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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자는 상황을 분별하는 사람이다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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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0월 26일 (수) 23:34:15
최종편집 : 2016년 12월 07일 (수) 22:42:01 [조회수 :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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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보적인 정당들이나 진보적인 성향의 기독교 단체들에서 김정은 정권을 압박하지 말고  김정은과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개성공단을 폐쇄한 것은 대화를 포기한 악수라고 말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시도했던 햇볕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을 압박하면서 대화를 중단할 때 평화적인 통일의 길이 막힌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노력하면 북한과 대화할 수 있을까? 북한이 우리의 대화 제의를 받아줄까? 그들이 원하는 수재민을 위한 구호품은 받아주겠지만, 우리의 요구에 응할까?


현재 상황과 진보주의자들의 주장


김대중 대통령이 통치하던 때에는 햇볕 정책을 시도할 만한 상황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서 북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고 김정일이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김 대통령이 많은 것을 북한에 퍼주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몽땅 퍼주고 북한에 갔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당시의 상황에서 시도할 만한 그리고 시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스웨덴의 한림원이 김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데서 남북의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김정일을 계승한 김정은은 그의 고모부까지 처형하는 공포 정치를 실시하고 있고, 연평도를 포격했고, 연일 미사일 실험을 하는가 하면 6차 핵실험을 앞두고 있다. 젊은 김정은은 아버지와 달리 충동적이고 무모한 사람이어서 연일 남한을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말로 위협하고 있다. 지금 전에 없이 UN에서는 북한에 압박을 가하고 있고 북한의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까지도 안보리 상임위원회에서 대북 압박 정책에 동조했다. 이렇게 김정은 시대에 와서 북한의 태도가 호전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남한의 정부당국자들뿐 아니라 온 세계가 동감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는 16년 전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햇볕 정책의 꿈을 버리지 않고 대화를 통해서 남북한의 대치국면을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의 남북 상황이 김대중 정부 시절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 그 꿈은 실현 불가능하다. 요즘 여야 간에 문제가 되어 있는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해서도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해빙 무드를 타고 있던 시절에는 기권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첨예한 대립 국면에서는 그런 결의안에 기권할 수 없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라면 변한 상황을 분별하고 거기에 맞추어 유연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지금 김정은은 우리와 대화할 마음이 없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여러 차례 대화를 요청했지만, 그는 계속 거절해 왔다. 오히려 미사일과 핵무기를 실험하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김정은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야생마다. 대화할 수 없는 사람들과, 우리와 대화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과 대화로 문제를 풀자는 주장은 실현 불가능하다.

대화에는 항상 상대가 있게 마련이고 대화란 양측이 대화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원하지만, 상대편에서는 원하지 않을 때, 대화의 자리조차 마련될 수 없다. 또 상대가 대화에 응한다 하더라도 그쪽에서 대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을 때 이쪽에서는 의욕을 잃게 된다. 만나는 것이 헛수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도주의자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모든 사회 집단이 이기심의 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 관계에서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조정과 설득이 별로 어렵지 않지만,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아주 어렵다.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윤리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정치에서 국가는 자기네 이익과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구한다. 그래서 국가 간에서는 동정심이나 인간적 이해가 뒷전으로 밀려난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는 것, 우리가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보호무역을 할 것인가 자유무역을 할 것인가는 모두 국익에 따라 결정된다. 더구나 어느 국가가 타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그 국가는 적의 공격에 맞서서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처럼 북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계속 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인도주의적 정책이 발을 들여 놓을 틈이 없다.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의 이타주의와 국가의 이기주의를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교적 이타주의를 국가의 정책에 적용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자신의 이상과 국가의 이익 추구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양극성의 긴장 관계를 강조하는 폴 틸리히에 따르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와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양면이어서 우리는 그 갈등구조 관계의 긴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의 이타주의와 국가의 이기주의 사이에 끼어 있는 기독교인은 국가가 외세의 위협에 직면하면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나가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김영란 법이 실시된 지금 그 법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남북의 상황이 달라진 지금 그 달라진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 달라지기 전의 대책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상황 착오적인 발상이다.


진보주의자의 자세


진보주의자는 소통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의 말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마음을 닫고 소통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 안에 갇혀 있게 된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이 어려움을 당하는 근본 원인은 소통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불통의 장막을 치면, 그 장막 안에 들어가 있는 몇몇 실세 외에는 가까이에 있는 비서실장조차 대통령을 만나기 힘들고 대통령이 하는 일을 소상하게 알기 힘들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당면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도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내가 속해 있는 단체나 정당에서 내세우는 진영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한다. 물론 내가 어느 단체나 정당에 속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내 동료들의 생각보다는 상대의 생각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그런 때에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나 정계에서 흑백논리에 사로잡혀서 무조건 상대를 몰아세우는 것을 흔히 본다. 진보나 보수를 가릴 것 없이 소통하려는 노력과 마음을 열려는 노력이 없으면, 상대의 장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항상 자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보주의자에게는 마음을 열고 소통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아가서 진보주의자는 그가 속한 집단이 지켜온 가치에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간파할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사람이다. 진보주의자는 구태의 틀을 깨고 나와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려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이다. 여성주의 운동이 본격화하기 전에, 19세기의 작가 토마스 하디는 그의 대표작 『테스』에서 사회적 관습에 의해서 차별받는 여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남성이었지만 당대 남성들이 지닌 여성에 대한 편견을 뛰어넘어서 여성도 남자와 똑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흑인들을 차별했던 미국의 남부에서 일부의 백인들은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흑인들의 편에 섰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지만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이라는 점을 밝히셨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외골수로 나아가는 독선적인 사람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전통에 따라서 여성을 차별하는 사람들, 백인의 우월주의에 사로잡혀서 흑인을 차별하는 사람들, 선민의식에 집착해서 이방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은 상대도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할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공산주의가 진리라는 확신을 지닌 확신범들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허구가 밝혀지고 북한 정권의 오류를 전 세계가 지적하고 있는 지금 그들의 확신은 오류임이 분명하다. 히틀러 역시 선을 행한다고 확신했지만 결국 악을 행하고 말았다.

진보주의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상황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사람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특히 교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진보적인 신앙인은 달라진 문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성경을 읽는 데서도 새로운 해석 방법을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달라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옛 것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옛 것에 집착한다. 소위 근본주의자들은 성경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삶의 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헛발을 디디기 쉽다.

며칠 전 국감장에서 일어난 한선교 의원과 유은혜 의원 사이의 사건이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한 의원이 발언할 때 유 의원이 웃는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한 의원은 그 웃음을 비웃음으로 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학 후배인 유 의원이 자기를 비웃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직설적으로 유 의원의 웃음의 의미를 지적하지 않고, 에둘러서 개인적인 자리에서 하던 식으로 ‘왜 웃어요! 내가 그렇게 좋아?’라고 농담조로 그녀의 태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데 그가 애써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한 그 말이 문제가 되었다. 먼저, 한 의원은 그 자리가 공적인 자리라는 당시의 상황을 분별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그는 성희롱이 중대한 문제가 되는 시대적 상황을 한순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렇게 주어진 상황을 감안하지 않으면 실수하게 된다.


마치면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남과 북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마틴 루터 킹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킹 목사에게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창의적인 능력이 있었다. 남북전쟁을 통해서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킨 후에도 남부 지방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킹 목사는 비폭력 투쟁을 벌였다. 당시에 흑인지도들 중에는 흑인 운동은 서둘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온건파가 있었는가 하면 폭력을 사용하자는 과격파도 있었다. 그러나 킹 목사는 흑인 차별은 미루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비폭력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폭력을 사용하면 증오가 더 확산되고 폭력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비폭력이야 말로 흑백으로 갈린 미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믿었다. 이쪽에서 폭력을 사용하면 저쪽에서도 폭력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킹 목사는 자기들을 차별하는 백인들을 미워하지 말자고 말하면서 비폭력 운동을 밀고 나갔다. 그런 주장은 낭만적인, 실현성이 없는 말로 들릴 만했다. 그러나 그는 백인과 흑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 미국을 꿈꾸면서 ‘I have a dream!’이라고 외쳤다.

킹 목사의 꿈은 이사야가 꿈꾸었던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어울리게 될 메시아 왕국에 대한 꿈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로 복음서에서 말하는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다. 킹 목사는 그의 꿈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외친 그 꿈은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다. 우리 한국에도 킹 목사 같은 비전을 지닌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킹 목사는 주어진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했을 뿐 아니라,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올바른 처방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거룩한 꿈을 위해서 자신을 바쳤다.

우리도 킹 목사처럼 비폭력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우리가 폭력으로 북한을 제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폭력을 사용할 경우 그들도 폭력으로 보복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이긴다 하더라도 우리가 입을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북한의 6.25 남침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남겼다. 우리는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은 밉지만, 북한의 주민들은 우리가 품어야 할 동포들이기 때문이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킹 목사의 비폭력 운동은 대화를 통해서 설득할 수 없는, 대화에 응하지 않는 백인들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압박 없이는 백인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북한을 압박하는 것도 대화에 응하지 않는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압박 없으면 북한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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