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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인들이 헌금에 대해서 민감한가?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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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9월 20일 (화) 22:29:36
최종편집 : 2016년 12월 07일 (수) 22:41:17 [조회수 : 4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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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인들이 헌금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십일조나 교회 헌금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큰 교회에는 돈이 남아돌고 그 돈이 엉뚱한 데에 유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인들이 내는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작은 교회도 많다. 그리고 교인들이 낸 헌금을 교회 유지, 선교, 구제 등 헌금을 꼭 써야 할 곳에만 쓰는 교회도 적지 않다. 그러나 큰 교회 작은 교회를 가릴 것 없이 십일조, 건축헌금 등 헌금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교인들의 문제

돈이 없으면 교회가 유지되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예배처소를 마련할 수 없고 목회자를 모실 수도 없다. 교회를 개척하는 경우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의자 같은 기본적인 집기들을 준비하는 데에 돈이 상당히 든다. 그래서 개척하는 목사들은 사재를 온통 털어 넣고 그래도 모자라면 돈을 빌리기도 한다. 그리고 교인이 몇 십 명으로 늘어나면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나 장로가 목사의 생활비와 교회 유지를 위한 돈을 걱정하게 된다.

큰 교회에서보다도 작은 교회에서 교인들의 헌금에 대한 부담은 더 크다. 작은 교회에서 믿음이 돈독하고 교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교회 유지를 위해서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낸다. 작은 교회의 교인 대부분은 교회 유지를 위해서 온전히 헌신한다. 그런 교회에서는 교인들도 목회자도 마음이 가난하다. 마태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천국이 그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도 헌금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주인의식을 갖고 그 교회의 운영에 대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는 성소에서 일하느라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레위 지파의 생활비와 성소의 유지를 위해서 열한 지파의 사람들이 수입의 십분의 일을 낸 데서 연유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느 단체에 가입했을 때 그 단체의 운영을 위해서 회원들이 회비를 낸다. 사회단체에서는 회원 모두가 같은 금액의 회비를 내지만, 교회에서는 수입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를 두고 있다는 점이 사회단체와 다르다. 그리고 사회단체에서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흔히 회장단에서는 상당히 많은 찬조금을 내는데, 교회에서도 운영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더 많은 헌금을 내고 있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 대한 교인들의 주인의식이 아주 약해졌다. 그것은 그들이 교회를 자주 바꾸기 때문이다. 요즘 직장이나 근무지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자주 이사하고, 같은 도시 안에서도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이사한다. 이렇게 이사할 경우 전에 나가던 멀리 있는 교회보다는 교통의 편의를 위해서 가까이에 있는 교회로 나가려고 한다. 이렇게 되다 보니 교인들이 한 교회에 안주하지 못하고 교회를 자주 바꾼다.

이사하기 때문에 교회를 바꾸기도 하지만, 인구가 도시에 집중하면서 교회들이 곳곳에 생겨서 다니던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서 옮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새 신자들 중에는 결신자보다는 다른 교회에서 옮겨오는 집사, 권사, 장로가 많다. 총동원 전도주일에도 보면 새로운 결신자들보다는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이렇게 이 교회 저 교회로 이동하기 때문에 주인의식이, 교회에 대한 책임감이 적다. 이렇게 소속감이 적다 보니 헌금에 대해서 인색해진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매사에 비판적이어서 교회를 선택하는 데에 아주 까다롭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 필이 꽂혀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교회를 고를 때에도 필이 꽂혀야 한다. 새로 나갈 교회를 정하기 위해서는 여러 달, 때로는 여러 해 동안 이 교회 저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어보고 분위기를 살핀다. 그럴 경우 마음에 드는 요건들 중에 헌금에 대한 강조 혹은 헌금을 드리는 방법 등 헌금 문제도 고려의 대상이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정한 뒤에도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특히 교회에 분란이 생긴다든지 담임목사가 바뀌면 많은 교인이 빠져 나간다. 그것은 결혼 생활을 하다가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이혼하고 마는 현대인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요즘 교인들에게는 이 교회가 내 교회라든가 이 교회에서 내 생을 마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그것은 마음에 드는 직장을 옮겨 다니는 것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교회에서 얻을 것만을 생각하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이 헌신해야 할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그 교회를 진정으로 걱정하지도 그 교회를 위해서 힘껏 헌금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교인들이 헌금에 대해서 민감해진 이유로 사람들이 경제 문제에 예민해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의 결혼 연령이 늦어지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독신자들이 느는 데에도 경제적 문제가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지 않으려는 것 역시 아이들의 양육비와 교육비에 대한 부담을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입의 1/10 이상을 교회에 내야하는 교인들은 그 헌금에 대해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반 헌금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경제사정이 나빠져서 가정경제에 압박을 느끼기 때문에 기부금이나 종교단체의 헌금이 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매스컴의 보도도 있었다. 이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점차 진행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교회에 대한 주인 의식이 없는 사람들, 헌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작은 교회를 피하고 큰 교회를 선호한다. 그들은 대중 가운데 숨으려고 한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외적인 것을 중시한다. 그래서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 규모, 시설, 프로그램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몇 해 지내다 보면 내가 힘써 낸 헌금이 엉뚱한 곳에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목사가 교회 재정을 유용했다고 고소당하는가 하면 교회의 비리에 대해서 매스컴에서 떠들기도 한다. 그러면 교인들은 이런 판국에서 내가 십일조를 낼 필요가 있는지 회의에 빠지게 된다.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 재정의 유용은 교인들이 헌금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주요 원인이다.


목회자들의 문제

한국 개신교는 중앙의 통제가 없는 자본주의적 자유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자유경쟁 체제에서는 자본주의의 병폐로 지적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서 가난한 교회와 부유한 교회의 격차가 심해진다. 이렇게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는 재정적 안정을 위해서 좀 더 큰 교회를 꿈꾸게 된다. 그런 경우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목회자의 동기에는 순수한 복음적 소명의식 외에 물질적 안정이나 체면 같은 세속적인 욕망이 많이 가미된다.

좀 더 큰 교회를 꿈꾸는 목사들은 교인들이 조금 늘어나면 우선적으로 교회 건물을 크게 지으려고 한다. 연못을 크게 파놓으면 고기가 모이는 것처럼, 교회 건물을 크고 산뜻하게 지어놓으면 교인들이 모여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그 건축 과정에서 혹은 건축 후에 시험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물질주의가 교회에 스며든다. 따라서 교회를 건축할 때 되도록 교인들에게 부담을 적게 줄 수 있도록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무모할 만큼 저돌적으로 추진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교회 건물을 건축할 때 보통 건축비의 절반 이상을 빚을 얻어서 충당한다. 교회 건축을 위해서는 5년 이상 건축 헌금을 독려하고 건축에 임박하면 부흥회를 열어서 십일조를 강조하고 성전 건축을 위한 특별 헌금을 약속하거나 내게 한다. 그럴 때 중직자들은 재산의 십일조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온 힘을 다 해 건축 헌금을 내서 건물을 완성하면 그것으로 건축헌금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건축하느라고 진 빚을 교인들이 갚아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강단에서는 계속 헌금을 독려하게 되고 교인들은 헌금 설교에 시달린다. 교회를 신축하는 경우에 교인들은 10여 년 동안 진정한 복음보다는 헌금 이야기, 다시 말해서 돈 이야기에 관련된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된다.

요즘 교회들이 파산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교회가 파산하는 것은 그 교회의 능력 이상으로 빚을 많이 지고 교회 건물을 지었을 때 발생한다. 내 조카의 교회가 파산했는데, 그 교회가 헌금으로 모은 돈은 10억인데 20억의 빚을 지고 30억의 공사를 했다. 교회를 지은 후 빚 위에 이자가 쌓여서 결국 교회가 경매에 넘어갔다. 교회가 경매에 넘어 갈 때 온 힘을 다 해서 헌금을 낸 교인들의 허탈감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교회 건물을 건축하자고 하면서 조카네 교회의 담임목사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교회를 지으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단다.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다윗과 솔로몬처럼 성전을 짓자고 말하는데, 반대하고 나서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무모한 계획을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파산하고 말았으니 그 목사가 기도 중에 받았다고 하는 계시가 진정한 것이었을까? 큰 교회에 대한 그 목사의 꿈이 기도 중에 환상으로 나타난 것 아닐까? 이러한 교회의 파산에서 목사들이 꾸는 큰 교회에 대한 꿈에 내재되어 있는 육신적인 욕심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겠다는 순수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작은 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들이 왜 큰 교회를 꿈꾸는가? 한 마디로, 자유경쟁 체재에서 내가 작은 교회에서 초라하게 살 때, 잘 사는 동료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자녀들의 교육비 때문에 쪼들리고 계속되는 부인의 불평에 시달리면, 목회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소명의식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점차 기도에 힘이 없어지고 소명의식도 점차 약해진다. 교인이 100명이 되어도 감사하지 못하고, 200명이 되어도 만족하지 못한다. 큰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풍요롭게 사는 친구들이나 후배들과 자기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교는 육신이 약한 목회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연말이면 사례비를 가지고 재정부장과 씨름한다. 재정부장은 불평하고 내 친구나 후배보다 적게 받는 나는 실망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복음을 위해서 목회하는지 돈을 위해서 목회하는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서 소명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큰 교회에 대한 꿈을, 나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은 세속적인 욕망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때로는 교회의 영적 부흥보다 교회 재정을 더 염두에 둔다. 그래서 부자 교인들에게 더 친절하고 가난한 교인들을 소홀히 대한다. 교회에 새로 나오는 사람이 교회 재정에 도움이 될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마음을 쓰는 형국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그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깨어서 기도하라는 당신의 부탁을 따르지 않고 잠자는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말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부르짖었다. 물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이셨고, 바울도 육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넉넉한 물질을 원한다.

참된 목사라면 육적인 욕망을 멀리 해야 한다고 말하기 쉽지만, 성인이 아니고서야 잘 사는 동료나 후배를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누구의 말대로 어느 시대든 성인은 많지 않은 법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이 많지 않아서 멸망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도 의인이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요즘 여러 교회에서 장로들이 젊은 목사들은 사명감보다는 월급에 연연한다고, 그들이 삯군 목사들이라고 불평한다. 그리고 나이든 목사들이 퇴직할 때 예상을 뛰어 넘을 만큼 많은 퇴직금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교회의 세속화로 인한 현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질을 멀리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뿐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은 어느 돈 많은 젊은이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셨다. 하물며 목회자들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려고 하기보다는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는 것은 복음적인 삶이 아니다. 물질을 탐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서 앞장서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의 구석구석에 물질주의로 인한 세속화가 깊숙이 침투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는 구약교회의 관행이었다고, 신약교회에는 십일조가 없었다고, 십일조는 신약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십일조를 강조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계속 좀 더 큰 교회를 꿈꾼다.

교회가 아주 커지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큰 교회에서는 교회 유지나 선교, 구제 등에 돈을 쓰고도 재정이 남아돈다. 이렇게 재정이 남아돌 때 부패의 균이 슬슬 교회 안으로 침투하기 시작한다. 십일조란 애당초 십시일반의 발상에서 나온 것인데, 오천 명이 모여도 만 명이 모여도 교인들이 십일조를 내기 때문에 큰 교회에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돈이 많이 들어온다. 그래서 큰 교회들에는 교회에 들어오는 돈을 수거해 가는 은행 지점이 들어와 있다. 교회의 돈은 눈먼 돈이라는 말이 있는데, 교회에 돈이 쌓이고 남아돌면 그 돈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래서 교회의 돈이 올바른 데에 쓰이지 않고 엉뚱한 곳에 유용된다. 목사는 해외에 허울 좋은 선교 센터를 세워서 수시로 해외를 들락거리고, 자녀들의 사업을 도와주려 하고, 교회가 투기 목적으로 토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서 임대업을 한다. 심지어 비자금을 만들어서 이자놀이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목사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총회장에 출마하려고 한다. 선거전에서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이 당선되기 때문에 총회장에 출마하려는 사람은 자금을 많이 모으려고 한다. 그래서 금권선거가 판친다. 그 판에서 정치 장로가 나오고 정치 목사가 나온다.

교회가 돈을 좋아하고 교회 지도자가 교회에서 정치를 하면 교회는 급속도로 세속화하고 부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의 대형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십일조로 인해서 대형 교회에 돈이 넘쳐나고 그 교회가 세속화하기 때문에, 십일조가 대형 교회를 타락시키는 주범이라고 말할 만하다.


마치면서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노력하지만, 큰 교회들이 그들을 유혹한다. 큰 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들이 직간접적으로 작은 교회의 목사들을 흔들고 큰 교회들이 큰 건물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랑하면서 작은 교회의 교인들을 끌어들인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자유경쟁 체제가 빚어낸 결과다. 그리고 행위를 외면하는 칭의론으로 인해서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윤리의식이 약해진 가운데 교회는 물질주의적 세속화에 휩쓸리게 되었다.

교인들이 헌금에 대해서 인색해지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에는 교인들 편에서의 문제가 없지 않지만, 큰 교회를 꿈꾸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특히 종교단체에서는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세속사회 안에 사는 교인들이 사회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하기도 하지만, 목회자들의 육적 욕심이 거룩해야 할 교회를 세속화해 왔고 그 세속화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큰 교회의 부패상이 드러나면서 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 재정의 유용을 목격한 교인들이 헌금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십일조가 부담이 된다 하더라도 그 헌금이 복음을 위해서 제대로 사용된다면 계속 헌신할 수 있다. 그런데 힘겹게 내는 십일조가 엉뚱한 곳에 유용되는 것을 보면 허탈감에 빠지면서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이런 허탈감이나 신뢰의 상실 때문에 교인들이 헌금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럴 때 우리는 교인들을 탓할 수 없다. 원인을 제공한 측은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 헌금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개신교단의 교회를 여기 저지 옮겨 다니다가 결국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되는 성당으로 간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그래서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난다. 결국 십일조의 강조는 교인 감소의 주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교회에서는 십일조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캐나다에 나가 있는 박 집사가 일전에 세계교회의 십일조에 대한 상황을 전해왔다. 유대교를 비롯해서 천주교와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십일조를 폐지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세계적인 추세를 알아볼 수 있다. 십일조가 폐지되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박 집사가 보내온 내용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캐나다 한인 포털 해피코리아’(국내뉴스, 드라마, 시사/교양, 종교 등)를 통해서 한국소식과 이곳 교민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교민 소식란에 종교와 관련해서 고태영 장로의 ‘십일조 헌금은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칼럼을 보았는데 십일조를 폐지한 나라들이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 1688년 폐지, 프랑스: 1789년 폐지, 독일: 1807년 폐지, 스페인: 1841년 폐지, 아일란드: 1869년 폐지, 스코트랜드: 2000년 폐지, 스웨덴: 세금형태로 교회세를 징수했으나 2000년 폐지.

이탈리아: 세금 형태로 0.8% 받아 교회 크기로 나눔, 핀란드: 세금 형태로 1-2.25%, 스위스: 공식적 십일조 없고,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형태로, 홀랜드: 십일조/각종 헌금 일절 철폐하고 생활수준에 따라 갹출, 오스트리아: 교회세로 자기 수입의 1%, 덴마크: 교회세 1%.

미국: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 하에 교회세와 십일조 걷지 않음, 북미의 연합감리교, USA 침례교, 아메리카 침례교, 미국 장로교 등 폐지(다만, 미국 남침례교, 오순절교회 등 일부 교단에서는 십일조를 걷고 있음). 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들: 모두 폐지,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폐지 (동방교회에는 애초부터 십일조란 개념 자체가 없음), 성공회: 폐지.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의 개신교회, 중동, 중미, 아프리카 등의 개신교회: 모두 폐지, 전세계 가톨릭 교회: 모두 폐지(1/30을 교무금으로 정함),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교: 폐지.

자료출처: 고동엽 목사의 ‘신앙산책’ http://blog.daum.net/ipssen/1794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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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법규 (122.101.20.146)
2016-09-21 11:12:32
좋은 내용의 컬럼입니다.
저도 대형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위에 있는 글중에 성도의 입장에서 생각하는부분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얘기는 신성남 집사님 컬럼에서도 많이 읽었었고 실제 그렇게 느끼기도 합니다.
돈이 많다보면 이런저런 잡생각 많이 들어갈것입니다.
그러니 땅을 사고 건물을 새로 건축하고 건축시 화려하게 잘 보이게 짓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들을 합니다.
지나치게 좋은 재료들을 쓰고 남보다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차례 설계를 변경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감당도 하지 못한 빚을 떠안아가면서 건축을 하는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위에 언급을 했드시 빚을 감당하지 못해서 교회가 경매로 넘어간다면 정말 허탈해
하실분들 많을것입니다.
정도것 내 형편에 맞춰서 편리하게 건축을 하면 되었지 왜 남의 눈을 의식해서
보여주기 위한 건축들을 하시나요.
그러니 돈이 많이 들어가지요.
건축이 되고 나면 지금 당장이야 남에게 어께를 펴고 좋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는 욕심이었고 허왕된 착각이었다는것을 느낄것입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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