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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의 기대를 접은 결정적인 이유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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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1월 12일 (토) 11:21:49
최종편집 : 2016년 11월 12일 (토) 23:59:12 [조회수 :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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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시점에서 서경석 목사는 박근혜의 하야를 반대한다며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이기에 지금과 같은 불법에 대해서 주권자인 국민이 일어나고 하야해야 한다고 하는 것인데... 수구의 대표적인 경우인데, 한국 보수개신교에는 이런 인사들이 아주 많다. 바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기존의 관점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꾸준히 말해왔다. 전적 부패, 무조건적인 선택, 보편적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음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상세한 내용은 <닫힌 성경 열기>(등과빛 출판사)에 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모두 잘못된 부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은 행위 구원과 믿음 구원의 대조가 아니라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이다. 옛 언약의 하나님의 경륜인 율법 준수와 새 언약의 하나님의 경륜인 성령의 (율)법 준수의 대조이다. 유대인이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옛 언약과 아무 상관이 없다가 새 언약 안으로 곧장 들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곧 하나님의 옛 경륜 아래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곧 믿음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구원의 원리는 같다.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형성되고 그 이후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 의지는 그 언약에서의 하나님의 경륜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으로 연결된다. 순종이다. 효력 있는 부르심 이후엔 믿음 구원이면서 동시에 순종 구원인 것이다. 순종은 행위 구원이 아니라 은혜 구원이다.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는데, 이는 신자의 자기 행위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된 은혜의 열매이다.

이러한 설명이 이상한가? 아니다. 어려운가? 결코 아니다. 아무런 공부가 없었던 성경 시대의 노예들도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교회의 교사를 자처하는 신학자나 목사 그리고 성도들은 회피한다. 자신이 속한 진영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답습하기만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장로의 유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책망하신 장로의 유전을 굳게 붙들겠다는 것이다. 전통주의자이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여기에 속하여 있다. 바뀌려고 하질 않는다. 이들은 전통의 터 위에서 기득권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 전통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배척한다. 그렇게 노력하는 이들을 제재하면서 여러 방식으로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그 시도는 대부분 성공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며 살고 있다.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인가의 문제로 페친인 한 목사와 논쟁을 하였다. 그는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교리를 따른 성경 읽기가 아니라 언약적인 성경 읽기를 강조한다. 위에 언급한 두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성경 자체의 바른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연구하는 목사이다.

율법은 옛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는 방식이었다. 죄를 더하는 기능을 한다.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살다가 율법에 제시된 내용으로 인해 죄인 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율법 아래에서 옛 언약의 백성들은 자기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음행, 더러운 것, 우상숭배, 투기 등이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힘이다. 죄와 사망의 법인 것이다. 반면에 성령의 (율)법 아래에서는 그것에서 해방된다. 육체의 일을 이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질 못했지만 성령의 (율)법 아래에서는 해방되는 것이다.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하고 그 아래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못하였다고 해서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인 것은 아니다. 율법의 대강령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일 수 있단 말인가?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었지만 그 백성들이 연약하고 율법도 완전하지 않아서 그 백성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진 못했던 것이다(롬 8:3).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그런데 위의 페친인 목사는 전혀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자기 입장만 내세우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는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이다. 요한계시록의 21~22장의 진술이 가리키는 바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면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이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저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변화가 요구된다. 바뀌어야 한다. 개혁이다. 많은 신자들이 이를 위해 나름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 짧지 않은 기간이 지났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고 있다. 수구 고수, 장로의 유전 따르기, 자기 고집 버리지 않기 등으로 인해서 말이다. 나는 이러한 모습으로 똘똘 뭉쳐진 신자들을 대하면서 개혁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되었다. 특히 나름대로 기대를 하였던 마지막에 언급된 목사와 같은 이들을 접하면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개혁을 말하는 이들 중에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 드러날 때에 인정하고 수용하며 잘못했다고 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터이면서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재료는 사도적 복음이다. 유일한 터이면서 유일한 재료이다. 기록된 그 시점에서의 의미를 바르게 밝히고 현재 이 시점에서의 적용점을 밝혀서 그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 사도적 복음 위에 교회가 세워지면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로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요원하다.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길로 나아가는 개혁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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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 (216.81.215.244)
2016-11-17 02:38:21
율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 행위의 기준이지만 죄성으로 인해 아무도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공의를 잘 나타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을 맺는 이스라엘 민족이 힘써 닮도록 하기위해 만드신 거울입니다.
율법은 기준일 뿐 그 자체가 은혜는 아닙니다.
은혜는 바로 두 언약 즉 옛언약과 새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옛언약은 율법준수 여부에 따른 조건적이고 한시적인 언약이었고 새언약은 그리스도의 대신속량의 은혜로 미리 선물로 주신 언약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세우신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율법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 봐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보좌 앞으로 나아오도록 인도하려고 제시하시고 이를 바탕으로 (옛)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막 해방돼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로 율법의 노예가 돼 하나라도 어길까봐 늘 노심초사하며 지내고 급기야 ‘더 잘 지키기 위함’이라는 허울 아래 제맘대로 장로들의 유전을 덧붙여 자기에게만 쉽고 남들에겐 무겁게 짐지워, 어차피 아무도 제대로 못지킬 바엔 ‘내가 너보단 낫다’는 식으로 상대주의적 의를 추구하는 지경으로 까지 치닫게 됐습니다.

따라서 비록 처음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로 주신 (옛)언약에 따른 율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주시기 위해 만드신 율법이 본래 뜻과 같지않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율법 아래 얽매여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결과로 됐으므로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인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그리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참뜻을 알지못한 채 열심만 내다보니 결과가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말해 옛언약은 한시적이나마 조건에 따른 계약이므로, 만약 율법을 지키면 축복, 어기면 저주 받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뜻에 맞게 지키려 하지않고 제뜻대로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축복은 없고 오직 어길 때 받는 저주만 남게 됐으므로 결과적으로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된 것입니다. 즉 애초부터 그리된 것이 아닙니다.
즉 율법의 기능들 중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우리 양심을 비추는 거울로서 우리의 죄와 죄성을 두루 비추는 것 뿐입니다. 물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옛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된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제뜻대로 고쳐놓고 준수했노라고 의기양양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곧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로 율법을 졸업하게 만드셔야만 했는지에 대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실마리를 푸는 열쇠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의의 법은 우리가 단지 소극적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해 율법을 뛰어넘어 졸업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웃사랑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돌에 새긴 율법 또는 법령에서 부터 우리 마음에 새긴 윤리도덕, 즉 대신속량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으로 바뀐 것입니다.
고금동서 법령을 돌에 새기는 까닭은 한번 정한 후 아무도 고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관행 때문이고 (심지어 복사본을 만든 후 곧 원본을 언약궤 안에 넣었습니다.)
법령은 노예들에게 또는 도덕적으로 아직 미숙한 시민들에게 신상필벌의 기준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켜볼 것입니다.
마음에 새긴다는 뜻은 그것이 윤리도덕이라는 뜻입니다.
윤리도덕은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어긴 점들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고치도록 가르치며 잘 타이르는 것입니다. 즉 율법준수하는 마음의 동기에서 크게 차이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자유인이 된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의 율법을 법령으로서가 아니라 윤리도덕으로서 지켜야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옛사람이 말한 바’는 율법의 언명이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에서는 그리스도의 법을 말합니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옭죄는 구속이 아니라 친절한 사용설명서 또는 천국을 향한 여행안내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법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한 후 다시 태어나 자유인이 됐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의의 법을 따라 율법을 완성하도록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언약시대를 여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율법을 뛰어넘을 수 있는 까닭은 비록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우리 삶의 기준인 율법은 제 죄성으로 인해 스스로는 결코 이룰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 나아올 때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가 완성할 수 있으므로 이를 믿고 순종해 실천하면 율법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의 대신속량의 은혜가 흔히 말하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 까지를 용서하는 살인면허 또는 면죄부와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믿기 전에 지은 과거의 죄만 사면하신 참회록 같은 것이고 이제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죄를 멀리하고 경건을 연습해 능력을 갖춰 진짜 의로워진 의인으로서 살아, 즉 성화돼 천국으로 구원받아 갈 것을 다짐하는 피로 쓴 우리의 맹세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초림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신 생명길(과 교회 즉 구원의 두 틀)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예정 즉 새은혜이고 이 예정된 틀을 따라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가는 그리스도의 좁은문을 통과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 지난한 고난의 생명길을 잘 달려 모두가 그 끝에만 나오는 천국문에 다함께 이르기를 소원하십니다.

이 생명길에 이미 들어선 사도 바울은 제 죄성으로 인해 길을 벗어나거나 유혹의 함정에 빠지기쉬운 어려운 상황을 가리켜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즉 죄성을 벗어나 성화되는 과정 중에 있는 사도 바울이 제 양심을 하나님의 율법에 비춰봤을 때 여전히 하나님의 성품에 까지 이르는데 아직 많이 부족함을 느낀 것입니다.

한국교회개혁을 향한 열망을 꼭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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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박창진 (14.42.152.229)
2016-11-19 15:56:36
정성껏 적으신 긴 댓글에 감사드리며 잘 읽었습니다.
율법이 무엇인가는 그 율법을 받은 옛 언약 백성들의 반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수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주실 때에 율법에 담은 의미에 의해 결정됩니다.
율법은 은혜입니다.
하나님 사랑, 내몸같이 이웃 사랑이 대강령인 은혜랍니다. 생명의 법입니다.

그 생명의 율법에 대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하였느냐는 님이 적으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다고 해서 은혜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영향력으로서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게 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과 영원한 멸망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이지요.
신자가 선을 행하고자 하나 죄의 법 아래로 끌어가는 힘으로서 육체의 욕심이 바로 죄와 사망의 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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