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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12을 반어법으로 풀어보면 어떨까?왜“귀있는자는들으라”고하셨을까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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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1월 11일 (수) 19:59:39
최종편집 : 2017년 01월 14일 (토) 16:42:21 [조회수 : 2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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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가 마가복음 4장 12절에 가면 누구나 어리둥절하게 된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알아듣기 쉽고 실감나게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한다니 납득이 안 된다. 그런데 조금 더 읽다 보면 33절과 34절에는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가 나온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다시 12절로 돌아가서 읽어 본다.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주석서들을 뒤져 보아도, 예수님의 비유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아도 납득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책들을 쓴 분들도 어정쩡하게 말하면 나야 어떻게 알겠느냐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거기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때때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신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가 사용된 것 같은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냥 삼키기는 했는데 영 소화가 되지 않는다.

마가복음 4장 12절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은 신성종 목사다. 그는 『예수님의 비유와 이적』에서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를 설명하면서 마가복음 4장 12절은 “신학적인 깊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이 구절이 은폐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을 따라서 신 목사도 은폐의 수단이라고 말하면서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라고 실토한다.

이 수수께끼를 시원하게 풀 수는 없을까? 마가복음 4장 12절을 반어법(irony)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예수님의 분노

예수님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5)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말에서는 ‘내 말을 들으라’고 하면 ‘내 말을 따르라’는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기서는 ‘들을 지어다’가 ‘깨달으라’를 의미한다. 그런데 장애인이 아니라면 모두 귀가 있는데, 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를 강조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셨을까? 이 말은 단순히 듣고 깨달으라는 말이 아니고 ‘귀가 있으면 듣고 깨달아야 할 것 아니냐’ 혹은 ‘듣고도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짜증이 섞인 말로 보인다.

이렇게 예수님이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 크게 실망하셨기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에 이은 다음 절에서 예수님이 실망하신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하신 사실이 드러난다.

장면이 바뀌면서 21절에 가면 예수님의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책망으로 변한다. 거기서 예수님은 당신이 권능을 많이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1) 여기서 “화 있을 진저”는 질책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는 24절에서는 그들의 파멸을 경고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 가면 더욱 화날 만한 일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더니 예수님의 친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미쳤다고 붙들러 오고(막 4:2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쫓는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큰 귀신이 들렸기 때문에 작은 귀신들을 내쫓는 것이란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바로 당신을 사탄으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보셨다.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셨는데, 사람들은 당신이 귀신이 들려서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데에 화가 치밀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사탄으로 취급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거역하는 엄청난 죄를 짓는 것으로 보셨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 혹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악담을 퍼부으셨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들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유대인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당신의 친족, 어머니, 형제까지 당신을 미쳤다고 귀신들린 사람으로 취급할 때, 예수님은 정말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는 화를 내지 않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고만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제들까지 당신을 미친 사람으로 알고 붙들러 왔을 때,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시려는 예수님의 음성이 떨리지 않았을까? 이제는 어머니와도 형제들과도 의를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예수님의 분노와 반어적 진술

이런 참담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 막 4:9; 눅 8:8))고 말씀하셨다. 모든 공관복음서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만,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씨 부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를 외치셨다는 데서 예수님의 격앙되어 있는 기분이 씨 뿌리는 비유와 연관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아무리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려도 길 가 같고, 돌밭 같고, 가시떨기 같아서 씨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들, 도리어 당신을 귀신들렸다고 몰아세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잔뜩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화가 난 상태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장 9절과 10절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람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12)고 언급하셨다. 신학자들은 너도 나도 이 구절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이 말은 반어적 진술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어적 진술이란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로 말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잘들 놀고 있네!’ 같이 빈정거리는 말도 반어적 진술, 달리 말해서 자기 생각과는 반대로 하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사람들이 잘 논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웃기고들 있네!’라는 자기 생각을 그렇게 반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어느 진술이 문맥과 맞지 않으면 그 진술을 반어적 진술로 본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문맥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 말씀을 예수님의 진의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반어적 진술(ironical statement)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말씀하신 후에도 계속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위 구절이 나오는 4장에서 마가복음의 기자는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4:33-34)라고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마가복음 기자의 말을 더 강조해서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13:34-35)고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구절은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후에도 계속 비유로 가르치셨다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자들이 기록하고 있는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언급과도 맞지 않는다. 이렇게 마가복음 4장 12절의 말씀이 문맥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이 구절을 반어적 진술로 볼 수밖에 없다. 그 구절의 내용은 예수님의 진의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마가복음 4장 12절이 문맥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이 반어적 진술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문맥 외에도 몇 가지 다른 근거를 가지고 그 구절의 내용이 예수님의 진의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먼저 알아듣지 못하게 비유를 사용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진의라면, 예수님이 비유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구절은 비유란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표현 방법이라는 비유에 대한 문학적 상식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구절의 내용이 예수님의 진의라면, 모두들 비유의 대가로 인정할 만큼 비유에 능한 예수님이 비유의 효용에 대한 상식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마가복음 4장 12절을  문자적으로 읽는다면, 예수님은 어떤 때는 알아들을 수 없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신 분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종잡을 수 없는 분, 진실하지 못한 분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거룩하신 주의 “영생의 말씀”(요 6:68)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구절의 내용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 예수님의 사명과 배치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분명히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과 맞지 않는다. 당시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상대하고 계셨다. 그런데 만민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선민인 유대인들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하셨겠는가?

예수님이 구원하시려는 최우선 대상은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으로 나서 유대인의 전통 안에서 성장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사랑하셨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크게 실망하거나 대단히 화가 나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말하듯이, 예수님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고 몹시 화가 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문맥으로도, 비유에 대한 상식으로도, 예수님의 진실성을 고려해서도, 예수님의 사명에 비추어 보아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진의가 아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리 씨를 뿌려도 결실할 것 같지 않은 그 사람들의 자갈 밭 같은 마음에 실망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냉소적인 어투로 말씀하셨고, 바로 이어서 당신의 진의와는 달리 반어적으로 진술하셨다.

주변인들만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조차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답답해 하셨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고 말씀하셨다. 어떻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의미를 알고 싶어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막 4:11)라고 우호적으로 말씀하셨다. 귀신들렸다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외부인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외부인들에게만 화를 내셨다.

반어법은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사적 표현이다. 마가복음 4장 12절을 반어적 진술로 읽는 것, 이것은 문학적 읽기의 일환이다. 마가복음 4장 12절을 반어적 진술로 보면 그 어려운 수수께끼가 속 시원하게 풀린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적 감각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실감하게 된다.


마치면서

지금까지 왜 많은 사람들이 마가복음 4장 12절을 놓고 당황했는가? 그것은 전통적인 문자주의적 읽기가 몸에 배어 있어서 그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반어적으로 말하는 수가 많다. 따라서 이 구절을 반어적 진술로 이해하는 데에는 전문적인 문학적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문학적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사람들조차 이 구절을 반어적 진술로 보지 못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관행이 신학계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문학적으로 성경을 읽는 일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면서 문자적 읽기를 고집한다. 읽기 방법을 바꾼다는 것은 성경을 보는 눈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읽는 법을 익히면 문자적으로 읽을 때에 보이지 않던 시원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납득할 수 없던 성경 구절들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마가복음 4장 12절을 반어적 진술로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몰아세웠던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는 사람을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심지어는 이단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런데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기독교의 신앙 체계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문학적 읽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이단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문학적 읽기를 좋아하는 것은, 마가복음 4장 12절의 해석에서 보는 것처럼, 그 구절을 반어적 진술로 읽을 때 예수님의 진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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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XXX.XXX.34)
2017-01-19 01:40:44
윤회사상, 배화교사상 등이 성경에 흡수되는 것은 당연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주변사람, 주변사회, 주변국가, 과거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 발전하게 됩니다. 성경 역시 주변사람, 주변사회, 주변국가, 과거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태동되었습니다.

사람이 독야청정할 수 없듯이 성경 역시 독야청정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할 당시에 존재했던 주변사람, 주변사회, 주변국가, 과거역사의 움직임이 實例나 敎訓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흡수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할 때에 윤회사상, 태양신사상, 배화교사상 등 그 당시 존재했던 사회조류를 흡수하여 자기만의 사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철학자가 철학책을 저술할 때 지금까지 나와 있는 철학서적을 참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윤회사상, 고대 이집트사상 등이 섞여있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혹자는 윤회사상이 성경에 있다며 이는 인도 및 불교사상을 그대로 베꼈기에 독창성이 없다는 둥 태양신사상에서 크리스마스가 비롯되었다며 이른바 ‘논문 훔치기’라는 둥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이건 성경 그 자체가 시대적인 산물이란 걸 망각한 겁니다.

철학자가 저술한 책을 읽는 사람은 그걸 분해하고 융합하여 자기만의 색깔로 해석하듯이... 성경기자 역시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가령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로마시대에 맞추어 해석했습니다. 이 해석은 지금 시대에서 볼 때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보니 바울의 해석을 달리 보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예수님이 창조한 그리스도교의 고유한(특유한) 철학이 무엇이냐?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지면 그 속에 녹아든 윤회사상, 배화교사상, 바울사상 등은 그다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손이 달을 가리키는 데 달은 보지 않고 손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손이 아닌 달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고루한 문자적 성경읽기를 超克한 문학적 성경읽기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한 번 더 오셔서 지난 2000년 동안 누적된 여러 가지 견해를 정리해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2000년 동안의 발전은 실로 엄청나서 2000년 전의 성경기자들의 견해가 중구난방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각자의 철학과, 각자의 수준에서... 부디 한 번 더 오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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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59.XXX.XXX.148)
2017-01-14 13:56:52
아주 소설을 쓰십니다!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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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XXX.XXX.34)
2017-01-14 19:20:14
검증을 문자적 성경읽기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라면 좀 곤란
본문내용 중 “예수님이 비유에 대하여 무지했다“라는 걸 文字的으로 읽으면 예수님을 무식한 사람으로 폄훼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후맥락을 따져서 文學的으로 읽으면 예수님이 무식했다는 것은 문자적 표현에 지나지 않을 뿐 사실은 다른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술어적 서술에 불과한 것 아닌지요.

뜻하고자 하는 본질은 그게 아닌데... “예수님이 비유에 대하여 무지했다“라는 걸 그 부분만 딱 따서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본문저자가 예수를 무식한 사람으로 매도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반어법적 성경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설명풀이에 지나지 않잖아요. 굳이 설명풀이를 왜 예수를 폄훼하는 방식으로 하느냐고 따지면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만...

무릇돌님께서 본문저자의 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게 아닐까요? 본문저자의 글은 자기의 이론으로서 이게 타당성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검증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그 검증을 지난 2000년 동안 사용했던 문자적 성경읽기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라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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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XXX.XXX.148)
2017-01-15 07:53:15
시작은 문자적 읽기에서
우선 문자를 읽어야 되겠지요, 모든 문학작품은.
그러나 문자는 의미의 그릇이라는 이 기본을 가지고서.
그 문자들이 어떤 문학적 유형에 속한다면 또 그 유형에 따라.
그렇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오랜, 그리고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이 교회와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아시쟎아요?
비유를 못알아듣게 하려는 이유로 하셨다는 막 4:12의 말씀은
마가와 마가공동체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결국 그 이하 34절에 예수께서 내부자들에게는
비유를 따로 설명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가의 문학적 장치이겠지요.
당장에 12절에서 그런 문자(말씀)이 이해가 곤란하다 하여
갑자기 상상력을 발휘하여 '반어법'을 들고 나온다면
그런 경우야 말로 본문을 왜곡하는 시발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34절이 없으면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명백한 본문 안의 설명이 있는데도
상상력을 발휘하는 건 문학적 읽기가 아니라
왜곡적 읽기라 하겠지요...

그리고 마가의 개작 마태로 마가를 보충해석하려는 것도
마가와 마태의 신학적 배경을 무시한 언어도단입니다!
당연하쟎아요? 마가를 개작한 마태는 그 개작의 정도만큼
마가하고는 신학적, 신앙적 입장이 달랐겠지요.
마가는 히브리성서나 그 아람어역본을 인용하는데
마태는 히브리성서를 오역한 칠십인역을 인용한다면
그 둘은 이미 공통점보다는 상이점이 많을 것은 자명하고...

그래서 기독교는 Q복음서에서 시작하고
복음서들의 효시인 마가복음서에서 그 뿌리를
재확인하여야 제자리로 돌아갈 길을 찾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의 몰역사적인 예수상과 미심쩍은 복음관을 교정하는
마가의 복음에서...
마가복음 정치적으로 읽기를 다시한번 권합니다!

저의 표현이 다소 거칠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저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을 '생소하게' 또
'자의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상황에
격한 '아니오'를 한 듯 합니다.
이제 댓글들을 다 읽어보니 여러 추가 논의들이
계속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논의에 늦게 뛰어든 지각생으로 '실례"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성서의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음이 자명합니다.
단지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할 뿐입니다.
좀더 부연하면 '대안적인' 해석과 이해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개혁하고 극복하는 해석만이
성서의 존재의 이유일 수 있다고 봅니다.
하여 성서는 본문보다 해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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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XXX.XXX.148)
2017-01-15 12:09:41
물론, 문자적 읽기(이해)는 보내고
문학적 이해(읽기)가 와야겠지요.

문자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한다면 독자(신자)들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은 물론, 자칫 육신은 물론, 정신-영적으로도 파멸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문자는 죽이는 것’(고후 3:6)이라고 표현한 바와 같은 것이다. 성경은 문학이며 종교문학이며 신학적 문서들의 총서이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디모데후서의 표현은 이런 진실을 여지없이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독자들은 영감을 가지고, 성경을 통하여, 성경이 종교문학임을 상기하고(신학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도 성경을 모두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또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동경(구리거울, 성경!)을 가지고 희미하게 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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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XXX.XXX.34)
2017-01-17 01:16:36
무릇돌님의 바울觀에 대한 보충
저의 어쭙잖은 反論提起상의 부족한 점을 적절하게 보충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바울에 대해서는 ‘대체로는’ 무릇돌님과 견해를 같이하면서도 ‘일부분은’ 다르게 평가합니다.

저는 엔도 슈사꾸(참조: 그리스도의 탄생)가 밝히는 바울 평가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엔도에 의하면 “....확실한 것은 그들의 소멸에 의해 초대 그리스도교단의 움직임은, 이후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한 각지의 교회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이다. 유태교의 테두리 내에서 성립되고 유태교의 한 분파로 간주될 만큼 유태교적 사고에 구애되었던 예루살렘 제자 그룹의 소멸 내지 쇠퇴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성격은 이때부터 일거에 180도로 전환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바울이 그의 생애를 걸고 싸웠던 저 이방인 문제-할례를 행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을 교회의 일원으로 삼을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背後로 돌려지고 그리스도교는 유태국내라는 좁은 세계, 유태교라는 민족종교에서 이탈하여 국경을 넘고 민족을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의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상대적으로 율법적이고, 유태적인(쇄국주의) 측면을 강조하는 예루살렘派가 득세했다면 결국에는 유태교로 되돌아갔을 것이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脫율법적이고, 脫유태적(세계주의) 측면을 강조하는 이방인派의 득세로 인해 <율법에 구애되지 않고 율법을 완전하게 하게 하기위해 왔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주로 비유로 말하는 예수님의 특성상 그 밑의 제자들의 예수해석은 제 각각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바울은 예수님을 개방적(진취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무수한 유태 종파가 경쟁하던 시대에 예수님의 사상을 세상에 어필하도록 한 위대한 선각자였습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로마는 결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되었다면 그리스도교는 그렇고 그런 종교에 머물고 말았을 것입니다. 로마로 가지 않았다면 한국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巨木일수록 그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듯이 바울의 문제점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무릇돌님의 견해에 대체로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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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XXX.XXX.148)
2017-01-17 21:50:21
巨木일수록 그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듯이...
감사합니다.
물론 바울의 문제점은 있겠지요.
더 문제인 것은 바울을 왜곡하고 오해하는 기독교이지요.
바울이 아니었으면 기독교는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역사속에서 사라졌을까요?
대체로 긍정하는 바라고 보입니다.
바울이 당시 황제숭배의 양식에 예수를 대입하여
그의 신학을 꼴지었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에서 이해하듯 예수를
해석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국신학의 황제숭배에 대조적으로, 대안으로서
예수를 해석한 것은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해도
당시에는 대안공동체를 향한, 대조사회를 위한
그리고 예수가 진정 추구하였던 것을
나름 팔레스틴 밖의 로마세계에서 실현하려던
그의 진정어린 의도의 발현으로 보입니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동환 목사님은
바울은 그 나름의 신학체계 속에 예수를
억지로 꿰어맞추었다고 하십니다.
이는 어느정도 개연성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복음이 없다면 참으로
기독교는 혼돈 속에 거하고 말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듭니다.
바울이 예수의 역사성은 거의 무시한 채
그의 복음을 구조화하였다면
(사실, 바울의 복음은 유대적 그리스교도들과의
특이한 대결 속에서 꼴지어졌다면, 그의 복음을
일반적인 상황에 적용한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마가는 철저하게 예수의 공생애에 근거한
그의 복음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의 복음을 마가가 교정한다고도
충분히 생각이 됩니다!
바울의 관념적인 복음과 신학에 대비하여
마가는 좀더 구체적이며 실존적인(?) 복음을
제시한다고 보입니다.
저는 근래에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어서
마가복음을 제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글들을 써보려고 했었는데
마침 박원일 목사님의 '마가복음-정치적으로 읽기'가
출간되어 들뜬 마음으로 그 책을 읽었습니다.

바울을 이제 제자리에 위치하도록 하여야
기독교는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감히 생각합니다.
마가를 비록 마태와 누가가 개작하였지만
마태는 또한 바울과는 전혀 다른 관점들을
제시하고 있어서
바울 제자리찾기는 정경 성서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보여집니다.
누가는 바울의 신학을 따르면서도
바울과 바울을 이단시한 예루살렘 전통을
나름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이제 그 미심쩍은 바울을 더욱 왜곡한 기독교는
근원으로,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해 봅니다.

문자는 (영혼을) 죽이는 것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빌어
영으로, 영감으로, 성경을 재해석하여
기독교를 새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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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122.XXX.XXX.192)
2017-01-13 21:17:35
문학적 글읽기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외면하는 글읽기가 아닙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인문, 사회학, 심지어 과학까지를 알아야합니다. 작가들을 보시지요. 그들이 모든 영역을 두루 알지 못하면 작품을 쓰지 못합니다. 문학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그런 문학작품들을 비평하듯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 신학자들은 문학비평을 공부하지요.

우리는 보통 남의 것은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내 것만을 내세우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나서의 요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죠. 선지자라는 사람이 심지어 하나님의 명을 외면하니까요. 그것은 당시에 이방인 혐오사상이 만연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상황을 모르고서는 요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지요.

그리고 막 4:12는 지적하신대로 사 6:9-10을 요약 인용한 내용입니다. 아래에 제가 이사야를 반어적으로 해석해 놓았으니 참고해 보시지요. 그리고 막 4:33-34는 알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거기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는 영어로는 "as much as"입니다. 그 의미는 가능한 '많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평행구절 마 13:34-35를 참고하시지요. 그것은 제 글에서도 이미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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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XXX.XXX.148)
2017-01-13 21:55:27
문학적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광범위한 내용이었습니까?
그런데 그 문학적 읽기로
반어법? 이라뇨?

박원일 목사님의 마가복음 정치적 읽기(제9장)와
서중석 교수님의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제2장)을
보시지요.
여하튼 반어법이 아니라 외부자와 내부자 갈등 및 대결국면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마가의 평행구절이라는 마태의 본문은 당연히 다르겠지요.
마가의 신학과 마태의 신학이 다른 것처럼!
마태는 마가의 개작입니다! 마가는 마태에게 이해가 안되었겠지요.
아니면 최소한 맘에 안들었던 게지요.
마태로 마가를 해석하려는 것은 최상의 넌센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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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XXX.XXX.148)
2017-01-14 14:00:47
책 하나 추가합니다!
마르틴 에브너, 슈테반 슈라이어의 신약성경개론(분도출판사) 중
마르틴 에브너의 마르코 복음서 부분을 참조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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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59.XXX.XXX.148)
2017-01-13 20:50:33
반어법? 문학적 읽기?
반어법? 문학적 읽기?
다 좋지요. 그렇지만...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들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막 4:10~12, 표준새번역>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막 4:33~34, 표준새번역>

왜 12절처럼 비유로 말씀하시고 알아듣지 못하게 하실까요?
반어법? 문학적 읽기? 인용하신 34절처럼 제자들에겐 따로 설명을 하시지만, 외부인(바깥사람, 마가공동체의 적대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도록 하려는 이유로 예수께서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4:11~12는 이사야 6:9~10을 인용하여 깨닫지 못함과 비유의 목적을 설명한다. 비유의 목적은 외부인들로 하여금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데에 있다."<박원일, 마가복음 -정치적으로 읽기>

문학적?만 가지고는 본질에 접근하기가 어렵지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신학적... 모든 접근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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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183.XXX.XXX.119)
2017-01-13 00:54:43
왜 하필 팔레스타인으로 오셔가지고
무소부재하신 분께서 한반도에 성육신 하셨다면, 그래도 구약성서의 예언을 들먹일수 있을까요? 논어, 도덕경, 금강경?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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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112.XXX.XXX.53)
2017-01-12 17:39:48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 곧 예수님에 대하여, 시온이다, 돌이다, 아기다, 아들이다, 처녀에게 난다 등등등, 비유로 기록이 되었다. 이 비유(묵시)의 참 뜻을 깨달아야만, 메시야 곧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예언(묵시)은 실상이 나타났을 때 믿게하는 증거 서류와 같다(요14:29 참고). 하박국 2:3의 기록대로, 묵시로 기록한 말씀이 정한 때가 되어, 예수께서 오시어 구약 성경에 약속한 메시야가 자신이라는 것을 구약 성경의 뜻을 풀어서 천국 복음을 전하였으나 믿는 자들이 많지 않았다. 마음이 완고하고 완악한 자들은 도리어 예수는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다.

이처럼 비유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 뜻대로 신앙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진리이다.

이와같이 신약 성경에도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구름타고 오신다. 불꽃중에 오신다, 볼 수 있게 오신다, 볼 수 없게 오신다 등등.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비유로 기록이 되었다. 신약 성경의 비유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죄 사함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진리이다. 나의 이 설명도 들을 귀 있는 자만 깨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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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 (218.XXX.XXX.240)
2017-01-12 10:36:58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5)

: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자는

비유의 말씀이 이해 되고, 해석이 된다.

성령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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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99.XXX.XXX.117)
2017-01-12 10:06:42
목사의 한계
성경을 볼 때, 정치, 문화, 경제, 역사의 배경이 있어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안 가르쳐 주지요. 그러니 문자적인 것으로만 달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학, 경제학, 세계사, 그리고 문화의 구조 등 기본적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 더 온전하게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보는 것은 읽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각 방식에도 많은 은혜가 있는데, 목사들은 이러한 은혜를 다 날려버리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참 재미없습니다. 아무튼 문자적, 문학적에다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 문화구조적인 것 까지 아울러져서 성경을 목사들이 보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성경 암송하는 것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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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122.XXX.XXX.192)
2017-01-12 00:44:54
마가복음 4장 12절은 이사야 6장 9-10절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의 문맥이 마가복음의 문맥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사야 1-5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백성을 구하시려고 노력하시지만 백성들이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5장에서는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에게 몹시 화가 나서 20-22절에서 "화 있을진저"를 3번 반복하십니다. 6장에서 이사야가 백성을 위해서 가겠다고 자원하자 그를 보내시면서 9-10절에서 "귀가 막히고...눈이 감기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말씀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1-4장에서 여호와꼐서 하시는 것을 본대로 나가서 백성을 깨닫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서 6장 9-10절이 앞뒤 문맥과 맞지 않는 것이 마가복음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말씀대로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가서 백성을 깨우치려고 진력했다는 것은 여호와의 그 말씀이 반어적 진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존 도미닉 크로산은 <비유의 위력>에서 마가복음 4장 12절이 문맥과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문맥과 맞지 않는 말을 기록한 것은 마가의 실수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엉뚱하게 말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해서 제가 이 글을 올린 것입니다. 이것은 교조적이거나 자의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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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XXX.XXX.34)
2017-01-12 01:23:49
이사야와 마가복음의 유사성을 입증하였다면...
구약의 특정 구절 역시 반어법적으로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제가 제기한 논리상으로 비추어보면 반어법적 해석은 적어도 '지나치게'라는 수식어는 떼어버릴 수 있겠군요. 저는 반어법적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더욱 더 자세히 읽어보면 반어법적으로 해석 가능한 게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좋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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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XXX.XXX.34)
2017-01-11 21:51:14
實例가 수없이 많아진다면 恣意的 논리 아닌 진리로 확증될 것입니다
문자적인 성경읽기는 ‘지나치게’ 敎條的이라는 문제점이 있고, 문학적인 성경읽기는 ‘지나치게’ 恣意的이라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전술한 교조적이다 라거나 또는 자의적이다 라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자적이든 문학적이든 간에 ‘지나치게’가 문제라고 봅니다.

문자적 성경읽기를 하면 앞뒤가 안 맞는 구절을 ‘합당하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적 성경읽기는 문자적 성경읽기의 한계 뛰어넘어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합당하게’는 ‘자의적’이라는 문학적 성경읽기의 한계를 벗어난 상태를 뜻합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문학적 성경읽기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實例가 단 하나 또는 두 개가 아닌 여러 개가 된다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實例가 여러 개가 된다는 것은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게 아닌 檢證이 확실하게 되어 ‘지나치게’라는 수식어를 뗄 수 있게 되고, 實例가 수없이 많아진다면 恣意的이 아닌 진리(진실)로 확증될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마가복음 4장 12절을 反語法으로 풀이한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일 수 있습니다. 최재석 선생님께서 반어법으로 풀이할 수 있는 다른 성경 구절을 여러 개 제시하시면 ‘최재석만의 독특한 자의적’ 성경읽기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되어도 어느 누구에게도 타당 해석이라고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 중 반어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아주 많이 제시할 수 있다면 반어법적 성경읽기는 人類의 새로운 資産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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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XXX.XXX.239)
2017-01-11 21:14:29
요한복음 3장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 14장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도행전 2장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사도행전 19장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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