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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기 새로 읽기
김종길  |  kimzongg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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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2월 23일 (금) 14:09:05
최종편집 : 2016년 12월 26일 (월) 04:20:29 [조회수 : 6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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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욥기 새로 읽기 ―

김종길 / 구약학

 

1. 머리말

 

이따금 교회에서 과보적 발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김홍도 목사는 2005년 서남아시아 지역에 발생한 해일을 “이방신을 섬기는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2011년 “일본의 대지진은 우상숭배 탓”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최성규 목사는 “1995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뒤늦게 구출된 청년 세 명이 모두 효자”라면서, 효행 자녀가 복을 받는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으로 사망한 학생들은 모두 불효자들일까요? 아니면 김삼환 목사의 말대로, “대한민국 국민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나님이 세월호를 침몰시킨” 것일까요?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재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곳에서, 이런 재앙을?”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욥의 질문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물음이 종종 인생에서 제기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서를 제대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종교에서 율법, 예언, 지혜, 묵시 등의 전통이 어울려 야웨 신앙과 히브리 성서를 형성하였습니다. 주류를 이루는 율법 및 예언 전통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에서 아래로 선포하고, 지혜문학은 아래에서 위로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대표적인 지혜문학은 잠언, 전도서, 욥기 등입니다. 욥기는 전통적/인습적인 지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비판적/전복적인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기록이 아니라 심오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위대한 문학 작품입니다. 욥기의 기록/편집 연대는 주전 5-3세기로 추정됩니다. 성서본문의 배경과 본문이 형성된 정황은 다릅니다. 욥기의 역사적 ‘배경’은 족장시대입니다. 욥기의 ‘삶의 자리’는 포로기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욥기는 족장시대의 이야기를 사용하여 유대 공동체가 겪은 고난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욥은 인내와 순종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약 5:11). 욥은 인내를 통하여 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욥기를 부분적으로 이해한 것이지요. 서막(1-2장)과 종막(42:7-17) 부분만을 읽을 때, 욥은 전형적인 인내와 순응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중심 부분(3장-42:6)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욥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발언하는 욥은 회의적이고 반항적이며 도발적입니다. 욥은 충고하는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고, 급기야 하나님에게 항변합니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내용을 간과하고, 의심하고 항변하는 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욥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2. 욥기의 구조

욥기는 한 작가가 저술한 단일 작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통일성이 없는 몇 개의 작품이 결합되어 형성된 작품입니다. 욥기는 크게 산문(서막, 종막) 및 운문(대화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산문으로 서술된 원래의 이야기에 운문으로 기록된 내용이 나중에 추가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창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욥기의 개략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서막: 1장-2장 (산문)
    2. 중심 내용: 3장-42장 6절 (운문)
       (1) 욥의 탄식: 3장
       (2) 욥과 벗들의 논쟁
         ① 첫 번째 논쟁: 4장-14장
         ② 두 번째 논쟁: 15장-21장
         ③ 세 번째 논쟁: 22장-31장
         ④ 엘리후의 논박: 32장-37장
       (3) 하나님과 욥의 대화: 38장-42:6
    3. 종막: 42장 7-17절 (산문)

 

   
▲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욥과 그의 친구들, Ilya Yefimovich Repin (1844 - 1930), Job and His Friends, 1869, 캔버스에 유화, 133x199 cm, 러시아박물관

 

3. 욥과 벗들의 논쟁

시문체로 시작되는 욥기 3장은 앞에 나온 1-2장의 분위기를 뒤집습니다.

불경하게 보이는 3장은 욥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욥은 3장에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원망과 탄식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벗들의 인습적인 신학은 비상적인 상황에 처한 욥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욥과 벗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자신들의 옳음을 증명하려 애씁니다.

 

(1) 욥과 벗들의 논쟁(4장-31장)

히브리 성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명기신학의 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는 인과응보, 곧 “순종-강복” 및 “불순종-심판”의 도식입니다. 신명기역사서(여호수아, 사무엘서, 열왕기)는 ‘범죄 → 징벌 → 회개 → 구원’이라는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욥기는 지혜전통의 관점에서 신명기신학의 보응사상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욥의 벗들은 율법서와 예언서에 근거한 정통 사상, 즉 인과응보 교리로써 욥의 고난을 해석하여, 욥을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벗들의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대전제: 범죄에는 징벌이 따른다(고난은 죄의 결과다).

② 소전제: 욥은 고난을 겪고 있다.

③ 결론: 그러므로 욥은 범죄하였다.

친구들이 보기에, 욥의 고난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욥이 죄를 지었기에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욥은 지혜문학 입장에서 인과응보를 내세우는 전통 신앙에 도전합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은 “범죄-징벌”의 공식으로 욥을 정죄하며 공격하고, 이에 대하여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욥과 벗들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서 논쟁이 전개됩니다(4-14장; 15-21장; 22-31장). 욥과 벗들의 첫 번째 논쟁(4-14장)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엘리바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7-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5:18).

△ 욥: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6:10).

▲ 빌닷: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8:4).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 욥: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9:33).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10:7).

▲ 소발: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11:7).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11:14).

△ 욥: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13:4).

 

벗들은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욥은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논쟁이 거듭되면서, 서로의 주장이 더욱 격렬해집니다.

세 번째 논쟁(22-31장)에서 발언의 주체가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24장 18-25절은 소발의 발언으로 추정됩니다.

26장 5-14절은 25장의 속편으로, 빌닷의 발언으로 추정됩니다.

27장 13-33절은 소발의 발언(24:18-25)을 보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엘리후의 논박(32장-37장)

32장부터 뜬금없이 엘리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신원을 밝히는 유일한 발언자입니다(32:6). 욥과 벗들의 이름은 이방식인데, 엘리후는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엘리후의 연설은 후대의 첨가 부분으로 간주됩니다. 그의 발언은 전술한 내용을 요약하고, 전통적인 입장을 강화하며, 뒤에 전개될 내용을 준비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세 친구가 다루지 못한 관점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는 형벌적 고난과 아울러 교육적 고난을 제시합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① 욥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다(33장). ② 하나님은 죄 지은 자를 징벌하신다(34장). ③ 욥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35장). ④ 하나님은 공의로우며 전능하시다(36, 37장).

엘리후는 공의로운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욥을 죄인으로 단정합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을 보면, 욥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난의 교육적 의미를 제시합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33:30). 엘리후는 결국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34:11). 다른 벗들과 마찬가지로 엘리후는 욥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벗들은 인과응보의 틀에서 논리를 전개합니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욥도 역시 인과율에 얽매입니다.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연고 없는 고난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욥과 벗들은 인과율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등장하여 욥과 담판하십니다.

 

4. 하나님과 욥의 대화

하나님과 욥은 두 차례에 걸쳐서 대화합니다.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틀을 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

①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 38-39장

②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 40장 6절-41장

욥의 질문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전능하다면, 어찌하여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에 자연 현상(38:4-38), 동물 세계(38:39-39:30), 두 괴물(40:15-41:34)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폭풍우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질문 형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아울러 ‘피조물(인간)의 무지와 유한성’을 입증합니다.

 

(2) 욥의 응답

① 욥의 첫 번째 응답: 40장 3-5절

② 욥의 두 번째 응답: 42장 1-6절

 

신명기역사서에서 보듯이, 신명기신학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지혜문학은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에게 접근합니다. 욥은 폭풍우, 곧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간접 경험(귀)을 넘어서 직접 경험(눈)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욥이 만난 하나님은 예측 불가한 하나님,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높은 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체험에서 욥이 얻은 결론은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그가 어떤 일을 행하시든지 그를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체험을 통하여 욥이 제기한 질문이 해소됩니다.

 

5. 욥기의 현대적 의의

욥기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산문으로 된 서막(1-2장)과 종막(42:7-17)은 독립적인 설화입니다. 원래의 이야기에서 욥은 고난 가운데 인내하고 복을 받습니다. 여기에 시로 이루어진 대화 부분(3장-42:6)이 삽입되었습니다. 여기서 욥은 의심하고 항변합니다. 편집자는 두 이야기를 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재구성된 욥기는 유대의 정통 신학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욥은 누구일까요? 그는 역사적 인물일까요? 아카드어(Akkadian)로 “아버지는 어디에?”라는 뜻을 지닌 ‘욥’이라는 이름은 물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독자는 욥을 개인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 모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후자로 본다면, 욥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욥의 고난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수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포로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일어납니다. 죄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은 과도한 심판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을 계속 신뢰할 수 있을까? 욥기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욥기를 읽다보면, 벗들의 설교에는 거부감이 없는데 욥의 항변은 부담스럽습니다. 오히려 벗들의 충고가 지당하고 교훈적입니다. 욥의 발언을 설교의 소재로 삼기에는 부적절합니다. 어느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그런데 결말에서 하나님은 욥이 옳고 벗들이 틀렸다고 판정합니다(42:7). 오늘날 우리는 욥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욥기의 현대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욥기는 정통 신학의 ‘인과응보’ 교리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친구들의 주장대로, 고난은 죄보(罪報)일까요? 욥의 고난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른바 신명기신학의 ‘순종-강복, 범죄-징벌’ 공식은 성찰과 회개에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은 자기 탓으로 어려움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모든 문제가 인과응보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만약 모든 경우에 고난이 죄의 대가라고 보면, 지금 슬퍼하는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힘없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죄인이 됩니다.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내 기준에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복합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지며, 고난의 의미가 단순하지 않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고난은 베일에 가려진 신비입니다. 욥은 끝까지 자신이 고난당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질문이 해소될 뿐입니다.

둘째로, 욥기는 신정론(神正論)에도 이의를 제기합니다.

욥기는 하나님과 악의 존재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는 신정론을 고난의 문제에 엄격히 적용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보응론과 마찬가지로, 신정론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범위에 제약되지 않습니다. 우주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욥과 하나님의 대화(38:1-42:6)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욥은 전능한 하나님의 섭리를 수긍할 따름입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셋째로, 욥기는 맹목적 신앙을 거부하고, ‘의심을 거친 믿음’을 제시합니다.

알베르 카뮈가 지적했듯이, 예나 지금이나 삶은 부조리합니다. 부당한 현실에 욥은 고민합니다. 신앙의 성숙에서 성실한 고민이 요구됩니다. 성실한 의심은 적극적인 신앙의 행위입니다. 욥은 신앙을 빙자하여 삶의 문제와 모순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욥은 하나님에게 도전하고 항변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시켜 준 전통적 신앙에 도전합니다. 덮어놓고 믿기보다 의심하면서 진리를 추구합니다. 자끄 엘륄(Jacques Ellul)도 “의심을 거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여 왔습니다. 덮어놓고 믿기보다 정직한 의심이 건강한 태도입니다.

넷째로, 욥기는 인생에서 무(無) 또는 부정(否定)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욥은 기존의 세계관을 부정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존재자성을 부정하는 무(Nichts)의 과정을 통하여 근원적 세계가 열린다고 통찰합니다. 고유하고 본래적인 자기를 찾는 데에 이제까지 딛고 있던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심연(Abgrund)의 경험이 요구됩니다. 희망은 절망 안에 있습니다. 참된 희망은 정직한 절망에서 움틉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하여 참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존의 구원관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습니다.

다섯째로, 상담학의 관점에서 욥기를 읽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은 감정을 억압하지 말고 충분히 애도해야 합니다. 불행에 처한 자는 퀴블러 로스가 말한 5단계, 곧 ① 부정, ② 분노, ③ 협상, ④ 우울, ⑤ 수용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겪어야 합니다. 그러하려면 열린 마음으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애도의 과정에서 가족이나 친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욥이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게 된 것은 고난의 현장에 동참한 벗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벗들에게서 아쉬운 점은 교리를 앞세우다 보니 공감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상대자와 입장을 같이할 때, 공감과 진정한 위로가 시작됩니다. 거짓 희망으로 어설프게 위로하지 마십시오. 타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우는 자들과 더불어 우십시오.

여섯째로, 욥기는 ‘조건 없는 신앙’의 경지를 제시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에게 묻듯이, 인간은 과연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이에 대하여 욥기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보상을 강조하는 인과응보의 신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참 믿음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1:9)하는 것입니다. 욥기는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소위 ‘삼박자 축복’이 진복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값싼 은혜입니다. 참된 복은 ‘믿음’ 자체입니다. 그것은 까닭 없이(조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여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2:3). 욥기의 결론은 이미 서론에서 욥의 고백을 통하여 명시되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2). 그 고백이 내면화되기까지는 ‘성실한 고민’과 ‘정직한 절망’의 여과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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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맞을까? (203.226.192.86)
2016-12-23 21:11:52
참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욥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명시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 가지 토를 달자면,
조건 없는 신앙은 무조건적 순종이라는 말과 등치시킬 수 있고, 그래서
조건 없는 신앙은 이단과 지극히 높으신 목사님들을 위한 착취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이나 교주들이 "뭐 바라고 신앙생활 하면 안된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교인들이 내는 헌금 꿀꺽하는 게 한국의 이단과 대다수 교회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에서 이성적이어야 할 때와 감성적이어야 할 때를 구분하는 겁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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