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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윤회설 흔적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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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1월 25일 (금) 20:18:28
최종편집 : 2016년 11월 26일 (토) 00:49:15 [조회수 : 1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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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윤회설 흔적들

 

마16:14(11:5,14; 14:2; 17:10~13; 27:52~53; 28:7)

  본문 14절은 분명하게도 윤회설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를 보고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은 예수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다는데 이것은 윤회설이 말하는 환생이나 귀환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다시 올 선지자로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말4:5).

 

윤회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윤회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내세관이나 사후세계관과 관련하여 윤회설을 말하는 항목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비롯한 신약성서 안에는 윤회설을 생각하게 하는 환생과 귀환개념의 흔적들이 다발적으로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내세 관념이나 사후세계와 관련된 관념들을 살펴볼 때 죽은 자의 상태를 말하는 본문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는데 시대적으로 볼 때 후기시대일수록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오고가는 환생이나 귀환 개념의 전거가 되는 표지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왜 내세관이나 사후세계와 관련한 항목에서 윤회설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뿐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들, 심지어 구약이나 신약의 다른 책들 안에 윤회설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다수 발견되는데 그리스도교 교리 항목에는 왜 이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여러 설명들을 제시하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론적으로 성서 안에 나타나는 윤회설적인 환생개념이나 귀환개념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표현을 통해 나타나는 그림 같은 회화적 표상마저 깨끗하게 삭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먼저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윤회설의 흔적들을 살펴보고 난 이후에 마태복음 이외의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표현들로 어떤 구절들을 들 수 있는지를 짚어보고 이와 같은 윤회설적 개념의 표현들이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왜 지워졌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윤회설의 흔적들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교리차원에서 설명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윤회설적인 환생이나 귀환개념이 명백한 표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차례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윤회(輪廻)의 뜻

  한자어의 윤회(輪廻)는 바퀴처럼 끊임없이 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최종 도착지에 도착하면 바퀴도 도는 것을 멈춥니다. 그와 비슷하게 인생도 최고의 경지에 도착하면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게 된다고 하는데 그 최고의 경지란 종교적으로 완전한 구원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합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완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삶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정결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 후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되면 윤회는 멈춥니다. 윤회가 추구하는 완전한 구원이라는 그 정점에 도착하면 윤회의 과정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구원의 정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과 사의 연속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생과 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단 한 번의 과정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종교들마다, 혹은 문화적 차이에서 나타나는 사후관념들마다 제각각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처음 삶→죽음→다시 삶”이라는 윤회의 기초 틀에서 볼 때 죽음은 생과 사의 과정이 반복되는 또 다른 인생의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환생(還生)과 귀환(歸還)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이와 같은 윤회는 환생과 귀환이라는 단어로 그 과정이 설명됩니다. 환생이란 단어의 1차적 의미는 생명이 돌아온다는 뜻이므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산다는 개념을 구성합니다. 환생으로서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환생관련 이야기는 신구약성서에도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윤회는 귀환이라는 용어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귀환은 말 그대로 되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마16:13~14는 귀환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세례요한이라고 하기도 하고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며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는 세간의 이야기는 죽었던 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환생개념에서 나온 귀환관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귀환이라는 용어는 죽었던 자가 세상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을 갖습니다.

 

환생한 엘리야, 귀환한 엘리야

   마11:5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되돌아온다는 의미이므로 환생개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이 가 있던 곳에서 산 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기 때문에 세상으로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환생이나 귀환의 개념은 생사의 과정을 오고가는 윤회설의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한편 14절은 세례요한과 엘리야를 등치시키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문장 그대로 읽으면 완벽한 환생, 혹은 귀환개념입니다. 더구나 죽은 엘리야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은 부활한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서 세상에 오는 것이므로 윤회설적으로 환생, 혹은 귀환입니다.

  이와 같은 윤회설적 환생이나 귀환의 관념은 17:10~13에서 확연하게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엘리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환생한 엘리야, 혹은 이 세상으로 다시 온, 귀환한 엘리야입니다.

  윤회설 관점에서 보면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온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볼 때 세례요한은 다시 살아난 엘리야, 즉 환생한 엘리야, 또는 지구로 다시 돌아온 엘리야 즉 귀환한 엘리야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을 엘리야의 환생, 혹은 귀환으로 설명하신 예수의 말씀과 똑같은 맥락에서 세례요한을 처형했던 헤롯은 예수를 세례요한의 환생으로 이해하고 세례요한이 살아났다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마14:1~2). 이것은 헤롯에 의해 죽임 당한 세례요한이 예수로 귀환했다고, 혹은 세례요한이 세상으로 다시 와서 예수라고 불리는 사람의 몸에 들어왔다고 보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빙의(憑依)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과 예수는 동시대사람이므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되돌아 왔다는 개념과 맥락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윤회설의 또 다른 아류적 관념에 의하면 빙의개념도 환생이나 귀환의 그림을 그리게 해 줍니다. 죽었던 자가 산 자의 육체를 빌려 나타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를 세례요한이라고 말한 예수, 예수를 세례요한이라고 본 헤롯의 견해를 종합하여 표식으로 나타내면, “엘리야→세례요한→예수”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전형적인 환생 개념도입니다. 마태복음은 이와 같은 윤회설적 환생개념, 혹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귀환개념이 복음서 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그림 그리게 하는 환생과 귀환의 개념

  이와 같은 윤회설적 환생, 혹은 귀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에서 좀 더 명백하게 인지될 수 있습니다. 재림이라는 용어는 다시 오실 예수를 가리키는 전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다시 오심을 말하는 재림에 대해 윤회설적 표현인 다른 단어를 이용하여 나타내면 “재림=왕이신 예수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면 하늘로 승천하셨던 예수께서 다시 이 세상으로 오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윤회설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 후 하늘에 오르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것은 죽음 저 너머의 천상에 가 계셨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신다는 것이므로 환생과 귀환의 개념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수의 두 번째 오시는 재림관련 천상에서의 강림사상은 왕의 귀환이라는 윤회설의 기독교적 표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윤회설의 전제 두 가지

  이때 환생과 귀환으로 설명되는 윤회설에서 전제되는 두 가지 핵심요소가 있습니다. 영혼불멸설과 영혼선재설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세상에 오게 된다는 것은 영혼불멸설을 전제합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할 때 죽는 것은 육체일 뿐이며 그 사람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관념이 전제되고 있으므로 영혼불멸설이 바탕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왔다는 것에서 영혼선재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세례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했을 때 세례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 이전에 엘리야가 있었음을 전제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명쾌한 그림은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나는 예수의 선재론에서 잘 그려집니다.

  고전15장은 유명한 바울의 부활강론장입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부활강론장의 내용들은 윤회개념으로 설명이 아주 잘 됩니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분명하게도 환생개념입니다. 부활하신 주의 재림은 승천하신 주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귀환개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예수는 세상에 내려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옵니다. 되돌아오는 그림이니 귀환개념입니다. 이를 지상에서 본다면 하늘에서 오셨던 주께서 하늘로 가신 후에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왔다가 다시 오시는 것이므로 역시 귀환개념입니다.

  물론 고전 15장에서 바울이 가르치는 부활개념은 소생개념과 아주 다릅니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므로 소생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생은 그 육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나타내는 반면 부활은 변화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부활과 소생의 차이점을 결정짓는 핵심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입게 되는 몸에서 나타납니다. 부활한 사람의 몸은 죽기 이전의 몸이 아닙니다. 죽기 이전, 세상에 있었을 때 가졌던 몸과는 전혀 다른 변화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늘에 속한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이므로 다시는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한 몸, 다시는 썩지 않을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서의 몸을 입은 사람은 죽기 전에 가졌던 세상에 속한 몸을 가졌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따라서 부활과 소생의 공통점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부활하여 변화된 몸을 가진 사람이나 죽었다가 소생하여 다시 갖게 된 세상의 몸을 가졌던 사람이나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사람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활과 소생은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전의 사람과 부활 후의 사람은 죽은 사람 그 자신이므로 영혼불멸설적입니다. 변화된 몸의 입장에서 볼 때 변화된 몸을 입게 되는 사람은 죽기 이전의 사람과 동일인이므로 죽기 이전의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영혼선재설적인 그림을 그리게 해 줍니다. 부활의 몸을 입은 사람은 부활 이전에 이미 존재한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변화된 몸을 입는다는 부활의 개념 역시 윤회개념에 서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과 소생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영혼불멸설과 영혼선재설이 전제되는 한 변화된 몸을 입게 되는 부활이나 죽기 이전에 가졌던 육체로 다시 돌아오는 소생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지점에서 환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은 몸을 떠났다가 다시 그 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귀환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은 저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온다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림을 그리게 하는 개념이므로 윤회설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윤회설 관련 표현들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임을 강조했던 바울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윤회설을 가능하게 하는 환생이나 귀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밑그림이 될 만한 내용들이 구약의 내세관 관련 표현들을 통해서도 확인이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교의 교리의 내세관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항목에는 이와 같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윤회설 관련 내용이 없는 것일까요? 부활개념과 다시 오실 재림주는 전형적인 윤회설적 환생, 혹은 귀환 개념인데 이를 설명하는 내세관, 사후세계관과 관련한 그리스도교의 설명은 왜 윤회설로 설명되지 않은 채 단어풀이만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구약성서의 내세관, 혹은 사후세계관은 무엇이며 신약성서의 본문들에 나타나는 윤회설 관련 표현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짚어보고 그 의미를 계속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보람된 한 해를 마무리하시는 남은 한 달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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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102)
2016-11-30 20:51:15
화두를 던져주는 좋은 기사...
이 기사가 왜 좋은 글인가?

우리의 기독교 교리와 신학은
대부분이 성경을 곡해하여 산출된 것임을
반증하는 좋은 글이기 때문이다.


기사의 댓글에도 있지만
대다수의 기독교도들은 부활과 내세에 관하여
성경을 상당히 곡해하여 꼴지어진
교리와 신학들을 분별없이 믿고 있다.


이는 강단의 먹사들의 책임도 크지만
생각없이 믿고자하는
기독교 신앙의 경향성(편향성)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무릇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종교의 특이성(교리외 신학 등)을 강조하면
인간을 편벽하고 고루하게 만든다.
종교는 보편성을 추구하고 강조하여야
인간생활과 인간세상에 도움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되살아나려면
허접하고 비이성적인 교리와 신학들을
과감하게 폐기하여 던져버리고
21세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를
예수사건과 성서에서 추출하여​
그것을 함께 추구하며 전파하는 세력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
리플달기
6 13
주방보조 (14.39.92.176)
2016-11-28 23:45:33
황당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보는 보수주의의 함정에 빠지신듯...
리플달기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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