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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적 읽기와 문학적 읽기임종석 목사님의 글에 대한 답변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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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2월 19일 (월) 14:42:44
최종편집 : 2017년 01월 15일 (일) 15:19:42 [조회수 : 2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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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목사님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사실인가 설화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당당뉴스>에 올려서 내 글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셨기 때문에, 답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쓴다. 이 답변서의 제목을 ‘문자적 읽기와 문학적 읽기’로 정한 것은 우리의 의견이 갈리는 것은 이 두 가지 성경읽기의 차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     *    *    *   *

신학자들이 문학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신대원 2학년 때였다. 교회에서는 문학을 싫어한다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고 있다는 발견은 참으로 의외였다. 나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인데도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는 요즘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는다는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이 의외의 발견은, 내가 문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내게 큰 반가움이었다.

이 발견에 고무되어서 나는 신대원에서 ‘현대신학과 문학’이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을 썼다. 그 후 졸업논문을 보완해서 『왜 그리스도인에게 문학적 소양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고, 그 책을 신학대학 교양과정에 개설된 ‘성경과 문학’ 과목의 교재로 사용했다.

임종석 목사님과 나는 같은 대학에서 가르쳤고, 신학대학의 동문일 뿐 아니라 문학전공자들이기 때문에 그동안 문학과 신앙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임 목사님은 내 신대원 논문도 읽었고 그 다음에 내가 낸 교회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내세우는 문학적 성경읽기에 대해서 언급하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문학전공자인 임 목사님도 문학적 성경읽기를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 <당당뉴스>에 공개적으로 내 글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 반박하는 글을 올린 것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그 글에 언급된 ‘신화’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거기서 신화적 이야기라는 말을 한 것은, 그 글에서 언급한 대로, 융, 엘리아데 등이 주장하는 종교와 신화의 관계 그리고 성경의 언어를 신화적 표현, 은유, 상징으로 간주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에 기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근본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일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까지도 문학에 관심이 많고 성경해석에 문학비평적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요즘 문학적 성경읽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마디로, 임 목사님의 의견과 내 것의 차이는 전통을 따라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가, 현대적인 추세를 따라서 문학적으로 읽는가의 차이다.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문학적 성경읽기나 신화를 언급하면 그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기보다는 ‘당신이 기독교인이냐?’ ‘당신은 이단이다’라고 거칠게 말하면서 반감을 표시한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과 교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 거리가 멀다. 그래서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 가운데는 교수가 이상한 것을 가르친다고 교수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교수들이 자기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을 가르치는 데에 크게 실망한 학생들 가운데에는 자퇴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신학생들 사이에서는 ‘공부는 진보적으로 목회는 보수적으로’라는 말이 돌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로 문학적으로 읽느냐 문자적으로 읽느냐가 포함된다. 글쎄 신학생들이 진보적으로 공부했으면 진보적으로 목회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보수적인 대학에서는 배우는 것조차 보수적인 신학이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라고 교육받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

나는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창세기 1장을 과학적 글이라고 믿는 분들에게 그런 성경읽기를 재고해 보라고 권면해 왔다. 지난주에 <당당뉴스>에 올린 ‘왜 예수님의 탄생기록들이 이토록 다른가?’에서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히려고 했다. 문학적 성경읽기가 문자적 읽기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그런 읽기가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성경을 접근하는 것은 비유적 표현을 즐겨 사용하시고 비유적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신 예수님의 의도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부시대부터 19세기까지 오랫동안 문학을 외면했던 교회가 왜 지금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나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된 사람들 중의 하나다. 상대를 모르고 무조건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교양인이 할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현대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것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것은 지도자들의 복음적이지 않은 삶에도 원인이 있지만, 현대의 지적 풍토 안에서 사는 사회인들이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우선은 전자가 주된 원인으로 보이지만, 나는 앞으로 후자가 더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그리고 이미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한국의 교회가 쇠퇴하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서양의 교회들이 문을 닫아가는 이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이러한 파국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물론 우선적으로 우리는 기독교인 답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풍토가 달라지면, 성경해석 방법도 해석된 내용도 달라지게 된다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학 분야에서도 근대 이전의 시대에 받아들여졌었지만, 탈근대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성경해석도 신학도 예외가 아니다.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신학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화의 시대, 열린 시대를 맞아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도 세상을 향해서 그리고 새로운 학문을 향해서 열려야 한다. 닫힌 마음으로는 열린 시대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마음을 연다고 해서 성경 안에 세상의 잡스러운 것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임 목사님도 인정하시는 것처럼, 그런 경우 성경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된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어느 신학자가 그의 신학적 관점을 바꾸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말이 있다. 신앙은 확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적 자세 혹은 성경을 읽는 눈을 바꾸는 것은 개종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문자주의적 성경읽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는 것은 안타까움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는 한국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임 목사님이 내 글을 인용하시면서 누락시킨 것이 있어서 정정하려고 한다. 임 목사님은 내가 “예수님은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라고 썼다고 하셨는데, 내가 쓴 것은 “예수님은 단순히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였다. 여기서 “단순히”라는 단어는 문장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내가 의도한 것은 예수님은 역사적 존재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임 목사님이 공개적인 글을 <당당뉴스>에 올린 것은 내가 내세우는 문학적 성경읽기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임 목사님,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성경읽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이것을 수확으로 여기겠습니다. 어떻든 제 글 때문에 임 목사님의 성탄절이 즐겁지 못하게 되었다니 미안합니다. I wish you a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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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0 04:5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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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는돌 (218.38.160.102)
2016-12-25 23:08:57
문자적, 문학적 성경이해와 관련하여 한마디
예수님의 어느 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을까요?
오른편일까요? 왼편일까요?

마가와 마가를 그대로 따른 마태는
둘 다 예수를 욕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누가는 아시다시피 다른 말을 하지요.
한편은 욕하고 다른 편은 욕하는 그를 나무라며
예수께 자신의 사후를 맡긴다고 기록합니다.
(물론, 왼편도 오른편도 성경엔 없습니다.)​

누가도 마태처럼 마가를 개작한 문서이지만
십자가의 두 강도 이야기를 독자들의 흥미를 위하여
좀 더 드라마틱하게 각색하였습니다.
참으로 누가야말로 문학적 재능꾼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 상의 대화를 들었을까요?

누가가 실제로 들었을 리는 만무하지요.​
누가는 이것을 영감으로 기록하였겠지요.
문학적 영감! 종교문학적 영감! 종교적 영감!
그래서 성경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영감으로 풀어야 하는 문학입니다

성서에서 무슨 만고불변의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넌센스 중의 넌센스이겠지요.
그런데 교회와 기독교는 성경 조각 억지로 꿰어맞춘
교리와 신학을 무슨 구원의 법조문으로 여기는
정신없는 짓거리들을 합니다.
(여기 구원이란 단어도 또한 문제적 낱말이지요.)
니가 틀린다, 내가 옳고 정통이다 하며.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면
독자들은 물가운데로도 가고 불가운데로도 가는
참으로 지독한 혼돈 속에 헤맬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단이 난무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고후 3:6).
물론 바울은 모세 오경을 말하였지만 당연
성경 전체로 확대해석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영(영감)으로, 공동체의 샬롬을 위해
해석되지 않는 모든 성경(해석)은
한마디로 잡설이며 견설입니다.
(하여 본문-문자보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이런 구분이 없기에
개독교를 벗어나가가 어렵습니다!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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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122.35.176.192)
2016-12-24 16:46:26
임 목사님,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의 생각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말씀하신 대로 배경이 된 시대나 장소를 고려하는 성경읽기도 문학적 읽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성경은 우리와는 아주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기록된 것 아니겠어요? 문학비평가들은 그런 글읽기를 '신역자주의 비평'이라고 하고 신학자들은 '역사주의 비평'이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우리 사이에 인식이 다른 것이 조금 있지만, 차후에 같이 이야기하시지요.

어떻든 임 목사님이 초청해주신 대화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당당뉴스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쁨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글을 올리고 크리스마스 칸타타에 가려고 합니다. 즐거운 성탄을 맞으시기 원합니다. Merry Christmas!

최재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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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5959 (24.104.217.127)
2016-12-24 02:33:59
문자적이건 문학적이건 읽기만 하면 되겠지요.
당당칼럼목사중에 신학은 꼴찌이지만 문학만은 앞서가려고 하는 등촌입니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은 타종교(이를 테면 불교) 경전에 비하면 상대가 안될정도로 문학적 수준이 낮아보입니다. 시편을 최고의 시문학이라고 떠드는 목사님들은 시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분들이기 쉽습니다.소동파의 적벽부 셀리의 서풍무는 고사하고라도 서정주와 조지훈의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오묘합니까? 난 견강부회 억지춘향으로 성경의 문학성을 설교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러나 문학성이 약하다고 실망하지 않아요.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까요. 문자적으로 읽건 문학적으로 읽건 읽기만 하면 우리집 마구깐에 주님이 오시리라고 믿지요.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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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122.35.176.192)
2016-12-21 21:15:13
많은 사람들이 신화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화와 종교의 관계를 주목하는 학자들의 신화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화학자들은 사람들이 신화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 경험한 경탄할 만한 것을 표현하고 이 압도적인 신비를 자신들의 삶과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신화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너무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워서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화가 종교 경험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사람의 신화에 대한 언급을 소개하겠습니다. 집단 무의식을 강조하는 칼 융은 신화는 보편적인 형태로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원형적 개념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믿었습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신화의 힘은 문자가 지닌 표면상의 의미 이면에 숨어 있으며, 논리와 이성만으로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들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들과 연결시켜주는 보편적인 상징과 주제를 제시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 카렐 암스토롱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창조 역사의 시간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문자적 설명은 불가능하며, 다만 신화와 상징만이 창조를 설명하기 위한 유일하게 정당한 방법이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화적 이야기를 이러한 신화에 대한 설명을 참고해서 접근한다면, 그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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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해석 (203.226.192.40)
2016-12-24 18:20:12
신화에 대한 다른 관점을 말씀드려봅니다.
일군의 신화학자들은 신화가 급속하게 늘어나는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 특이한 점은 권력의 집중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권력자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신화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성서에도 그런 신화 꽤 많을 겁니다.
혹시 예수님의 처녀 탄생 설화도 예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 사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벌어먹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비로운 탄생을 강조하면서, 종교권력을 수호하고 단단히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요즈음도 목사님들 보면, 그런 분들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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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는돌 (218.38.160.102)
2016-12-25 22:45:46
어쩌면
성경도 예수 신성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서라 할 수 있겠지요.
아시다시피 최초의 복음서 마가보다는
마가를 개작한 마태와 누가가
그리고 마태와 누가보다는 더 후대의 요한이
훨씬 신성화한(신화로 각색된) 예수를
그리고 있지요.
마치 예수가 이만큼 훌륭하다에서
예수가 이, 이만큼 더 훌륭하다로
또 예수가 이, 이, 이만큼 더 신성하다로 나아가는
복음서들 안에서의 예수 신성화(신화화)하는
단계들을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서 독자(아니 청중)들은 더 큰 감동을 일으키고...
예수는 결국 훌륭한(뒤어난) 랍비(선생)에서
태초부터 계셨던 하느님으로 승화된 것이지요.
이 신화들을 벗겨서(잘 해석해서) 그 신화들의
의미들을 분별해내어야 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신화를 사실로 믿으려 하니
문화지체에 정신지체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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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122.35.176.192)
2016-12-20 11:49:42
김경환님께
성경 기록의 차이는 문학과 직접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기록자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기록의 차이에서 성경이 주관적인 글이라는 생각이 나오고, 그런 차이를 발견하면 성경이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있겠고, 또 기록자의 주관성에 주목하면 문학적이라는 말로 나아갈 수는 있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지난 주에 제가 <당당뉴스>에 올린 '왜 예수님의 탄생기록이 이토록 다른가?'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신화와 문자적 성경읽기의 문제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에게,
왜 성경의 어떤 부분을 신화적 이야기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하는지 그리고 문자적 성경읽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제가 <당당뉴스>에 올린 '왜 예수님의 탄생기록들이 이토록 다른가?'(2016-12-14)와 '왜 문자적 성경읽기를 문제 삼는가?'(2015-6,-17)를 참고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특히 두 번째의 글에서는 태고사라고 말하는 창세기 첫 부분을 신화적 이야기로 읽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임 목사님에게,
달아주신 댓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문학적 성경읽기를 선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임 목사님이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신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가까운 분이고 많은 것을 서로 걱정하고 상의해온 분이시기에 '반박'이라는 단어 대신 '언급'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임 목사님의 주장을 피력하신 것이지요. 제 답신에서는 임 목사님의 성경읽기와 제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것처럼 말했지만, 저는 그것을 이 '공개적인 언급' 이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일이고, 특히 신앙문제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기에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신앙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제 글 '왜 문자적 성경읽기를 문제 삼는가?'에서 이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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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175.208.8.110)
2016-12-20 17:22:24
저도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신앙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과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보고 믿음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정이 아니라 그냥 믿음이 없다고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신자들 가운데에는 누구누구는 신앙이 좋다, 좋지 않다 하는 일도 많습니다만, 이 또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듭 하는 말입니다만, 저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신자 시절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배경이 된 시대와 지역적인 특성 하에서 胚胎된 기자의 作意를 따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읽기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방법도 문학적 읽기의 범주 안에 든다면 저도 물론 성경을 문학적으로 읽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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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47.201.34)
2016-12-20 01:34:02
감히 최재석 선생님께 여쭙습니다!
<창세기 28장 13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야곱)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출애굽기 6장 2절~3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前者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는 ‘야곱에게 여호와임을 밝혔다’고 기술하고 있고, 後者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야곱에게 여호와라고 밝히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文字的으로만 성경을 읽으면 일종의 기만극이 됩니다. 즉 창세기에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여호와임을 밝혔다고 되어있는 데 반해서 출애굽기에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여호와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文字的으로 성경은 일점일획도 하자가 없다고 하는 데 위 성경구절은 분명히 서로 모순됩니다. 그렇다면 文學的으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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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220.124.120.114)
2016-12-19 23:18:46
최재석 교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최 교수님의 글 때문에 성탄절을 즐겁게 만은 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한 건 표현의 미숙으로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의 견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 같은 내용의 글들도 많은데, 그것들과 저의 견해가 다른 때문이라고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글 가운데 ‘단순히’라는 말이 빠진 것은 저의 부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이 또한 사과드립니다.
저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기자의 작의를 더듬어 가며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는 것을 문학적 읽기라고 한다면 저도 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설화나 신화 아닌 사실(史實)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 같은 글을 쓴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설화나 신화로 읽어 젊은이들이 쉽게 이해하기를 바랐듯이, 저는 사실로 믿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듯이 신앙에 대한 견해 또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견해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개적으로 언급’이라 하셨는데, ‘공개적인 반박’으로는 이해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방점은 ‘반박’이 아닌 ‘주장’에 찍힌 것입니다.
성탄절 기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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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포이멘 (183.109.98.239)
2016-12-19 22:59:08
요한복음 14장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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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
김경환 (110.47.201.34)
2016-12-19 19:07:28
文學的, 文字的 성경읽기에 대한 견해
처음부터 문학적 또는 문자적 성경읽기의 어느 것이라도 허용되었다면, 문학적 성경읽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라고 강제로 억누른 결과에 대한 반작용이 현재의 百家爭鳴이다.

1C 경만 하여도 성경(예수)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했다. “예수는 신이 아니고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비주류의 견해, “성경은 그노시스的으로 읽어야 한다.”라는 그노시스파의 견해, “성경은 한 점 한 획도 바꿀 수 없는 진리”라는 正經기자들의 견해, “예수와 마리아의 인간적인 관계를 중시”한 마리아복음서 등 外經기자들의 견해...

니케아종교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다양한 견해는 전부 다 척결되고 ‘단 하나의 이론’만 남았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이 맹위를 떨치게 된다. 로마제국과 당시 교계 최고지도자들이 확립한 교법에 反하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루터 이후로 다양한 사람들이 확립된 敎法에 이의를 제기한다. 예수의 神性을 부정하는 건 예사이고 아예 예수의 實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백가쟁명으로 회귀한 셈이다.

문자적 성경읽기는 敎條的이라는 맹점이, 문학적 성경읽기는 恣意的이라는 맹점이 있다. 이미 누더기가 된 敎法, 예수(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홍수 속에서 각자는 눈을 크게 뜨고 각자의 신앙을 간직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본다. 최근의 다양한 의견이야말로 서로 다른 의견에 영향을 주어 인간의 ‘믿음’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할 것이다. 자기가 믿는 바를 믿으면 된다. 그걸 누구에게 강요할 바는 아니다.

저의 경우 "예수는 神은 아니었지만,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었다."라는 식의 관점에 점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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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239)
2016-12-19 22:39:17
요한복음 10장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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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239)
2016-12-19 22:42:46
시편 82편
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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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102)
2016-12-19 21:29:38
예수는 神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예수는 神은 아니었지요.

예수가 神이었다는 표현조차도
종교문학적인 표현이고
예수 당대의 로마세계에서는
널리 유행하던 풍조를 따르는 것이었지요.
이런 사실은 점점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데
교회와 기독교는 문화지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마치 박순실의 공화국처럼 혼돈속에...

"예수는 神은 아니었지만,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었다"
라는 님의 표현이야말로
21세기와 이후 세대를 위한
최상의, 최선의 기독교적 신앙고백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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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116.127.47.57)
2016-12-19 23:51:44
예수 = 신 이라는 구절을,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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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102)
2016-12-20 08:56:37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말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신도 인간이 되며
위대한 인간 또한 신이 되었습니다.
우리 전통에서도 '인내천' 사상이 있죠.
인간이 없는 신은 무의미하고
신이 없는 인간도 역시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신은
'이름없는 신'이고 '신비의 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참 신이요 참 인간이라 함은
인간과 신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임을
반증하는 어설픈 공식이 아닐까요?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시편 8편 5절, 히브리성경>
사람은 본래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바울이 시작하고 어거스틴이 완성한 원죄교리는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지요...
유럽의 신학자들은 한국 등 아시아의 기독교는
원죄의 교리와 십일조에 의해 생존한다고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구원의 자격(의무)는 십일조다!
그러니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고 맙니다.
무식하고 탐욕스런 먹사들에 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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