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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언어의 우상화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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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2월 29일 (목) 18:44:11
최종편집 : 2017년 01월 15일 (일) 15:20:19 [조회수 :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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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번에 ‘문자적 읽기와 문학적 읽기’라는 제목의 글을 <당당뉴스>에 올린 일이 있다. 나는 그 글에서 성경은 문자적으로 읽기보다는 문학적으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요지의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내 글재주가 부족하고 그 글의 성격으로 인해서 조리 있는 글이 되지 못했다. 그 글을 읽고 찜찜했을 독자들을 위해서 미국의 신학자 샐리 맥페이그의 『은유 신학』(다산글방, 2001)의 첫머리에 나오는 종교 언어의 속성에 관한 부분을 여기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만으로는 문학적 성경 읽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글을 통해서 신학계에서 왜 문자주의를 문제 삼는지 그리고 왜 상징을 중시하는지 감을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문학적 성경 읽기

   
▲ Sallie-McFague

를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맛보기에 불과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호기심이 있는 독자들은 『은유 신학』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맥페이그가 종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 텐데, 보통 미국의 신학계에서는 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를 가리킨다.
                           
                                 * * * * * * *

종교 언어의 진리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언어를 문자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지속적이고 강력하고 보수적인 종교적 흐름이 있다. 오늘날의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종교적 보수주의는 자칭 ‘복음주의자’나 ‘근본주의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경향은 역사비평을 통해 성서를 상대화하기 두려워하고, 해석학적 관점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과 연관된다.

이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는 오류가 없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다. 성서 언어와 이미지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 있고 적합한 언어와 이미지다. 그들은 다른 모든 문헌들과는 달리 성서는 거룩한 문헌이며, 인간의 다른 산물과 달리 상대적이지도 다원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성서는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만다. 그들은 성서를 기록한,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의 말을 하나님을 정확하고 문자적으로 지시한 것으로 간주한다. (중간 생략)

나는 종교적 문자주의가 우리 시대에 횡행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문자주의를 견제할 만한 종교적 명상과 기도 수행을 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실증적 과학주의가 협소한 진리관을 문화 안에 침투시켰기 때문에 문자주의가 판을 친다고 말한다. 그 두 가지도 타당한 이유가 되겠지만, 우리 선조들과는 달리 우리가 상징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세계 만물이 다른 무엇인가를 상징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세계 만물은 자체의 존재를 나타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우리는 상징적 감성을 통해서 문자에 담긴 다층적 실재를 이해하는데, 이 문자는 문자 자체를 넘어선 의미를 담고 있다. 상징적 감성을 지닌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성서 문자주의자처럼 보이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상징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처럼 상대성을 잘 몰랐기 때문이지 그들이 진짜 문자주의자들인 것은 아니었다.

‘사중적 해석 방법’(네 해석 단계 중 세 단계에서 문자적 의미를 중시했던 해석 방법)이 성서 해석에서 상상력의 사용을 허용하고 고취하게 된 것은 3세기부터였다. 한동안 ‘유비적’이고 ‘비유적’인 여러 가지 해석이 흥미를 끌었었지만, 종교개혁기에 와서 성서는 스스로 해명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사단계를 포기함으로써 결국 문자주의로 귀착하고 말았다. (중간 생략)

나는 문자주의와 종교 언어의 진리에 대해서 서론적 개관을 마치기 전에, 사람들이 세속적이고 상대적이며 다원적인 문화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 왜 그렇게 열심히 기존의 종교 제도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사회 인류학적 시각에서 언급하려고 한다. 클리포드 기어츠가 지적한대로, 인간은 ‘미완의’ 존재로 태어나서 다른 동물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 원숭이와 꿀벌은 각기 원숭이 ‘세계’나 꿀벌 ‘세계’에 태어나서 애당초 그들에게 주어진 세계 안에서 산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세계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 인간은 반드시(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세워놓은 세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그 세계가 위협을 당하면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기어츠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가장 기초적인 안전을 위해서 우리가 건설한 세계를 보호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어떤 위협도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을 때는 사람들이 개방성, 상상력, 유연성을 보이지 못한다. 그 세계가 전통 안의 다원적인 시각에 의해서든 아니면 전통 밖의 경쟁 구조에 의해서든 상대화될 때, 그 세계는 더더욱 문자적이고 절대적이며 교리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예를 들어서,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사상 체계가 해방신학이나 타종교의 압력을 받게 될 때, 그것이 문자주의적, 절대주의적인 동면 상태로 후퇴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자주의로는 그런 압력을 이겨낼 수 없다.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나는 왜 문자주의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지, 또한 그 대안은 무엇인지를 다루려고 한다. 사려 깊은 두 신학자가 종교 언어 문제에 대해서 바르게 지적했는데, 한 사람은 직접적인 훈계를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종교 언어를 시에 비유했다. 영국 신학자 람제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개인 일기장을 들여다 볼 특권을 갖기라고 한 것처럼 ... 그래서 하나님이 왜, 무엇을, 언제, 어디서 행동했는지를 선뜻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신앙이 깊거나 자신의 시각이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충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구약성서 학자 필리스 트리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선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은유를 빌리자면 시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이렇게 은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어둠을 밝게 비추는 빛을 이해하는 길이며, 초월적 진리에 참여하고 현실을 껴안는 길이다. 손가락을 달과 동일시하거나, 달은 모르고 손가락만 알면 핵심을 놓친다."

트리블의 말을 우리의 주제와 관련시켜서 설명하면, 인간의 언어를 신적 실재와 동일시하거나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초월적 진리에 참여하고 세계를 껴안는” 길인가? 트리블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은유적’ 방법이라고 부르고, 그 방법을 종교 언어의 형태로 상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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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 (122.35.176.192)
2016-12-30 19:50:16
알레고리 해석의 거장 오리겐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세부사항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은 아담, 그의 목적지 예루살렘은 낙원, 여리고는 세상, 강도들은 인간의 원수, 상처는 죄, 제사장은 율법, 레위인은 교회, 두 데나리온은 성부와 성자에 대한 지식, 여관 주인은 교회를 지키는 천사, 사마리아인이 돌아 온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렇게 해서 오리겐은 그 비유 이야기에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재림에 이르는 거대한 신학적 체계가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순교의 시대에 살았던 암브로스는 이 비유에서 박해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순교의 고난을 외면하고 세상의 안일과 쾌락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보았고, 강도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박해자들로 보았습니다.

이 두 신학자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신학적 의미 혹은 교훈적 의미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서 각기 다른 교훈을 끌어냈습니다. 여기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면 해석자마다 자기의 입맛에 맞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전하려고 했던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에 대한 답과는 너무나 엉뚱한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1888년에 율리허의 <예수의 비유 연구>가 나오면서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오류가 드러났는데, 율리허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17-21절을 보면 4천 명을 먹이신 후 예수님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특별히 19-20절에서 떡 다섯 개를 5천 명에게 먹였을 때 몇 바구니가 남았으며 4천 명에게 일곱 개를 주었을 때는 몇 광주리가 남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주목을 끄는 것은 여기서 물고기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천 명을 먹이실 때의 4천, 일곱개, 생선 두어 마리가 5천 명을 먹일 때의 숫자와 다른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두어 마리'는 막연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21절에 가면 제자들에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무엇을 깨달으라는 말씀일까요? 11-12절로 돌아가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천 명을 먹이는 능력을 보여주었는데도, 바리새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표적을 보여주었는데도 그것을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더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조차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시고 4천 명을 먹이신 두 이적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라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숫자에 집착하면 5천 명 이적과 4천 명 이적에서 각기 다른 교훈을 찾게 되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문맥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학적 성경 읽기의 기본입니다.
리플달기
0 0
무릇돌 (218.38.160.102)
2016-12-31 00:39:01
사마리아인의 비유?
잘 아시겠지만요.
강도=의적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유대인 부자를 때려 눕히고
물건을 빼앗았지요.
그런데 그 거의 죽어가던 어떤 사람(유대인 귀인)을
비슷한 계층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외면합니다.
그러던 중 어리석은 부자 사마리아인이
그 중상자를 거의 매춘굴에 가까운
당시의 여관으로 옮기고
여관 주인한테서
바가지를 옴팍 쓴다는 이야기로
근자에 들었습니다.
아닌가요?

김재현의 '원시기독교와 Q복음서'에
나옵니다.
본래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의 청중인 소작농과 도시노동자들로 하여금
한바탕 배꼽쥐고 웃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결론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바보 사마리아인이라는...
리플달기
0 1
무릇돌 (218.38.160.102)
2016-12-30 23:24:0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떡은
예수의 말씀과 신학(신앙)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그 "떡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다른 표적을 요구하지요.
일곱 개였던 떡(8장 5절)은 다시
한 개(14절)가 됩니다.
일곱으로 완전하였던 떡은
하나로도 완전합니다.
왜일까요?
떡은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가르침이요,
결국에는 주님 자신(몸=떡)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아셨겠지마는요.

마가에서 떡은 예수입니다!
다섯 개든, 일곱 개든, 하나든.
주님의 말씀, 예수의 가르침,
예수 그 자신 오롯이만
있으면 배고픔은 해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자입니다.
그의, 그분의 가르침은,
오경을 '경천애인' 두 계명으로 해석한 것이고
또 그것을 '사랑의 계명'하나로(요한복음)
만드신 그것이며,
그것을 또 몸소 사신(실천하신)
그의 몸입니다!
이게 기독교이고 이게 진리입니다.
아시겠지만.
여기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세서리요
과하면 예수를 왜곡하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도 마가-정치적으로 읽기에
비슷하게 나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주저리대서.
리플달기
0 1
무릇돌 (218.38.160.102)
2016-12-30 23:07:05
좋은 설명에 감사하면서
물론, 성경은 같은 본문이라도
만가지가 넘는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그것이 또한 경전의 묘미 일테고요.
문제는 설교(해석)되는 그 본문이
독자와 청중들에게 어떤 의미,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느냐이겠지요.
따라서 오리겐, 암브로스 그리고 율리허 조차도
다 옳을 수도 또 다 그를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그 때의 그 해석이
어떤 유익(덕)을 끼쳤는가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인간을 진정 거듭나게 하고, 위로하고,
바로 서게 한다면...
그 어떤 '파격적인' 해석이라도
괜찮다고 보여집니다.

카렌 암스트롱의 '성서 이팩트'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리플달기
0 3
무릇돌 (218.38.160.102)
2016-12-30 17:12:44
문자적, 문학적 성경 이해와 관련하여
그리고 특별히 오병이어 이야기와 관련하여
여기 당당뉴스의 광고에 계속 게시되는
박원일 목사님의 '마가복음-정치적으로 읽기'를
한번 읽기를 권합니다.

개인적으로 마가복음은 바울류의 복음을
교정하기 위한 최초의 복음서 문서로
저술되었다고 믿기에
마가복음에 집중하던 중
이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은 출판하는 과정에서
사연이 좀 있었던 책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예수살기 모임에서 최근에
모임 텍스트북으로 사용했던 문제의
책이지요.
독자들로 하여금 신학을 다시하고
성경을 다시 쓰라는 그런
파격적인 책입니다.
아주 유용한, 의미있는...

<뱀발>
21세기 현대의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필독해야 할 도서라고 감히
추천합니다.
이책을 읽지 않고
기독교 복음과 신앙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생각하기를 포기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
사료됩니다!
리플달기
0 3
화평 (122.35.176.192)
2016-12-30 15:27:07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당신이 메시아냐고 물으니까, 예수 말하기를, 맹인이 보고 한셈병 화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본 대로 가서 요한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은 바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라신과 벳새다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수가 행한 권능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병고치는 이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행한 이적은 바로 예수의 권능을 보여주는 사건, 교리적으로 말하면 그가 하나님이 보낸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요?

그러면 오병이어의 사건도 그렇게 볼 수 없을까요? 병자를 고쳤을 때 남자를 고치든, 여자를 고치든, 맹인을 보게 했든, 한셈병 환자를 고쳤든, 한 사람을 고쳤든, 열사람을 고쳤든 그런 세세한 것과는 상관 없이 병자를 고쳤다는 사실이 바로 예수의 권능를 나타내는 것, 예수가 하나님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 아닐까요? 오병이어 기적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닐까요?
리플달기
0 3
무릇돌 (218.38.160.102)
2016-12-30 19:20:20
정말로
예수가 문자 그대로 하느님으로
믿는 그런 순진유치한(?)
분이신가요?
리플달기
0 3
무릇돌 (218.38.160.102)
2016-12-30 11:04:24
'오병이어' 사건의 적실한 이해는?
‘오병이어’ 기적의 올바른 해석- 문자적 이해? 문학적 해석?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

<마가복음 6장 38~44, 표준새번역>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행하신 기적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14: 15~21), 마가(6:38~44), 누가(9:12~17), 요한(6:5~13)의 네 복음서가 이구동성으로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기적은 저 유명한 ‘오병이어’ 즉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의 기적이다. 예수의 설교를 듣고자 찾아온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도 오천명이나 되는 허기진 남자들을 예수께서 ‘떡 덩이 다섯과 생선 두 마리’로 배부르게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도록 남겼다는 내용의 기적 이야기이다.

“먼저 오병이어 이야기의 성서적 배경을 생각해 보자. 이 이야기는 기원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새로운 이스라엘 건설이라는 회복운동(restoration movement)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읽어 보면 모세 이야기가 연상된다. 출애굽 이후 모세는 가나안 진출에 앞서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여 백성들을 군사적으로 재구성한다. 모세는 자신을 도와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선출한다(출 18:21). 마찬가지로 예수는 군중들을 백 명씩 혹은 오십 명씩 않게 한다(6:40). 그렇다면 이것이 모세가 행했던 군사 소집을 염두에 둔 기획이었을까? 예수는 “목자 없는 양”같은 백성들을 보고 불쌍히 여긴다. 이 표현은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울 때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던 기도에 등장한 말이다(민 27:17). ‘예수’나 ‘여호수아’나 같은 이름을 달리 표현할 뿐 모두 ‘구원’을 뜻하는 말이다.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인 (기적적인) 사건 역시 구약성서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출애굽기 16장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인 일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만나를 가리켜 ‘하늘로부터 내린 빵’이라고 표현한다(요 6:31). 또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도 이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는 구약성서의 기록이다. 엘리야가 죽은 후 그의 제자인 엘리사가 엘리야의 일을 재현한다(왕하 4:42~44). 특히 엘리사 이야기는 오병이어 이야기와 공동점이 많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 엘리사와 예수는 소량의 빵으로 다수의 사람을 먹이고도 남긴다. 엘리야로 비유된 요한은 자신보다 강한 자의 등장을 알리고(막 1:8),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를 “선지자보다 나은 자”(마 11:9)로 말함으로써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보다, 혹은 그 어떤 지도자보다도 높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장 쉽고 일반적인 이해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보는 것이다. 즉 이 사건의 초점이 예수의 신성과 유일성, 예외성을 증거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이야기를 서술하는 저자의 문체가 지극히 기계적이고 형식적이다. 초자연적 기적을 보도할 때 수반되기 마련인 감동이나 흥분, 놀라움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떡을 먹은 군중들의 반응도 비교적 조용하다. 오히려 이 점이 독자들에게는 더 이상하게 보인다.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윤리적 해석이다. 오병이어 이야기를 서로 가진 것을 나누라는 도덕적 교훈 정도로 받아들인다. 제자들이 먼저 자신들의 가진 것을 내놓자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을 꺼내어 서로 나누었다는 말이다...

오병이어 사건을 말할 때, 우리는 먼저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불가능성(기적)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이 사건을 단지 기적으로만 이해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교훈을 남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숫자에 굳이 의미를 두자면, 오천 명에서 다섯(五)은 모세 오경(五經)을 의미하며, 천(千, mille)은 무한정 많은 양을 숫자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축복을 통해 자손을 천 배나 많게 하고(신 1:11), 천 대(generations)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언약을 지킨다(신 7:9). 시편 105:8은 영원함과 천 대를 시적 평행구로 표기한다. 인간의 천 년과 하느님의 하루를 비교한 표현(시 84:10, 벧후 3:8)이라든가 계시록의 천년왕국 역시 영원함과 무한함을 상징한 말이다. 비밀스런 숫자인 144,000(계 7:1, 14:1, 3)을 12×12×1000으로 분석하면, 열둘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 영원할 것을 암시한 말로 보인다. 이렇게 떡 다섯은 오경, 더 나아가 구약성서(토라)를 상징한다.

본래 예수가 제자에게 물었던 것은 떡(bread)이 얼마나 있는가, 떡의 수량이었다(6:38). 말씀과 떡은 쉽게 연관 지을 수 있다. 그러면 물고기는 어떠한가? 예수는 베드로를 부르면서 그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고기와 어부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빗댄 암묵적 표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물고기 문양이 그들 회합장소나 무덤에 쓰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표식으로 쓰였다고 한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ichthus(잌투스)라고 쓰는데, 각각을 머리글자로 만들면 예수(Iesous), 그리스도(Xristos), 하느님(theos), 아들(uios), 구주(soter)가 된다. 곧 예수가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그러면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오경과 관련해 어떤 서기관이 묻는다.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입니까?(막 12:28). 첫째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오경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묻는 장면에서, 예수는 두 마디로 답한다. 빵 다섯이 오경, 더 나아가 구약성서(토라)를 상징한다고 볼 때, 그 말씀을 정리한 것이 물고기 두 마리가 상징하는 의미이다. 첫째 계명을 묻는 서기관에게 예수가 두 마디로 정리한 것처럼, 빵의 숫자를 묻는 예수에게 제자들 또한 빵과 함께 물고기 숫자로 답한다. 여기서 빵은 성서와 전통을 가리키고 물고기는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한 ‘신학하기’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오병이어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이다.”

<박원일, ‘마가복음-정치적으로 읽기’에서 갈무리>

예수 기적의 핵이라 할 수 있고, 성경의 모든 기적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박원일 목사는 전술한 바와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문자적 이해(해석)입니까? 문학적 해석(이해)입니까? 이 글을 쓰는 저는 개인적으로 이 해석이야말로 가장 적실한 ‘오병이어’의 성경적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석되고 이해된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 당시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의 설교말씀을 듣다가 저녁이 되어 허기진 군중들을 영적으로 충분히 ‘배불리’할 수 있을뿐더러,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충분한 하늘의 양식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학적 이해(해석)인가요? 아니면 문자적 해석(이해)일까요? 성서적-종교문학적-신학적 이해이며 해석이라 할까요? 으음, 성서문학적 이해(해석)이라 하면 될 듯 하네요. 성서문학적! 성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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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기 (211.34.110.112)
2016-12-30 15:42:46
숫자에 집착하는 것도 문자에 집착하는 것 만큼이나 엉터리
빵의 숫자, 물고기의 숫자 등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넌센스 아닐까요? 마태복음 15장에는 오병이어 설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다시 나옵니다. 이번에는 빵 7덩이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4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의 부스러기를 거두었다는 설화입니다. 그럼 모세오경이 아니라 모세7경으로 이해해야 하나요?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그저 신화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다가 대충 문자화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님께서 제시한 해석 중 두 번째 해석인 도덕적 교훈 정도가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그저 예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얘기겠지요. 간단한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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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는돌 (218.38.160.102)
2016-12-30 17:02:18
물론 숫자도 문자와 함께 가지요...
그렇지만 왜 하필 그런 숫자가 있을까요?
고대 유대인들에게 숫자는 또 다른 의미전달의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계시록을 보세요.

그리고 사천명의 해석도
마가복음-정치적으로 읽기를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그저 신화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부풀려지다가"
그랬다 해도 왜 그런 숫자일까요?
저도 도덕적 해석을 선호했었습니다만
그것도 어쨌든 '기적같은' 사건을 전제하는
문자적 해석의 일종입니다.
아닌가요?

간단한 걸 어렵게?
좀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물론 마가는 당시 유행하던 기적이야기가
듬뚝 양념이 된 덕론이라든가
위인전이라든가 하는 양식을
원용했겠지요.
그렇지만 그는 구약이야기에 익숙한
저자일 것입니다(조엘 마커스, 주님의 길).

그가 제시한 오병이어 이야기도
마가 이전의 원시기독교의
전승일 수도 있겠지요.
다른 세 복음서 작가들에게도 익숙하고
원시기독교에서 익숙한...
그리고 그럴듯하게 해석되는...

인간만이 의미를 찾는 동물이 아닐까요?

그리고 오병이어를 그렇게(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기독교는 오늘날의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
덕을 끼치는 종교와 공동체를 산출하겠지요.
끝까지 예루살렘 교회의 의인 야고보의
의혹을 떨치지 못하였던 의문의 그
바울류의 이상한 복음과 대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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