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신화

―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읽는 요한복음 ―

김종길(金宗吉)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요한복음 5:2-9).

▲ 윌리엄 호가스의 “베데스다 연못의 그리스도”(Christ at the Pool of Bethesda)

I. 머리말

위에서 제시된 본문은 베데스다(베드자다) 못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그늘을 상징하고, 못가에 있는 병자들은 빈곤과 질병 그리고 종교권력에 억압당하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짓 희망에 붙들려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서성이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언행을 현대사상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도 유의미할 것입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론으로 요한복음 5장 2-9절 본문에 접근하여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3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일어나 걸어가라”(8절) 등 세 구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II. 예수와 베데스다

1.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예루살렘 성전의 북쪽에 베데스다 못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베트와 헤세드가 합성된 ‘베데스다’는 사랑의 집 또는 은혜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몸과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베데스다에서 위로와 희망을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수도원, 병원, 요양원 등에서 베데스다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서민들 사이에 베데스다 못에 관련하여 치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4절). 베데스다 못은 빗물을 저장하는 저수지로서, 간헐적으로 지하수가 분출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두고 천사가 물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괄호 안에 들어 있는 이 구절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지어낸 민담이고 전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구절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없지요. 어떤 사본에는 괄호 안의 구절이 없습니다. 거룩한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기에, 어떤 성서기자는 그 구절을 생략하였을 것입니다.

종교와 관련된 전설이나 신화는 인간의 영혼을 저하시키고, 그릇된 희망에 집착하게 합니다. 성자숭배가 그러한 예입니다. 사람들은 성물이나 성지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루르드(Lourdes) 지방에 있는 마사비엘(Massabielle) 동굴에 해마다 10만 명의 병자가 방문한다고 합니다. 개신교도 다르지 않습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신유 집회를 여는 기도원에 모여듭니다. 이 가운데 복음적 신앙과 거리가 먼 곳이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다양한 베데스다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복음의 진리를 대신하여 자본주의에 근거한 번영신앙 및 교회성장 등이 현대판 신화를 형성합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베데스다 못의 영험을 인정하더라도, 베데스다의 치료 방식이 환자들에게 공평할까요? 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비교적 병이 가볍고 거동이 자유로운 환자가 먼저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막상 병이 중하고 절박한 병자는 정녕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이름과는 달리, 베데스다의 현실은 무자비하고 냉혹합니다. 선착순으로 치료받는 그곳에서는 각박한 세상인심이 적나라하게 노출됩니다. 생존경쟁이 난무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는 없는 세상입니다. 베데스다 이야기는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회를 양극화하는 현정부의 정책은 소수 계층의 특혜와 기득권을 강화하고, 일반 서민에게는 경쟁과 분열을 강요합니다. 극소수를 제외한 국민 대다수가 무한경쟁의 ‘헬조선’에서 부대끼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현정권의 모순은 급기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터져 나왔습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

현실에서 부딪치는 불공정과 좌절은 헛된 희망에 집착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 될 줄 알면서도 거짓 희망을 붙들고 세월을 허송합니다. 대박을 터뜨려 인생역전을 꾀하는 요행을 기대하게 합니다. 주체성을 상실한 대중은 인습과 고정관념에 얽매여 생각이 굳어져 있습니다. 아집과 맹신을 참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예수께서 병자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하게 들리는 이 물음은 삶의 본질을 건드립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물음은 구원 문제를 제기합니다. 몸과 마음의 온전함을 뜻하는 ‘휘기에스(ὑιής)’라는 용어는 구원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릇된 믿음과 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앞에 나오는 2장 13-22절과 연결하여 읽으면 그 뜻이 보다 잘 드러납니다. 성전을 숙청하신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요 2:19)고 선언하셨습니다. 막다른 골에 내몰린 병자들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있는 베데스다 못은 서민화된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상징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베데스다 못의 치료 효과는 믿지 않았지만, 욕구를 해소하는 분출구가 체제 유지에 필요했기 때문에 서민들의 행위를 묵인하고 방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이며,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속이고 종교권력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체제는 당시 유대교를 지탱하는 신화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신화를 부정하고, 성전을 숙청하신 것입니다. 주변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성전을 헐라”고 하시고, 이어서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가 진행되는 데 성전 붕괴가 전제됩니다. 예수님의 파격적인 언행은 당시의 유대교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존재의 근거였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신화를 허물어뜨리고 진리를 드러내는 데 주력합니다. 그의 역작인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읽기에 쉽지 않지마는, 찬찬히 읽으면 깊은 맛이 우러납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기본명제는 “존재자가 존재한다(dass Seiendes ist)”라는 것입니다. 이 명제에 대한 해석은 지난하고 복잡합니다만, 그의 존재론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이데거는 존재자(Seiendes)와 존재(Sein) 자체를 구분하고, 플라톤 이래의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했습니다. 전통 철학은 이원론(dualism)과 실체론(substantialism)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종래의 철학은 존재자의 ‘존재자성(Seiendheit)’을 탐구하여 왔습니다. 존재자성이란 존재자의 본질이나 실체로서 이상(Idea), 신(God), 자아(ego) 등을 가리킵니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존재자성을 부정했습니다. 존재는 시간적이고 현실적인데, 존재자성은 무시간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신학을 비롯한 서구사상은 주-객 도식으로 사물의 본질(존재자성)을 파악하여, 대상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데에 관심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현대 과학기술은 위기를 초래하였습니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아울러 자연이 파괴되었습니다. 인간도 이윤의 도구가 되고, 비본래적인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2) 현대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그릇된 실재관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기존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존재자성을 부정하는 ‘무(Nichts)’를 요구합니다. 기존의 존재자성의 부정은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니체(F. W. Nietzsche)가 선언한,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는 과격한 명제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기존의 세계관이 부정되고 기성의 가치가 전도될 때, 큰 충격과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무’의 상태를 “Abgrund”라고 표현했습니다. 독일어 ‘Abgrund’는 지반 붕괴 또는 심연을 의미합니다.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세계가 열리려면, 이제까지 딛고 있던 터가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무(Nichts)는 근원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무’를 거쳐서 고유하고 본래적인 존재 자체가 드러납니다(aufgehen). 세계에는 존재자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존재자가 있습니다. 존재자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세계는 다시 긍정됩니다. 여기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이로운 사건으로 경험합니다. 그것은 존재자가 은폐된 자신을 드러내는 진리(ἀλήθεια)의 사건입니다. 궁극적 실재인 자연(φύσις)은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신화로 채색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기독교는 존재자성을 신(神)으로 상정하고, 무시간적이고 타계적인 세계를 추구합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신화적인 대속론에 근거합니다. 이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오늘의 구원’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 및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과 일치합니다. 존재자성을 부정할 때 비로소 존재 자체가 드러납니다. 눈을 가리는 신화를 제거해야 은폐된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성전을 허물어야 참 믿음이 세워집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면, 교회가 죽어야 하나님 나라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고 일갈하셨던 것입니다.

3. 일어나 걸어가라

베데스다는 민중의 아편이며 일종의 ‘희망 고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거짓 희망에 붙들려 못가에 누워있는 병자에게 권면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구원의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의 결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수용하는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과 아울러 인간의 책임으로 완성됩니다.

앞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① 존재자성(Seiendheit) ― ② 무(Nichts): 존재자성 부정 ― ③ 존재(Sein) 자체로 요약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을 인간을 분석하는 데 집중합니다. 존재 이해의 마당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릅니다. 그는 인간을 또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합니다. 현존재는 우연성을 강조하고, 세계-내-존재는 관계성을 역설합니다. 현존재는 세계 안에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하며 존재합니다.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습니다. 실존이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입니다. 현존재가 자신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심려(Sorge)’의 방식으로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 심려하며, 고유하고 본래적인 자신을 구현하고자 마음을 씁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1) 일상에서 세속인(Das Mann)은 비본래적(uneigentlich) 실존으로 퇴락합니다(verfallen). 비본래적 실존이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으며, 고유하고 본래적인 자기를 구현하지 않고, 무의미한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세속인은 잡담, 호기심, 애매함 등으로 무명(無明)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세월을 낭비하는 혈기 마른 사람이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는 영적으로 무기력한 세속인의 모습입니다.

(2) 무(Nichts)는 세속인의 비본래적인 일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데스다에 걸었던 희망이 깨어지고, 터가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인간이 죽음이라는 한계상황과 대면할 때,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붕괴됩니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극단적이며, 확실한 가능성입니다. 죽음에로 선구하면서(vorlaufend)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합니다. 존재의 의미는 시간적입니다.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죽음에 깨어있는 현존재의 결단이 존재의 근원적인 개시를 가능하게 합니다.

(3) 무에서 비롯된 근본적 기분(불안, 권태, 우울 등)은 현존재를 근원적 세계로 초대합니다. 비본래적 일상을 부정하여 현존재에게 근원적 세계가 개시됩니다(aufgehen). 유한성을 자각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구현하려고 마음을 씁니다(sorgen). ‘무’에 직면하는 결단으로 고유하고 본래적인 자기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흔들리는 터전”의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인간을 이해하고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 통찰을 제공합니다. 인간의 실존에 관심하는 불트만(R. Bultmann)의 실존론적 신학은 인간의 현존재를 분석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서본문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불트만의 신학에서,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 및 ‘실존론적 결단’이 핵심어입니다. 구원이란 비본래적 일상에 묻혀 있던 현존재가 고유하고 본래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진리 사건입니다.

III. 맺음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데스다는 신화를 상징하고, 예수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교는 성전 신화를 재생산하며 체제 유지에 집착했습니다. 베데스다는 막장 인생들이 겪는 희망 고문입니다. 신화가 현실을 지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낫기를 원한다면, 베데스다를 비신화화하고, 구체제를 떠받치는 성전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하는 거짓 버팀목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불안하며 고뇌하게 됩니다. 거짓 희망은 잠시 위로를 주겠지만, 마침내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생의 심연을 직면할 때,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허무와 절망을 직시해야 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하여 참된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의 바닥을 칠 때, 비로소 그 바닥에서 절망이 부력이 되어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모범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는 탄식에 이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롬 7:24-5) 하고 바울은 감사했습니다. 율법의 신화가 무너지는 절망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의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결단이며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이란 근원적 세계에 눈뜸이며, 본래적 존재를 향한 결단이지요. 우리의 할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허상을 깨닫고, 미련 없이 베데스다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국가가 제조한 안보와 경제의 신화를 비신화화하고, 지배자가 심어준 아편 같은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종교가 생산한 자본주의적 번영신앙과 타계적인 구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존주의 작가인 카뮈가 역설했듯이, 삶은 부조리합니다. 인간은 성실(誠實)로써 부조리에 저항해야 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미망에서 깨어나고 종교적 신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박민규 작가가 ≪눈 먼 자들의 국가≫에서 절규하듯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적 삶이란 퇴락한 일상을 거부하고, 눈을 떠서 순간순간 깨어서 사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면 절망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래도 눈을 뜨고 깨어나야 합니다. 참된 희망은 정직한 절망에서 움틉니다. 거짓 희망을 단념하고, 진실에 소망을 두십시오. 히스기야는 백성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고자 놋뱀을 없앴습니다(민 21:9; 왕하 18:4).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의지해온 느후스단(구리 뱀)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부수고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고 선언하고, 베데스다를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세속인으로 전락한 인생에게 도전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어서 부드러우면서 단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