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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요?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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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0월 24일 (월) 10:17:36
최종편집 : 2016년 10월 24일 (월) 23:53:07 [조회수 : 6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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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친이 자신의 담벼락에 올린 로마서 풀이에서 당당하게 그렇게 말한다. 죄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사망은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하나님의 뜻을 어겨 그분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작용하는 힘을 뜻한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 예외가 없이 작용하는 힘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면 율법 아래 있는 것 곧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고 그 결과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그 죄와 사망의 책임이 있다는 말인데...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은혜와 생명이 아니라 죄와 사망이다?

롬 8:2-3의 이해가 중요하다. 2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을 얘기하곤 3절에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것이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다.

그 문맥이 얘기하는 바는 명백하다. 율법은 그 방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신음하는 인생 곧 옛 언약의 자기백성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 율법이다. 그 율법을 지키면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제사장 나라답게 된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다. 그 시점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와 그 결과인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열방을 중보하고 열방을 하나님께 이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죄와 사망에서 온전히 해방되도록 하기에는 완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생이 연약하여서 곧 이스라엘이 연약하여서 그것을 할 수 없었다. 율법으로는 그 백성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가 스스로를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 이유이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것이다. 선과 악이 함께 하고 있는 법 곧 원리를 깨달았다.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따르려고 하는데 다른 법이 자신을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망의 몸이다. 곤고한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을 사로잡는 죄의 법이 율법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 완전하게 하신 율법을 성령과 함께 우리에게 주셨다. 심비에 새긴 것이다. 신자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법을 따름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산상수훈을 생각해보자.

살인하지 말라. 율법이다. 타인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취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따르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생명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타인의 생명을 임의로 취하진 않지만 그들 간에 시기와 미움, 업신여김으로 고통을 겪는다. 육체의 욕심을 따른 결과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에 빠지게 만드는 힘 곧 육체의 정욕이다. 음욕, 시기, 다툼 등등의. 육신의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스스로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자 하나 원하는 바를 하지 않고 악을 행하게 되는 원인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 형제에게 노하지 않고 라가라 하지 않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도 살인이라시며 금하셨다. 모세의 율법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생명의 성령의 율법이다. 그 법을 따르면 시기와 미움, 업신여김으로 고통을 겪지 않는다. 육체의 욕심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 육신의 일을 이루지 않는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율법을 심비에 심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을 좇음으로 가능하다. 성령께서 신자를 다스리시는 방편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성령을 좇음은 그 법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서 인간이 해방되기를 원하셔서 어떤 인간들을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필요한 삶의 원리를 제시하셨다. 율법은 그 하나이다. 신명기 28장을 읽어보라. 생명의 성령의 법도 그렇다. 전자는 완전하지 못했고 율법은 받은 백성들이 연약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후자는 완전하고 그 법을 받은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곧 성령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해방될 수 있었다.

죄와 사망의 법은 모든 인간에게 작동하는 것이고 율법 곧 모세 율법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효력을 가졌던 것이다. 초대 교회 때를 생각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이나 불신자들 모두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 있었고 율법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에게만 효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데 어떻게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죄는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에게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율법이 죄의 법이라면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법과 무관하다는 것인가?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서는 야고보 장로를 만난다. 야고보 장로는 유대인 신자들이 율법 지키면 안 된다고 바울 사도가 말하고 다닌다는 말이 들린다며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자고 한다. 바울 사도는 야고보 장로의 말과 제안에 아무 이의를 달지 않고 제사가 포함된 정결예식을 행한다. 자신이 돈을 대며 동참한 것이다(행 21:20-26). 그때에 야고보 장로는 유대인 신자들이 수만 명인데 다 율법에 열성적이라 하였다. 야고보 장로와 수만 명의 유대인 신자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 열성적이었던 것인가?

그 페친이 왜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하는가? 목사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목사는 왜 그렇게 말했는가? 신학자가 그렇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못 읽고 잘못된 주장을 하였는데 그것이 걸러지지 않고 그냥 수용되었던 것이다.

좀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학자의 주장을 목사가 답습하여 가르치고 그렇게 배운 바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말로만 개혁주의, 개혁주의 하지 말고 진짜로 개혁주의자가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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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4.42.152.229)
2016-10-26 16:38:51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는 이유와 평가
페친인 한 목사가 죄로 심히 죄되게 하는 율법의 기능과 율법으로 통치할 때도 죄와 사망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내세워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란다. 요지부동이다.

죄로 심히 죄되게 하는 율법의 기능은 분명한 성경의 진술이다. 문제는 율법이 그런 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 기능이 있다. 죄로 죄되게 하는 것은 부차적인 기능이다. 율법의 주 기능은 생명을 얻은 이들이 그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죄로 죄되게 하는 기능은 주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결과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강령이 하나님 사랑, 내몸같이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주기능이다. 그 주기능을 이스라엘이 따르지 않음으로 죄의 지배 아래에서 신음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압축되는 율법이 어찌 죄와 사망의 법일 수 있겠는가?

율법으로 통치할 때도 죄와 사망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 롬 8:3이 그걸 말하고 있다. 율법이 해방할 수 없었다고. 그런데 그 말이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란 말은 아니다. 율법으로 죄와 사망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 곧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두 문장이 어떻게 동의어가 된다는 것인가?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도 그것이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이 연약하여 그 목적에 부합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있었고 그분 안에서 곧 그분의 율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구약과 다르진 않은 것 하나는 신약의 신자가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르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죄와 사망은 율법이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의 욕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예외가 없고 그렇게 모든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이 죄와 사망의 법이다.

율법과 관련된 성경의 진술에서 주어로 쓰이는 우리와 너희를 바르게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곧 그 표현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바울 사도를 포함한 유대인들이다. 너희는 편지를 받는 대상인 이방인 신자들이다. 율법은 후자에겐 전 남편이랄 수 있고 후자는 아니다. 후자는 애초에 율법을 받지도 않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초등교사이지만 후자는 아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햇빛을 받고 있는 시체에서 썩은 내가 난다. 햇빛 때문에? 아니다. 햇빛에도 불구하고 썩은 내가 나는 것이다. 햇빛이 잘못이 있는가? 썩은 내의 원인이랄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율법은 햇빛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만 그 빛이 온전히 밝진 않고 좀 미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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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망자 (68.175.46.128)
2016-11-09 22:10:51
성경은 인간의 눈높이로 쓰여졌다. 분명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죄가 없는 완전한 세계, 전적인 순종이 가능한 세계에의 시각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기가 역부족인 죄 가운데 사는 인간의 눈에는 율법이 무언가 부족한 것일 수밖에 없다. 본질상, 부족이 아니라 불가능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죄없는 분으로서 율법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분이시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십자가가 그 증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은 분명, 생명에 이르게 할 법이다(롬 7:10). 아담의 불순종의 대가가 영원한 죽음이라면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은 우리의 영원한 의가 된다. 그리고 온전한 순종을 이루신 주님이 우리를 감싸시고 도우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너희도 죽기까지 충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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