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6월 어느 날 후배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도와달라고 하는 소개를 받고 찾아온 여인은 남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그만 차에 치여 사망했는데 가해자는 무면허에 음주에 과속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을 병원에 실어다 놓고 도망을 가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가해자가 누군지 알아내기는 했지만 경찰이 사고를 낸 사람은 잡을 생각도 안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싸고 도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는 것이다.

남편을 갑자기 잃어버린 것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판에 공정할 것으로 생각했던 경찰이 오히려 가해자 편에 서서 일을 처리하는 꼴을 보니 기가 막히고 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통사고에서 경찰이 돈이 나올 일이 없는 피해자보다 돈이 나올 만한 가해자 위주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녀에게 더욱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일은 십여 년을 다닌 교회의 목회자들 태도였다. 장관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는 큰 교회이지만 담임 목사는 가난한 신자가 당한 불운을 알 리가 없고 부교역자들만 처음에는 관심을 좀 가지다가 일이 계속 어렵게 꼬이자 '은혜롭지 못한'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보다 못해 신학생 전도사가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경찰 측에도 연락을 해보고 변호사와도 의논을 해보았다.

두 달 후에 그 여인이 다시 나를 찾아왔는데 다행히도 합의를 하고 가해자가 자수를 해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상금을 받은 돈의 십일조라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집사님! 이 돈은 남편의 피값 입니다.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라고 했지만 일단 돈이 들어오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그녀의 단순한 믿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십일조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난감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면 이 돈을 우선 내가 보관하는 걸로 하자, 그러나 생각이 달라지거나 더 좋은 곳에 쓸 곳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가라."

그러나 그 여인은 그 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건물을 얻는데 쓰면 어떻겠느냐는 뜻을 전했더니 그녀가 좋다고 했다. 그 돈을 종자돈으로 해서 후원자들 가운데 부담이 크게 되지 않을 분들에게 부탁을 해서 조금씩 돈을 모아 나갔다. 그렇게 해서 지하 건물을 얻어서 입주예배를 드리는 날 “이 세상 사는 동안”을 불렀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스러져도

그 보다 더욱 귀한 것 생명을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뺐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그 후 잘 아는 베테랑 대공 형사와 대화 중에 “젤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라고 물으니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 조.... 뭐였는데”라고 했다.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조 아무개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인천의 어느 공단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암약(!)하다가 공장주의 신고로 잡혔단다.

“그런데 왜 기억 나시죠?”

“밥을 주니까,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요?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걸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요”

“말도 없는 놈이었어요.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었어. 주변 조사해 보니까 뭐 의식화 같은 걸 시도하지도 못했더구만. 그렇게 수줍어했대요.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더라고요. 위장 취업이라면 좀 붙임성이 있고, 선동도 할 줄 알고 해야 하는 거 아니우.그런데 녀석은 영 아니더라고. ”

“잡혀 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어요. 그런데 걔는 진짜 말 한 마디 안 했어요.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고.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요. 아 이놈은 진짜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더라고. 말을 시켜도 한 마디도 안 해요. 마치 벙어리처럼.”

서울 법대를 나왔다니 그래도 고시라도 봤을 것이고 어느 동네에선가 인권 변호사 쯤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지금은 뭘 하는지 묻자 형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죽었어요.”

“네?”

“집행 유예로 나왔는데 다른 공장에 또 갔어요. 어느 날 부평역 앞에서 녀석을 우연히 만나서 역 앞에서 한 1시간 동안 붙잡고 훈계,아니 하소연을 했어요. 너 제발 이렇게 살지 말아라. 강원도 태백인가가 고향인데 아버지는 광부였고. 그 아버지가 얘가 서울 법대 갈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모르긴 해도 동네잔치를 3박 4일 했을 거야. 막장 인생에서 용 난 거 아네요? 그래서 내가 걔한테 빌었어요. 나중에 너 잘 된 뒤에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되는 거니까,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구. ”

그 만남이 있은 지 달포가 지났을 때 형사는 동료가 전하는 조 모 학생의 비보를 들었다. 위장 취업 중이던 공장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 깜박 졸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 차갑고 무거운 기계의 금속성 밑에서 그 젊은 피를 쏟고 말았다는 것이다.

“유치장에서 걔가 자주 부른 노래가 있었는데.... 시끄러운 투쟁가 같은 뭐 그런 건 아니었고...... ‘ 이 세상 사는 동안…. 그런 것이었는데”

김기춘과 우병우가 졸업한 서울 법대. 한국 사회에서 서울 법대는 가장 주요한 인맥이고 현대판 왕족에 가깝다.

40년전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아직 신학대학을 졸업을 하지 못해서 학도호국단(총학생회)에 속해 있었다. 호국단 간부여서 새마을 수련원에 연수를 가야 했다. 연수원 방에는 먼저 거쳐 간 수료생들이 쓴 수료 소감문이라는 것이 비치되어 있어서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 읽어보도록 해놓았기에 한번 훑어보았다. 그 중에 서울법대 학생회 간부 학생이 쓴 글이 있었다.

“이제까지 과에서 1년에 한두 명씩 공부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학업을 그만두는 동료가 생길 때 마다 안됐다는 생각 보다는 ‘아,경쟁자가 하나 줄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교육을 받는 동안 그 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돌아간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세상에, 후회하고 반성할 것도 수준이 있지 서울 법대생의 의식수준이 새마을 교육을 받고 바뀔 정도였다는 것이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비록 반성을 한다고 했지만 법대 3학년생이 될 때까지 이런 정도의 생각을 했던 사람이 반성을 하면 얼마나 했겠나 싶었다. 그 정도의 윤리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패스를 해서 한국 사회를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조 군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