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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소 안 든 단팥빵 같은 한국교회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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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1월 08일 (일) 13:36:28
최종편집 : 2017년 02월 05일 (일) 00:26:55 [조회수 :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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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한때에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는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도 많이들 했다.

붕어빵은 붕어를 재료로 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민물고기 붕어모양으로 만들었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이 빵에는 이름과 모양 외엔 붕어 자체뿐 아니라 그것과 비슷한 어떠한 것도 들어 있지 않다. 이름만 그럴듯하고 내용이 없는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흔히들 빗대어 써 온 말이다. 최근에는 ‘최순실 청문회’에 최순실이 나오지 않아 맹탕이 되자 사람들은 ‘붕어빵 청문회’라 비아냥거렸다.

후자 ‘앙꼬 없는 찐빵’은 ‘앙꼬’가 일본어인 탓도 있어 이젠 거의 들을 수가 없게 됐다. ‘앙꼬’는 ‘팥소’로만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을 포함한 무엇인가의 안에 채워 넣는 ‘속’을 통틀어 말한다. 아무튼 일본어인 ‘앙꼬’ 대신 우리말 ‘팥소’를 써 ‘팥소 없는 찐빵’이라 못할 것도 없지만, 그리하면 말이야 틀리지 않다 해도 ‘소금은 짜다’와 같이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를 이들 속어가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모임체인데, 그러한 예수교회에서 예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있는 건 ‘붕어빵’처럼 이름과 빈 껍질뿐 예수가 없다.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서 오늘의 교회를 보다

 

요한복음 5장 2절로부터를 보면 예루살렘의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 다섯 행각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필자는 거기에서 오늘날의 교회 모습을 본다. 행각 안의 병자들은 눈이 안 보이거나 다리를 절거나 아니면 혈기가 마른 것 같은 각양각색의 육체적으로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또한 그와 같지 않은가 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육체적 병보다 정신적으로 병을 앓는 사람 많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교인들은 자기가 정신적 병을 앓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다. 몸에 병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병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마찬가지로 병들어 있는 자신의 내면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의 내면의 병은 마음이 하나님과 맞춰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거나 약하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크리스천으로서의 할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좀 더 믿음에 열심인 사람들은 헌금과 교회봉사를 하는 것 등으로 믿음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생각한다. 따라서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면서 같은 교회의 교우(敎友)가 곤경에 처해 있는데도, 심할 경우는 죽어 가는데도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 베데스다 못가 행각의 병자들처럼 말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예수의 말씀에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한 38년 된 병자의 말은 그곳이 얼마나 매정한 곳인가를 말해 준다.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 했으나, 실은 나음을 받는 사람은 활동에 아무런 지장도 없는 경증 환자들이었을 것이다. 움직임이 조금만 불편해도 그런 사람들은 뒤쳐질 수밖에 없어 고칠 수 있는 가망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족을 하나 붙이고자 한다. 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말씀의 3절 하반에서 4절까지는, 그러니까 병자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라는 부분은 오래되고 권위 있는 사본에는 없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해 성경 원본에 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일반 민중들의 전설이나 병자의 신념을 서기관들이 해설적으로 부기한 난외주가 필사를 거듭하는 동안 그 일부가 본문에 삽입된 거라는 것’이 권위 있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필자는 초신자 시절부터 이 괄호 안의 말을 읽을 때면 성경에 왜 이런 게 쓰여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서양의 무슨 민속신앙에 대한 것을 읽는 것처럼 미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지금 생각하면 문장을 묶은 괄호도 보지 못하고 읽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물이 움직인 건 천사가 그리한 게 아니라 간헐천이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자연적인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병을 고치고자 하는 병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낳은 오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께서 그 베데스다 못가 행각으로 찾아가셨다. 38년 된 병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에게 한 예수의 말로, 병자에게, 그것도 38년 동안이나 중병을 앓아 온 사람에게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하나마나한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면 언제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도록, 그러니까 신앙심을 높이도록 하시는 일을 먼저 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또한 그런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뿐만은 아니다. 몸이 불편하여 구걸하여 먹고 사는 걸인이 병이 나으면 생계가 막히고 만다. 이 병자가 못가에 나온 것은 꼭 낫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이나 의지에서가 아니라 무엇인가의 타성도 작용했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친구 없는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셨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예수의 물음에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갑니다’라고 대답한다. 예수께 은근히 도움을 청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건 물이 언제 움직일지도 모르는데 염치없는 일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알았다면 직접 고쳐 달라 매달렸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베데스다 못이 양문 곁에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병자들은 양문 곁의 베데스다 못가 행각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를 먼저 찾아야 했다.

 

생계와 주일성수, 어느 것이 우선인가

 

많은 크리스천들은 건물이 중심이 된 교회 아닌 교회에 다니며 ‘주의 품은 뜻 나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라 기도한다. 입으로야 그리하지 않지만 마음이 그렇다. 병자들이 갈 길을 잘못 찾아 못가로 갔듯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크리스천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따르기 위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 인간들이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 그러나 너희의, 너희 각자의 방법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방법에 따라 하고, 나를 의지하며 하라. 그러면 너희의 하는 일에 내가 함께 할 것이다’라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께서 38년 동안이나 앓아 온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 하시고 조금 뒤에 이어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의 이 장면만으론 그 병자가 중병이라는 것 외엔 병증에 대해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한다. 걸어서 왔는지 기어서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조력도 없이 스스로 왔을 것이라는 것이며, 침상도 혼자서 옮겨 왔을 거라는 것이다. 침상이라 해도 이를 가리키는 헬라어 크랍바토스는 깔개를 의미하는 것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병자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예수의 말씀에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라 되어 있으니 사실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낫기 전에 먼저 말씀에 따르려 했을 것이라는 건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선 무슨 일이 됐건 당신 혼자서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은혜를 입을 당사자가 동참하기를 바라신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은 그날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아니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여 그곳에 가셨다. 그분께서는 상습적으로 안식일을 범하셨고, 그때마다 비난과 핍박이 뒤따랐는데, 그날도 그랬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을 알고 박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병자가 나아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을 보고 오늘은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비난했다.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것은 사람들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셨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한 사람의 이웃이 3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을 괴롭혔던 불치병으로부터 놓임을 받았다면 모두가 같이 기뻐하며 감사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들먹거리며 그러한 그를 죄인으로 몰아갔다. 그러며 병으로부터 해방되게 한 예수까지도 박해했다.

오늘의 교회들도 그와 그리 크게는 다르지 않다. 생계를 위해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믿음이 적다고 손가락질한다. 주일에 장애인 시설 같은 데에 가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까지도 못마땅해 한다.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안식일과 주일이 다르고 성전과 교회당이 다르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일을 안식일로 착각하고 교회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기도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에서 기독교의 참모습을 찾아야 하고 교회의 본질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종교이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도 하셨는데,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담스러운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편안하게 안식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거머쥐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놓는 것이 주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체득해야 한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세속의 물질만능주의사상으로 심하게 오염되어 기복신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기복신앙 그것은 기독교신앙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쉼도 자유도 누릴 수 없다. 물질도 명예도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그것은 마치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고 그런 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물질은 그것이 없으면 단 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찰 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바른 방법으로 모아 나누며 쓴다면 금은보화에 비하겠는가. 그렇게 하고도 쉼을 얻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거짓말이다.

이에 무슨 공자 같은 말을 하는 거냐 할 사람이 많고, 공감 또한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지만, 그게 사실이니 어쩌겠는가. 어렵지만 그리되려 노력만이라도 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이제 주일을 안식일 개념으로 생각하는, 그리고 교회를 성전으로 여기는 그런 율법적 의식을 우리의 신앙에서 지워야 한다. 흔적도 없이 말끔히 지워 버려야 한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어 깨닫게는 하나 없이 하진 못한다. 인간의 연약함을 폭로할 뿐 고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율법을 폐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율법을 폐하는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말씀하셨다. 사실 율법은 그 초점이 예수께로 맞춰져 있고,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예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무시해서도, 모르시해서도 안 된다.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 신앙의 초석을 든든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한다면 율법은 복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또렷이 드러내어 빛을 발하게 할 것이다. 교회는 세속의 물결로부터 벗어나 성도들의 가슴을 복음의 사랑으로 따스하게 할 것이다. 잘못된 율법적 사고가 구약시대의 안식일로 착각케 한 주일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벅찬 기쁨으로 맞아 위로를 받으며 쉼을 누리는 날이 되게 할 것이다. 건물 숭배적 사상이 농후한 성전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교회당을, 만나 반갑고 같이 예배를 드려 은혜가 큰, 그리고 함께 함으로 예수의 피로 이어진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집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럼으로 교회는 우리가 내쫓았던 예수께서 다시 들어오셔 우리를 친히 돌보시는 진리와 은혜 가득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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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XXX.XXX.239)
2017-01-09 06:47:51
요한복음 7장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고 성령의 충만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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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나무 (125.XXX.XXX.175)
2017-01-08 22:19:45
참 좋은 말씀입니다! 윗글의 말씀대로만 된다면 그런 삶이 천국이겠지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는 교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강도의 굴혈을 만든 교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한국교회,주님이 오시기 전에 얼마나 고쳐질수 있을런지요...주님 오시면 뭐라고 하실런지요... 오~~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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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문 (218.XXX.XXX.67)
2017-01-08 21:42:30
교회에 목화자만 있고 예수님이 안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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