체의 핵심이다. 삼박자 축복에는 남에 대한 배려나 공동체를 위한 헌신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요한3서의 초점과 전혀 다르다.

사실, 영혼이 잘되는 것과 범사가 잘되고 건강해지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영혼이 가장 맑고 온전하신 예수께서는 모욕당하고 수치를 받으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다. 바울은 병약했으며, 누구보다 많은 매를 맞고, 굶주리고 헐벗고, 수없이 옥에 갇혔다. 영혼이 잘되어도, 주를 위한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다. 거룩을 향한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초기 조선선교사들 가운데는 핍박받으면서도 의술을 펼치고 복음을 전하다가 34살의 나이에 병으로 일찍 죽은 이가 있다. 더욱 딱한 것은 남편을 잃고 유복자를 낳은 후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죽은 그 땅으로 다시 와서 헌신하다가 어린 딸을 병으로 잃는 슬픔을 겪기도 한 이가 있다. 그 아들은 토마스 하디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아버지와 동생을 데려간 조선 땅에서 의술을 펼치고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어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성경 번역을 위해 불철주야로 다니다가, 파선을 당해 순직하신 이들도 있다. 한결같이 아픔을 겪고 모진 고생을 감내하였다. 영혼이 아무리 잘 되어도, 건강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이 자동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믿음이, 떼쓰는 기도가 잘 먹고 잘 입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성서본문을 이토록 심각하게 훼손하여 한 개인의 체험을 절대화시킨 성서 모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믿는 성서문자주의자들이, 이토록 심각하게 성경의 의미와 내용을 비튼다면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만다. 삼박자 축복 우화는 십자가 신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삼박자 축복은 성경의 증언과 거리가 너무 멀다. 성서적이지 않다.

 

c) 떼쓰는 기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신다. 중심을 달아보신다. 우리 바깥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얼마나 정결한지, 얼마나 갈구하고 있는지? 내가 나를 잘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는 나를 아신다. 내게 당장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아신다. 그리고 미래를 가늠했을 때, 무엇이 우선인지 그는 아신다. 나의 좁은 마음과 좁은 눈은 그 신비와 미래적 변수를 잘 헤아릴 수 없지만 성령은 아신다. 성령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며, 우리의 심령이 맑아지게 도우시며,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깨달아 알게 해주신다. 보혜사의 감화 감동을 받은 신자들은, 굳건한 믿음과 기쁜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르게 된다.

소리소리 지르며, 밥을 굶으며 기도하면서 체험하게 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자기 포기이다. 내려놓음이다.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하면서 얼마나 가식된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스스로 볼 때가 있다. 입만 겉돌고, 마음은 딴 곳에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말 절박해서 기도를 드리다가 이 세상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따로 있다고 깨달을 때도 있다.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만 붙잡고 감격에 차 찬송 드리기도 한다. 통성기도의 위력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 나를 꺾고, 나를 내려놓고, 내 생각과 내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절박한 세상 문제를 가지고 찾아왔다가, 그 모든 것을 지푸라기처럼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떠올라, 나를 둘러보게 된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새롭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철저히 항복하고 하나님만을 다시 붙드는 새로운 경험을 한다. [세속적인 문제 해결을] 간구하러 왔다가, “하나님 사랑합니다!” 또는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하는 사랑의 고백과 돌이킴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생선과 달걀 대신에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깨닫게 되는 은혜 사건이다. 해서, 믿는 자들의 이기심을 부추겨 기도하게 이끌어주고, 기도 속에서 이러한 버림과 내려놓음을 체험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삼는다고 강변할 수 있다. “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거나, “열매를 보아라!”라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르짖는 기도를 ‘성령의 인도’를 받는 방편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작용이 너무 많다. 철저히 항복하고 하나님의 사랑만 붙든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삼박자 축복 우화로 재해석해버리기 때문이다. “기도원에서 내려오니 문제가 해결되었다!”라고 간증해버린다면, 품성의 변화까지 이를 수 없다. 거룩을 향해 나가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현실의 축복에 멈추고 만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며 교제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룩을 이루시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의 하나 됨을 이루신다. 떼쓰는 기도를 강조하다보면, 생활 한가운데서 맛보고 만날 수 있는 성령의 임재를 제한할 수 있다. 조용히 앉아 있는 것도 기도이며, 침묵하는 것도 높은 수준의 기도이다. 찬송도 기도며, 노동도 기도이다. 일하면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낄 수도 있다. 별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조용히 독서하며,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을 느낄 수도 있다. 봉사와 실천을 통해, 가난한 이웃과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손을 움직이며 하나 되어 함께 움직이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없이 체험할 수 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익혀가도록 이끌어 가시기도 한다. 삼박자 축복 우화와 구체적으로 매달리며 떼를 쓰라는 기도는, 성령께서 이렇듯 다양하고 풍성하게 우리를 앞서서 인도하시고 또 우리 내면에서 친히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어색하고 생소한 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조용기목사의 삼박자 축복과 그가 말했던 성공 신화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선취적으로 약속하셨던 거룩을 지향할 수 있다. 가난과 질병 속에서도 감사와 겸손을 배우고, 핍박과 수모 당함 속에서도 오래 참음과 온유라는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이 믿는 자 속에서 이루신 진리(logos)의 화육이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일이다. 이 품성으로 덧입는 것이 참 생명의 길이며, 참된 부흥이 아니겠는가?

 

4. 한국 사회의 배금사상을 고발한다.

 

중세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면죄부] 죄의 사면’과 ‘참회의 면죄’사이의 긴장과 갈등이었다. 대중은 돈으로 면죄를 얻고자 했다.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유혹했다. 유혹에 넘어간 대중은 이미 죽은 부모나 형제자매들의 죄 문제마저 ‘오늘의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해결해 줄 수 없는 인간의 약속에 낚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권의 힘에 타협하고, 참회의 고통과 긴 과정을 생략하고, 쉽고 편하게 죄 사함을 받고 천국 보장을 받고 싶었다. 은총으로 거듭나고, 죽는 날까지 끈질기게 참회해야 하는 수고를 피하고 싶었다. 물론 인간의 연약함과 쉽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오용한 교권과 교권의 하수인이 더 악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이론을 만들어 유혹을 했더라도, 쉽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 ‘죽기까지 참회해야 하는 연단’을 피하려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낚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돈이 갑질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갑질의 횡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돈의 위력에 눌려 살고 있다. 모두가 돈 벌고 싶어 한다. 돈이 많아지고 많이 쌓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세상인심은 지갑에 돈이 없으면 기가죽고, 돈이 두둑하면 어깨가 펴진다. ‘교회마저 그렇게 가르쳐온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가 든다. [물질적 축복과 성공 교리에 물든 이들이] 여전히 돈 축복을 믿음의 산물이요, 축복의 징표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믿는 자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 목회자 받들기를 하나님처럼 받들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지? 초기 선교사들에게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어 가난 속에서도 교인들을 섬기던 종의 모습은 이제 희미해진 것이 아닌지? 예수의 향기 대신 세련된 CEO의 품격과 행정 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과연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돈이 영적 기쁨과 즐거움도 줄 수 있나?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고, 돈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교인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늘어나야 하지 않을까? 이들의 삶에 매료되고 영향 받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헌신이 우리나라를 변화시켜야 되지 않을까? 이제,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이해부터 새롭게 하고, 돈으로부터 일정부분 자유로워지는 것이 절박하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요한 웨슬리가 돈에 대해서 오늘 우리 목회자들처럼 가르치지 않았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부흥과 성장, 물질적 성공과 축복을 사모하며,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있다. 조금만 더 참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고 설교한다. 그리고 기도 끝은 언제부터인가, “축원합니다.” 또는 “기도합니다.” 대신 “축복합니다!”라고 끝맺는 이들도 있다. 중보기도는 여전히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기원해준다.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의 바탕 밑에 돈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돈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고, 그 앞에서 굽실되면, 당연히 갑질하게 된다. 갑질을 해야 사람 대접받는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풀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아테네의 현자 디오게네스를 찾아와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했을 때, 디오게네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태양이 필요하다. 옆으로 좀 비켜주라!” 권력과 무력의 힘 앞에서 그는 태연했다. 칼의 힘을 무력화시켰다. 따사로운 햇빛이 주는 행복과 자유가 더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력은 쓰레기와 다르지 않다. 돈도 마찬가지이다. 돈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치워야할 쓰레기와 다를 바 없다. 일체자족을 배운 바울은 이전에 좋던 모든 것을 분토처럼 여겼다. 빈에 처해도, 부에 처해도,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그의 영이 자족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 혼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아쉽다.

잠시 우리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조선 초기 기독교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꿈꾸고 교회를 중심으로 그 힘을 모으려고 했을 때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것’이었다. 서양식 교육을 받아 개인의 입신양명을 구한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신앙에 붙들린 후에는 대부분 시대의 선각자들이 되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윤치호, 남궁 억, 이준, 이승만 한결 같았다. 신앙의 목표가 나 하나 잘 살자는 것은 아니었다. 민족을 계몽시키고, 민족의 힘을 키워, 일제의 압제와 수탈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회개는 국채보상운동으로 이어졌고, 날 연보는 결국 농촌계몽운동으로 번져나갔다. 내 영혼 구원,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것은 뒷전이었다. 한때 그랬었다. 1930년대 일제의 강압이 극에 달했을 때, 이용도목사에 의해 불붙은 조선의 부흥운동은 탈 현세적이고, 영원한 저 세상을 지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청빈과 고난, 슬픔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영적 순결이 저 세상을 보장해준다고 외쳤다. 그는 현실적 축복이나 번영을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믿는 자들의 겸비와 순결한 신앙을 강조했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축복 신앙이 기독교의 궁극적인 모습이거나 유일한 얼굴은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한 시대의 유물이며, 이제는 벗어나야 하는 옛 얼굴일 뿐이다.

특히 이승만의 경우, 한성감옥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미국식 민주주의 통해 과거를 청산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은 저평가되고 있지만, 그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미국의 발전된 문명을 도입하고 싶어 했고,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나라의 발전과 개인의 자유가 함께 가는 길이었지만, 미국식 자본주의, 미국식 교육, 미국식 제도 속에는 ‘미국식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은 것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이 개인주의가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과 민족의식을 갉아먹는 좀 벌레였다. 아무튼 이때까지만 해도, 내 구원을 위해 예수를 영접하고, 죽은 다음에 천당 가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조국 근대화의 바람이 불고, 잘살아보세 운동은 민족 전체가 수천 년 가난을 벗어나보자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힘은 지대했고, 자본주의 경쟁체재 속에서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가 나뉘고, 돈을 모은 자와 돈을 모으지 못한 자들이 갈라졌다. 문제는 성공과 부의 축적이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권력형 부정축재, 정경유착, 땅 투기, 부정부패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는 ‘불신’과 ‘불만’이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돈의 위력이 이렇게 과대평가된 적이 우리 사회에 없었다. 졸부를 깔보고, 딸깍발이 정신과 청빈을 선비의 기개로 여기던 때도 있었다. 근자에 이르러, 물량주의 문화와 경제지상주의의 맘몬이 우리의 혼과 마음을 빼앗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없이도 살 수 있고, 더 가난해도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그 길을 우리 시대에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초대형교회가 되어야만 꼭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크기나 규모에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참 형제자매와 결속과 연대를 느낄 수는 없을까? 작은 미자립 교회에서는 영적 성숙을 도모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까?

우리가 묻는 질문에 대해 성실하고 건전한 대답을 성경 속에서, 우리 교회의 전통 속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돈을 넘어서는 길’, ‘돈이 갑 질하지 않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제안을 동의/수용하는 사회 분위기와 국민적 공감대가 조성되면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특히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를 하는 것을 깔보는 사회 풍토가 형성될 수 있다. 4-50년 전 동사무소와 파출소에서 보던 부정과 부패는 어느 정도 근절되지 않았는가? 피부에 와 닿는 청렴도는 많이 향상되었고, 앞으로 더욱 맑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필자는 바로 여기가 분기점이라고 믿는다. 그리되면 부자 스스로 세금을 내며 존경과 품위를 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 가지려 덤비지 않고, 오늘 곳간을 쌓아도 내일 하나님이 불러 가실 수 있다는 두려움이 저를 겸손하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했을 때,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청년도 힘들어하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부자가 돈을 내어 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강제적인 방식이 성공을 거둔 역사의 사례도 없다. 또 다른 권력층과 특권층을 낳았을 뿐이다. 먼저 돈을 최우선시 하는 물질 만능 주의로부터 벗어나고 다 함께 서로 나누며 사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빈부와 소득의 격차를 자발적으로 줄여나가는 협동과 연대의식이 향상되어야 한다. 이 공감대와 연대의식을 법제화시키고, 함께 동의하여 만든 법을 준수하면서 존경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부자를 유도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대안을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보려고 한다)

 

재벌이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60년대에는 땅 부자들을 조롱하는 심리적 가치관이 살아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이 가치관이 사라지고, 너도나도 위를 향해 달려갔고, 몇 사람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그 다음 세대가 직면한 경쟁은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의 경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려받은 것이 없는 자녀 세대들은 좌절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잘 나가던 아버지가 명퇴를 당하고 병을 얻어 누워있으니 나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 생계를 떠맡다보니 학원에 다닐 형편도, 스펙을 쌓을 엄두도 안 난다. 결국 경쟁에서 더 쳐질 수밖에 없다. 이들이 떠안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과 억울함은 분노와 불신으로 쌓이게 된다. 돈에 대한 가치관이 바꾸지 않고는 개인의 병리적 상태나 사회적 불신의 병도 치유되기 어렵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은 단지 사는 동안 관리만 할 뿐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내 것 인양 까불면 안 된다. 높이 쌓아 대를 물려 넘겨주고, 불평등한 경쟁구도를 만들면 악이다.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주인이 원하시는 때에 아낌없이 내려놓고, 퍼주고 나누어주면 그만이다. 각자 재능이 다르고, 품성도 차이가 난다. 어떤 이는 어떤 특정 분야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혼신을 다해 그 재능을 발휘하고, 뒤에서 도우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겸손이 받아들인다면 내 것 인양 갑질할 수가 없다. 소위 ‘하늘이 무섭지 않냐?’ 는 것이다. 워렌 버핏이 “부(wealth)는 스코어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최선을 다해 조사 연구한 후 적절한 곳에 투자하여, 자신의 예상이 적중한 경우 기대한 수익을 거두었느냐를 판정해주는 하나의 잣대일 뿐이라고 한다. 해서 부자는 더 많은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고, 더 벌은 것은 사회 공익사업을 위해 과감히 재투자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세금을 얼마 더 낸다고 해서 불평한 구조가 근본적으로 고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은 하루 24시간, 주 7일 일하고,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일주일에 5일만 일한다. 투자 수익이 노동 수익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돈을 귀하게 여기는 풍토에서는 투자 수익을 일정부분 보장해주고, 투자의 위험성을 최소화시켜주는 정책을 택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경쟁체재 하에서는, 돈이 돈을 벌고, 돈은 보호받게 되니, 결국 돈이 또다시 갑질을 할 수밖에 없다.

세금에 머물지 말고, 신학적으로 좀 더 밀어 붙어야 한다. 돈은 최선을 다해 산 것에 대한 표지일 뿐 포상이 아니다. 마치 아마추어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경기에 임해 일등, 이등, 삼등을 하면, 도금한 금, 은, 동 메달을 준다. 시장 가격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집에 가지고 가서 매달아 놓고, 스스로를 대견해 한다. 이것이 다른 삶의 분야에서도 스스로 최선을 다하게 하는 채찍이 된다. 최선을 다한 표지이지, 돈으로 가격을 매기거나 부자가 되게 해주지는 않았다. 재삼 강조하지만, 돈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정립이 필요하다. 성경은 ‘착하고 충성된 종’에 대해 설명해준다. 각기 다른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각자 착하고 충성스럽게 일한 표지일 뿐, 달란트는 양에 불문하고 자기 소유가 아니다. 혼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가 주신 소명을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이문을 남긴 표지일 뿐 자신의 것이 아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나. 열 달란트 맡은 자나 착하고 충성되게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면 된다. 어떤 이는 돈 버는 일에, 어떤 이는 예술 하는 일에, 어떤 이는 정치하는 일에, 어떤 이는 목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이문을 남기면 된다. 하지만 자기 소유는 아니다.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한 이에게 또 다른 일을 맡기신다. 하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일도 군림하는 일이 아니라, 남의 발을 씻어주는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일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본이 그렇다. 하나님의 통치는 군림이나 권위로 짓누르는 일이 아니라. 섬기는 일이며,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시는 사랑의 통치이다.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에이전트로서 한 마을을 다스리는 종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지는 포상은 돈과 권력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주고, 하나님의 품성을 심어주는(impartation), 곧 거룩함에 이르게 하심이다. 웨슬리는 이 거룩함에 이르게 하심을 성화의 은총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 얻을 수 있는 상급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고 갑 질하고, 초대형 교회를 이루어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일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셨던 모습은, 겸손의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사람들을 고치고 가르치고 기도해주던 충성된 종이었다. 그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며, 성심으로 섬기셨다. 그 분의 형상을 회복하고,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형상과 품성으로 살아간다면,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보상을 얻은 것이라 믿는다. 주님의 품성을 닮아가고, 주님의 형상을 회복해나가는 것이 참된 보상이다.

성서의 예를 살피면, 바울 서신이 회람되고, 공관복음서가 읽혀진 다음 요한복음은 기독교공동체의 가치와 이상을 담으려고 애썼다. 요한복음 기자에 의하면, 17장에 예수의 유언이며 중보기도가 나온다. 핵심은, 택하신 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시고(요17:17/19),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이듯, 저들도 아버지 안에서 하나 되기를 구하신다.(요17:21) 예수의 마지막 기도요 간구이다. 역으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최상의 약속이요, 믿음의 이상(ideal)이다. 믿음의 목표요 푯대는, 거룩해지는 일이다. 하나님과 하나 될 만큼 거룩해지는 일이다. 이 거룩이 믿음의 최고의 보상이지 돈이 아니다. 돈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요17:11/15) 우리의 기쁨은 돈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산다. (요17:13) 교회성장도 아니다. 얼마나 많이 모았나? 얼마나 부흥시켰나? 도 아니다. 얼마나 ‘스스로 거룩해졌으며’, ‘성도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켰으며’, ‘사회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가고 있으며’, ‘이들 모두 함께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는 아버지 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느냐?’ 가 부흥의 척도요, 성공의 표준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모으고, 아무리 많은 교인을 모았어도, 성공한 것이 아니다. 참되게 흥한 것도 아니다. 거룩이 참된 보상이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궁극적인 기도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신앙의 목표라면? 이제 우리의 부흥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정립될 수 있다. 부흥을 재는 잣대도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다.

 

5. 종교개혁 500 주년을 즈음한 감리교 백만 구령 운동

 

생뚱맞다. 느닷없이 왜 이 이야기를 할까? 의아해 할 사람들이 있다. 감독회장께서 부흥사 출신이어서 부흥을 외치는 것일까?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흥운동은 현재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존립이 달린 생존의 문제이다. 이대로 가면 감리교단이 문 닫을지 모른다는 최고위직의 영적 판단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연합감리교회는 2050년이 되면 감독과 감독비서만 남을 것이라고 오래 전부 냉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지로 줄고 있고, 교회 통합과 교회 매각을 통해 은퇴목회자의 연금을 확보하고 있다. 단지 생존하며 시간을 벌고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연합감리교회 교인이 늘어났다는 보고는 지난 30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기적적으로 늘어나는 한인교회나 히스패닉 교회가 이따금 보고되긴 하지만 그 역시 전체 흐름에 비하면 잠시 멈추는 돌기 같은 것이다. 서서히 공룡은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대안이 없다.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보았고, 수많은 컨퍼런스와 테스크 포스를 가동하지만 여전히 줄고 있다. 대형교회를 담임한 목회자들은 분담금 문제로 힘겨워하고, 소형교회들은 1/2 time 으로, 1/4 time 으로 줄여가고 있다. 생활이 안 되니 조기 은퇴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백만 부흥 운동은 절박한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의 현실에 대한 대안 마련이라고 본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과 새로운 방향 설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이 운동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감독회장님의 개인적인 구호인가? 아니면 선거 공약인가? 아니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어 그를 붙드신 것인가? 모든 부흥 운동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사람일 수가 없다. 성령이 이끄시지 않는 부흥운동은 또 하나의 교회 성장 기법이거나 전도 전략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성령께서 먼저 시작하시고, 사람이 시중을 들고 붙들려서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시적인 구호에 그치거나, 보여주기 위한 캠페인으로 그칠 확률이 높다. 여기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기도로 준비하며, 성령께서 친히 앞서시기를 기다리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부흥운동은 한 사람이 붙들렸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랬고, 챨스 피니가 그랬다.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 그랬고, 원산 대부흥의 시작에 토마스 하디가 있었다. 한 사람이 붙들리면 그 불이 옆으로 퍼져나간다. 회개운동이 병행된다. 전도열이 붙고, 사람이 모인다. 그리고 모인 힘이 교회를 세우고, 주머니를 털어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운다. 우리가 단순히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면 21세기 한국 사회가 요청하는 개혁이 무엇인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어디로부터 어디로 움직이고 계신지? 누구를 택하셔서 사용하고 계신지? 그 흐름을 나름대로 가늠해보고 성실히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냄새나 요소가 개입하지 않은 ‘성령이 친히 하시는 부흥’이 되도록, 우리는 그의 길을 곧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a) 낙수 효과 방식

 

먼저 추진 방향부터 생각해보자.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표현하자면, 낙수효과와 분수효과 방식이 있다. 먼저 낙수 효과는 중대형 교회가 자체 성장을 주도하면서 숫자를 늘려가고 초 대형화시키는 방식이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재벌들이 더 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더 많은 돈을 벌게 자본과 기술을 집중하도록 협조하거나 방조하는 정책이다. 대형교회는 모든 면에서 소형교회보다 교회학교 체재, 인적 자원, 시설, 예배의 집중도, 음악이나 기타 퍼포먼스 등이 뛰어나다. 조직력도 뛰어나서, 속회별로, 대단위 전도에 집중하면, 최소 매주 3-4가정의 등록한다. 대부분의 신도시 또는 아파트단지 주변의 교회는 교인 숫자만큼 매해 새로운 신자들이 등록한다. 문제는 등록한 신자 수와 거의 비슷한 숫자가 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간다는 사실이다. 시설과 설교, 조직과 체재를 즐기고 나면 언제인지 모르는데, 저마다의 이유를 지닌 채 떠나간다. (초)대형교회의 뒷문을 막는 방안을 마련하고, 교회 내의 기존 조직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문객이나 초기 등록교인의 정착을 돕는다면, 자연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새롭게 등록한 이들과 기존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정착과 재훈련 과정만 강화시켜도 연말 결산 시 실질적인 교인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조직력과 자금력, 체재 관리 능력을 인정하여, 대형교회가 백만 구령 운동에 앞장서면, 단시간 내에 가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몇 가지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 첫째, 빈익빈 부익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수평 이동을 통해, 타 교단의 교인보다는 중소형 감리교회 교인이 대형교회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장로교인들은 웬만해서는 감리교회로 옮기지 않는다. 수평이동이 심화되면, 소형 교회는 이름만 남는 교회들이 생기고, 담임자들은 좌절하거나 목회를 그만 둘 가능성도 있다. 목회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 비근한 예로, 시장 통이나 골목길에 들어 온 대형 마켓이나 대형 빵집 체인점이 골목 안 마켓이나 빵집을 문 닫게 만든다. 규제만 가지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교파가 다른 교회들 사이에는 규제도 없다. 온누리 교회나 사랑의 교회 등 대형교회의 위성 성전이나, 지교회가 들어오면 주위 소형교회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새 신자를 전도해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소형교회의 교인을 흡수 통합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형교회가 전도에 최 일선에 서서 전 교인 전도운동을 벌리게 되면 결국 주위에 있는 중소형 감리교인들을 빨아들이는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대형교회와 소형교회는 경쟁이 안 된다. 대형교회 위주의 성장은, 소형교회의 동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형 교회가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대형교회의 교인수가 늘어나고 헌금이 늘어나면, 미자립 교회에 주던 선교 후원비를 더 늘려주는 추가 지원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형교회에서 늘어난 자기 교인들을 이웃에 위치한 미자립 감리교회에 떼어주겠는가? 꿈같은 이야기이다. 자기 교회 이름을 매단 저교회를 세우거나 다른 외지에 개척교회를 세우는 교회들이 주를 이룬다. 대형교회를 이루신 목회자들 중에는 선교전략, 설교 노하우, 그리고 교회 관리나 자료 등을 전수해주어서 자신의 성장을 복제하기를 기대하시는 분들도 있다.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상상 이상의 비용을 지출하여 심지어 왕복 비행기 표와 체류비까지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성공을 이루었던 시대와 사람이 다르다. 전하는 자와 배우러 온 자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능력(?)과 역량의 차이가 있다. 아무리 따라 해도 결코 될 수 없는 것을 전수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따라한다고 해서, 사람의 품성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품성이 있어야 그런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그런 기도생활을 하고, 그렇게 사람들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교회 위치나 공간과 규모도 상대적으로 그만해야 한다. 시장 통 한가운데 반 지하를 빌려하는 교회에 그런 햇빛이 잘 비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초대형 시설을 물려주고, 기술을 전수해준들, 심지어 인적 자원을 지원하고, 자금 지원까지 해주어도 대기업과 동일한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운영 경험도 없거니와 판매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자금 회전이 원활치 않을 때 버틸 신용도 없다. 누가 풋내기를 믿고 돈을 빌려주겠는가? 한 마디로, 낙수효과 이론은, 재벌 기업이 돈을 많이 벌어, 재벌 오너와 일가족, 그리고 임원들이 돈을 물 쓰듯이 써야 겨우 가뭄에 단비 한두 번 맛보는 정도다. 돈 많이 벌은 사람치고 절약하지 않는 사람 드물다. 이재용회장이 3,000원 미만의 립밤을 쓴다고 신문마다 장식된 적이 있지 않은가? 대형교회를 이루신 목회자들의 경영 마인드나 개인의 역량은 뛰어난 면이 많다. 열심과 집중도도 뛰어나다. 기업을 운영했더라도 적지 않은 규모의 성공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대형교회 중심의 부흥전략은 신앙의 기준을 대중화시키고, 완전성화의 이상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형교회를 하는 분들의 교인에 대한 애착은 남 다른 데가 있다. 나의 인간적인 체면이나 이웃 교회를 향한 목회 윤리보다는 교인을 붙드는 것이 먼저라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 분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 분들로부터 교인 하나 빼내온다는 것은 늑대 입에 물린 양을 빼내는 것보다 힘들 수도 있다. 그만큼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애착을 갖는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시도하는 것은, 교단 전체의 교인 수 통계를 뽑을 때 전년 대비 숫자가 늘어서, 마이너스 성장을 멈추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줄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중대형 교회 중심의 전도 전략을 맞추었을 때, 순회전도자의 생명을 건 헌신과 완전 성화를 이루었던 평신도 설교자들의 삶이 주는 참 믿음의 본은 점점 희미해졌다. 대신 존경받는 기독교인, 그 사회에서 명망 있는 기독교인에게 초점을 맞춘 설교가 보편화되고, 신앙의 목표도 하향 조정되었다. 완전성화를 대신해서 ‘존경받는 시민’으로 그 목표를 확 낮추어준 것이 잠깐 대중화하는 데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이었다. 진정한 신앙의 깊이를 추구하고, 더 깊은 헌신을 즐겨하는 이들을 - 완전 성화를 갈구하는 이들을 - 다른 교단에 빼앗기고 말았다. 최고위층의 정책적 실수가 감리교회 교세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대형교회가 선도하는 교회성장과 부흥 운동은, 소위 말하는 낙수효과 방식은, 위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정리해보자! “중소형교회와 대형교회가 같이 간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경쟁이 되지 않는 관계이다. 같이 붙여놓으면 처음에는 지원을 받은 소형교회가 빨리 출발할지 모른다. 하지만 금방 대형교회들은 진공청소기 전도전력과 매혹적인 프로그램과 시설들을 활용해서 어느새 소형교회의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수평이동을 시켜 놓을 수 있다. 대형교회 목회자나 교인들이 나서서 전도를 하고, 교인들을 불러 모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교육시설이 뛰어나고 폭넓은 교제를 하기 좋은 대형교회로 옮기는 발길을 막을 수도 없다. 익명성을 원하는 교인들은 자신이 다 들여다보이는 작은 교회를 피해 대형교회 뒷자리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많다. 결국 미자립교회는 문을 닫고, 실업자나 폐업자를 양산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형교회 역시 자신의 역량을 특성화시키지 못하고, 또다시 숫자 노름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초신자 교육만 되풀이하고, 성화와 성숙에 이르는 교육 및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넘치는 재원을 교인 관리에 소진할 가능성이 높다.

 

b) 분수효과 방식

 

그렇다면 분수효과는 무엇인가? 경제 이론에 있어서는 재벌의 규제와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자들, 상대적 빈곤층에 더 분배하여, 이들로 하여금 돈을 쓰게 하자는 이론이다. 법 제정이나 세금 확보, 무관세 지역으로의 탈출 방지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이 돈을 저소득층이나 실소비자에게 적절하게 분배하여 분수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방식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법제화는 국회에서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한 번 만들어진 법도, 몇 해 지나지 않아 새로운 법으로 눈을 가릴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재벌들은 현금을 쌓아놓고도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투자처를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한번 잘못 계발하면 수억 불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글로벌 시장 경제이다. 이제 그 규모가 나라 살림을 능가한다. 이들에게 경쟁력을 갖추도록 도우면서 적절한 이익을 내도록 법을 정비해주고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들어주어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며 건강한 기업윤리를 지킬 수 있도록 경영권을 확보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쉽지 않다. 국민연금으로 경영권 확보를 도와주다가 정치권의 공세에 횡령과 배임이라는 치욕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교단의 문제는 이미 한 고비 넘어섰다고 본다. 재벌이 경영권을 놓지 못하고, 돈을 쌓으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규모의 경쟁력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모은 것을 온갖 절세(?)와 편법을 통해서라도 주식 상장 등을 통해 내 자녀들에게 손자들에게 물려준다는 메리트가 있다. 하지만 우리 교단은 이것을 제도적으로 막아버렸다. 세습방지와 징검다리 세습까지 막아버렸다. 굳이 자녀들에게 물려주어 여생을 편히 보내려고 하거나, 원로 목사가 되어 끝까지 자녀들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실질적인 부담이 사라지게 되었다. 평등 분배를 위한 탁월한 법제정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철저히 다 함께 성심으로 지키느냐? 의 문제가 남았다. 그룹을 만들어 열 교회 스무 교회가 서로 돌리면 ‘눈 가리고 아웅!’이 될 수도 있다. 민초들이 부라린 눈으로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대형교회를 이루신 분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길은 감독이 되거나 감독회장이 되는 길, 그리고 어차피 곧 두고 떠날 것인데 한없이 퍼주고 나누어주는 것밖에 없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면, 목회에 바쳤던 혼과 열정을 후배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에 모인 돈이나 인적 자원을 공공 재산으로 여기고, 또 이를 교단의 전체 교회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목회를 하여 운 좋게 초대형교회를 이루면, 어차피 내 것이 아닌데, 있는 동안 넘치게 베풀다 가면 된다. 이 같은 공감대가 전 감리교회원들에게 확산된다면 초대형교회나 준 대형교회를 비방할 이유가 엷어진다. 맡은 달란트가 잠시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제안을 해보자! 입법회의에서 교인 이천 명 이상의 교회는 총회 부담금을 실 예산의 10%, 연회 10% 그리고 지방회 각 10%로 늘리고, 교세에 따라 적절히 그 비율을 정하게 하여, 500명 이상의 교회에는 년 5%로 늘리면 어떨까? 모아진 재원을 공동 재산의 개념으로 활용하여,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과 특수사역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홀 사모들의 생활비를 전액 보조할 수 있다면? 누가 반대하고 또 찬성할까? 과연 입법회의를 통과할 수 있을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깡통 교회, 감자탕 교회 같은 이름이 붙은 교회들 중에서는 더 많은 선교 후원을 위해 스스로 ‘조금 더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남을 위해 더 많은 재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실천적인 교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헌금을 자기 교회 성장이나 외관을 꾸미는 데는 인색하다. 이들이 평신도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가랑비의 옷 젖듯’ 한국 사회로 스며들고 있다. 만약 우리 교단의 대형교회들이 앞장서서, 연대성을 강화하고 미자립교회의 형제자매들과 목회 지망생이나 선교사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부담금을 증액할 수 있다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면, 다함께 할 일은 많고, 재원은 차고 넘칠 수 수 있다.

지방회 차원에서 지방 내 특수 목회 사역자, 예를 들어, 호스피스 사역, 홈리스 사역, 독거노인이나 청소년 가장 등을 위한 목회를 하는 이들을, 감리사 감독과 지휘 하에 재정 지원을 한다면? 일단 관리 감독은 현 제도 내에서도 가능하다. 지방 선교부총무와 평신도총무가 근접에서 격려하며, 사역의 실태를 관리할 수 있다. 이 같은 빈민층, 저소득층, 사회소외층을 위한 도시선교사의 파송과 헌신은 감리교의 대사회적 공신력을 높일 수 있다.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서 가장 절박한 심령들의 문제를 함께 아파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면, 감리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조선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을 떠올리면 쉽게 그 가능성을 연상할 수 있다. 가장 하층민을 찾아갔고, 이들을 교육시켜, 사회의 지도층이 되게 했다. 스크랜턴과 헐버트가 그랬고, 홀과 하디가 그랬다. 이들을 만난 주시경과 전덕기가 변했고, 이화학당의 첫 졸업생들이 변화되었다. 이들의 진급 문제는 대형교회 소속 전도사 또는 사회사업 전문 부목사로 소속시켜 진행해도 무방하다. NGO를 만들어 정부보조금을 얻어 3-4년에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만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관리는 절대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금전사고가 나서 우리의 브랜드 가치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연회 차원에서는 연회 소속 기관 목회자들에 대한 집중 관리와 지원, 그리고 연회 소속 홀 사모들을 전도부인으로 활용하는 문제이다. 기관 파송 목회자들을 최대한 늘려, 목회자 수급 문제를 해소하며, 동시에 이들 만의 교회를 창립하도록 도와준다면? 이들 사이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지역별로 탄생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각개 전투로 행해지던 기관 목회자들의 사역이 하나의 연회 체재 안에 흡수되면서 적절한 지원과 관리가 가능해 질 것으로 예상한다. 동시에 연급에 따라 최소한의 격차만을 인정한 채, 최저생활비를 일정하게 지급한다면, 연대의식을 배양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초중 고등학교 학원 사역 - 전문직 교사들을 안수주고 이들의 선교비를 일정기간 지원하는 제도 - 학원 내 폭력방지와 왕따 근절을 위해 안수 예정 전도사들의 청원 경찰 사역 - 이들에 대해 연회 차원에서 일정 보조금을 지불하여 현장에서 지킴이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사역, 그리고 캠퍼스 미니스트리 - 대학에 들어가 영어나 기타, 그리고 작은 소그룹 운동을 주도하면서 장기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역 등이 가능하다. 이것을 중소형 교회의 기능을 특성화하여 경쟁력을 키워주고, 초대형교회가 감히 할 수 없는 가장 밑바닥의 일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또 이들이 돌보는 청소년 또는 대학생들이, 십년 이십년 안에 우리 감리교회의 허리가 되고 중추가 될 수 있다. 홀 사모들 중에 전도부인을 선발하여 일정 보조금을 지불하여 양로병원의 사회복지사로 취직하도록 감독이 추천하고 신분을 보장해주는 방안도 있다. 이들이 몸으로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본을 보이는 동시에, 시설 내의 프로그램 중 일부를 맡아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율동도 하고, 요가도 가르치며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가까워진다면, 감리교회의 생명력과 감화력은 증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총회 차원의 자금은 해외 선교를 위해 집중하면 좋겠다. 미주지역과 중국을 필두로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모든 사역자들을 하나의 해외 연회로 묶어주는 일이다. 최소 한 선교지 이상을 돕는 모든 해외의 선교 지향적 교회들을 ‘해외 연회’로 묶어주고, 적절한 물질적 지원과 정보 및 자료 지원을 지속하는 일이다. 거대한 시장이다. 해외 시장을 놓치고 교회 성장이나 부흥을 논하는 것은 글로벌 시대에 맞지 않다. 왜 백만인가? 왜 우리는 UMC 보다 큰 교단이 되면 안 되는가? 영국감리교회보다 미국감리교회의 교세가 커졌었다. 앞으로는 한국의 감리교회와 중국의 감리교회가 그 보다 훨씬 크고 튼튼해질 수도 있다. 가장 한국적인 영성으로 성서적 거룩을 이루어내고, 하나님의 품성을 회복하는 영적 대각성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동시에 한국 내 이주 노동자들이나 이민자들에 대한 접근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될 수 있다. 지금까지 개교회 중심의 지원과 중복 지원은 자원을 낭비하고 감리교의 연대의식을 약화시켰다. 소위 보고서를 잘 써 보내는 선교사들만 물질적으로 넉넉한 후원을 즐겼다. 오지로 들어가 인터넷도, 우편도 잘 안 되는 이들은 정말 맨 땅에 헤딩하며 온 청춘을 바쳐 선교하고 있다. 이들의 헌신에 효율을 더해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사들 역시 대형교회에 연을 닿아, 줄서고. 학연과 그룹을 모아주는 하나의 파생상품 밖에 안 된다. 총회 차원의 총체적 관리와 선교비의 투명한 지원은 헌신하는 선교사들이 부를 축적하거나 소외된 고립감 때문에 스스로 소명의식이 약화되고 탈진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동시에 전 세계에 흩어진 미자립 이민교회를 물질적으로 보조하고 새로운 목회/신학 정보로 지원하여 실질적인 교회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이로써, 전체 감리교의 교세확장과 개개인의 성화를 돕도록 총체적인 지원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대형교회는 손해만 보는가? 아니다. 대형교회는 그 자리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찾아오는 고객들이 있다. 먼저 이들에 대한 철저한 관리 시스템과 교육 네트워크를 보강하고, 기존 시스템 안에 이들이 원만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 좋겠다.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서 헌신하는 감리교 사역자들과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대사회적 헌신을 통해 감리교회의 브랜드 가치에 매료된 사람들이 인근의 대형 감리교회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삼성에서 텔레비전과 신문에 삼성 휴대 전화기 선전만 열심히 해주면, 실제로는 전화기 대리점에서 삼성 전화기를 열심히 팔아준다. 이들이 적절한 이문을 얻고 장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만 적절히 제공하면, 삼성은 앉아서 돈을 번다.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감리교회에 대한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들만 이따금 열어준다면? 최전선의 헌신된 감리교 사역자들에게 감동된 예비 신자들이 바로 그 사역자들과 함께 고생하기 싫으면, 혹은 더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영성 교육을 받기를 원하면 대형교회를 찾을 수밖에 없다. 대형교회는 소형교회와 경쟁하여, 그들의 교인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복음 전도의 시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좋겠다. 초대형 재벌의 빵집이 골목 상권과 경쟁하여, 땅 집고 헤엄치려는 태도가 사회적 지탄을 받아, 결국은 재벌해체라는 구호 앞에 노출되기도 한다. 대형교회 역시 유사한 불신을 받을 수 있다. 성장하는 대형교회는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이웃의 중소형교회 교인마저 마치 청소기로 빨아들이듯 수평 이동을 유도한다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이들의 불신이 커지고, 불필요한 잡음에 휘둘린다면, 특정 교회뿐만 아니라 감리교 전체가 먹칠을 당할 수도 있다. 굳이 미자립 교회에서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을 나서서 받을 이유가 없다. 점잖게 되돌려 보내는 여유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대신 대형교회는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처럼 전문화되고, 최고의 영성 훈련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 완전성화를 향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단계별로 가르치는 종합훈련장이 되도록 지금보다 더욱 정예화 시키는 것이다. 청장년들을 목회지망생이나 예비 평신도 지도자로 헌신하도록 교육시킨다. 아울러 평신도 지도자들을 잘 양육시켜 완전성화를 체험하게 하고, 일정기간 훈련된 평신도들을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하거나, 도시 전문직 선교사로서 인생 후반전에 헌신할 수 있도록 이끌어갈 수 있다. 대형교회의 시설과 인적 자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마디로 신앙을 갖기로 한 이들에게 보다 좋은 교육시설을 활짝 개방하여 교회 문을 열어젖히고 최고의 기독교 교육을 제공하고 영성 훈련을 시키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더 깊은 영적 훈련을 사모하고, 완전성화를 꿈꾸는 감리교인들은 대형교회를 찾아와 전문적 훈련을 받고, 다시 한 번 세상으로 파송 받으면 된다. 그리되면 대형교회는 자연스레 성숙해지고, 성장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모든 면에서, 특히 물질적인 면에서 겸손의 본이 되면 좋겠다. 지금도 이미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하고 계시지만, 감리교의 헌신과 섬김, 그리고 완전 성화라는 브랜드 가치를 위해서 더욱 낮아지고 더욱 청빈하게 사시면 좋겠다. 어느 초대형교회 목회자가 교인이 사주어서 어쩔 수 없이 타고 다녔다는 벤트리 자동차의 경우, 누구나 손가락질을 한다. 본인만 모른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겸손해지고 가난해져야 설득력이 높아진다. 온 몸으로 그리 살아낼 때 그들의 충고는 힘이 있다. 가난한 동료들이나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조금만 더 참고, 주를 위해 헌신하자!’ ‘목회 해보니까, 돈이 다가 아니더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리교 회원으로서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거나 동질감을 상처 낼지도 모른다. 겸손하면 존경받는다. 절약하여 남을 도우면 영적 세마포를 얻어 입을 수 있다.

 

6. 보조 받는 사역자들 눈치 볼 것 없다. - 어차피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교단이나 외부 지원을 받는 개인이나 단체는 모든 지원금을 교회 또는 인준기관의 총 수입에 포함시키고, 투명하게 재정을 공개해야 한다. 혼자 받아서 혼자 쓰면 안 된다. 결코 자립할 수 없다. 의존하게 될 뿐이다. 개 교회에서 지원받는 선교 후원비, 개인에게 받은 사례비, 다른 교회에서 기도 또는 간증하고 얻는 후원금 모두가 수입으로 잡혀야 한다. 그중에서 일정 부분을 자신의 생활비로 받아가고, 나머지 활동비는 영수증을 첨부하여 꼼꼼히 관리하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해서는 각 감리사 또는 감리사가 위임한 선교부 총무나 지방 감사가 정기적인 감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 첫 월급은 도시노동자의 최저임금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기관 및 미자립교회 역시 지방과 연회 그리고 총회에 연 1%의 부담을 내도록 하여, 자금의 투명한 운영과 함께 모두가 감리교회의 일원으로 함께 분담한다는 연대의식을 높이면 좋겠다.

결코 주눅 들거나 눈치 볼 필요 없다. 당당해야 한다. 가난이 몸에 익숙해지고, 두 벌 옷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특히 목회 초년병들은, 주님의 특사가 되어 낮고 비천한 자들을 도우는 사절로 임명되었다는 긍지로 맡겨진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비록 남루한 옷이지만 자주 깨끗이 빨아 입고, 단정한 몸짓과 자세로, 만나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 빈곤층이나 노약 자 또는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가장 낮은 자세로 섬기면 된다. 무릎을 꿇으면 주님이 잘 보인다. 이 주님이 주시는 위로로 우리는 산다. 낯선 이국 땅 조선에 와서 목숨을 바쳤던 선교사들이 그리 살다가 가셨다. 그들을 이어받은 초기 목회자들은 정말 가난과 한 덩어리가 되어 살았다. 그 피가 감리교회를 세웠다. 돈과 풍요와 멋지게 넘긴 머리 스타일을 보고 전도되는 것이 아니다. 온 몸으로 헌신하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사람의 심장에 감동을 준다. 선교사 홀은 평양성을 보면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습니다!”라 고백했다. 그는 스스로 목숨 바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를 통해, 아들을 통해, 평양과 해주가 복음화되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동안 그 자리에서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혼신을 다해 쓰이면 된다. 보상은 돈이 아니다. 가난을 통해, 헌신을 통해, 나누고 베푸는 전 삶을 통해, 거룩으로 열매 맺는다. 섬김을 통해 죽기까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던 아들의 영광이 헌신하는 사역자들을 통해 되돌아온다.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목회지에 파송된 것이다. 많이 모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혼신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절약해서 투명하게 쓰면 된다. 매월 말 일이면 지방회에서, 연회에서, 또는 총회에서 생활비가 정확하게 입금될 것이다. 이 믿음이 있으면 된다. 간혹 선배가 주거나 할머니들이 쥐어주는 돈에 넘어가면 안 된다. 그 모두를 자신이 운영하는 교회 또는 비영리단체에 모두 입금해야 한다. 그래야 가난하게 사는 긍지가 죽지 않는다. 언제 옮기실지 모르지만 그 날까지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 삶 전체가 살아있는 전도이다. 혹자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뛰어날 수도 있고, 혹자는 집수리에 뛰어날 수도 있다.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어깨를 주물러주는 지압에 뛰어날 수도 있다. 이 모든 재능들을 마음껏 발휘하여 섬기면 된다.

굳이 선배들이 하는 예배스타일이나 예배시간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주보도 창의적으로 직접 만들면 된다. 설교는 한 주간 주님을 만난 경험, 주님의 위로, 삶의 자리에서 직접 부딪힌 이야기들을 모아 진솔하게 전하면 족하다. 잘하려고 인위적인 노력을 하거나 꾸밀 이유가 없다. 사실 더 많은 성경 연구, 주석 공부도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범위를 정해서 나태하지 않게 신학적 지식과 소양을 독학하거나 동료 사역자들과 스터디 그룹을 통해 업그레이드 하면 족하다. 전하는 말씀이나 성경공부 인도는, 학교에서 배운 신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자신이 일상에 겪는 경험들을 최대한 뽑아내면 된다. 그리되면 설교가 살아있고, 매주 살면서 주님의 임재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주님이 함께 살아가시는데, 주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목회의 이유요, 의미요, 본질이며, 푯대이다.

 

7. 성서적 근거로부터: 완전 성화를 향한 자기 점검

 

성경 전체에서, 적어도 신약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전체 맥락 속에서 우리의 성화를 위한 성서적 가이드라인이 제시될 수 있을까? 웨슬리가 말한, 성서적 거룩(biblical holiness)을 이루기 위한 성서적 토대가 정말 존재하는가? 그가 정말 성경 속에서 성서적 거룩이라는 개념과 실천방안을 찾아냈던 것일까? 그가 말한 성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는 것인지? 얼마나 성화가 이루어졌을 때, 실지로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자신이 얼마나 성화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해볼 수 있는 잣대가 가능할까? 웨슬리의 표준설교를 통해 살펴볼 때, 성화는 직선적 발전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성화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들 뿐, 얼마나 성화되었는지? 얼마나 더 성화되어야 하는지, 어떤 부분이 더 성화되어야 하는지 명확치 않다. 성화의 전 과정을 점검해주고,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격려해주고,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실천지침이 있으면 좋겠다. 먼저 성서적 점검부터 시작하자.

 

a) 먼저 그의 의와 나라를 구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의 결론은, ‘먼저 그의 의와 나라를 구하라!’ 이다.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하면 ‘후히 더하여 주신다!’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선취와 권능을 신뢰하고, 그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맡길 수 있다. 무엇을 주셔도 감사하다. 무엇을 주셔도 그것이 내게 가장 알맞고 소중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내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나를 위해 예비하시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만큼을 주신다고 믿는데서 출발한다. ‘좋은 것을 주신다.’ 는 믿음의 일면은 조용기목사가 주장하던 것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이 좋은 것이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거나, 또는 내가 기대하던 것을 주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철저히 다르다. 무엇이 언제 필요한지에 대해 판단하는 주권이 구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점에서도 전혀 다르다.

성화의 길에서, 이제부터 나는 나를 위해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구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구한다. 자연스레 나의 관심, 나의 욕구, 나의 바람이 사라진다. 내가 엷어지고 마침내 포기되어진다. 하나님만으로 족한 일체자족의 삶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 안 계실 때가 없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인생에게는 갈증도 결여도 없다. 그저 일체자족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 마음이 족하고, 내 삶이 넉넉하다고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된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 뜻을 능가하고,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다. 내가 호흡하고 내가 꿈꾸고 추구하는 모든 것의 최우선에, 최종적인 목표에 하나님이 있다. 내가 아니다. 이것이 거룩을 꿈꾸고 거룩해지는 첫 걸음이다.

목표 설정이 소중하다. 어디를 향해 나가느냐? 가 관건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숨 쉬고 먹고 마시고, 꿈을 꾸고 행동한다. 남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이 일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이다. 내 중심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면 된다. 아니라면 아직도 하나님을 나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구와 바람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바라는 욕망일 뿐이다. 성화의 길에 들어서고 나서는, 내 구원에 목말라 할 이유도 없다. 내 안에서 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이가, 구원을 주실 이가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해서 믿고 따르는 것뿐이다. 그 사랑 안에서 내가 점점 사라져야 한다. 그 사랑에 점점 취해서 이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이 점점 희미해져야 한다. 그것이 성화, 곧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으로 변화해가는 첫 걸음이다.

 

b)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웨슬리가 가장 즐겨 쓰던 성서 본문 중의 하나이다. 내 마음을 다 드리고 뜻을 다 드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면 나는 사라진다. 내 안에, 내 심장 안에, 내 바람 안에 하나님만 있다. 여기에 내게 주신 모든 힘을 쏟아 살아낸다면 나는 사라지고. 나를 위해 자기 몸 버리신 분을 위해 사는 삶의 덩어리만 남는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 ‘날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자기 몸 버리신 분을 위해 산다!’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실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틸리히의 말처럼 궁극적 관심이 되고, 자나 깨나,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표준이 되고, 목표가 되고, 이상이 된다. 해서 하나님을 위한 것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끼어들 자리가 점점 없어진다. 내 인생도, 내 현실도, 내 문제도 문젯거리가 아니다. 돈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모두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에 맡겼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의존하고 따라가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것을 위해 산다. 하나님을 즐기며, 하나님의 일을 즐기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과 함께 즐기며, 하나님을 가슴에 가득 품고 사는 순간을 즐기며 사는 것뿐이다. 류동식교수는 이것을, ‘지상에서 천상을 누리며 사는 삶’이라 말씀하셨다.

환난이 오나 역경이 오나 변함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 영적 기쁨에 취해서 살기에 현실에는 무능하고, 말에는 어눌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결과는 그 편이 낫다는 것을 매일 매일 체험하며 살아간다. 지지고 볶고 다투고 힘겹게 경쟁하고 살던 삶에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지만 이제는 웃음도, 즐거움도, 사랑도 느끼며 살게 된다. 열매가 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사람들이 남는다. 큰 변화이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에 취해서 살아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넓혀주신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 사랑이 바깥으로 펼쳐져,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이웃으로 뻗어나가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이웃을 위해 나를 내어주어도 점점 아깝지 않게 된다. 미운 사람이 적어지고, 모든 것을 품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점점 풍성해진다. 삶의 한 가운데서 맛보는 영적 변화이며, 삶의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품성의 변화이다.

 

c)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우리가 이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 사랑보다 사람을 사랑하기가 더 힘들다. 끝없이 요구하고, 수없이 변덕을 부리며, 한없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의 연약함과 자기중심 앞에서도 예수께서는 친히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본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그 사랑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나를 이루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창조이전에 누리던 그 영광에 늘 하나 됨으로써, 친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실 수 있었다. 이 길에 우리를 초대한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현실에서는 내 남은 인생을 남을 위해 사는 것을 뜻한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서, 이제부터 날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분이 사셨던 대로, 남을 위해 나를 다 내어주는 삶을 산다. 이것이 자기를 다 내어주는 자기 소여의 사랑, 곧 거룩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살고 있는지? 내가 나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남을 살리기 위해 살고 있는지? 지금 이 일을 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살필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날 위한 것이 묻어 있다면 쉽게 변질되고 만다. 자기희생과 자기 소여의 사랑이 아니다. 남을 위해 자기 삶을 온통 다 주면서, 내 이기심도 내 중심주의도 사라진다. 자기를 다 내어주면,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 차셔서, 내가 거룩해질 수 있다. 나를 위해 살던 사람들이, 남을 위해 살아가면서, 거룩한 품성으로 변화해 간다. 하나님이 먼저 주시는 사랑으로 점점 충만해진다. 아울러 나와 남 사이의 간격도 점점 엷어진다. 남을 기쁘게 하는데 내가 기뻐지며, 남이 다시 일어서서 풍성한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내가 새 힘을 얻는다. 이것이 총체적인 구원이다. 내 것을 더 쌓아서 기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쁨 속에서 하나님과 나와 내 이웃이 함께 기뻐한다. 이 자리에 이르면 돈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돈은 이제 나를 지배할 수 있는 원초적 힘을 상실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살리는 것이 내 구원과 이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남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 내 삶의 의미와 기쁨이 다시 늘 새롭게 돋아나고, 그 맛으로 인해 내 삶의 현재적인 고통과 환란이 엷어진다. 고통과 핍박이, 환란과 수고가 나를 더욱 거룩하게 하는 은총의 수단으로, 비료로 쓰이고 있음이 보인다. 해서 일체자족을 맛보는 삶이 시작되며,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을 나의 어깨에 짊어져도 더 이상 무겁지 않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 동족을 위해 부어드린 산 제물이 될 준비가 된 것이다. 이런 각오와 결심으로 매일 살아간다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고, 거룩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날지 모른다. 신학에서는 이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하나님을 보여주는 투명한 실체(trans-parent reality)’라고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살다 가셨다.

 

d)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영과 육과 혼을 완전히 거룩하게 하여 주실 것이다. (살전 5:23)

 

결국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 보다 앞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우리가 그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더욱 열심히 우리 안에서 우리 구원을 이루어 가실 수 있다. 더 이상 우리가 자의적으로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구원은 믿고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을 많이 모은다고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교인을 많이 모으고, 출세를 하고, 권력을 쥔다고 해서 이루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품성인 거룩을 자신 안에 이루어 내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가고 계신다.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안에서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살전 5:16-19) 라고 권면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선취적 약속을 믿고, 내어 맡기고, 나를 잊고,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신다.’ (살전 5:23-24) 바울은 이 복음을 확실히 믿었고, 맛보고 살았고, 믿음의 형제자매들 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를 부르신 그의 주인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그와 같은 삶을 사셨다.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 되어 사셨다. 우리는 그저 따라가면서, 모든 면에서 예수가 사신 삶을 닮기만 하면 된다.

예수를 따르며 닮아가는 노정에서는 모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모든 범사가 예수를 닮아가고, 거룩해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폭풍우 치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푸른 초장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다. 할 수 있다. 내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고, 내 것도 아닌데, 지금 손에 쥐어진 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나고 내 자의식이 되살아나고, 내 욕망과 내 바람이 나를 다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은혜가 나를 지배하도록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다. 항상 기뻐하라! 했다. 남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는 자는 남을 기쁘게 하면서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다. 남은 더 이상 나의 경쟁 상대가 아니다. 적도 원수도 아니다. 나를 내어주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기뻐할 때 당연히 내가 기쁘다. 갓난아이를 목욕시킬 때 땀을 흘리고 수고하지만 아이가 즐거워하고 방긋 웃어줄 때, 조건 없이 모두가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만나서 도움을 주는 모든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우리는 천상의 기쁨을 미리 당겨다 쓸 수 있다.

내가 만일 매일 이런 삶을 살아간다면, 이미 거룩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치의 흩뜨려짐도 없다면 완전 성화에 다가갔다고 공인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온전히 자신을 다 내어주었는데도, 아낌없이 다 주었는데도, 남이 살아나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그런 천상의 품성을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감리교인이 21세기 한국 땅에서, 예수의 향기를 품어내고, 또 그를 통해 예수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사람을 완전 성화를 이룬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예수는 그 완성의 끝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맡기셨다. 이루고자 하는 욕구마저도 다 드렸다. 아들에게 준 권세를 모든 이들이 영생을 얻도록 하는데 사용하셨다.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려드려서,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만들었다.(요 17장) 예수의 삶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감리교 전통이 추구하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룬 사람으로, 성서적 거룩을 이룬 사람으로 공인해도 될 것이다. 이런 모델이 방방곳곳에서 나올 때 우리의 영성은 꽃을 피우고, 성령의 불길은 옆으로 퍼져서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8. 맺음말: 개혁과 완전 성화 - 백만 전도 부흥을 향해

 

우리의 부흥은, 웨슬리가 말했던 완전 성화를 이루는 부흥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변화시켜 가시는 부흥이라 믿는다. 이 부흥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자신의 온 몸과 마음과 미래를 바친 인간들 속에서 시작되는 거룩한 사건이다.

개혁은 먼저 영성을 담는 틀인 신학부터 바꾸어야 한다. 새로운 신학은, 삼박자 축복과 ‘돈 복음’이 퍼뜨린 자기중심적 구원이해와 이 세속적 축복과 물질의 축복과 건강의 보상으로부터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나 하나 구원받는 것을 신앙의 목적과 목표로 삼아 온 것부터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기 내어줌의 사랑을 알고, 거룩을 이루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자기 구원을 위해 이웃과 사회를 ‘나 몰라!’라 할 수 있는가? 모순이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내 가정 그리고 내가 속한 이웃 속에,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분의 사랑과 섬김의 통치가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다스리고,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라 하시면 내 영혼의 구원마저도 내 줄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 구원은 첫 번째 과제가 아니라 최후의 간구거리이다. 하나님의 보상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문제 해결에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이 차고 넘치게 채워주심에 있지도 않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는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 속에서, ‘세상으로 보내졌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셨다.(요17:18-19)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당신의 성품과 동일하게, 결국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요17:21) 왜 이것을 세속적인 것이나 물질로 환원시키려고 하는가? 돈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영원한 기쁨도 돈으로 얻을 수 없다. 성서에 확실한 바탕을 둔 ‘성서적 거룩’(the biblical holiness)을 향한 우리의 소망과 추구를 설명해주고, 인도해 줄 수 있는 “완전 성화의 신학”이 먼저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참된 부흥은 바른 목표에서부터 시작된다. 거룩을 향한 몸부림, 자기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내 구원에 대한 욕망마저 내 이웃을 살리기 위해 포기할 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재현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셔서, 당신의 형상을 이루어 가시며, 나와 하나를 이루시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다시 사는 것이며, 부활이며, 영생을 맛보고 사는 삶이다. 제대로 흥하는 것이다. 나는 쇠하여야겠고, 그[의 품성은 내 안에서] 흥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흥하여, 그의 영이 내 영을 지배하고, 내 영과 혼연일체를 이루어, 내 영으로 그의 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때로 조국독립을 위해, 때로 민족 개혁을 위해, 때로 맘몬과의 쟁투를 영적 대각성 또는 신앙의 목표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중요하고 훌륭한 일이지만 지나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 종착지는 아니다. 남을 위해, 사회와 온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나를 내어주는 삶의 실천을 통해 다듬어져 맺는 열매는 결국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품성을 우리 안에서 화육시키신 것이다. 그의 영으로 우리가 살고, 그의 품성의 열매가 우리 삶에 주렁주렁 열리고, 우리의 품성이 그의 품성으로 마침내 변화된다. 온유와 겸손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익어갈 때, 내가 살고, 내가 속한 사회가 살고, 온 세상이 되살아난다. 진정한 부흥이다. 다 내어주었는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충만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더불어 나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그 부흥 속에 우리가 속한 사회가 다시 살고, 민족이 개조되고, 온 세상이 다시 한 번 제대로 살게 될지 모른다.

셋째,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부흥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옆으로 파급 확산된다. 성령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다. 주체는 성령이시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그 불길은 성령께서 친히 옆으로 확산시켜나가실 것이다. 우리는 보조적인 도우미일 뿐이다. 나 같은 죄인 안에 하나님의 품성과 그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에 감격하고 그저 좋아서 따라가는 것뿐이다. 내 품성이 변화되고 내가 늘 잔잔한 기쁨의 삶을 살아갈 때, 이웃에게 감동을 주고, 나의 삶은 동참자들을 불러오는 불쏘시개가 될 것이다. 변화된 나의 삶과 감리교인의 새로운 모습이, 믿지 않던 자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성령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지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부흥은 개인의 품성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가치관을 바꾸고, 사회적 약속과 신뢰를 상승시켜줄 것이다.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일깨워줄 것이며,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 사회를 움직이는 원초적 동기가 아님을 일깨워줄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질 때, 사회는 변할 수밖에 없다. 공동의 가치와 목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실 영적 부흥과 성화를 이룬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유형의 삶을 따라 하기 쉽다. 마치 젖은 장작이 시뻘겋게 불붙은 화로 속에서 함께 타오르듯 민족 전체가 불타오르는 역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동시에 돈을 많이 모아야 행복해질 것이라고 오해했던 그릇된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모으고 쌓아서 갑 질하기 보다는 어렵고 모자란 이들에게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놓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풍토가 조성될지 모른다. 이러한 성서적 거룩의 가치관이 정립되고, 완전 성화를 향한 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이것은 전체 한국 사회의 부흥이 아닐 수 없다. 이 부흥은 한국 땅에만 머물지 않고, 온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위대한 공헌이 될 수 있다. 백만이 아니라 천만 그 이상이 부흥될 수도 있다.

 

 

 

 

[ 강성도 박사 프로필 ]

·학력 및 경력:
- 1955년 8월 5일 부산에서 출생
- 1974년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 1978년 고려대 산업공학과 졸업
- 1980년 군 복무 이후
- 1981년 3월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입학
- 1984년 1월 동대학원 졸업 후 아현감리교회 전도사
- 1985년 8월 미 남리교대학원 퍼킨스신학대학원 입학
- 1987년 동대학원 졸업
- 1988년 1월 클레어몬트 대학원 종교학부 입학
- 1992년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 1994-2000년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아시안센터 원장
- 1994-2007년 샌트란시스코신학대학원 객원교수
- 1997-현재 하나감리교회 담임목사
- 2013-현재 미주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

·저  서: 화이트헤드 과정철학 입문, 종교다원주의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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